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짤갤줍


*청룡전설* 

ㄴㅈㅈㅇ ㅇㅌㅈㅇ 곽건화왕카이


BGSD 어나더 3나더


15. 경염

경염도 한 번 온천에 간 적이 있었다. 임수가 살아 있던 어린 시절에는 온천 같은 곳에 가는 것보다 함께 훈련을 받고 사냥을 하고 전장에 따라 나가서 나라를 지키는 일에 함께한다는 뿌듯함을 즐기는 일에 열중했기에 온천 같은 곳에 발을 들일 일이 없었다. 성년이 된 후에는 전장을 떠돌아다니느라 틈이 나지 않았다. 금릉에 돌아오면 그간 뵙지 못했던 어머니를 시간이 날 때마다 찾아가 안심시켜 드리고, 비어 있던 정왕부를 돌보고, 간혹 아비에게 벌을 받아 묶여 있느라 또 틈을 낼 수 없었다. 경염이 한 번 온천에 갈 수 있었던 건, 숙부인 기왕야가 자신의 온천에 데려가 주었기 때문이었다. 유독 군량이 부족했었던 전장에서 돌아온 경염의 파리한 안색을 본 숙부는 황제에게 경염을 데리고 온천에 다녀오고 싶으니 열흘간 경염의 시간을 비워줄 것을 요청하고 직접 윤허를 받아 왔다. 기왕은 온천을 공들여서 화려하게 꾸며 놨었기에 경염은 온천은 으레 호화로운 장식으로 둘러싸인 곳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경염은 새하얀 눈밭 한가운데 푹 파인, 그야말로 노천온천을 보고 연못을 떠올렸다. 하지만 그 물에서는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희미한 김이 올라오고 있었다. 작은 호수라고 해도 될 정도로 넓은 땅을 차지한 온천은 그 위압적인 크기에도 불구하고 따뜻한 수증기로 감싸여 있어서인지 포근한 느낌이 들었다.


[온천에 가 본 적이 있소?]

[한 번 숙부님의 온천에 가 본 적이 있었습니다.]

[화려한 온천이었겠군.]

[네, 호화롭고 아름다운 곳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온천이 더 운치 있고 근사한 것 같습니다.]


연성은 그 참혹했던 밤 이후 처음으로 희미하게나마 미소를 띠는 경염을 보며 급작스럽게 온천 행을 결정한 자신의 선택이 옳았음에 안도했다. 여전히 가까이 했던 시비의 배신이 준 상처는 가시지 않았겠지만, 웃을 수 있을 정도로 여유가 생긴 건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경염은 바로 온천에 들어가고 싶어 했으나 오는 길에 식사를 제대로 못 챙겨서 안 된다는 연성의 만류에 결국 중반을 들고도 소화가 될 때까지 시간을 좀 보낸 뒤에야 온천을 즐기러 나올 수 있었다. 태자와 태자비가 새하얀 홑겹 옷 위에 망토를 걸치고 온천으로 나와 보자 이미 온천 주위로는 화로와 찻상, 가볍게 집어먹을 수 있는 다과와 함께 차려놓은 술상이 준비되어 있었다.


홑겹 옷을 입은 채로 온천에 들어간 경염은 눈밭 한가운데 있는데도 추위를 전혀 느낄 수 없을 정도로 따끈한 물에 몸을 푹 담그고 연성에게 기댄 채 하얗게 눈이 쌓인 굽이진 산들과 산 너머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경염의 머리는 눈에 보이는 것 대신 눈에 보이지 않는 제 마음을 생각하고 있었다.


경염은 온천에 온 후로 빠르게 안정돼 갔다. 아침에 일어나 조반을 들고 산책을 하고 책을 보거나 훈련을 하고 중반 후에 온천을 즐기고 돌아와 연성과 함께 잠자리에 누워 소곤소곤 시답잖은 이야기를 나누거나 몸을 나누는 동안, 그동안 외롭고 섬뜩했던 기억들도 살그머니 지워져갔다. 경염이 무엇보다 좋아했던 건 따끈따끈한 노천온천에서 연성과 나란히 앉아 온천을 즐기며 생각을 정리하는 시간이었다. 연성도 생각할 게 많은 듯 온천에서는 말이 많지 않아서 두 사람은 벗은 것이나 마찬가지인 얇은 홑겹 옷 한 벌을 입고 몸을 딱 붙이고 앉아서 각자 머리와 마음을 정리하는 시간을 즐겼다.


