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시작은 차였다. 선황이었던 소선에게 미움을 사 전장을 돌았던 구박데기 7황자, 양제 소경염은 본래 차보다는 아무 것도 타지 않은 맹물을 더 선호하는 이였다. 한 줌에 기와집 여러 채가 오가는 차나 하급 중에 하급이라 돈 있는 평민도 취급하지 않는 차나 소경염에게는 맹물이나 진배없었다. 조정에서 자리를 잡기 전까지 정왕부에 떨어졌던 패물이나 열악하기 그지없었던 전장의 상황을 생각한다면 다행인 일이었지만 황제가 된 후로도 누군가를 대접하지 않는 이상 맹물을 고집하곤 했던 황제였다. 그렇기 때문에 오랫 동안 선황을 보필했으며 이제 새로 등극한 황제의 옆을 지키게 된 고담이 차가 마시고 싶다는 황제의 갑작스러운 명에 잠시 당황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무엇으로 올리라 할까요, 폐하.

그 말에 젊은 황제는 뜸을 들이는가 싶더니,

-무이암차가 좋겠군.



여상히 말하며 다시 상소를 들었다. 차를 내오라고 말하였으나 명을 내린 황제 본인도 웃기기는 마찬가지였다. 물소, 네가 차라니! 하며 카랑카랑하게 울리는 수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도 같았다. 수가 아무리 한 번 마셔보라 드밀어도 고개를 젓던 저였건만. 차를 마신지 며칠이나 되었을까. 짬이 나면 태후의 지라궁을 방문한 황제가 백합탕이나 개암과자같은 즐겨 먹던 간식들을 점점 물리기 시작했다. 어느 날 태후의 닭고기탕을 먹다 한 구역질은 황제의 상태에 의문을 가지던 사람들에게 정점을 찍고야 말았다.



-경염!



사색이 된 태후가 저도 모르게 황제의 이름을 부르자, 허옇게 뜬 얼굴로 황제가 웃었다.



-선황께서 승하하시고 밀린 정무가 많았지 않았습니까. 그것 때문에 피곤하여 그런가봅니다. 심려치 마세요, 어머니.



그러나 황제의 어머니는 의녀였다. 환자를 보면 맥을 짚어야 한다는 의녀 시절의 사명은 괜찮다는 황제를 부득불 앉혀 팔을 걷게 했다. 궁인들을 밖으로 보낸 후 맥을 짚던 그녀는 이내 당황해하며 멀뚱한 표정으로 앉은 황제에게 물었다.



-페하. 혹 두 세달 전에 양인과 관계를 맺은 적이 있습니까?


태후의 물음에 황제가 눈을 질끈 감았다.


굳이 기억을 거스를 필요는 없었다. 음인으로 발현하고 수와 맺어진 날에도, 적염군과 기왕의 무죄를 주장하다 금족령을 받고 강제로 형질을 잠재우는 약을 마셨던 날 이후에도 황제의 양인은 오로지 한 사람이었다. 임수이며 매장소이던 그 사람 외에 누구에게 몸을 열었으랴.

눈을 감으면 그 날이 더욱 선했다.


선황이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았고 전쟁으로 백성들이 얻은 피해도 크니 즉위 연회는 열지 않겠다고 그답지 않게 엄포를 놓은 뒤 소택을 몰래 찾은 날이었다. 적염군 사건 재심 이후로 금릉을 떠날 생각으로 정리했던 집이 물건 없이 텅 비고 식솔들도 모두 강호로 떠나 집에는 매장소와 비류, 타주인 려강과 안의원만 남아있었다. 원래도 주인의 심성마냥 조용한 집이 사람사는 소리까지 들리지 않자 적막하기 그지없었다. 그에 눈치를 보는 건 문을 사이에 두고 대치하고 선 황제와 매장소가 아닌 주위의 수하였다.


결국 매장소가 고집을 꺾었다. 날이 아직 추웠고, 경염을 밖에 세워두는 것도 마음에 차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화로 하나가 붉게 타오르는 내실에서 다기를 사이에 둔 채 침묵을 지키고 있던 황제가 입을 열었다.



-금릉을 떠나는 것인가.



기어이 나를 두고. 목 끝까지 올라온 말을 애써 삼키고 앞에 놓인 찻잔을 노려보던 눈을 들어 매장소를 응시했다. 여느 때처럼 의뭉스러운 미소를 띈 매장소가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예, 폐하.

-그 폐하라는 말,

-아마 영영 돌아오지 않을 것입니다.

-...그게 무슨 말인가. 영영 돌아오지 않는다니!



황제의 음성에 노기가 어렸다. 매장소는 아랑곳않고 제 몫의 차를 또 한 모금 마셨다.



-임수로서의 사명은 다했으니 온전한 매장소로 살아봐야하지 않겠습니까. 랑주를 비운 지 너무 오래 되었습니다. 제가 직접 처리해야하는 일도 있을 테니 돌아가 봐야지요.

