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짤갤줍


*청룡전설*

ㄴㅈㅈㅇ ㅇㅌㅈㅇ 곽건화왕카이


BGSD 어나더


9. 경염

가을 사냥이 끝나고 돌아오자마자 북연에 겨울이 닥쳤다. 대륙의 북쪽에 있는 북연에는 11월 초부터 눈이 쏟아지기 시작했고 매일이 춥고 혹독한 날들이었다. 웬만한 날씨에는 화로도 없이 지내던 경염은 고국과 다른 사나운 겨울에 매일 화로에 불을 피우고 도톰한 망토를 걸치고 있어야 했다.


그해 겨울에는 많은 일이 있었다.


태자의 측비 중 한 명이 황손을 낳았다. 연성에게는 7번째가 되는 아들이었다. 태자의 비들을 제외한 궁 안의 모든 이가 새로운 황손의 탄생을 축하하며 기쁨에 젖어 있었으나, 황손을 낳은 하운궁 유씨는 출산 후 앓아누워 있었다. 그 측비가 임신하고 있을 때 어떤 불측한 시도가 있었다는 말을 들은 적도 없었고, 내내 건강했다고 들어서 경염은 혹여 출산 때 문제라도 있었던 게 아니냐 의아해했지만 시비와 태감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입을 다물고 모르겠다는 말로 일관했다. 늘 재잘거리며 경염에게 이것저것 북연의 관습을 알려주고 궁 내의 여러 소식을 전하던 소현마저 경염의 의문을 풀어주지 않았다.


부군이 다른 이에게서 자식을 보는 일이 유쾌한 일은 아니지만 황자로 태어나 황자로 살았던 경염은 궁의 생리를 알고 있었다. 황제에게는 혼인도, 자식을 보는 일도 모두 전략적인 판단 하에 이루어지는 정치의 연장선상에 있었다. 게다가 북연의 황제들이 대대로 유달리 자식을 많이 보는 것은 대륙의 다른 국가들에서도 익히 알고 있는 일이었다. 현 북연의 황제에게도 13명의 황자와 4명의 황녀가 있었으며, 연성은 12황자였다. 경염은 윗사람으로서 응당 해야 할 일이므로 담담하게 하운궁으로 축하 선물을 보냈다.



10. 경염

경염은 19세 이후로 겨울을 금릉에서 난 적이 없었다. 늘 전장에서 겨울을 났던 경염은 궁 안에서 보내는 첫 겨울도 예전과 다를 바 없이 보내고 있었다. 오전에 연무장에서 몸이 녹슬지 않게 훈련을 하고, 양나라에서는 볼 수 없었던 여러 서책을 읽으면서 오후를 보내면 저녁이나 밤에 연성이 찾아와 함께 시간을 보냈다. 간혹 연성이 다른 궁에서 침수를 들 거란 이야기를 들을 때도 있었지만 개의치 않으려 애썼다. 경염은 연성과 약속한 대로 다른 비들이 다치거나 아프다는 말을 들어도 마음을 가다듬고 잘 견뎌내고 있었다. 어떤 시선에도, 어떤 말에도 흔들리지 않는 법은, 제 아비 덕분에 오래 전에 이미 익히지 않았던가. 제게 악의를 품은 이들의 사악한 시도는 경염을 아프게 하지 않았다. 


제 아비가 친아들과 친우에게 그랬듯이, 가까운 이들의 배신만 아니면 충분히 견뎌낼 수 있었다.


경염이 훈련을 마치고 욕탕에 몸을 담그고 있으면, 소현이 몇 가지 과일과 가루가 담긴 두어 개의 그릇을 가지고 들어왔다. 피부를 매끄럽게 해 준다며 소현이 목욕 후 경염의 몸에 발라주는 재료들이었다. 과일을 짓이긴 후 가루와 섞어서 반죽처럼 만든 뒤 온몸에 바르고 다시 뜨거운 물로 씻어내는 일을, 경염은 매일 하고 있었다. 소현은 경염의 몸을 가꿔주며 거의 매일 [태자 전하의 사랑을 받으셔야지요, 마마. 빨리 황손을 잉태하셔야 합니다.] 라고 속삭였다. 처음에는 들을 때마다 쑥스러웠으나 이제는 매일 듣다 보니 마치 주문처럼 들려서 간혹 섬찟해지기도 했었다. 윗사람의 처우에 따라 시비나 태감들의 실질적인 지위도 달라지긴 하나, 소현은 경염이 태자의 사랑을 받게 하는 것이 자신의 가장 큰 사명인 것처럼 경염을 단장하는 일에 최선을 다했다.