그래서 어느 날 아침에 일어나서 제법 큰 눈발이 날리는 걸 본 경염은 답지 않게 노골적으로 실망하는 표정으로 창밖을 망연자실하게 바라보게 되었다.


[왜 우울해 하시오, 경염.]

[눈이 이렇게 오니 오늘은 밖에서 온천을 즐기지 못할 것 같아 그저 조금 아쉬운 것뿐입니다.]


경염은 마치 계속 바라보고 있으면 흩날리는 눈발이 멈춰주기라도 하는 것처럼 내리는 눈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16. 연성

그저 조금 아쉬운 것뿐이라는 경염의 얼굴은 말과는 전혀 다른 마음을 보여주고 있었다. 경염 역시 황자로 교육받고 살아왔기에 얼굴에 감정을 드러내는 일이 많지 않은 사람이라, 무심결에 본심을 내보이는 모습이 사랑스러운데도 그 모습을 보고 있으니 왠지 가슴이 아팠다.


20여 일 동안 경염은 다친 마음을 꾸준히 조심스럽게 추슬러 오면서도, 한편으로는 내내 상처받지 않은 삶을 살았던 것처럼 씩씩하고 건강하게 사냥과 온천, 산책을 즐기며 생활했다. 하지만 연성은 경염이 얼마나 큰 상처를 품고 삶을 견뎌내고 있는지 알고 있었다. 12년 전 그 사건이 벌어지기 전 경염이 음인으로 발현할 수 있었다면, 경염이 아직 소선의 미움을 받기 전에 태자비로 맞을 수 있었다면, 아직 권력을 향한 인간들의 욕망이 얼마나 추악하고 잔인한지 미처 깨닫기도 전에 제 옆으로 데려올 수 있었다면, 그랬다면 경염도 연성도 지금보다 덜 아팠을까.


경염은 언제나 초연한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그 담담한 얼굴을 하고도 처연한 눈빛만은 숨기지를 못해서 경염이 옆에 있으면 늘 손이 뻗어나갔다. 옷을 벗기고 가느다란 몸을 끌어안고 그 몸에 몸을 묻고 싶었고, 어린아이처럼 품에 넣고 맛있는 걸 먹여주고 포근하게 안아주고 싶었다. 하지만 아직 제가 제 반려에게 줄 수 있는 건 치열한 암투로 가득한 끔찍한 시간뿐이었다. 어제 연성은 궁으로부터 소현의 추국을 마쳤다는 편지를 받았다. 소현은 사촌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이가 있었고, 연성의 측비 중 하나가 사촌을 꾀어 내었다. 사촌은 쓰레기 중 쓰레기라 사촌 동생을 겁간해 아이를 낳게 한 것으로도 모자라, 그 아이의 목숨을 인질로 동생에게 태자비를 살해할 것을 강요했다고 했다. 그 측비와 측비의 사가, 소현의 사촌, 소현까지 모두 목숨을 거두었다. 부모를 잃은 아이만 불쌍하게 되었다. 


이제 돌아갈 날도 얼마 남지 않았다. 연성이 미루고 미루었던 진실을 털어놓을 시간이었다.


[경염.]

[네, 전하.]

[눈이 내려도 눈을 보면서 온천을 할 수 있는 방법이 있소.]


연성은 자신을 바라보는 경염의 눈이 기대로 반짝거리는 걸 보면서 팔을 벌렸다.


[접문을 해 주면 방법을 알려드리겠소.]


경염은 혼례를 치른 지 벌써 반 년 가까이 지났는데도 입을 맞춰 달라는 말에 얼굴을 발갛게 물들이며 난처해했다. 하지만 눈이 내리는 걸 보면서 즐기는 온천에 대한 기대가 큰 건지 아침부터 뻔뻔하게 접문을 요구하는 연성에게 다가와, 앉아 있는 연성의 어깨에 손을 살짝 얹고 몸을 숙였다. 새털처럼 가볍게 연성의 입술에 닿았다가 곧 떨어지려던 입술은 그러나 연성이 깨물어 오는 탓에 멀어지지 못했다. 연성의 두 손이 가느다란 경염의 허리를 붙잡고 다리 위로 앉히며 등을 감싸 안자 두 사람의 얼굴과 입술이 더 가까워졌다. 화려한 모란 향과 은은한 죽향이 섞이고, 입술과 입술이 겹쳐지고, 혀와 혀가 얽혔다. 틀어 올렸던 경염의 새카만 머리카락이 어깨 위로 쏟아져 내리고 꼼꼼하게 여며 놨던 옷자락 속으로 연성의 커다란 손이 파고들었다. 곧 경염의 몸을 감싸고 있던 옷자락들이 바닥으로 떨어져 내리고 연성은 행궁에 온 뒤로 내내 품었던 몸인데도 여전히 볼 때마다 갈증이 치솟는 몸속으로 파고들었다.


