-98`
먹칠된 세상 구석에 불이 켜졌다. 두 사람이 침전에서 빠져나왔다. 후거는 홍력의 손에 억세게 이끌리고 있었다. 한치 앞이 보이지 않는 자욱한 어둠 속으로 홍력은 거침없이 걸어갔다. 입술을 끊어져라 깨문 채 속절없이 끌려갈 수 밖에 없었다. 뒤늦게 등을 든 태감들이 계단도 고사하고 높은 단을 뛰어내렸다. 그들은 허리를 기억자로 숙인 채 허둥지둥 후거를 지나쳐 달렸다. 홍력의 앞길에 가져대 밝히는 등이 거친 움직임에 좌우로 흔들렸다. 홍력은 뒤를 돌아보지 않았지만, 손아귀에서 조금이라도 후거의 팔이 빠져나가는 느낌이 들면 거칠게 끌어당겼다. 때문에 넘어질 뻔한 적이 한 두번이 아니었다. 하지만 휘청거리며 후거는 어떻게든 따라붙었다.
"폐하."
태감들은 불안하게 흔들리는 등불 아래, 후거의 발밑이 새하얗게 비춰지는 걸 보고 오줌을 지릴 뻔 한다. '사람이 어찌 그림자가 없는가.'
그들 눈에는 작은 여인의 두 발이 휘청휘청 디디는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정작 후거의 발을 방해하는 건 헐렁한 운동화였다.
궁은 크고 멀어 침전에 다다랐을 즈음 후거는 두 다리가 후들거렸다. 홍력은 끌어온 힘 그대로 후거를 바닥에 깔린 융단 위로 밀쳤다. 자기 자신을 모르랴. 누구의 손도 닿지 못하는, 가둘 곳부터 찾아서 끌고 온 것이다. 밝은 불 아래서 다시 얼굴을 확인하자 홍력은 자조 위로 덮쳐오는 거센 감정에 낯빛을 굳혔다.
홍력을 모시는 태감들은 마음이 하나 같았다. "폐하, 위험합니다." 그들은 양쪽에서 홍력을 붙들고 문턱을 넘지 못하게 만류했다.
요괴였다. 요괴가 아니라고 해도, 홍력을 가까이서 모셔온 태감들이라면 그가 얼마나 비정하게 그녀를 유린하고 버렸는지 기억했다. 귀신이 되어 지아비를 기다리고 있었다니. 복수하기 위해 칼을 갈고 있다고 하는 편이 인지상정에 맞았다.
홍력은 그들을 떨쳐냈다. 그리고 침전의 문을 양 옆으로 끝까지 젖혀서 열었다.
황후 앞에서 여유를 부리며 옛 후궁에게 손을 내밀던 모습과도, 한 숨도 멈추지 않고 여기까지 가로질러온 모습과도 다르게, 홍력은 담담한 목소리로 물었다.
"네 눈엔 무엇이 보이느냐."
"폐하." 태감은 거의 울먹였다.
"거짓 없이 고하라."
"…" 홍력과 후거를 번갈아본 태감이 팔목 안으로 이마를 수그렸다. "…돌아가신 영 답응이 계십니다."
"물러가." 홍력은 눈을 후거에게서 떼지 않은 채 말했다. "하나도 남김 없이, 바깥문까지 물러가라. 당장."
다들 자신의 목이 제대로 붙어있는지 손바닥으로 쓸어보며 뒷걸음질쳤다. 궁에서 썰물처럼 사람이 빠져나가 바깥문에 늘어섰다. 넓고 호화로운 침전엔 온갖 귀물들과 두 사람만 남게 되었다.
홍력은 떨리는 손을 감추기 위해 뒷짐을 졌다. 그는 이윽고 천천히 후거의 주위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침묵이 압박해왔는지 후거가 고개를 휙 들었다.
"난 저 사람들이 말하는 여자가 아니에요."
"… …"
"그 애가 말한, 그 애 어머니도 아니에요. 날 알아보,"
"여인으로도 둔갑할 수 있는 줄 몰랐다. 하지만 다른 이들 눈엔 어찌 비치든간에 내겐 너로 보이는구나. 이미 널 아는 짐의 통찰력이 미친 탓이겠지."
그의 손이 후거의 턱을 움켜쥐었다. 후거는 홍력의 허벅지를 붙잡았다.
"법석을 떠는 게 당연하다. 네가 둔갑한 여인은, 수년도 전에 죽었느니라."
"… …"
"네가 사라진 뒤 어느 날, 그 여인이 서랍장 속에 숨어있었지."
