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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뭔가를 들고 있었다면 분명히 떨어트렸을 것이다. 곽건화는 입 안으로 밀려들어온 뭉건한 살덩이를 느끼며 들고 있던 맥주봉지를 떨어트리는 장면 같은 것을 상상해보았다. 그러나 손에 쥘 것이 아무것도 없는 현실에서 양 손은 갈 곳을 모르고 그저 방황할 뿐이었다. 건화의 커다란 두 손은 여전히 어정쩡하게 왕카이의 어깨에 걸쳐져 있었다. 뾰족하게 세운 혀끝으로 입 안을 만지듯이 더듬어댔던 소학교때의 키스와는 달리 왕카이는 윗입술 아래의 연한 점막을 핥고만 있었다. 꿈지럭거리던 손가락을 화들짝 땐 것은 그러다 스친 혓바닥에 척추가 지릿 했을 때였다. 건화는 꾹 감고 있던 눈을 번쩍 뜨고 떨어졌다. 촉 하는 소리와 함께 입술이 떨어지자 왕카이가 사르르, 감았던 눈을 뜨는 것이 슬로우비디오처럼 느린 화면으로 보였다. 

 닫혀 있던 눈꺼풀이 열리고, 밤색의 눈동자가 초점을 찾는 것을 건화는 멍청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목 뒤로 땀이 흐르는 것 같다. 팔과 다리가 어떤 각도로 구부러져 있는지, 어디가 어떻게 카이와 닿아있는지, 그 면적의 넓이마저 부대낀 살의 온도로 알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스스로의 몸뚱이를 이런 식으로 인식해본 것은 처음이었다. 관절이, 팔다리가 거추장스럽게 느껴졌다. 

 느리게 초점을 되찾은 눈동자는 건화의 입술을 향했다가, 다시 시선을 마주쳐왔다. 건화는 직감적으로 알았다. 왕카이가 자신의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뭔가를 말해야 하는 타이밍이었다. 

 

 "어..음.."

 "......"

 “바..밥 먹었어?”


 왕카이는 건화의 입술로 시선을 내렸다. 고개를 천천히 숙여서 아랫입술에만 짧게 입술을 붙였다가 다시 떨어졌다. 혀가 얽혔던 순간보다 그 짧은 입맞춤에 더욱 얼굴이 붉어지는 기분이었다. 


 “..안 먹었어.”


 2차시기를 준 것이다. 정답이 아니었는데 한 번 봐 준거다 지금. 시선을 맞추고 가만히 기다리는 왕카이의 반들거리는 눈동자를 보며 건화는 초조하게 입술을 핥았다. 선명하게 떠오르는 것은 토끼우유 사탕을 쥐고서 왕카이의 앞에 섰던 유치원의 그 날이었다. 한참이나 말을 고르는 건화를 기다려주었던 동그란 뺨과 통통한 손가락 같은 것들이. 

 아..어... 말을 고르는 사이 점점 카이의 고개가 숙여져, 어느새 발치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잘 지냈어..?”

 "......" 

 "..보고싶었...어..?"


 보고 싶었다고, 딴에는 용기를 내서 한 말이었거늘. 네가 지금 기다리고 있는 말이 이것이냐 금도끼 은도끼를 찾는 나무꾼의 심정이 되어 던진 말은 끝이 올라가는 괴상한 의문문이 되어 나왔다. 왕카이가 고개를 들었다. 도르륵, 진주알 같은 눈물방울이 뺨을 따라 흐르기 시작했고, 곽건화는 유년기를 통째로 지배했던 그 풍경이 다시 한 번 반복되는 것에 머리가 새하얘졌다. 그 때와 다른 것이라면 왕카이가 고개를 끄덕이고 그래도 내가 예쁘냐고 묻는 것 대신에 불쑥 시야로 침범하고선 이마로 곽건화의 머리를 들이받았다는 것이었다. 꽝, 골이 울릴 만큼 무식하게 박치기를 해놓고서는 바닥에 주저앉았다. 엉엉 소리 내서 눈물 콧물을 흘리며 울기 시작했다. 대성통곡을 하면서 죽일 놈 살릴 놈 찾는 통에 곽건화는 앞뒤 안 가리고 왕카이를 끌어안았다. 등 뒤로 두른 건화의 손을 털어내려는 듯 사지를 허우적거리는 것을 결박하듯 끌어안는 움직임은 숙련된 조교의 것과 다름없었다. 익숙하게 등허리를 쓸어내리면서 뚝, 괜찮아, 달래는 소리를 내자 울음소리는 더욱 커졌다. 


 “으어엉. 곽건화 이 씨발...”

 “응. 응. 뚝 해야지.”

 “곽건화 똥멍청이가 키스도 더럽게 못하는 주제에...”