아침부터 방 안에서 모란 향과 죽향이 뒤섞여 흘러나오고, 태자와 태자비의 신음소리가 문틈으로 새어 나오는 바람에, 조반을 들고 왔던 시비들은 몇 번이나 조반을 데우다가 결국 중반 시간이 돼서야 새로 요리한 중반을 차려낼 수 있었다.



17. 경염

연성이 내내 붉어진 얼굴로 민망해 하는 경염을 데리고 간 온천은 위에 정자 형식의 커다란 지붕이 세워져 있는 곳이었다. 몇 개의 기둥이 시야를 방해하기는 했지만 내리는 눈을 바라보며 온천을 즐길 수 있는 것은 사실이라 두 사람은 여느 때처럼 홑겹 옷을 입고 물속에 몸을 담갔다. 경염도 이제 떠날 일이 가까워졌다는 걸 알고 있기에 뜨거운 물속에 앉아 차가운 머리로 제 마음을 들여다봤다.


10년 넘게 전장에서 살아온 경염은 당연히 여러 번 생사의 경계를 넘나들어야 했다. 칼과 활에 부상을 당한 일은 부지기수였고 적국의 첩자가 경염에게 접근해 독을 먹인 일도 있었다. 가벼운 부상도 많았지만, 전장에서 사경을 헤맨 일도 여러 차례였다. 안타깝게 전장에서 목숨을 잃은 부하들의 시신을 거두어야 했던 일도 많았다. 그런 죽음의 전장에서 10여 년을 보내면서 매령에 묻힌 7만 군사들과 임수가 떠올라 괴로웠던 적은 많았어도, 전장의 피비린내와 긴장을 견디지 못해서 힘들었던 적은 없었는데.


경염은 혼례를 치른 이후, 내내 힘들어 했던 저답지 않은 모습을 돌아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생각하고 말고 할 것도 없이, 이미 원인은 알고 있었다. 전장에서는 경염만 바라보는 많은 군사들의 사기가 떨어지지 않게 늘 누구보다 용감해야 했고, 어떤 일이 닥쳐도 의연해야 했기에 무슨 일이 생겨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게 늘 마음을 단속해 두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 누군가를 지키기만 해야 했던 경염을 지켜주겠다는 사람이 나타나서, 경염이 다칠까 아플까 노심초사하며 바라봐 주는 사람이 나타나서, 그 마음에 기대 저도 모르게 어리광을 부리고 있었던 게다. 어린 시절 넘어져서 무릎이 깨져도 잘 버티고 있다가 어머니가 달려와 피가 나는데 아프지 않느냐고 걱정하면 그제야 엉엉 울었을 때처럼. 이젠 어린 아이도 아닌데. 한숨만 쉬어도 걱정스레 바라봐 주는 사람이 생겨서.


[제가 복이 많아서 전하처럼 좋은 분을 부군으로 모시다 보니, 그동안 너무 어리광을 부렸던 것 같습니다.]

[어리광?]

[모두 씩씩하게 잘 살고 있는데, 전하를 보필해야 할 비가 내내 마음을 잡지 못하고 전하의 다정함에 기대서 신경 쓰시게 했으니 어리광이 아니면 뭐겠습니까.]


연성은 의연한 얼굴로 담담하게 그간 죄송했다고 말하는 경염의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주며 경염을 가까이 끌어안았다.


[경염.]

[네, 전하.]

[나의 반려.]


경염은 연성에게 처음 들어보는 제 반려라는 말에 가슴이 두근거려서 달아오른 귀를 감추려했다. 어차피 뜨거운 물속이라 온몸이 발긋해졌지만 유독 귀가 뜨거워서, 저를 끌어안고 있는 연성도 못 볼 리 없으니 쓸데없는 짓인 줄 알면서도 고개를 숙여 귀를 감추려 했다.


[그대는 나의 반려입니다. 경염.]