-날 지켜본다고 하지 않았나. 내게 또 거짓을 말하려고! 몸 상태를 숨기고 전장에 나갔던 것으로 모자라!

-폐하께서는 제가 금릉에 있던 3년 동안 이미 겪어보셨습니다. 굳이 제가 금릉에 있지 않아도 제 눈은 항상 폐하를 지켜볼 수 있다는 것을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황제가 고개를 떨구었다. 황궁에서 일어난 일도 황자였던 본인보다 먼저 알고 대책을 강구해주었던 매장소였다. 만일 매장소가 눈을 두지 않는 곳이 있다면 그것은 그의 능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그럴 필요가 없는 것을 뜻했다. 그의 능력이라면 능히 황궁에 제 사람을 넣어 황제를 지켜볼 수도 있다. 누구보다 황제 본인이 더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가 바라는 것은 매장소였지 매장소의 눈이 아니었다. 그 사실을 짐작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매장소는…



-내가 가지 말라고 한다면 가지 않을 건가?

-폐하.

-알고 있네. 자네는 언제나 그리하였듯 자네가 원하는 대로 할테지. 하지만 내가 생각지도 않았던 자리에 올려놓은 사람은 자네일세. 황장형께서 계셨을 때는 형님의 것이라고 생각했던 자리였어. 형님께서 돌아가시고는 부황과 두 황형들을 보며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었고. 나는 뜻도 없었던 그 자리에 날 혼자 둘텐가.

-..폐하.

-내가 가지 말라 부탁해도 그대는 들어주지 않겠지. 알고 있네. 늘 그리했으니까, 그대는.

황제가 제 앞에 있던 식은 차를 단숨에 들이켰다. 찻잔이 바닥에 닿는 소리가 요란했다.

-그렇다면, 내 부탁 하나 들어주게.



매장소가 황제와 눈을 맞추었다. 화 때문인지 무엇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잔뜩 붉어진 눈이었다. 매장소는 황제의 눈을 애써 무시했다. 욕심내지 말아야 한다. 황제는 더 이상 욕심을 내면 안되는 사람이었다. 금릉으로 처음 돌아와 경염을 처음 마주하고 그를 돌려보냈을 때에도 적염군의 팔찌를 보며 했던 생각이었다. 임수가 아닌 매장소는 그의 곁에 머물 수 없다. 경염의 임수가 아닌 매장소는.


황제의 눈길이 매장소의 손 끝으로 닿았다. 평온한 표정이면서도 그는 알 수 없는 머리 안에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소맷자락을 쓸고 있었다. 황제의 눈빛을 알아차린 매장소가 경염이 버릇을 지적했던 그 날처럼 멋쩍게 웃으며 소매 안으로 손을 숨겼다.



-여기 머물러달라는 말은 아닐세. 자네에게도 곤란한 부탁일테니. 그저..

-예, 폐하.

-나를.. 안게.


매장소가 무어라 말하려는 듯 입을 달싹였지만 황제는 고개를 저어 그의 입을 막았다.



-첩지를 내리려는 것도 아니야. 억지로 자네를 내 곁에 두면 그게 무슨 소용이겠나? 자네가 그리 해서 잡혀 줄 사람이 아니라는 것도 알고 있는 마당에.

-송구합니다, 폐하. 저는…

-나를 황제라 생각 말고 자네의 옛 정혼자라고 생각해주면 들어줄 수 있겠지? 항상 그랬지 않은가. 자네가 나와의 약속을 지키지 않을 적마다 소원을 들어주었잖아. 13년 전 무사히 돌아오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않았으니 13년 동안 묵혀두었던 소원을 들어주는 걸로 하자. 그러면 되잖아, 수아야…….



경염이 기어이 눈물을 흘려냈다. 그 모습에 화독이 몸을 태우던 것처럼 속 언저리를 뜨겁게 태우며 내려갔다. 울컥하고 올라오는 고통에 가슴께를 그러쥔 매장소의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필시 모든 용기를 끌어 부탁하는 것이리라. 경염의 눈을 보면 알 수 있었다. 창문을 타고 들어오는 환한 달빛은 누구라도 피하지 못하게 두 사람을 비추고 있었으니까. 처연한 달빛에 비친 경염의 모습이 이리저리 어룽졌다. 어쩌면 눈물을 흘린 사람은 경염이 아니라 매장소일지도 몰랐다.



-수, 수아야. 어찌 그래!



욕심내지 않겠다고 다짐했는데.



-다시 몸이 아픈 것이야? 안의원을 부르겠네. 잠시만,



경염의 떨리는 목소리가 눈물에 잔뜩 젖은 개암색 눈이,



-……수아야?



비겁한 저를 잡아보려는 몸짓이 이토록 애처로워서.



-경염.



책사는 황제의 팔을 붙잡았다.

임수가, 경염의 팔을 붙잡았다.



종주정왕 후거카이


재업임!! 시발 태그 이상하게 잡혀서 놀랬네;; 제목도 이게 맞는지 모르겠다 아무튼 ㅇ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