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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만하면 정말 할만큼 했다고 생각해







그 날 저녁 후홍량에게서 받은, 나는 너를 믿고 있고 어쨌든 지금 니가 할 수 있는 일에 최선을 다 해라 운운하는 위로의 문자는 호가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리고 별 생각 없이 자연스럽게 호가의 방에 들어온 곽건화는 그야말로 시한부 선고를 받은 자의 표정과 맞닥뜨리곤 당황했다. 그는 잠깐 호가의 눈치를 살폈고, 호가에게 어떤 사정을 들은 건 아니지만 제가 어떻게 해줄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걸 직감으로 파악한 후 그를 그대로 내버려둬 주었다. 그건 곽건화가 해줄 수 있는 최선이었고 의외로 호가에게 나름의 위안이 되어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호가는 아직 류천에 대해 곽건화에게 말하지 못했다. 아마 곽건화가 아는 건 곧 그가 복귀할 것이란 정도가 전부일 테다. 호가는 고민에 빠졌다. 그에게 어디까지 말해야 하는가.


말하긴 뭘 말해, 어차피 입도 벙긋 못하겠지. 호가는 우울한 얼굴로 억제제를 삼켰다. 어제 반쯤 먹다 남은 생수 통을 드는데, 뚜껑을 여는 순간 약한 거부감이 들었다. 


뭐야 이게? 


호가는 당황한 얼굴로 투명하게 비치는 물속을 바라보았다. 그냥 방에 둔 건데, 벌써 상한건가? 이내 누군가가 부르는 소리에 길게 생각할 겨를은 없었다. 호가는 아쉬운 대로 물 없이 약을 삼키곤 자리를 벗어났다. 의문도 그것으로 끝이었다. 


“호 감독, 얼굴 너무 안 좋은데?”


다른 말없이 촬영에만 집중하는 호가의 눈치를 살피다 촬영감독이 한 마디 던진다. 차라리 드러내놓고 감정을 표출하는 것보다, 과도하게 차분한 기류가 주위를 불편하게 할 수도 있었다. 최소한 소리라도 지르면 화가 났다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을 텐데 이건 화가 난건지 삐진 건지 우울한 건지 가늠도 안 되니. 정확히 말하면 스테프들은 지금 호가가 주지도 않은 눈치를 보고 있는 셈이다. 


사정을 아는 조연출만 안절부절 못했다. 호가는 고개만 들어 촬영감독을 바라보았다. 그는 의외로 웃는 상이었다.


“내 얼굴 뭐 어때서, 오늘 아침에 거울 보니까 멀쩡하던데.”

“아니 얼굴에 핏기가 없는 게, 아침도 먹는 둥 마는 둥 하더니.”

“나 원래 더우면 입맛 떨어지잖아. 아까 그 장면 한 번 더 가야될 거 같은데.”


카메라를 향하 턱짓하며 호가는 제 입술을 쓸었다. 까칠하게 올라온 입술이 손끝에 거슬린다. 그러고 보니 열이 좀 있는 거 같기도 하고. 


한편 머리를 맞대고 방금 장면을 의논중인 호가를 멀찍이서 바라보며 곽건화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저게 끝까지 말을 안 할 생각인가 보네. 전적이 있으니 먼저 채근은 못하겠고, 스스로 입을 열 때까지 기다려야 할 눈치인데 아마 죽을 때 유언으로 전해 듣지 싶다. 








그때까지만 해도 촬영과, 류천과, 상해에서 저 모르게 이뤄질 작업들에 대한 걱정으로 호가의 머릿속은 이미 과부하였다. 촬영 중 사담에는 대응조차 하지 않은 호가의 태도에 차차 스태프들은 적응해갔고(류천 온다잖아, 예민해졌나보지 뭐), 곽건화 역시 둘만 있을 때에도 딱히 불필요한 말을 하지 않았다. 


