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잠시만요.

-아, 호 경독님. 제가 지금 급하게 출동해야 하는데, 이따 얘기하시면 안되겠습니까?

-.......아....그럼....조심...하십시오....

 

한 달 넘게 쫓고 있던 범인의 차량이 인근 고속도로 CCTV 화면에 잡혔다는 소식에 서둘러 겉옷을 챙겨들고 사무실을 나설 때였다. 서류철에 온통 시선을 빼앗긴 채 맞은편 복도에서 걸어오고 있던 그와 눈이 마주쳤다. 가볍게 눈인사를 하며 고개를 끄덕이고 계단을 내려가려는 순간, 저를 붙잡는 나지막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려 쳐다봤더니, 무언가 보이지 않는 것을 헤아리는 듯한 시선으로 생각에 빠져드는 것이 보였다. 평소 같았으면 그가 다시 말을 꺼낼 때까지 느긋하게 기다려주었을 테지만, 범인의 도주 경로를 차단하고 신변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한시가 급한 상황이었다. 서두르는 기색으로 그의 생각을 끊어내듯 급하게 말을 꺼내는 저를 보며 잠시 망설이다가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이고는 돌아섰다. 계단을 뛰어내려가며 슬쩍 올려다 본 시선 끝에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소매 자락을 쓸어내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무언가 불안하거나 걱정스러운 것이 있을 때면 절로 나오는 그의 오래된 습관이었다. 무슨 말을 하려던 걸까, 생각하면서도 걸음을 멈출 수는 없었다.

 

예상 가능한 도주 경로를 모두 막고 빠르게 검문을 실시한 덕분에 범죄에 사용된 차량을 확보하는 데는 성공했으나, 운전자는 범인이 아닌 차량 탁송을 의뢰받은 대행업체 기사인 것으로 밝혀졌다. 현장을 대충 수습하고 허탈한 마음에 담배에 불을 붙이고 깊게 한 모금을 빨아들였다. 허공으로 흩어지는 연기를 멀거니 바라보다 습관처럼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화면을 켰다. 선이 고운 옆모습이 담겨있는 실루엣 사진을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애틋해서 조심스런 손길로 화면을 쓸어내렸다. 오랜 시간을 돌고 돌아 마침내 제 곁으로 다시 돌아온, 그러나 그 무엇도 기억하지 못한 채 그저 맑고 투명한 시선으로 저를 담아내는, 그의 말간 얼굴이 보고 싶었다. 일순 타는 목마름이 일어 급하게 담배 연기를 들이마시고 채 반도 타지 않은 꽁초를 비벼 껐다. 그가 그곳에 있다는 것을, 자신의 가까운 곳에 있다는 것을 당장 제 두 눈으로 확인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가 없을 것만 같았다. 서둘러 차를 몰고 공안부로 향했다. 지난 번에 외사국 이 경원이 디저트가 맛있다고 했던 곳이 어디였지, 기억을 더듬으면서 늘 그가 손에 쥐고 있는 커피브랜드의 로고를 떠올렸다.     

  

양 손 가득 커피와 디저트를 사들고 돌아가자, 출출한데 잘 됐다며 맛있게 잘 먹겠다고 호들갑을 떨며 좋아하는 목소리들이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마주 인사하듯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 커피 두 잔과 머핀 하나를 챙겨들고 그의 책상으로 다가갔다. 서류철을 꼼꼼하게 읽는 동시에 쉴 새 없이 펜을 움직이며 무언가를 적어 내려가다가 제 기척을 느꼈는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올려다보았다. 제가 내민 커피잔을 바라보다가 티타임, 어때요? 묻는 말에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감사합니다, 속삭이듯 말했다. 행여 손가락이라도 닿을까 조심스럽게 커피잔 끝을 겨우 잡는 모습에 마음이 울컥한 것도 잠시, 단정하게 커피 한 모금을 마시고, 향이 좋네요, 말하며 살며시 눈가를 접고 웃는 새하얀 얼굴에 어느새 표정이 스르륵 풀어지고 말았다. 

 

오른쪽 눈가를 덮고 있는 짙은 흉터와 장갑 아래 감추고 있을 고운 두 손. 제가 없는 곳에서, 그 시간들 속에서 홀로 대체 무슨 일을 겪었기에, 그는 이리도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돌아온 것일까. 말없이 그저 바라보기만 하는 제 깊어진 눈길에 그는 할 말을 고르듯 입술을 달싹이다가 끝내 시선을 돌리고 고요하게 커피잔만 쓸어내렸다. 아까 저한테 하시려던 말씀이 있었던 것 같은데, 무슨 일입니까? 묻는 제 목소리에 그제서야 다시 저를 올려다보았다. 오늘 저녁에 시간 괜찮으십니까? 드릴 말씀이 있는데, 라고 답하는 목소리에, 지금 여기서는 곤란한 이야기인가 보죠? 물었더니, 슬쩍 사무실 안을 둘러보고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먼저 저에게 시간을 내달라고 청하는 것이 의아하긴 했지만, 그가 이 도시로 돌아오고 처음으로 단 둘이 마주앉아 밥을 먹는다는 생각에 가슴 한켠이 두근거렸다.

 

오후 업무를 마무리하고 사무실로 돌아왔을 때 그는 자리에 없었다. 벽시계를 보며 퇴근 시간이 지났는데 어디로 간거지 생각하는데 마침 휴대폰 진동이 울렸다. 그가 보낸 문자에는 근처 일식집 상호명이 찍혀있었다. 같이 퇴근하는 모습을 누구에게도 보이고 싶지 않았을 그 칼같은 성격에 씁쓸한 미소가 새어나왔다. 한 팀에서 일하는 사람들끼리 같이 퇴근을 하거나 밥을 먹거나 술잔을 기울이는 것이 무슨 대수라고 이렇게까지 하는 것일까 마음이 아팠다. 그는 어린 시절에도, 그리고 지금도 스스로를 고립시키는 방법에 도가 튼 사람이었다. 누구의 손길도 원치 않고, 허락하지 않는, 단단한 성벽에 둘러쌓인 채 홀로 부유하는 섬 같은 그.