그제야 경염은 연성이 말하는 반려라는 말이 단순한 애정 표현이 아닐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었다. 달아오른 얼굴을 감추려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어, 눈을 바라보자, 연성이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다시 말했다.


[경염, 그대는 나의 반려, 청룡의 반려입니다.]


청룡?


하늘에서 쫓겨난 청룡과 그 반려. 북연의 탄생. 청룡과 청룡의 반려들이 이루어 온 역사. 청룡의 아이들. 대를 이어올수록 격렬해진 반려의 자리를 노리는 암투. 한 대에 한 명만 태어나는 청룡의 아이. 청룡의 아이를 지키고, 청룡의 아이로부터 세상을 지켜야 하는 운명을 가지고 태어나는 황자들. 그리고 청룡인 자신의 반려는 경염이라는 것까지. 연성은 기나긴 역사를 조용조용히 경염에게 전달해 주었다.


[경염, 그대가 아이를 낳을 때까지 절대로 그대가 반려임을 누구에게도 말해선 안 되오.]


먼 옛날 전설 같기만 해서 두근거리며 듣고 있던 연성의 이야기는 어느새 경염의 목숨을 위협하는 무시무시한 이야기로 변해 있었다. 결국 북연의 황실에서 벌어지고 있는 잔인하고 조용한 전쟁은 경염이 아기를 낳기 전에 죽이려는 전쟁이었다. 연성의 말을 들어 보면 과거, 실제로 반려를 죽였던 측비가 끔찍한 형벌을 받게 됐다는 것을, 아마도 모두 다 알고 있을 텐데도.


경염은 술렁이는 마음을 가라앉히려 노력했다. 누가 누가를 왜 죽이고 있는지 알 수 없어서 더 불안하게 했던 그 무시무시한 전쟁은 결국 경염 한 사람을 노리는 것이었다. 비록, 그 전쟁에 뛰어든 이들이 자기가 죽여야 할 사람이 경염임을 모르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렇다면 경염은 연성의 말대로 자기가 반려임을 철저하게 숨기고, 확실히 자기를 보호하기만 하면 됐다. 반려가 아닌데도 저들끼리 죽고 죽이고, 죽어가는 사람들의 소식에 귀를 닫은 채로. 입맛이 씁쓸하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경염은 이를 악물고 독한 마음을 품었다. 자신들의 욕망에 져서 저들이 벌인 전쟁이었다. 경염은 경염과 연성만 지키면 되었다.


[다시 돌아가면 그대가 새로운 청룡을 낳을 때까지 또 지옥 같은 시간을 지나야 할 텐데, 늘 잘 견뎌 달라는 말밖에 하지 못해서 미안하오.]


연성이 안타까운 표정으로 경염의 얼굴을 쓰다듬자, 경염이 그 손에 손을 올리고 연성의 상냥한 눈을 바라봤다.


[괜찮습니다. 그곳이 지옥이더라도 전하가 제 옆에 계셔주실 것 아닙니까.]


연성은 경염의 의연한 태도가 더 안쓰러운 듯 미안한 얼굴로 경염의 얼굴을 쓰다듬다가 고개를 숙였다. 경염이 다가오는 연성의 얼굴을 바라보듯 눈을 감자, 온천에 몸을 담그고 있던 탓에 촉촉하게 젖어 있던 입술에 따뜻한 연성의 입술이 닿았다. 


연성이 이야기 소리가 들리지 않는 곳까지 떨어져 있으라 지시해서 저 멀리서 지켜보고 있던 태감과 시비들은, 태자와 태자비가 입을 맞추자,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18. 경염

온천에서 돌아오자마자 연말 제례와 연회, 그리고 1월에 있었던 황제의 생일 축하연으로 정신없는 날들이 지나갔다. 제례와 연회, 황제의 생일 축하연 모두 경염은 태자의 정비로 연성의 옆에 함께 있었다. 경염은 행사가 있을 때마다 신분상의 차이로 태자의 옆자리에 있지 못하고 아래쪽에 떨어져 있어야 하는 많은 측비들의 무시무시한 시선을 느꼈지만 담담하게 그 시선을 받아넘겼다.


연말 행사들과 황제의 생일 축하연 때 황후 외에 황제의 비들은 아무도 없었다. 청룡의 후예들은 반려가 제 아이를 낳고 각성을 하면 반려가 아닌 다른 비들을 찾지 않기에, 비들은 황자나 황녀인 제 아이를 궁에 두고 재가해서 궁을 나가거나, 자신의 아이들이 성년이 될 때까지 황궁에서 함께 살다가 아이들이 성년이 되면 제 아이의 왕부에 들어가서 함께 살았다.