 “응. 그래. 그렇게 울면 나중에 목 아파.”

 

 건화는 못 들은 척 하고 티셔츠의 밑단을 끌어올려 왕카이의 눈물을 닦아주고 콧물도 닦아주었다. 왕카이가 뭉개지는 발음으로 ‘술 냄새... 홀아비 냄새나 씨발 거지 같아악!’ 하는 것도 못 들은 척 했다.


 결국 왕카이는 울다 지쳐 잠들었다. 땀을 뻘뻘 흘리면서 엉엉 울어대는 통에 저러다 제 성질을 못 이기고 쓰러지면 어쩌나, 곽건화는 노심초사 어쩔 줄을 몰랐다. 건화의 티셔츠를 걸레짝으로 만들며 왕카이가 주억거린 말의 절반은 곽건화의 욕이었고 나머지 절반은 천하의 똥멍청이 머리털을 다 뽑아버려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에어컨을 켜고 거실에 웅크리고 잠든 왕카이의 머리를 살살 들어 베개를 받쳐주었다. 얇은 이불도 가져와 덮어 주었다. 카이가 잠에 들자, 그제야 놀라고 당황한 마음에 한구석으로 밀려났던 술기운이 올라오는 것 같았다. 건화는 카이와 마주보는 자세로 드러누웠다. 눈물이 엉겨 붙은 속눈썹을 내려다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거한 이별 후유증은 늘 있었던 일이고, 고장 난 수도꼭지처럼 울어재끼는 것을 달래준 것도 처음이 아니거늘 이 기분은 뭐란 말인가. 울다 지쳐 잠든 얼굴을 보자 그깟 전화 한 번 하는 게 뭐라고. 버티고 있었던 스스로가 우습게 느껴졌다. 싸우긴 또 왜 싸웠을까. 카이 자존심에 먼저 숙이고 들어오는 일 같은 건 절대 하지도 못 했을 텐데. 적당히 먼저 져 줄 걸. 눈물에 퉁퉁 부은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 봄 눈 녹듯이 스르르 마음이 모두 녹았다. 물기를 매달고 있던 카이의 눈꼬리에서 뺨으로 길게 눈물이 떨어졌다. 손등으로 문질러 닦아주자 이마를 찡그리면서도 깨지는 않았다. 뺨을 문지르던 손을 떼고는 괜히 빈 거실을 둘러보고 큼큼 헛기침을 했다. 두어달 만에 본 얼굴은 눈을 감으면 사진을 더듬듯이 선명하게 기억할 수 있는 이의 것이었다. 그런데도 새삼스러웠다. 왕카이를 알게 된 후 이렇게 오랫동안 만나지 않은 적이라고는 없었기 때문이다. 땀에 젖은 앞머리를 이마에서 한가닥씩 떼어주는 동안에도 왕카이는 깨지 않았다. 건화는 왕카이를 마주보며 누워 그렇게 한 시간 넘게 자는 왕카이를 구경했다. 째깍거리는 초침 소리만 조용한 곳에서 시간 가는 줄을 모르고.

 달이 머리꼭지 위로 올라왔을 즈음에야 왕카이는 잠에서 깨어났다. 거실에 불도 켜지 않고 좀비처럼 저를 내려다보고 있는 곽건화를 확인하고서도 놀라지도 않았다. 그저 조용하게 눈을 떴다. 눈썹을 조금 꿈틀거리나 싶더니 닫혀 있던 눈커풀이 열렸다. 그것은 이상한 감각이었다. 잠들었던 동안 내내 감고 있는 눈을 떠 처음으로 바라 본 곳에 있었을 뿐인데 이상하게 특별한 기분이 들었다. 

 곽건화는 머릿속에 맴돌고 있었던 질문을 위해 입을 열었다.

 너 나가서 살겠다는 것뿐이었는데. 왜 그렇게 가슴 한 구석이 비어버리는 기분이었을까.

 아. 그러나 눈이 마주치자 또 뇌를 거치지 않고 말이 튀어나갔다.


 “..예쁘다.”


 왕카이는 그 말을 인지하지 못 한 듯이 천천히 눈을 깜빡거리다가, 입술을 달싹였다. 뺨을 따라 천천히 눈물이 떨어졌다. 곽건화가 조심스럽게 그것을 닦아주려고 손을 내밀자 카이가 눈을 감았다. 마른 손끝이 다 젖도록 고요히 울었다. 