 

오랜만이라며 반갑게 인사하는 주방장에게 손을 들어 인사하고, 얼마 전에 새로 부임하셨다는 경독님인가보죠? 정말 젊고 잘생기셨던데, 능력까지 있으신가봐요? 묻는 홀매니저의 호기심어린 목소리에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더니, 요즘은 경찰도 얼굴이 스펙이에요? 모델이 걸어 들어오는 줄 알았다니까요, 감탄하듯 내뱉는 말에 피식 웃고 말았다. 립서비스만 그렇게 하지 말고, 우리 경독님 맛있고 몸에 좋은 걸로만 잘 챙겨줘요, 작게 부탁하자, 무슨 당연한 말씀을 그렇게 굳이 입 아프게 하세요, 톡 쏘아붙이듯 말하고는 웃으며 멀어져갔다. 똑똑-문을 두드리고 방으로 들어가자, 창가에 서서 야경을 바라보고 있었는지 특유의 처연하고 고독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가냘픈 뒷모습이 보였고, 두 어깨에 내려앉은 삶의 무게가 버거워보여 심장을 베인 것처럼 가슴 한 켠이 아파왔다. 몸을 돌려 저를 바라보는 시선이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지금으로부터 세 달 전, 새로 부임한다는 경독은 부임 전부터 숱한 소문과 호기심을 자아내는 이야기 속의 주인공이었다. 미국에서 법의학과 범죄심리학을 전공하고, 모 대학의 종신교수직에 올랐으며, 인터폴과 미정부의 자문의원으로 활약하다 중국 정부의 초청으로 일시 귀국한다는 채 서른이 되지 않은 나이의 1급 경독. 말단에서 시작한 베테랑 경찰들이 십 여년을 노력해도 오르기 힘든 자리였지만, 그가 직함이나 직급은 별 상관없다며 다 거절했던 까닭에 공안부 수뇌부들도 그의 거취를 두고 꽤 쩔쩔매며 고심한 모양이었다. 철저한 상명하복의 위계질서로 이루어진 공안부 관료조직 안에서 원활한 수사 지휘를 위해서는 그에 걸맞는 직급이 필요한 법이라는 설득 끝에 그도 결국은 경독 자리를 수락할 수밖에 없었다고 전하는 부처장님의 얼굴에 낭패감이 가득했다. 자신보다 한참은 어린, 직속 상관의 부임이 달갑지만은 않은 것이 분명했다. 부임 첫 날, 예상했던 것과 달리 훤칠한 키와 새하얗고 고운 얼굴, 부드러운 눈매와 듣기 좋은 목소리로 인사하는 새로운 인물의 등장에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이가 가슴 설레어하며 훈훈하고 따뜻한 미래를 잠시나마 머릿속에 그렸을 것이었다. 그러나 첫 수사 회의에서부터 거칠 것 없이 쏟아내는 그의 날카로운 독설에 모두가 정신 못차리고 단번에 나가떨어지고 말았었다. 

 

말없는 평소의 그는 고요하고 나긋나긋한 인상을 주었지만, 사건과 수사에 관해서만은 거침이 없었다. 수사만으로도 벅찬 업무량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서류 작업 하나하나 소홀히 하지 말고 꼼꼼하고 신중하게 작성하라는 지시가 내려졌고, 사건 분석과 조사, 회의의 반복 속에서 휘몰아치는 일거리에 하나 둘 투덜거리며 불만을 토로하기 시작했다. 처음부터 성과 올리기에 급급해서 아랫사람들 사정은 생각도 안하고 너무 몰아부친다는 반발감과 대체 얼마나 일 잘하는지 어디 한 번 두고 보자는 시기어린 불신의 시선들은, 정체되고 미뤄졌던 미제 사건들이 빠르게 해결되고 정리되어가는 동안 저절로 경외심 가득한 놀라움으로 바뀌어갔다. 가장 먼저 출근하고 가장 나중에 퇴근하면서도 언제나 흐트러짐 없이 반듯한 모습과 누구보다 엄청난 업무량을 놀라운 속도로 처리한다는 것을 깨달은 후로 그 누구도 그의 지시에 토를 달지 않았다. 사사로운 감정도, 권력의 개입도 없이, 사건 내용을 파악하고, 용의자를 프로파일링하고 수사를 지휘하는 솜씨는 감탄을 자아낼 정도였고, 부임 두 달 만에 그는 공안부 특별수사국 전체를 완벽하고 완전하게 장악했다. 

 

그러는 사이 몇 년만에 살인범을 잡았다는 소식에 달려온 어느 유가족의 감사 인사에, 어머니 옆에 서서 눈물 흘리는 어린 아이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너무 늦어 미안하다고 진심어린 사과를 하고, 눈물을 닦아주었다는 일화는 도시전설처럼 공안부 전체를 한바탕 휩쓸고 지나갔다. 텅 빈 복도에 조용하게 울려퍼지던 아이를 달래는 호 경독님의 다정한 목소리와 환한 미소에 반할 수밖에 없었다고 고백하는 정찰국 윤 경원의 말은, 편하게 말 한 번 붙이기도 무서울 만큼 찬바람이 쌩쌩 도는 냉미남인 호 경독에게 그런 다정한 면모가 있을 리 없다는 의혹과, 어쩌면 차가운 얼굴 아래 사실은 굉장히 부드럽고 따뜻한 심성을 감추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호기심을 동시에 불러일으켰다. 