황후의 사주였다. 홍력은 후거의 턱을 아플 정도로 쥔 채 옛날 얘기를 읊조렸다.
"짐은 꾐에 넘어간 걸 알면서도 미치광이처럼 날뛰었다. 누군가 원하는 대로 짐이 움직이고 있다는 게, 얼마나 두려운 일인지 너는 아느냐? 하지만 어마마마께서도 늘… 네 생각을 하는 짐이 알기 쉽다고 조롱하였어."
"윽," 그가 거칠게 턱을 끌어당기자 후거는 이를 윽물었다.
"소요야."
그 호칭이 들리자 후거는 눈을 크게 떴다.
"짐과 놀기 위해 들렀구나."
"… …."
보러오고 싶었다고, 늘. 자기 전이면 생각났다고. 단순한 말이지만 홍력은 알아들을 수 없을 터. 후거는 허벅지에 올려진 손으로 그의 어지러운 옷을 점차 그러잡을 뿐이었다.
"짐을 놀리고 있어, 너는."
"아니에요." 그가 목청을 틔웠다.
"네가 몇 년을 사는지 아느냐? 네게 시간 따윈 쥐고 놀면 그만인 모래 한 줌이겠지!" 홍력이 소리쳤다. "십 년 동안! …십 년 동안 넌 날 버려뒀어."
십 년이면 강산도 변한다. 속에서 천불이 치밀었다. 도리어 더 큰 목소리로 후거를 찍어누른 홍력은 참지 못하고 손을 치켜들었다. 후거는 바닥에 모로 쓰러졌다. 그리고 나서도 손등에 남은 화끈거림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홍력은 손을 몇 번이나 쥐락펴락 했다. 홍력의 얼굴에 번진 물기와 열기, 그 밑을 가로지르는 상처가 후거의 말문을 막았다. 어떻게.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정말인 것처럼. 종이 위에 고스란히 배껴낸다 해도, 종이를 무겁게 할 것 같았다.
후거는 집도 연기도 잊어버렸다. 홍력은 마치 자신이 뺨을 맞은 사람처럼 후거의 벌게진 얼굴을 노려보다가 손을 감췄다.
"짐은 올해 겨울로 서른 여섯 해를 살았다."
"… …"
"몇 년 전 독을 씹었을 땐 네가 원망스러웠어. 사람은, 황제라도, 물길에 쉽게 쓸려나간다. 숱하게 죽을 뻔 했는데! 헤어지면 끝이거늘 넌 날 들여다보지도 않았어! 네가 감히 아니라느니, 짐을 보러왔느니 운운할 수 있단 말이냐?"
"그래서 왔잖아요!"
내던지듯이 후거가 대답했다. 꿈 밖에서 쫓기고, 몰리고, 깊은 잠에 들 수도 없이 살아왔던 건 자신이었다. 꿈 속 같은 데 비할 바가 아니었다.
"그러니까 보러왔잖아요. 왔으면 됐잖아요."
설명할 수 없는 건 다 건너뛰고 후거가 허벅지에 매달린 채 소리쳤다. 막무가내였지만 후거는 순수한 감정에 따르고 있었다. 홍력은 낯빛이 울그락 불그락 해지더니 서릿발처럼 차갑게 받아쳤다.
"건방진!"
"나라고 다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줄 알아요? 그럼 그딴, 낡은, 즐겁지도 않은데서," 곽건화가 눈앞을 스쳐 후거는 고개를 저어 떨쳤다. "기다리고만 있었겠어요 멍청이처럼?!"
"뉘 앞이라고 언성을 높이느냐?"
"!"
후거는 자신을 뿌리치듯이 발길질하려는 홍력을 눈치채고 더 죽어라고 매달렸다. 그 손힘과 타는 듯한 눈빛을 마주한 홍력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나 잊어버렸을 줄 알고,"
거기서 더 말을 잇지 못하며 후거는 고개를 숙였다. 홍력은 어떻게든 제 허리춤을 붙잡고 있는 그의 두 손이 보였다. 손마디가 하얘질 정도로 힘을 주고 있었다. 뒷목을 다 덮지도 못할 만큼 짧은 머리와, 이마까지 흐트러진 잔머리. 이해못할 옷차림. 불편해보이는 신발. 후거의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홍력의 눈빛이 스쳐갔다.
홍력은 기어코 뜯어져서 핏방울이 고이는 후거의 입술에서 눈을 떼지 못하며 말했다.
"…당연히 너 같은 거, 짐도 버려두고 살았느니라."