 

 왕카이가 소학교 2학년때 열었던 생일파티는 뻥 좀 섞으면 동네 잔치였다. 학교에 말 한 번 섞어본 애들이라면 누구나가 왕카이의 집에 와 있는 것 같았다. 그것은 학년의 절반쯤 되는 아이들이 고삐풀린 망아지마냥 엉망진창으로 뛰놀았다는 이야기다. 어린이 건화는 고집스레 엄마의 도움을 받지 않고 스스로 포장해 온 선물을 건네줄 기회를 보고 있었다. 마땅한 타이밍을 잡기가 어려웠다. 한참을 흘끔대며 양 손으로 조물 대느라 스카치테이프가 떨어질랑 말랑한 선물꾸러미를 들었다 놓았다 한 것이 족히 한 시간은 되었을 때였다. 고깔모자를 쓴 왕카이는 건화의 앞에서 ‘뭐 해?’ 짧게 묻고는 뒷마당에 쪼그려 앉아있던 건화의 위로 작은 그림자를 드리웠다. 사실 건화와 카이는 전날까지 냉전 상태였다. 무엇 때문에 싸웠는지는 지금은 기억도 나지 않는 사소한 일이었다. 싸워놓고는, 그래서 크레파스로 그려 만든 초대장도 주지 않아놓고는 막상 생일날이 되자 건화가 오지 않으면 생일케잌의 초를 불지 않겠다고 고집을 피웠다. 뒤늦게 쭈뼛대며 들어오는 건화의 팔을 붙잡고 한달음에 제 옆으로 당겨 방긋 웃고 제일 크게 생일 축하 노래를 부르고 후우 초를 불었었다. 아무렇지도 않은 척 하기는 겸연쩍었던 건화는 카이랑 둘만 아는 뒷마당 개구멍 뒤에서 한참을 쪼그리고 있었다. 건화가 쑥 내미는 선물꾸러미를 양 손으로 받아든 카이가 또 방긋 웃었다. 건화는 조막만한 손이 야무지게 선물포장을 뜯고 와아, 하는 것을 보았다. 세모 두 개가 겹쳐져 별모양이 된 팔찌였다. 그랑죠 그랑죠 동네가 떠나도록 노래 부르는 것을 보았으니 마음에 들겠지. 흘끔 왕카이를 올려다보았을 때 망설임 없이 팔목을 내미는 것에, 햇님처럼 방긋방긋 웃는 얼굴에 마음이 풍선처럼 부풀었다. 왕카이는 그 그랑죠 팔찌를 한참이나 하고 다녔었다. 당시 왕카이의 짝궁을 비롯해 여러 친구들이 같은 팔찌를 선물했다는 것은 나중에야 알았다. 그래도 왕카이가 손목에 걸고 다니는 것은 건화가 팔목에 걸어준 것 하나뿐이었다. 


 “어째 짐이 늘어난 것 같다?”


 정백연과 헤어진 카이는 집으로 돌아왔다. 두 달 만에 용달차로 돌아온 짐을 밀어 넣으며 건화는 들으라는 듯이 툴툴댔다. 왕카이는 대답도 안 했다. 다시 돌아온 저녁 이후로 카이가 건화를 대하는 방법이란 첫 번째가 무시요 두 번째는 못 본 척, 세 번째는 안 들리는 척으로 총체적으로 말하면 투명인간 취급이라고 할 수 있었다. 뭔가 마음에 안 들면 차라리 쌍욕을 해주면 좋겠다.. 구슬땀을 흘리며 짐을 옮기고도 좋은 말 한 마디 듣지 못하는 건화가 한아름의 짐들을 안고 계단을 오르느라 앞도 제대로 못 보고 뒤뚱거리며 현관 앞에 다다랐을 때였다. 방 안에서 나오던 카이와 좁은 현관에서 마주쳤는데 오른쪽으로 비켰다, 왼쪽으로 비켰다, 짜맞춘 듯이 같은 방향으로 움직이는 통에 삐그덕대며 한참이나 마주보고 있었다. ..쟤 입술이 저렇게 빨갰나. 불과 24시간도 전에 바로 이 현관에서 저 입술이 닿았던 더운 감촉에 귀 끝에 오르는 열을 식히려 고개를 흔들어대느라 왕카이가 들고 나가던 상자는 보지도 못했다. 그래서 짐을 다 들여놓고 용달차가 떠나는 것 까지 보고 빌라 안으로 들어서려고 했을 때, 잡동사니 더미와 같이 쓰레기 분리수거함 옆에 가지런하게 있었던 그 상자를 발견했다. 


 “뭐야? 버리는 거야?”


 상자 안을 뒤적거리던 건화는 어렵지 않게 알아볼 수 있었다. 똑같은 것 여러 개를 다른 사람이 선물했어도 카이가 자신이 선물한 것만 팔목에 걸고 다니는 것을 알아보았을 때처럼 모를 수 없었다.


 “응. 이제 버리는 거야.”


 미련 없이 먼저 돌아서 올라가는 왕카이를 따라가지 못하고 곽건화는 한참이나 그 오래된 잡동사니들 사이에 쪼그리고 앉아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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