일상은 특별한 일 없이 어제와 오늘이 비슷했지만, 아마 어느 순간 아주 달라질 것이라 모두들 예상했다. 얼음은 굳은 채 멈춰있지만, 그 아래 물은 쉼 없이 흐르는 법, 모두의 얼굴을 바꿔놓을 날은 얼마 남지 않았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다들 긴장하고 있었다.


호가는 이미 자신이 임계점이라 생각했다. 고민은 불포화 상태였고, 밤잠을 설치게 할 걱정거리 역시 충분했다. 


그리고 그는 지금까지의 걱정들은 정말, 아무것도 아니었고 사소하기 짝이 없었으며 고민을 할 가치조차 없었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물론 이는 상대적이었고, 태양 앞에 촛불과 같은 효과였지만 어쨌든 그랬다. 


무엇보다 그가 단 한 순간도 원하지 않았으며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결과였다. 그렇기에 행복이나 행운은 될 수 없었다.


침대 위에서 곽건화가 호가의 가슴을 만지작거리는 건 손버릇 같은 것이었다. 반드시 성적인 의도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쉬고 있거나 일을 하거는 자신에게 은근슬쩍 다가와 가슴 안으로 손을 집어넣는 손버릇을 내버려둬야 할지 고쳐야 할지 그냥 분질러야 할지. 다 큰 애 장난감도 아니고 이게 무슨.


오늘도 아니나 다를까 한 손엔 핸드폰을 쥔 채, 나머지 손으로 자신의 가슴을 가지고 노는 그를 호가는 어이없이 바라보았다.


“하나만 만져, 하나만.”


호가의 의도는 가슴에서 손을 빼라, 였고 곽건화가 취한 행동은 핸드폰을 던진 채 나머지 손 역시 불쑥 집어넣는 것이었다. 이 징글징글한 인간 같으니. 호가는 어느 새 침대 위에 깔렸고, 드러난 가슴팍 위에 곽건화는 얼굴을 파묻었다. 높은 콧대가 가슴골을 스치자 호가가 저절로 인상을 썼다. 


그 때였다. 날카로운 욱신거림이 가슴 쪽을 후려치는 것이. 


“아.”


통증은 상당했다. 호가는 저도 모르게 가슴을 팔로 가리며 벌떡 일어났다. 덩달아 떠밀린 곽건화가 의아한 얼굴을 한다.


“왜, 아파?”

“아, 모르겠어. 갑자기 뻐근한데.”


통증은 쉽게 가라앉을 듯 하면서도 끈질기게 따라붙었다. 아픔에 구겨지는 호가의 얼굴을 바라보다 곽건화가 슬쩍 손을 뻗어왔다. 많이 아파? 곽건화의 손이 닿자마자 호가가 기겁을 하며 그를 후려쳤다.


“아프다고, 만지지 마!”

“그 정도로 아프단 말이야? 갑자기 왜?”


곽건화의 표정은 걱정이었고, 호가는 그것을 장난감 뺏긴 아이의 울상으로 해석했다. 그 동안 알게 모르게 제 신체 부위가 노리개 비슷한 취급을 당해온 스트레스와 억울함을 무의식중에 발산한다. 호가는 그의 어깨를 후려쳤다.


“작작 좀 만져, 너 때문에 멍든 거겠지!”

“내가 그렇게 세게 만졌나?”


우울한 얼굴로 제 손바닥을 들여다보는 곽건화를 발로 죽 밀어버리며 호가는 핀잔했다. 오늘 니 방 가서 자. 잠결에 더듬지 말고.


고약한 손버릇에 대한 보복 겸해서, 곽건화에게 그렇게 핀잔을 주곤 내쫓았지만 호가 나름대로 짚이는 게 있었다. 갑자기 이유 없이 역한 기운이 들거나 체온이 오르내리고, 근육통 등등의 증상을 조합해보면 그가 내릴 수 있는 답은 한 가지였다.


그렇지만 어째서?