 

그는 늘 장갑을 끼고 있었는데, 그보다 높은 직급의 간부들과 악수를 할 때조차 벗지 않아서 작은 파문을 일으키기도 했었다. 물론 그 부분에 대해서 사전에 얘기된 바가 있었던지 그것을 두고 예의가 없다며 지적하거나 그 일 자체를 화제에 올리는 지도부는 없었다. 다만 마치 처음부터 그렇게 태어난 것처럼 언제 어느 때나 장갑을 낀 손에 사람들은 호기심을 느꼈다. 오른쪽 눈가의 깊게 파인 흉터 덕분에, 손에도 보기 싫은 심한 흉터가 남아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겠냐는 것이 제일 유력한 가설로 설득력을 얻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스스로에 대해 설명하거나 해명하는 법이 없었고, 어떤 오해와 의심도 관심없다는 듯 초연했다. 환영식을 위해 마련한 첫 회식 자리에서마저 자신이 있으면 더 불편하고 분위기가 가라앉을 거라며 첫 잔을 겨우 비우고 카드만 맡겨둔 채 금방 돌아간 까닭에 주인공없는 환영식을 치룰 수밖에 없었고, 사사로이 누군가와 함께 밥을 먹거나 개인적인 이야기를 나누는 법도 없었다. 모두가 그를 궁금해하고 알고 싶어했지만, 사건과 관련된 것이 아니면 입을 여는 일 자체가 거의 없다는 것이 보다 정확한 표현일 것이었다. 

 

그랬던 그가 부임 석 달만에 저와 마주앉아 함께 저녁을 먹고 있는 것이었다. 반듯한 자세로 앉아 차례차례 나오는 음식을 맛보는 모습은 아주 오래전 그 날처럼 변함없이 단정하고 우아했다. 다만 변한 것이 있다면 그가 굉장히 천천히 조심스럽게 젓가락질을 한다는 것이었다. 식사는 입에 맞으신가요? 라는 제 물음에, 다른 생각에 빠져있었다는 듯 움찔하다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정갈하고 담백하니 맛이 좋네요, 라고 말하고는 조용히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냅킨으로 입가를 정리하고 찻잔을 쥐는 손에 시선을 두었더니, 그가 마침내 입을 열기로 결심한 듯 자세를 고쳐 앉고 제 두 눈을 직시하였다. 심연의 바다처럼 깊고 맑은 두 눈 가득 오롯이 저만을 담아내고 있었다. 아주 오래전 그 때처럼.

 

-근 경사님.

-네, 말씀하십시오.

-경사님은 알고 계신거죠?

-무엇을 말입니까?

-제 손, 아니 정확히는 그 손이 하는 일 말입니다. 총경감님께 들으셨겠지요?

-....아....네...

-그래서 많이 불편해 하셨던 겁니까?

-네...? 그게 무슨....?

-아무래도 저 때문에 집에 못 들어가셨던 것 같아서요. 

-아, 그건, 

-제가 너무 염치없이 생각보다 오래 신세를 졌죠? 총경감님 부탁이라 거절하기 어려우셨을 텐데, 일이 바쁘다는 핑계로 미처 신경을 못쓰고 있었습니다. 죄송하고, 또 감사했습니다. 경사님 덕분에 편히 잘 지낼 수 있었습니다.

-갑자기 무슨 말씀이신지...?

-살 곳, 구했습니다. 그러니 이젠 경사님도 편히 댁에 가서 쉬십시오. 고된 직업인데, 잠이라도 편하게 주무셔야지요. 

 

 

 

특별수사국에 새로운 경독이 부임할 거라는 소문이 돌고 얼마 후, 총경감님이 직접 저를 호출한 적이 있었다. 미국에서 온다는 경독에게 집을 구해줘야 하는데, 그것이 꽤나 까다롭고 벅찬 일이라고 했다. 누군가 살았던 곳은 안된다는 단 하나의 조건을 달았다는 말에, 결벽증이 심한 사람인가보다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있는데 놀랍게도 총경감님은, 자네 아직도 그 큰 집에 혼자 산다며? 당분간 그 집에서 함께 머물면 안되겠나? 묻는 바람에 잠시 얼빠진 얼굴을 했었더랬다. 네? 누가 살았던 집은 안된다면서, 살고 있는 집은 괜찮답니까? 저희집은 사람이 살기에는 적합하지 않을텐데요? 물었더니, 평소에 자네는 아무 생각 없이 살지 않나? 그러니까 딱이지, 라며 뜻 모를 소리를 진지하게 하는 바람에 피식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지만, 언제까지요? 그리고 과연 그 사람이 괜찮다고 할까요? 물었을 때는, 당분간 집을 구할 때까지만 부탁함세, 아마도 그는 괜찮다고 할 거야, 라고 웃으며 대답했다. 미국에서 살았다면 차라리 호텔이나 단기 렌트하우스가 혼자 지내기 편하지 않을까 의아하게 생각했던 제 궁금증은, 그의 얼굴을 마주한 순간 저절로 풀리고 말았다. 그는 누군가 머물던 장소에서 편히 쉴 수도 잠들 수도 없는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 공간에, 사물에 깃들어있는 상념들은 그에게 온전한 휴식을 허락하는 법이 없었다. 