경염은 연성에게 이 말을 들었을 때 처음에 태자의 정비, 측비들과 황후와 황제의 후궁들이 전부 궁을 갖고 있으려면 궁이 넓어야겠다고 생각했던 걸 웃으며 털어놓았다. 경염은 지금도 태자의 정비지만, 반려가 정비가 아닌 경우에도 반려가 각성을 하면 황후가 되는 것은 그 반려라고 했다. 연성의 어머니도 정비가 아니라 측비였다고. 역사에는 제 반려가 위험해지는 걸 최대한 막기 위해 일부러 반려를 정비가 아닌 측비로 들인 태자들이 많았기에 딱히 정비라고 해서 더 의심을 받는 건 아니니 그 점에 대해 너무 걱정하지 말라는 말도 들었다.



19.

경염은 문이 열리는 소리에 잠을 깼다. 간혹 연성은 일이 많은 날이면 경염이 잠든 후에 새벽녘에 태자비 궁에 와서 함께 자기도 하지만, 그럴 때에도 연성은 조용히 들어와 옆에 몸을 눕히므로 경염은 아침이 돼서야 연성과 함께 잠들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이런 식으로 문을 여는 소리로 경염을 깨우는 일은 없었다. 경염이 비일상적인 상황에 눈을 뜨며 반사적으로 침상 밑에 숨겨 두었던 칼을 집자, 서둘러 경염에게 다가오던 시비, 소민이 흠칫거리더니 조급하게 예를 올렸다.


[마마, 궁에 화재가 났다고 합니다. 대피하셔야 합니다.]

[화재가?]

[네, 지금 금위군이 마마를 모시러 와 있습니다.]


경염이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자 소민이 긴급한 와중에도 망토를 가지고 와 경염의 어깨에 급히 둘러주었다. 비상 상황인 만큼 혹시 모를 일에 대비해 여전히 칼을 든 채로 나간 경염은 정원에서 한쪽 무릎을 꿇고 기다리고 있는 금위군 병사를 발견했다. 한 명이었다. 아무리 금위군이 화재 진압에 대부분의 인원을 투입하고, 각 궁마다 사람을 보내 대피시켜야 하는 긴급한 상황이라고 해도 단 한 명을 태자비 궁으로 보낼 리가. 경염은 또 다시 등골을 따라 서늘한 기운이 스치는 걸 느꼈지만 동시에 화재 소식에 놀랐던 머리도 차갑게 식었다.


[화재가 발생했다고 했느냐?]

[네, 마마. 급히 피하셔야 합니다.]

[화재가 난 곳이 어디냐?]

[전 화재 진압에 투입되지 않아서 잘 모릅니다. 일단 대전 쪽으로 모시고 오라고 명을 받았습니다.]

[그래?]


경염은 정원으로 내려가려는 것처럼 천천히 발을 옮기며 숨을 들이마셨다. 역시 공기 중에 매캐한 냄새는 느껴지지 않았다.


화재가 발생하지 않았거나, 태자비 궁과는 아주 먼 곳에서 화재가 일어났거나.


경염이 태자비 호위군 대장인 우검에게 눈짓을 하자, 우검과 호위군 몇 명이 경염을 데리러 온 금위군 병사 뒤쪽으로 슬쩍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금위군 병사는 호위군들이 절 둘러싸는 것도 모르고 눈이 튀어나올 듯 눈을 커다랗게 뜨고 경염을 바라보고 있었다. 경염이 제 침소 앞 복도와 정원에 장식해 둔 석상을 차례로 딛고 몸을 띄우더니 몸을 휙 날려 지붕 위로 올라가 버린 것이었다. 지붕 위에서 잠시 주위를 둘러보던 경염이 다시 가볍게 지붕에서 정원으로 뛰어내릴 때까지도 금위군 병사는 입까지 벌린 채 멍하니 경염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경염이 그대로 병사에게 다가가 검집으로 병사의 등을 내리치자, 병사는 놀란 표정을 수습하지도 못하고 그대로 의식을 잃었다.


경염의 호위군들과 수발을 드는 태감, 시비들은 경염이 매일 연무장에서 훈련을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도 경염이 경공으로 지붕 위로 올라갈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지라, 모두 놀란 표정으로 경염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나마 호위군 대장, 우검만이 서둘러 정신을 수습하고 쓰러진 병사의 검을 뽑아 제 부하에게 맡겼을 뿐이었다.