연성은 경염과 잠드는 밤마다 경염이 지치면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경염의 몸을 쓰다듬는 걸 즐겼다. 경염은 서로의 피부가 닿은 채로 연성의 나긋나긋한 목소리를 듣고 있으면, 연성이 최근 4황자와 9황자가 사이가 좋지 않아 회의 때마다 피곤하게 군다는 이야기를 해도 마냥 좋았다. 말의 내용을 떠나서 그 상냥한 목소리와 다정한 손길에서 연성의 마음이 느껴져서 가슴이 두근거리고 저도 모르게 귀가 뜨거워졌다. 오랫동안 어머니와 경녕 공주 외의 누구에게도 제대로 된 애정을 받지 못한 경염은, 연성이 검을 쥐느라 굳은살이 박힌 제 손이 경염을 아프게 할까 조심하며 경염의 살결을 쓰다듬는 그 시간을 좋아했기에, 소현이 동동거리며 열심히 피부에 과일 반죽을 발라줄 때마다 붉어진 얼굴로 그 민망한 시간을 견뎌냈다.



11. 경염

경염은 남자에게 다가갔다. 남자 역시 아직은 소년이라고 해야 할 나이였으나 고작 10살밖에 안 됐던 경염에겐 어른이나 마찬가지였다. 남자는 경염의 고사리 같은 손에 경염이 좋아하는 다식을 쥐어 주었다. 평소라면 즐겁게 먹었겠지만 경염은 자꾸 눈물이 날 것 같아서 다식을 쥐어 준 남자의 손만 바라보고 있었다. 경염은 남자의 얼굴을 보려면 고개를 꺾고 올려다봐야 했다. 평소엔 자신의 작은 키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그때는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고개를 들지 않으면 남자에게 울 것 같은 자신의 얼굴을 보이지 않을 수 있으니. 하지만 남자는 언제나처럼 경염의 앞에 몸을 숙이고 앉아서 경염의 얼굴을 보며 빙긋 웃었다.


[우린 다시 만날 거야.]

[언제?]


경염은 어렸지만 황자였기에 알고 있었다. 두 사람이 다시 만날 일은 평생 없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아니, 솔직히 다시 만나지 않게 되는 편이 더 낫다는 것을. 다시 만났을 땐 서로의 심장에 칼을 겨누는 관계가 될 수도 있었다. 그럴 바에야 다시 만나지 않는 편이 나으리라. 그래도 다정하고 상냥한 남자와 헤어지기 싫은 마음이 약속을 받아내고 싶어 했다.


[때가 됐을 때.]

[그게 언젠데?]

[경염이 어른이 되었을 때.]

[어른이 되면 만날 수 있어?]

[그래, 내가 데리러 갈게. 약속할게.]


남자는 경염의 작은 손을 들어 단풍잎만한 보드라운 손등에 입술 도장을 찍어 주었다. 남자의 입술이 닿은 손등을 바라보던 경염은 곧 떠날 남자에게 웃어 주려고 했지만 결국 참지 못한 눈물이 뺨을 타고 흘렀다. 남자는 울지 말라는 듯 경염을 품에 안고 등을 토닥여줬다. 그 품이 따뜻해서 왠지 더 슬퍼졌다.



12. 연성

경염이 꿈속에서 어린 연성을 만나고 있는 시각, 연성은 측비를 안고 측비가 잠든 사이 측비의 궁을 빠져 나와 동궁으로 향하고 있었다. 아이를 많이 낳아야 하는 것은 몇 백 년 전, 한 태자가 큰 사고를 친 이후부터 청룡의 후예에게 내려오는 의무였다. 연성은 측비들을 안는 밤마다 그 선조를 원망했지만, 당시 이성을 잃었던 선조를 이해했다.