 

그는 여러가지 의미로 참으로 놀라운 하우스메이트였다. 좋게 말하면 깔끔하고, 있는 그대로 말하면 대체 사람 사는 곳이 맞느냐는 말을 들을 만큼 황량하고 텅 비어있어서 스탠드 하나만 새로 사다놔도 눈에 확 띄는 제 집에서조차 그는 그 어떤 존재감도 드러내지 않았다. 커다란 침대 하나와 빈 옷장만 덩그라니 있던 작은 방에 그가 첫 날 들고 온 캐리어마저 자리하고 있지 않았더라면, 그가 정말 제 집에 살고 있는 게 맞는지조차 알 수 없을 정도로 흔적을 남기는 법이 없었다. 평소 출퇴근도, 수면 시간도 불규칙적인 생활에 익숙해져서 집에 들어가는 일이 드물기도 했지만, 어쩌다 여유가 생겨도 집에 그가 있다는 생각을 하면 어쩐지 쉽게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던 것도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건 그가 불편해서라기 보다는 그가 제 집에서만이라도, 잠시라도, 편히 잠들고 쉴 수 있길 바라는 마음이, 그의 얼굴을 보고 싶다는 마음보다 간절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대충 시간이 나면 숙직실에서 잠을 자고, 틈이 날 때 집에 들려서 옷을 갈아입고 나왔다. 

 

그렇게 석 달이란 시간을 보내는 동안, 그와 저가 사실은 한 집에서 살고 있다는 것 자체를 잊은 적도 있었다. 잠복 근무를 마치고 옷을 갈아입을 요량으로 집에 들렸던 어느 이른 아침, 막 욕실에서 나오며 수건으로 머리를 털어내고 있는 그와 마주쳤을 때, 순간적으로 그가 왜 자신의 집에 있나 궁금해 했을 정도로 아무 생각이 없기도 했었다. 그런데 그는 아마도 그런 저를 오해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자신때문에 불편해서 일부러 집에 들어가지 않았다고 생각하고, 미안해 하고 있었다. 아니라고, 사실은 언제까지라도 그 집에 머물러도 된다고, 그러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을 지경이라고 말해주려고 했는데, 그의 말이 더 빨랐다.

 

-알고 계시는 줄 알았더라면 처음부터 미리 말씀 드릴 걸 그랬습니다. 보통의 경우 스치는 것만으로 마음을 읽거나, 생각을 훔쳐보는 것은 아니고, 직접 닿은 상태에서 나름 집중을 해야 가능합니다. 그렇게 경계하고 불편해하지 않으셔도 됐는데, 여러모로 죄송하게 됐습니다. 

-경독님,

-이렇게 표현하는게 적절한지는 모르겠지만, 전염병처럼 옮는 것도 아니고, 무턱대고 누군가의 머릿속을 들여다 보는 것도 아니니, 너무 기분 나쁘게는 생각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제가 경사님 댁에 머물면서 반복적으로 현관문을 열고 닫는 동안 저절로 읽게 된 유일한 감정은 깊고 오래된 그리움, 그것뿐이었습니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경사님 생각을 읽으려고 시도한 적도 없고, 앞으로도 그러지 않을 겁니다. 싸가지 없고 무례하다는 말을 듣기도 하는 저이지만, 함께 일하는 동료들에게 그런 짓을 할 만큼 막돼먹은 인간은 아니거든요. 아무튼 경사님 댁에 머무는 동안 정말 진심으로 감사했습니다. 마치 제 집처럼 편안하고 포근한 느낌이라, 몇 년만에 마음 놓고 편히 잠들었을 정도로요. 그리고 경사님이 저 모르게 뒤에서 많이 도와주시고 조율해주신 것 알고 있습니다. 덕분에 공안부 업무에도 빠르게 적응했고, 수사도 수월하게 진행할 수 있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언제까지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함께 일하는 동안 잘 부탁드립니다.

 

깍듯하게 고개 숙여 인사하고 부드럽게 미소짓는 얼굴을 마주하면서 저 단단한 가면 아래 숨기고 있는 상처받은 그의 연약한 영혼이 제게는 보이는 것만 같아 마음이 아팠다. 모진 말과 오해에 익숙해지고 사과하는 것이 자연스러워질 동안, 혼자서 얼마나 서럽고 아팠을까, 생각만으로도 손 끝에 바늘을 하나씩 쑤셔 넣는 것과 같은 고통이 찾아들었고, 가슴이 울컥해져서 앞에 놓인 술잔을 단숨에 털어 넣을 수밖에 없었다. 뜨거워지는 두 눈과 괴로운 마음을 애써 갈무리하며 시선을 들었을 때, 할 말이 다 끝났다는 듯 고개를 돌리고 창 밖, 먼 어딘가를 바라보는 듯한 쓸쓸한 그 옆모습 위로, 스스로가 가진 능력을 저주라고 표현하며 자조적으로 웃던 열 세 살의 어린 그를 처음 만났던 날의 풍경이 떠올랐다.    

 

 

 

-....제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세요....?

-음, 그렇다기 보다는.....

-제 진술이 과학적 근거가 없기 때문에 신뢰하지 않으신다는 건가요...?    

-저기 학생, 아무래도 우리 입장에서는,

-제 말을 믿든 안 믿든, 속는 셈 치고 한 번쯤은 직접 가서 확인해 보실 수는 있는 거잖아요? 이 일이 그 정도 가치도 없다고 생각하시는 거예요?

-있지, 뉴스에서 봤는지 모르겠지만, 지금 연쇄 살인 사건때문에 모든 경찰들이 눈코 뜰새없이 바쁘고 정신없어. 그래서 지금 고양이 손이라도 빌리고 싶은 심정들이라고. 그런데 가까운 곳도 아니고, 차로 2시간 거리에 있는 곳까지 가서 순찰을 돌기에는,  

-제가 착각을 했어요. 어리다고 무시하지 않고, 진지하게 이야기를 들어줄 경찰이 단 한 명은 있을 줄 알았는데. 죄송합니다, 쓸데없이 괜한 시간을 빼앗았군요. 참, 이대로라면 아마 그 연쇄 살인범은 잡히지 않을 거예요. 제가 이곳에 와서 같은 이야기를 네 번 반복하는 동안, 경찰들이 단서 하나 못찾고 정신없이 헤매는 사이에, 또 다른 누군가를 죽이고 증거 하나 남기지 않은 채 이 도시를 떠날 테니까요.