[우검, 화재가 난 곳은 궁의 서남쪽이다. 태자 전하는 어디 계시지?]


동궁과 태자비궁은 궁의 동쪽에 있어서 화재가 난 곳과는 거리가 멀었고, 경염이 잠깐 살펴본 것으로는 화재가 본디 작았는지 금위군이 서둘러 진압한 것인지 불길도 작아 보였다. 반 시진 내에 진압이 끝날 수 있을 것이었다. 그러나 연성이 청룡의 후예라 화재 따위로 다치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옆에 없으니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태자 전하께서는-]

[경염!]


연성이 뛰어 들어와 칼을 들고 서 있는 경염과 쓰러져 있는 병사를 보더니 서둘러 경염에게 다가왔다.


[경염, 어떻게 된 일이오? 괜찮소?]

[전하. 황궁 서남쪽에 화재가 발생했습니다.]

[화재? 그걸 어찌 아셨소?]


경염은 검집 끝으로 금위군 병사를 가리켰다. 병사는 이미 태자를 뒤따라 들어온 태자의 호위군들에게 양 팔이 잡힌 채 축 늘어져 있었다. 여전히 의식은 없는 채였다.


[이 자가 와서 궁에 화재가 발생했으니 피하여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아무래도 병사 한 명만 온 것이 의아하고, 공기 중에 불 냄새가 나지 않아 혹여 저를 태자비 궁 밖으로 불러내려는 시도가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어서 지붕 위에 올라가 살펴봤습니다. 전하는 다치지 않으셨습니까?]


연성은 잠시 의아한 얼굴로 경염과 병사를 번갈아 바라보다가 눈을 커다랗게 떴다.


[지붕 위에는 어떻게 올라갔소?]

[경공을 썼습니다.]


뭐가 문제냐는 듯, 담담하게 경공으로 지붕 위에 올라가 화재 장소를 파악했다는 경염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연성은 결국 픽 웃으며 경염을 끌어당겨 안았다.


[고맙소, 경염.]


고맙다는 말에, 불합리한 이유로 목숨의 위협을 받게 된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의연하게 대처하게 된 경염의 심적 변화에 대한 고마움도 포함돼 있다는 걸 느껴서 경염은 새삼 미안해졌다. 그동안 경염이 흔들릴 때마다 연성이 얼마나 마음 아파했을지 알 것 같아서. 온천에서 청룡 전설을 모두 듣고, 연성이 한동안은 저만 편애할 수 없다는 이야기도 들었기에, 이렇게 많은 눈이 보는 데서 다정하게 안겨 있으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혹여 저 작은 불길이 연성에게 해를 입혔을까 놀란 가슴도 아직 진정되지 않아서. 경염은 연성의 품에 가만히 안겨 있었다. 제 심장이, 그리고 연성이 심장이 평소대로 잔잔하게 뛸 때가 돼서야 경염은 발그레해진 얼굴로 연성의 품에서 벗어났다.


[서남쪽에는 뭐가 있습니까?]


다정한 눈길로 경염을 바라보고 있던 연성은 그 말에 또 피식 웃었다.


[식사 준비를 하는 상식청이 있소. 내일 조반이 제대로 올라올지 걱정이군.]

[설익은 반찬은 없을 테니, 그건 안심이지 않겠습니까.]


경염이 이 상황에서도 답지 않게 농담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여유로운 모습을 보이자, 연성이 안심이 되는 듯 웃다가 아직 밤바람이 차다며 경염을 다시 침소 안으로 들여보냈다.


[들어가서 먼저 쉬고 계시오, 비. 부황께서도 이미 화재 소식을 들으셨겠지만, 혹시 모르니 가서 부황께 보고를 하고 화재 진압이 되는 걸 보고 오겠소.]

[다녀오십시오, 전하.]


태자비 궁을 나온 연성의 얼굴에서는 경염에게 보여주던 다정한 눈빛과 상냥한 미소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연성은 자신이 태자비 궁 안에 있는 동안 호위군들이 끌고 온 말에 오르며, 태자 호위군 부대장에게 지시를 내렸다.


[누가 태자비를 궁 밖으로 끌어내려 했는지 찾아내라. 하운궁 쪽부터 알아보도록 해라.]

[네, 전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