당시 태자는 자신의 반려를 사랑했다. 모든 청룡의 아이는 자신의 반려를 사랑한다. 다만 그때의 태자는 그 사랑이 지나쳐 맹목적이었던 것이 문제였다. 청룡의 반려는 운명이 정하는 것이 아니라 청룡의 후예가 사랑에 빠지는 이가 반려가 되었다. 처음부터 운명이 정해주는 반려라면 반려가 되지 못한 이들이 그 자리를 노리지 않았을지도 모르나, 청룡의 후예의 마음만 얻으면 된다고 생각하기에 많은 음인들과 여인들이 그 자리를 노리고 서로의 목숨을 끊어 놓으려 했다. 그걸 알면서도 당시 태자는 제 반려를 만천하에 공개했다. 반려가 공개되는 순간 그 반려는 모두의 공적이 된다. 하지만 당시 태자는 청룡의 후예인 내가 내 반려 하나 못 지키겠느냐 자신감에 젖어 있었고, 그 자신감과 오만함이 반려의 죽음을 불렀다. 이성을 잃고 폭주하는 청룡의 후예를 인간들은 막지 못했다. 궁 곳곳으로 흉포한 불덩이를 날리며 세상을 끝낼 것처럼 폭주하는 청룡의 후예를 말린 건 그 태자의 형제들이었다. 청룡의 피를 잇지 못했으나, 청룡에게서 태어난 황자들이 목숨을 걸고 뛰어들어 말린 덕분에 가까스로 북연의 멸망을 막을 수 있었다. 그 이후, 청룡의 후예가 폭주할 때를 대비해 태자들은 많은 여인을, 음인을 안고 많은 아이를 낳아야 했다. 대대로 모든 태자가 자신의 반려가 아닌 이를 안고 아이를 낳아야 하는 운명을 저주했지만, 폭주했던 당시 태자를 이해했기에 원망을 갈무리하고 의무를 받아들였다. 자신 또한 반려를 잃으면 폭주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에.


당시 태자는 반려를 죽인 배후, 자신의 측비 중 하나였던 음인을 찾아냈고 그 비를 냉궁에 가둬둔 채 1년간 기를 쏟아 부었다. 그리고 그 비가 청룡의 아이를 잉태하고 출산하기 직전, 임신 기간 내내 양인의 기를 받지 못해 배가 볼록해진 채 뼈 위에 가죽만 남아 있던 비의 냉궁에 태자가 찾아갔다. 청룡의 아이만 낳으면 청룡의 후예가 원하든 원치 않든 자신은 반영생의 몸을 가지게 된다. 그 희망으로 눈이 번들거리던 비는 그러나, 태자의 말에 모든 희망이 꺾였다는 것을 알았다.


- 너 따위가 내 반려가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느냐. 청룡의 반려를 죽였으니 너는 죽어서도 천제의 분노를 사, 끔찍한 벌을 받아야 할 것이다. 네가 바라는 대로, 언제까지나 영원히. 살아서 영원을 누리지 못했으니, 죽어 지옥에 가서 영원을 누리며 불길 속에서 몸부림쳐 보려무나.


태자는 그 비의 목을 베어 죽이고, 배를 갈라 청룡의 아이를 꺼낸 후 제 아이를 모후의 품에 안겨주고 동궁으로 돌아가 자결했다. 그 후로 한동안은 태자의 반려일지도 모를 누군가를 살해하려는 무모한 시도는 없었다. 하지만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고, 역사는 쉽게 잊혀지며 인간은 어리석은 실수를 반복한다. 고작 200년 만에 궁에서 다시 태자의 측비가 살해되는 일이 벌어졌다. 그 측비가 태자의 반려가 아니었기에, 태자가 별다른 반응이 없자 자연스럽게 다시 비들의 암투가 벌어지기 시작했다.


현 황제도 의무를 다 하기 위해 많은 아이를 낳았기에 연성에게는 수많은 형제가 있었다. 하지만 연성의 아래로는 동복아우 한 명과 동복누이 둘뿐이었다. 현 황제는 반려가 노출되는 것을 막으려 무던히 애썼던 탓에 청룡의 후예를 돕고 만약을 대비할 아이들을 많이 낳아놓은 후 제 반려가 주의를 끌지 않을 시기에 연성을 낳았다. 연성을 낳으며 모후는 반영생의 몸이 되었기에 더 이상 반려가 아닌 다른 비들의 공격을 두려워 할 필요가 없었다. 그러자 황제가 세상에 청룡의 반려임을 천명한 황후만 안았던 탓에 연성의 동생들은 전부 황후에게서 태어난 것이었다. 대대로 북연의 황자들 중 막내에 가까운 이들이 태자가 되는 이유도 이와 같았다. 연성에게는 아이가 아직 아들 7명, 딸이 1명뿐이었다. 경염의 형질 발현이 늦었던 데다 음인으로 발현한 후에는 경염이 계속 전장에서 전투 중이었기에 데려올 수가 없었다. 게다가 경염이 없는 동안은 다른 비들의 눈을 가릴 필요가 없어서 비들과 동침을 게을리 했고, 경염을 비로 맞은 후로는 경염이 아닌 비를 안기 싫어 또 측비들과의 동침을 게을리 했던 탓이었다. 언제까지 이 지긋지긋한 의무 동침을 해야 하는지 한숨을 쉬던 연성의 발걸음이 멈췄다.