    

합동 수사 회의 준비를 위한 자료를 두 손 가득 뽑아들고 커피가 든 종이컵을 입술 끝으로 물며 겨우 자리로 돌아와 앉았을 때, 맞은 편 책상 너머로 난감해하는 유 경원의 목소리와, 아이답지 않게 차갑고 똑부러지는 말투로 독설을 서슴치 않는 여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상황을 보아하니 여러 명의 경찰을 거쳐, 말단인 유 경원에게 아이가 떠맡겨진 모양이었다. 바쁜 시기에 안됐다고 혀를 차며 엉망으로 쌓여있는 서류철 더미 위에 수사 자료를 올려두고 무심코 커피를 한 모금 마셨을 때 연쇄 살인범을 잡을 수 없을 거라고 말하는 서늘하기 그지없는 말투에 순간 소름이 돋았다. 확신에 찬 말투, 단호하기까지 한 그 차가운 목소리에 가슴 한 켠이 싸늘해졌고, 저도 모르게 자리에서 일어나 유 경원 쪽으로 다가갔다. 무슨 일이냐고 눈짓으로 묻는 저를 올려다보며 한껏 난감해하는 유 경원에게 제가 맡겠다고 말하며 어깨를 두드렸더니, 그제서야 겨우 살았다는 표정으로 두 손을 모으며 감사 인사를 하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빠른 걸음으로 도망치듯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그 뒷모습을 말없이 바라보다 고개를 돌렸을 때, 자리에서 일어나 가방을 챙겨드는 아이의 모습이 보였다. 

 

-왜? 어디 가려고?

-집이요.

-난 이제 왔는데?

-3시간 동안 네 명의 경찰, 경찰 입장에서는 아마도 어린 민원인에게 충분히 성의를 보였다고 생각하고 만족하시겠죠. 더는 서로 시간 낭비 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네요.

-이왕 시간 낭비한 거 한 번 더 시도해보지 않을래?

-왜 그래야 하죠?

-굳이 택시를 잡아 타고 가깝지 않은 이곳까지 직접 와서, 3시간 동안 무언가를 설명하고자 애썼다는 것은, 누군가를 지키고 싶다거나, 도움을 주고 싶다는 선의를 갖고 있다는 거니까. 속는 셈 치고, 한 번 더 진술해주지 않겠어요, 어린 민원인님?

-....어떻게 아셨어요....?

-교복 셔츠에 있는 뱃지, 그곳에서 이곳까지 자동차로 최소 40분, 버스나 지하철을 이용했다면 1시간 반 이상은 걸렸을 텐데, 이곳에 3시간 정도 있었다고 했지? 지금 7시가 다 되어가고 있으니까, 4시 경에 도착했다는 거고, 3시에 수업을 마치고 택시를 잡아타고 바로 왔다면 그쯤이 아닐까 싶어서. 학교를 땡땡이 치지 않았다고 짐작한 건, 손에 들고 있는 스케쥴러대로라면 마지막 수업이 레슨이었을텐데, 그 피아노 레슨을 좋아하는 것 같으니까. 피아노라고 생각한 건, 말을 하는 동안 습관적으로 손가락을 두드리는 모양이 건반타법 같아서이고, 그 동작이 정확한 박자로 쪼개져 있기 때문. 참, 너 말할 때도 템포 일정하게 쉼표를 넣는다는 거 알고 있어? 

-.....제 생각을 정정해야겠군요. 이곳의 모두가 한심한 멍청이는 아니었네요.

-테스트는 통과한 것 같으니, 함께 저녁 먹으면서 이야기를 들려주지 않을래? 너나 나나 어차피 저녁은 먹어야 하고, 시간도 아낄겸. 참, 내 이름은 근동, 그냥 편하게 아저씨라고 불러.

 

창백하게 보이기까지 하는 새하얀 얼굴의 아이는 흔들림없는 시선으로 저를 올려다보며 잠시 생각을 하는가 싶더니 이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뭐 먹고 싶은 거 없냐는 물음에 대충, 아무거나요, 라며 성의없게 대답하고는 앞장서서 걷는 뒷모습이 제법 살쌀맞아 보여 피식 웃음이 났다. 빳빳하게 다림질된 새하얀 셔츠깃 아래로 언뜻 언뜻 보이는 가냘픈 목덜미와 교복 반바지 아래로 늘씬하게 뻗은 두 다리와 발 사이즈보다 더 커보이는 까만 단화, 명문 사립 학교의 뱃지가 아니었더라도 명문가 막내 도련님같은 인상을 주는 단정한 차림새와 똑부러지는 말투가 보통의 아이는 아니라는 인상을 주었지만, 평범한 샌드위치를 베어무는 동작마저도 한없이 우아하고 기품있어 보여 절로 감탄사가 나왔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아이가 담담하게 꺼내놓는 이야기가 너무 놀라워서 잠시 할 말을 잃었을 정도였다. 