호가는 의심스러운 눈으로 베드테이블 서랍을 바라보았다. 약은 꾸준히 챙겨먹고 있었다. 갑자기 사이클이 들이닥칠 리 없었다. 그것도 지금은 주기가 아닌데. 


혹시 부작용인가?


그래서 그는 그 다음날 아침 비행기를 타고 상해로 향했다. 타이트하게 촬영 일정을 진행한 터라 시간적 여유가 있어서 다행이었다. 조연출에겐 오늘 저녁에 바로 돌아올 것이라 말했고 곽건화에겐, 와서 보자는 말만 남겼다.








초조해하는 호가를 앞에 둔 의사는 좀 황당하다는 얼굴이었다. 


처음 그는 호가의 증세를 듣더니 약간 반신반의한 얼굴로 갸웃거렸고, 몇 가지 검사를 했다. 그 이후 호가의 얼굴과, 그의 검사 결과를 번갈아보던 의사는 얼굴에 약한 웃음을 띠었다. 그게 호가의 눈엔 비웃음과 비슷하게 보였다. 


“부작용이 아니라, 아주 정상적인 신체 반응입니다. 당연히 임신이죠.”


호가는 그의 웃음에 항의하려던 것을 새카맣게 까먹었다.


의사는 턱을 괸 채, 호가가 언제쯤 말을 할 것인지 기다렸다. 호가는 두어 차례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그의 입이 불현 듯 열린다.


“왜요?”


호가의 순진하기까지 한 멍한 얼굴이 의사의 장난기를 건드린다. 길가다 황새를 만난 적 있으신가요? 하지만 그는 전문과정을 이수한 전문가였고, 직업에 사명감을 가진 프로페셔널이었다. 그는 의료계 종사자가 할 수 있을 가장 적절한 답을 내놓았다.


“글쎄요, 환자분 성생활이라면 저보다야 본인이 더 잘 알고 계실 테고.”


의사는 어깨를 으쓱하더니 산뜻한 목소리로 말했다. 호가는 여전히 눈을 깜빡거린 채였다. 


“2주 정도 되셨습니다. 남성 오메가의 경우 보통 일반 임신보다 좀 더 빠르게 진행되니까 일반적인 1달 정도 과정이라고 보시면 될 거 같군요. 가슴이 아프고 속이 역한 기운은 지금 그 시기에 겪을 수 있는 정상적인 반응이니까 걱정 안하셔도 될 거 같고,”


여전히 호가는 고장 난 채로 앉아있었고, 그런 호가를 앞에 둔 채 흥얼거리듯 말하는 의사는 어쩐지 신이 난 기세였다.


“입덧이야 개인차가 있겠지만 심할 경우는 물도 드시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래도 영양섭취에 신경 쓰셔야 하고, 특히 엽산과 단백질은 따로 영양제를 챙겨 드시는 게 좋겠군요. 남성 오메가이시기 때문에 검사는 다른 분들보다 자주 오셔야 합니다. 나이도 있으시니……최소 2주에 한 번씩은 방문하셔야 하고요. 특히 이 시기에 조심하셔야-”

“아니 잠깐, 잠깐만!”


흡사 물에 빠진 사람처럼 호가는 손을 허우적거려 그의 말을 막았다. 실제로 의사의 이야기에 익사할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호가는 입을 뻐끔거리다, 순간 가슴이 답답해 두드렸다. 임신이 아니라 공황장애 같은데.


패닉에 빠져 어쩔 줄을 모르는 호가의 모습을 의사는 말없이 바라보았다. 전에도 그랬지만 이 환자 양반은 보는 재미가 있네, 은근히.


간신히 제 정신을 차린(사실 제정신이라 하기에도 의문스럽지만 말을 할 준비는 된) 호가는 이마를 짚었다. 손등이 파랗게 떨리고 있었다.


“임신이라고요.”

“아, 축하드립니다.”

“그게 아니잖아!”