태자비의 궁 전체를 감싸놓았던 결계가 부정한 출입을 감지하고, 결계를 친 장본인인 연성에게 이상을 알려오고 있었다. 연성은 태자비 궁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13. 경염

꿈에서 깨어난 경염은 천천히 눈을 깜빡거렸다. 아직도 어린 자신을 안아주던 따뜻한 품이 느껴지는 듯했지만 언제나 그렇듯 꿈속의 내용은 빠르게 기억 속에서 지워졌고, 약속할게. 라고 말하던 어린 목소리만이 귓가를 맴돌았다. 누운 채로 잠시 꿈의 여운에 빠져 있던 경염은 제가 잠에서 깼는데도 시비와 태감들 중 아무도 방으로 들어오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궁에서 일하는 이들은 윗사람이 눈만 깜빡거려도 알 수 있는 이들이었다. 그리고 그제야 한밤중에 경염을 깨운 것이 무엇인지 알았다. 문 밖에서 여러 명이 돌아다니는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움직일 때 소리를 내지 않도록 훈련을 받는 태감과 시비들이 내는 소리가 아니었다. 경염은 가을 사냥 때 연성에게 선물 받아 서랍 안에 넣어 두었던 칼을 꺼내 들고 소리 죽여 문으로 다가갔다. 문 밖에서 짙은 살기가 방 안까지 전해지고 있었다. 궁 안에만 있으면 안전하다는 연성의 말을 믿었지만 심장이 이상할 정도로 쿵쿵 뛰었다. 나쁜 일이 생길 거라는 불안감이 가슴을 축축하게 적셔갔다.


문을 열자 태자비 궁에서 일하는 시비와 태감들이 모두 잠자리에서 끌려나와 정원에 꿇어앉혀져 있었고 태자의 호위군들이 누군가를 결박하고 있었다. 경염은 제게 등을 보이고 서 있는 연성을 발견했다. 방 안에 있던 경염까지 숨이 막힐 정도로 짙게 뿜어져 나오는 살기를 흘리고 있는 사람은 연성이었다.


[전하... 이게 무슨 일입니까.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경염을 돌아보는 연성의 눈에는 핏발이 서 있었고 온몸에서 날카로운 살기가 흘러나오고 있어 경염은 저도 모르게 한 발 물러설 뻔한 몸에 힘을 주고 가까스로 버텨냈다.


[경염...]


연성은 잠자리를 가질 때가 아니면 경염의 이름을 잘 부르지 않았지만 이름을 부를 때는, 늘 섬뜩하거나 이해할 수 없는 경고가 잇따랐다. 하지만 연성은 경염의 이름만 불러놓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답답해진 경염이 꿇어앉은 시비와 태감들을 둘러보다가 결박당한 시비를 내려다 봤다. 다른 태감과 시비들은 모두 당황스러운 표정이긴 해도 담담한 태도였는데, 결박당한 시비는 하얗게 질린 얼굴이었다.


[소현.]

[...]

[무슨 일이냐?]

[...]

[네가...]


불길한 예감에 목소리가 갈라져서 말을 멈춰야 했다. 경염은 자신의 등에 꽂히는 연성의 시선을 느꼈다. 이 궁 안에서 목숨이 위험한 것은 태자의 비들뿐이라는 말도 생각났다. 왜 황제의 비들은 안전하고 태자의 비들만 위험한 걸까라는 의문이 잠깐 들었지만, 눈앞의 상황을 보며 그 의문은 금방 사라졌다. 태자의 비빈들만 위험한 거라면, 그런데 태자비의 궁에서 일하는 소현이 결박당해 있는 거라면.


[소현, 네가 나를 해하려 했느냐.]