 

아이는 A시 국립공원의 숲 어딘가에 어린 여자아이의 유품이 묻혀있고, 그것이 사건의 중요한 증거물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허무맹랑한 장난이라고 치부하기에는 이야기를 하는 아이의 표정이 지나치게 진지하고 차분했기에 말을 다 끝마칠 때까지 그저 잠자코 듣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걸 어떻게 알았니? 조심스럽게 묻는 제 말에 잠시 망설이던 아이가, 거짓말처럼 들리시겠지만 레슨을 받다말고 그냥 문득 떠올랐어요, 그곳에 가야한다고, 그래서 범인을 잡아야 한다고, 마치 제가 그곳에 가본 적이 있는 것처럼 아주 선명하게 보였죠, 말하고는, 어차피 믿지 못하실 거라는 거 알아요, 스치듯 덧붙이며 빨대로 콜라에 남아있는 얼음을 휘이휘이 저었다. 몸에 벤 체념과 한숨에 어쩐지 제 마음이 더 안타깝고 답답해졌다. 

 

-혹시 이런 일이 자주 있어?

-....가끔, 어떨 땐 자주, 특별한 주기가 있는 건 아니에요.

-언제부터인지 물어봐도 될까?

-글쎄요, 정확하게 제가 인식하고 받아들이기 시작한 건 아마 다섯 살 무렵일 거예요. 그 전까지는 부모님이 녹화해두신 영상으로 그런 일이 있었나보다 짐작하는 정도이고, 그때부터는 제가 직접 기록을 남겼거든요. 

-많이 괴롭지는 않았니?

-...................

-보통의 사람들과 달리 누군가의 불행이나 슬픔을 혼자 먼저 알게 되다니, 그동안 많이 아프고 힘들었겠구나.

-....아저씨도 보통의 사람들과는 다른가 봐요...

-왜? 어떤 면이?

-......저한테 이런 말을 해주는 사람은 처음이거든요. 어쩌다 제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은 하나같이 거짓말쟁이라고 몰아부치거나, 괴물이라고 손가락질 하거나, 자기 미래도 한 번 맞춰보지 않겠냐고 비아냥 거리거나. 뭐 보통의 반응은 그래요. 힘들지 않았느냐고 상냥하게 말하는 사람은 아저씨가 처음이에요.

-그래서, 피아노만 곁에 두기로 한 거야? 음악에서 위안을 찾은 건가?

-....그냥,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아도 되는 것들이 필요했어요. 한 때는 책 속에 파묻혔는데, 그럴 때면 몇 날 며칠이고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책에 빠져있으니까, 부모님이 많이 속상해 하셨어요. 그래서 타협점을 찾은 게 피아노였죠. 어머니가 제가 연주하는 피아노 소리를 참 많이 좋아하셨거든요. 그때만은 그냥 피아노를 조금 잘 치는 평범한 어린 아이처럼 보였을 테니까, 잠시나마 마음이 놓이셨던 거겠죠.

 

열 셋. 그저 아무 생각없이 뛰어놀기에도 부족한 어린 나이에 너무 일찍 세상을 알아버린 아이는 스스로를 고립시키면서도 가족을 지키기 위해 타협점을 찾았노라 담담하게 말했다. 아이는 말을 배운 후로 어찌된 일인지 경험한 적도 없는 일들을 제 기억처럼 구체적으로 말하곤 했었는데, 아이의 부모는 아이가 하는 말을 비디오 카메라로 녹화하며 어떤 규칙성을 찾아내려 애썼다고 했다. 그것이 사물에 남아있는 잔상을 읽은 것이거나 미래의 어떤 사건을 말하는 것이라는 것을 나중에서야 깨달았다고 했다. 아이는 거짓말쟁이로 몰리거나, 손가락질 받아도 태연한 척 했으나, 상처 받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부모는 특별한 능력을 갖고 있는 만큼 한없이 예민하고 섬세한 아이를 지키기 위해 아이가 학교에 들어갈 나이가 되었을 때 살던 곳을 떠나 이 도시에 정착했다고 했다. 어느 날 아이는 제 부모가 낯선 이의 칼날에 목숨을 잃는 장면을 머릿속에 떠올렸지만, 그것이 그저 제 상상인지 정말로 일어날 미래의 일인지 알 수 없었고, 쉽게 털어놓을 수도, 그렇다고 마냥 숨길 수도 없어 고민했었다고 했다. 아이의 고민을 눈치 챈 부모가 아이를 달래 그 이야기를 모두 듣고는, 빙그레 웃어주었다고 했다.

 

-설령 정말 그런 일이 벌어진다 해도 괜찮단다. 너의 솔직함이, 너의 능력이 우리의 마지막을 준비할 시간을 벌어준 것이 아니겠니? 마지막인 줄도 모르고 헤어진 채 생을 달리하는 사람들도 많을 텐데, 이 얼마나 복받은 일이야. 그러니 슬퍼하기 보다는 감사하자. 너를 남겨두고 떠난다는 것만이 마음 아프고 괴로울 뿐, 죽음은 두렵지 않단다. 그리고 그것이 그저 꿈으로 그친다해도 그 또한 나쁘지 않겠지. 살아있는 매 순간 순간을 감사하며 서로 사랑하고 아끼면서 함께 할 수 있을 테니 말야. 가끔은 너의 비범함이 너를 힘들게 하는 것 같아 미안하고, 또 이런 능력을 주신 하늘이 원망스럽기도 하지만, 네가 우리에게 와주어 얼마나 행복한지 모른단다. 그러니 너는, 네가 옳다고 생각하는 대로, 너의 방식대로 바르게 살아가면 돼.  