깜빡했다는 듯 말하는 의사의 말에 그럴 때가 아님에도 호가는 왈칵 성질을 냈다. 그리고는 이내 공황장애 증세가 다시 찾아온 듯 손발을 벌벌 떨었다. 


“임신이라니 왜 대체……주기가 아닐 때도 약은 꼬박꼬박 챙겨먹었다고요. 선생님이 그때.”

“말했지요, 제가. 환자분의 불안정한 호르몬을 치료하고 주기를 규칙적으로 유지하기 위해 약을 먹어야 한다고. 밸런스가 안정적으로 잡힌 상태에서, 알파와 꾸준한 관계를 가질 시 무슨 일이 벌어지겠습니까. 자연스러운 도출이죠.”


호가는 하얗게 질렸다가, 눈을 질끈 감았다. 눈앞이 캄캄했다. 꼭 제 미래 같았다. 


파랗게 질렸다가 허옇게 떴다고 노랗게 바래는 호가의 안색은 구경하는 입장에서 심심하지 않은 재미였다. 호가의 입장에서야 청천벽력도 이런 청천벽력이 없겠지만, 그로 따지면 지금 그가 앉아있는 의자에서 울고불고 통곡하는 이들만 수십 수천이었다. 


경험의 누적은 사람이 가질 수 있는 강력한 방패 중 하나였고, 가끔은 다른 이들의 눈에 꽤 냉정하고 인정머리 없게끔 보이게도 했지만 어쩌겠는가. 오늘만 해도 의사를 지나친 산모만 열둘이었다.


의사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래도 의사로서 기쁘네요.”

“뭐라고요?”

“가장 좋은 치료방법은 알파와의 관계라고 했는데, 환자분이 이렇게 훌륭하게 완치해 오실 줄은 꿈에도 몰랐거든요.”


특히 그 쪽은 꽤 타입이……딱딱해 보여서 최소 십 년 동안 약만 타 가실 거라고 생각했는데. 물론 뒷말은 속으로만 생각한 바였다. 호가 입장에서야 앞의 말만으로도 의사 살해 동기로는 충분했다.  


능글거리며 거북한 농담을 던지는 의사에게 호가가 본격적으로 인상을 썼다.


“이보세요, 지금 남의 일이라고-”

“남의 일이니까 이렇게 말하죠. 제 일이 아닌데. 하지만 환자분은 본인 일이시니 그렇게 멍 때리고 부정해봤자 시간 낭비라 이 말씀입니다. 받아들이세요. 환자분이 헤맬 동안에도 애는 자라고 있으니까요.”


사정없는 돌직구로 호가를 자살 직전으로 몰아세운 후 의사는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이 연타를 날렸다. 


“혹시 데이트 강간당하셨습니까?”

“뭐요?”

“아니면 어떤 강제적인 관계로 인한 사고로-”

“아니, 아니아니아니!”


호가는 손을 내저으며 그의 말을 황급히 막았다. 


“대체 얼마나 상상력이 풍부하면 그런 소리를 대뜸 내뱉은 거예요?”

“환자분이 제 입장이 되어보는 상상만 하셔도 이 질문이 부적절하지 않다는 걸 금방 깨달으실 텐데요. 그래서 애를 지우실 겁니까?”


호가는 정말 놀랐다. 거의 급소를 가격당한 기분이었다. 그는 입을 딱 벌렸다 


“내, 내가 언제……?!”

“그럼 낳으실 겁니까?”


벌어진 입이 도로 다물린다. 그 말에 선뜻 대답할 수 없는 자신이, 호가에겐 조금 전과는 전혀 다른 충격이었다. 의사는 미적지근한 얼굴로 차트를 바라보며 말했다.


“법적으로 허용되는 낙태 기간은 석 달 안입니다. 상대 분과 상의한 후 결정하세요.”


그는 호가 쪽을 흘깃 바라보며 덧붙였다. 산모수첩은 그때 드려도 되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