그때까지 하얗게 질린 얼굴로 굳은 듯 앉아 있기만 하던 소현이 눈물을 뚝뚝 흘리기 시작하는 걸 보고 경염은 이를 악물었다. 자신이 아직 북연에 대해 아무것도 모를 때, 가장 먼저 다가와서 살갑게 굴면서 이것저것 상냥하게 가르쳐 주어, 자신의 이복동생 경녕 공주를 생각나게 했던 아이였다. 경녕 공주는 경염과 달리 아비의 애정을 한 몸에 받고 있었음에도 천대받는 오라비인 경염에게 상냥했던 동생이었다. 그래서 경염도 소현을 대할 때마다 경녕 공주를 떠올리며 다정하게 대해주곤 했다. 그랬는데 그 소현이 경염을 해하려 했다니, 어차피 이 궁에서 경염이 믿을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건 알았지만 가슴이 아픈 건 어쩔 수 없었다. 북연의 궁 안에 가득한 죽음의 손길이, 경염이 아끼던 이의 손을 빌어 경염의 목을 조르는 것 같았다. 숨을 쉬기가 힘들었다.


연성이 소현을 붙잡고 있던 호위들에게 눈짓을 하자 호위들이 소현의 옷을 우악스럽게 뒤져서 품 안에 숨기고 있던 작은 병을 찾아내 연성에게 건넸다.


[... 전하, 그건 독입니까?]

[비, 금잠고독을 아시오?]

[모릅니다.]

[강호에서 쓰는 독이오. 무색무취무미의 독이나, 중독되면 천만 마리나 되는 독벌레가 온 몸을 물어뜯는 끔찍한 고통을 받게 된다고 하지. 칠일 밤낮을 그 고통에 시달리다가 죽는다 하오.]


경염에게 살갑게 북연에 대해서 알려주던 때에도, 태자 전하께 사랑받으셔야 한다고 다정하게 속삭일 때에도, 피부가 매끄러워야 한다며 경염의 몸에 정성껏 과일 반죽을 발라줄 때에도, 소현은 경염이 칠일 밤낮을 끔찍한 고통에 시달리다 죽어가기를 소원했을까. 그렇지 않았을 거라고, 소현도 이용당한 것일 거라고 믿고 있는데 말은 마음처럼 나오지 않았다.


[그래도 그간 우리가 함께하며 쌓은 정이 있는데, 고통 없이 즉사할 수 있는 약으로 준비해 주지 그랬느냐, 소현.]


그때까지 눈물만 뚝뚝 흘리던 소현이 땅에 엎드려 통곡하기 시작했다. 


마마, 이 년을 용서하지 마시옵소서, 마마. 용서하지 마시옵소서.


[경녕은... 아니... 소현은... 어찌 됩니까?]


잔뜩 쉬어서 나온 목소리는 경염이 듣기에도 제 목소리가 제 목소리가 아닌 듯 낯설게 들렸다.


- 내게 경녕이라는 아주 예쁜 누이가 있다. 널 보니 그 아이가 생각나는구나.


언젠가 상냥하게 수발을 들어주던 소현에게 했던 말이었다. 그때 들은 양나라 공주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었는지, 소현이 더 큰 소리로 울기 시작했다. 그 울음에 담긴 것이 공포인지 원망인지, 미안함인지 알 수 없었다.


[추국을 할 것이오. 다른 시비와 태감들도 일단은 조사를 받아야 하오.]

[그렇습니까. 그러면... 그러면 부탁드립니다.]


태자에게 예를 갖추고 다시 침실로 들어가는 경염의 귓가에 문득 꿈속에서 들었던 목소리가 스쳤다. 눈 뜨자마자 기억에서 사라져서 잊었다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목소리가 되살아났다.


- 그래, 내가 데리러 갈게. 약속할게.


당신이 누구라도 좋아, 날 데리러 와. 날 이 숨 막히는 죽음의 궁에서 꺼내 가 줘.


어깨에 따뜻한 손이 닿았다. 돌아보지 않아도 은은한 모란 향으로 태자가 따라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연성의 손이 닿은 부분에서 따뜻한 체온과 위로가 전해져서 경염은 막혔던 숨통이 조금 트이는 걸 느꼈다. 경염은 길게 한숨을 쉬며 천천히 침실로 향했다. 그래, 자신은 연성에게 견뎌내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니 힘을 내자. 조금만, 아주 조금만 힘들어 하고...