 

그로부터 일 년 후쯤, 아이가 열 살이 되던 해의 여름, 아이가 콩쿨 준비를 위한 레슨을 받고 있을 때, 아이의 부모는 대형 쇼핑몰에 갔다가 인질극에 휩쓸렸고, 어린 아이들을 구하다 범인이 휘두른 칼날에 치명상을 입었다고 했다. 소식을 듣고 병원으로 달려간 아이의 손을 꼭 잡고, 흐르는 눈물을 닦아주며, 네 덕분에 어린 아이들을 구할 수 있어서 참으로 다행이었지 않니? 우리 아들, 사랑한다. 보이지 않는다고 함께 하지 않는 것은 아니니 너무 오래 슬퍼하지는 말자. 어린 너를 혼자 두고 가서 미안해, 네가 홀로 너무 오래 아파하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라는 말을 남기고 끝내 목숨을 잃었다고 했다. 아이의 부모는 마치 자신들의 죽음을 예견했다는 듯 모든 법적 절차를 빈틈없이 준비해두었고, 아이는 별 어려움없이 후견인의 보호 아래 학교를 다니고, 피아노를 배우며, 일상을 살아갈 수 있었다고 했다. 

 

정말 용감하고 대단한 부모님이셨구나, 감탄하듯 말하는 제 얼굴을 들여다보던 아이가 한숨처럼, 거짓말 같은 이야기죠, 차라리 이 모든 것들이 거짓이라면 참 좋을텐데, 저주에 걸린 저때문에 부모님이 그렇게 되신 거예요, 내뱉고는 시선을 돌렸다. 샌드위치 가게의 테이블 한 켠에 반듯하게 앉아, 창문 너머, 어딘가 먼 곳을 바라보는 얼굴에 내려앉은 짙은 피로와 슬픔의 무게가 저에게도 느껴지는 것만 같았다. 그 순간, 저도 모르게 아이를 지켜주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아이의 곁에 있어주고 싶다고, 아이가 자라는 모습을 오래도록 지켜봐주고 싶다고. 불과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완벽한 타인이었던 열 세 살의 어린 아이가 제 삶으로 풍덩-뛰어든 순간이었다. 대책도 없이, 출구도 없이, 마치 그래야만 하는 운명인 것처럼 아이가 제 삶에 스며들고 말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집 주소를 물어보며 데려다주겠다고 했지만, 아이는 고개를 저으며 거절했다. 수사 열심히 하셔서, 곤란에 처해있는 누군가를 너무 늦지 않게 구해주세요, 부탁하고는 택시를 잡아 타고 제게서 멀어져갔다. 택시 번호판을 중얼거리며 사무실로 돌아가 차 키와 겉옷을 챙겨들고 다시 나왔다. 곧 야간 회의가 시작될 건데 대체 어딜 가냐는 과장님의 외침에, 범인 잡으러 갑니다, 큰 소리로 답하고 걸음을 서둘렀다. 퇴근 시간의 지옥같은 교통 체증을 뚫고 고속도로만 꼬박 두 시간을 더 달려 A시의 국립공원 앞에 도착했을 때, 오는 길에 수색 협조 요청을 했던 관할서 경찰들이 반쯤은 귀찮은 기색으로, 반쯤은 어리둥절한 시선으로 저를 기다리고 있었다. 

 

-더 자세하게 기억나는 건 없니?

-....나뭇잎....나뭇잎 모양이 이렇게 생긴 나무들이 많은 곳이었어요.

 

손가락으로 테이블 위에 그림을 그리다가 도무지 감을 못잡고 있는 제 표정에, 가방에서 노트와 필통을 꺼내 연필 한 자루를 꼭 쥐고는 슥슥 그림을 그리는 얼굴이 기억을 더듬어가듯 아득해졌다. 얼마 뒤 다 됐다며 내민 노트를 받아들고, 그림과 아이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빠르게 대충 그린 크로키라고 하기엔 사진처럼 선명하고 구체적인 풍경화가 제 눈 앞에 있었다. 아마 멀지 않은 곳에 호수가 있나봐요, 잔잔하게 부는 바람에 습기가 가득했어요, 덧붙이는 아이의 얼굴은 침착하게 빛나고 있었다.

 

관할서 경찰들에게 아이가 그렸던 그림을 건네주며 근처에 이런 곳이 있느냐고 물었다. 저들끼리 둘러보며 웅성거리다 이내 누군가, 호숫가 근처 오두막이 있는 곳 같은데요, 말했다. 정말로, 이곳에, 아이가 머릿속에서 보았다는 장소가 있었다. 새벽까지 이어진 수색 끝에 어린 여자 아이의 책가방과 혈흔이 묻은 담요를 발견할 수 있었고, 국과수 검사 결과 5년 전에 실종된 어린 아이의 DNA와 일치한다는 것이 밝혀졌다. 그리고 담요에서 신원미상의 성인 남성의 DNA가 함께 검출되었는데, 총 일곱 건의 연쇄 살인 사건 중에서 범인이 유일하게 흔적을 남겼던 두 번째 사건 현장의 DNA와 일치한다는 것이 밝혀졌다. 그 이후 난항을 겪던 수사는 순조롭게 흘러갔고, 마침내 세상을 시끄럽게 했던 연쇄 살인범 검거에 성공할 수 있었다. 

 

처음 A시의 국립공원에서 어린 여자 아이의 유품을 발견했다는 제 말에 겁에 질린 표정이 되었던 유 경원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범인 검거 후 합동 수사본부가 해산되던 날, 술 한잔을 사달라고 말을 걸어왔다. 말없이 앉아서 술잔만 넘기던 유 경원이 한참만에 겨우 입을 열었다. 

 

-결국, 그 아이의 말이 맞았던 거네요.

-응.

-선배님은 처음부터 그 말을 믿으셨습니까?

-글쎄. 

-어쨌든 그날 밤에 그 먼 곳까지 찾아가셨잖아요.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그 아이 말이 맞았으면 좋겠다는 마음 반, 아니었으면 좋겠다는 마음 반, 그런 심정으로 달려갔었던 것 같아.