"… …"
"짐의 자식이 아까 네가 본 하나인 줄 아느냐? 수없이 많다."
"그럼 사과를 해야지 왜 화를 내냐고요."
후거가 울먹이면서 홍력의 옷을 잡아 흔들었다. 홍력은 아찔해졌다.
"… …"
달싹거리던 홍력의 입술이 다른 길로 말을 텄다.
"네가 짐을 홀리는 꼬릿짓이 빤하구나. 짐의 몸 속에 더 파헤쳐먹을 것이 남았나보지?"
또 한 발을 빼고 내려다보는 말투였다. 후거가 벌게지고 짓물린 눈가를 해 고개를 들자 홍력은 그의 머리채를 손아귀에 잡았다. "네가 짐의 눈을 흐려놓고, 속을 뒤집어놓고 또 도망쳐버릴 것을 이젠 정말 모를 줄 아느냐?"
홍력은 그림자 하나 지지 않는 몸뚱아리를 끌어다 침상 위에 올렸다. 황제의 침실은 온통 붉었고, 침상은 금빛이었다. 발이 향하는 쪽의 침대 양 쪽 기둥에는 늘 천이 둘둘 감겨있었다. 후거는 침대 위로 쓰러졌고, 자신의 위로 타고 오르는 홍력의 너머로 저어기에 너풀너풀 흔들리는 비단이 보였다. 아직 문이 활짝 열려있다는 뜻이었다. 전혀 개의치 않고서 홍력은 후거의 위로 바싹 몸을 눕힌 채, 뒷머리를 그러잡고 숨이 뺨에 번질만큼 가까이 왔다.
아무래도 좋았다. 정말로. 후거는 고조되는 성적인 긴장감을 느끼면서도, 몸에 전혀 힘을 주지 않고 누워있었다. 그의 몸은 이불처럼 따뜻하고, 한 겨울을 맞는 것처럼 차가운 태도로 후거를 대했다. 홍력은 동요 없는 후거의 표정을 어떤 익숙함으로 읽었는지 심사가 더더욱 비틀려 쓸개를 문 표정이 되었으나, 후거는 그마저도 좋았다. 홍력이 중얼거렸다.
"책에는 없었다."
"뭐가요."
"요괴에 홀린 사람들은 있어도, 그들이 결국 어떻게 되는지는 나와있지 않았어."
혹은..
"짐이 널 어떻게 하면 가질 수 있는지도 쓰여있지 않았다."
후거는 이불 속으로 자신의 발목을 쥐고 만지작거리는 홍력의 손길을 느꼈다. 아.. 작은 탄식 같은 신음이 새어나왔다.
"하지만 짐은 늘 궁금했거니,"
거의 발목을 부러뜨릴 듯이 힘을 주면서 홍력이 더욱 억눌린 목소리로 속삭였다.
"이제부터 널 가지고 하나하나 시험해볼 생각이다."
후거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신음을 듣던 홍력은 마지막에서야 발목을 잡은 손에 힘을 풀어주었다. 후거의 발목은 한줌 밖에 되지 않았다. 홍력은 거친 손길로 기둥에 둘린 천을 끌어당겼다. 이 천의 용도는 책에 적혀있었다. 이건 계집의 예법이었다. 홍력은 한쪽 기둥에 하나씩 후거의 발을 천으로 묶어, 높이, 그리고 양 옆으로 벌어지게 했다. 그리고 그 사이에 무릎 꿇어 자리잡고 몸을 숙였다. 뒤이어질 일을 역시 아는지, 후거의 얼굴을 다소 상기되어 있었고 홍력은 혀를 내어 그의 뜨거운 뺨을 핥으면서 옷가지에 손을 댔다.
"어디 둔갑해보거라. 아니면 사라져보던가. 짐이 널 가두었느냐? 문은 열려있느니라."
홍력의 무게를 몸으로 느끼면서 후거는 고개를 옆으로 돌려서 뉘었다. 입 안이 젖어들었고, 홍력의 입술이 그의 목덜미를 예뻐하면서도 사정없이 허리를 손으로 낚아챘다.
"이젠 조각이 나면, 조각 나는 대로 가지련다."
"아…"
"힘을 빼. 그래야 버티기 수월할테니까."
그가 귀에 흘려넣는 분노는 다 삼켜버리고 후거는 고개를 반대편으로 돌렸다. 그리고 얼굴이 맞닿은 잠깐 사이에 굳은 홍력의 입술을 깨물고, 명백하게 입을 맞춰주었다.
건화후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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