14. 연성

연성은 창백해진 경염을 침상에 눕히고 제 힘을 약간 끌어내서 경염을 강제로 잠재웠다. 연성이 경염의 피부가 매끄러워 손을 뗄 수가 없다고 했을 때, 소현이라는 시비가 매일 공을 들여 가꾸어 주고 있다며, 누이가 생각나게 하는 참한 아이라는 말을 들었던 적이 있었다. 매일 옆에 있어줄 수 없는 자신 대신 경염이 북연에 정을 붙일 수 있게 해 주는 시비라 연성도 기억해 두고 있었다. 하필 그 시비를 꼬여내다니. 배후가 누구이든 경염의 몸에 상처를 내진 못했어도, 마음에 커다란 상처를 내는 데는 성공했으리라.


[이 태감 안으로 들어라.]


태자가 어릴 때부터 옆에서 모셔왔으며, 태자의 반려가 경염이라는 걸 알고 있는 두 사람 중 한 사람인 동궁의 태감총관이 조용히 안으로 들어왔다.


[태자비 궁의 궁인들은 조사를 철저히 했으니, 궁인들 중 약점을 잡혀 이용당할 만한 이는 없다고 하지 않았느냐. 저 시비가 왜 태자비 궁에 독을 들이려 한 것이냐.]

[송구하옵니다, 전하.]

[사흘 후에 태자비와 함께 양양산의 온천 행궁에 갈 것이다. 한 달 후에 돌아올 것이니 동궁의 궁인들 중 행궁에 따라갈 이들을 선별해 놓고, 이 태감은 여기에 남아서 태자비 궁을 새로 채울 궁인들을 준비해 놓아라. 이번에는 한 치의 실수도 있어선 안 될 것이다.]

[명 받들겠습니다.]

[이 태감.]

[네, 전하.]

[북연의 역사에, 황제가 되지 못한 태자가 한 분 계셨지. 알고 있느냐.]

[네, 전하. 알고 있습니다.]

[그 역사를 반복하고 싶은 것이 아니면 이번엔 실수가 없어야 할 것이다. 자네가 한 번만 더 실수를 하면 역사서에서만 보던, 불타는 궁을 자네 눈앞에서 보게 될 것이다. 이번에는 그 불이 북연 전체로 퍼져 나가면 큰일이지 않겠느냐.]

[한 치의 실수도 없게 하겠습니다, 전하.]


이 태감은 무시무시한 경고에도 떨지 않고 침착하게 허리를 숙였다. 하지만 새파랗게 질린 얼굴과 힘이 들어간 턱의 모양새로 보아, 이 태감이 태자의 경고를 제대로 알아들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나가라.]

[네, 전하.]


연성은 경염을 품에 안고 누웠다. 마음이 흐트러진 경염이 향을 제어하지 못해서 경염의 향이 은은하게 새어나오고 있었다. 경염의 향은 언제나 연성의 복잡한 마음을 다독여 줬지만, 오늘은 경염이 왜 향을 제어하지 못하는지 알고 있어 위안이 되지 못했다. 경염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던 용맹한 장수였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전장과 육궁은 다르다. 제 고국의 궁에서 소외돼 있던 경염은 이런 음험한 암투에 면역이 없었다. 자신이 북연의 태자가 아니었다면 경염을 비로 맞지 못했겠지만, 자신이 북연의 태자이기에 경염을 힘들게 하고 있어, 경염이 제 옆에 있는 것에 지칠까 봐 두려웠다.


하지만 연성은 경염을 믿고 있었다. 어린 시절의 경염도 강했고, 사랑하는 이들을 한꺼번에 잃고 나서도 경염은 강했다. 알려주자. 경염의 눈을 가리고 귀를 막은 채 무조건 견디라고 하는 것보다, 경염의 지혜와 용기를 믿고 모든 걸 알려주고 같이 견뎌내자고 하는 것이 나을 것이었다. 그러면 경염은 연성과 함께 견뎌줄 것이었다. 연성이 어린 시절 만났던 경염, 그리고 경염을 데리고 오지 못했던 그 긴 시간 동안 연성이 줄곧 여러 눈과 귀를 통해 알아왔던 경염은 그런 사람이었다.


[한 달간, 아무도 없는 곳에서 둘만 지냅시다, 경염. 모든 걸 말해 줄 테니, 나와 함께 해 주시오. 돌아와 다시 이 궁에서 지낼 때에도, 나는 반드시 그대를 지킬 것이오. 그러니, 조금만 더 힘을 내 주십시오, 경염.]


사흘 뒤 온천 행궁으로 떠나기 전, 연성은 매장소가 금릉에 들었으니 2년만 기다리라는 편지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