-어째서요?

-아이의 말이 맞다는 건, 아이가 거짓말을 한 것이 아니고 범인을 잡을 수 있는 단서를 찾는 거니까 좋은 일이지만, 그 어린 아이가 그런 평범하지 않은 능력을 갖고 있다는 것이 과연 행복하고 좋은 일이기만 할까 싶었거든.

-솔직히 못난 저같은 놈은 그런 생각까지는 하지도 못했습니다. 그땐 그냥 너무 피곤하고 귀찮고, 빨리 끝났으면 좋겠고, 아무렴 어떨까 싶은 심정이었으니까요. 그런데 선배님이 정말로 그 아이 말대로 그 장소에서 증거물을 찾았다고 하셨을 때, 겁이 나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하고, 사실 그 이후로 단 하루도 편히 잠든 날이 없었어요.

-.....유 경원.......

-그때 선배님이 사무실로 들어오시면서 그 아이가 하는 말을 듣지 않으셨다면, 그래서 그곳에 가지 않으셨다면, 그 후로 또 얼마나 더 많은 희생자가 생겼을까 생각하니 덜컥 겁이 나더라구요. 믿어주지 못해서, 진심으로 대해주지 못해서 너무 미안했어요. 아무 상관도 없는 아이가 알지도 못하는 누군가를 구하고 싶다는 순수한 마음만으로 용기를 내어 찾아왔는데, 비겁한 어른인 저는, 저는, 그냥, 

-유 경원, 

-부끄럽지만 경찰로써도 어른으로써도 최악이에요.

-유선우.

-...네, 선배님.

-그 날 그 아이가 그러더라. 저 경찰 아저씨는 생긴 건 곰같은데 마음이 여려서 고생 꽤나 하시겠어요, 라고. 그래서 내가 무슨 말이냐고 물었더니, 네 명의 경찰과 얘기하는 동안,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준 사람은 네가 처음이었다고 하더라. 말을 끊지도 않고, 끝까지 진지하게 들어주었다고. 장난이라고 무시하거나, 대충 흘려듣지 않아서 끝까지 이야기를 마칠 수 있었고, 그 친절한 경찰 아저씨 덕분에 다섯 번째 경찰인 나를 만날 수 있었다고.     

-......흐....흑....흐흑.........

-선우야, 야, 임마, 좋은 경찰이 뭐 별거 있냐? 상대가 누구든 진지하게 이야기를 들어주고, 민첩하게 움직이고, 한 발자국이라도 더 걸으면서 끈질기게 들러붙어서 범인을 잡는 거지. 그게 우리 사명이고, 그러려고 경찰된 거잖아. 열 세 살 꼬맹이한테 지지 않으려면 더 열심히 하는 수밖에, 뭐 다른 방법이 있겠냐? 더 좋은 경찰이 되기 위해 구르고 또 구르다 보면 또 알아, 정말 그런 경찰이 되어있을지.

-....감사....합니다....

-어쨌거나 이 일은 다 털고, 힘내서 다시 시작해보자. 아직도 세상에 널려있는 나쁜 놈들, 우리가 다 잡아야지. 

 

그렇게 사건이 정리된 이후로 시간이 날 때면 아이를 만나러 가거나, 아이가 공안부로 놀러오기도 하면서 인연을 이어 나갔다. 시간이 맞아 유 경원도 함께 밥을 먹는 날이면 유 경원은 아이에게 쩔쩔 매면서도 애틋하고 살갑게 굴었다. 톡톡 쏘아붙이는 아이의 말투에도 사람 좋은 얼굴로 웃거나, 어울리지 않게 어린이날이나 크리스마스라며 선물 같은 걸 챙겨주었다. 물론 그때마다 아이는 어디서 애 취급이에요? 라고 발끈하며 뾰로퉁한 표정을 지었지만, 유 경원은 그저 밝게 웃으며 쓱쓱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아이가 그 손을 쳐내지 않고 잠자코 있는 것만으로도 둘 사이가 많이 편해지고 가까워졌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오랜만에 만난 어느 날, 아이의 가방에 자신이 선물한 곰인형 열쇠고리가 얌전히 매달려 있는 것을 보며 슬쩍 웃으며 뿌듯해 한다거나, 어쩌다 밑도 끝도 없이, 잘 지내고 있죠? 라고 물을 때의 유 경원의 얼굴에 다정함이 가득해 고개를 끄덕이면서 제 마음도 저절로 따뜻해지곤 했었다. 

 

때로는 바쁜 저를 위해 공안부까지 놀러온 아이가 사무실 의자에 앉아 제가 건네준 핫초코를 호호-불며 얌전하게 마시기도 했었다. 처음에는 누구냐고, 늦둥이 동생이냐고 호기심어린 시선으로 묻던 동료 경찰들도, 어느새 아이의 방문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고, 오며가며 과자나 음료수를 건네주고 아는 척을 했다. 동물원 원숭이 취급할 때는 언제고, 라고 투덜거리면서도 사람들의 친절이 나쁘지만은 않은지 손에 쥐어준 사탕 껍질을 만지작거리는 아이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가 있었다. 그럴 때면 영락없는 그 나이 또래의 아이같아 반갑고 기뻤다. 한 달에 몇 번, 혹은 몇 주에 한 번, 얼굴을 보고 밥을 먹고 산책을 했고, 때때로 헤어지기 전 제 몸에 살며시 이마를 기대었다가 언제쯤 닿을 수 있을까요? 말하며 저를 올려다보는 아이의 두 눈은 그저 맑고 깊기만 했었다. 그러는 사이 몇 번의 계절이 바뀌었고, 아이는 열 다섯 살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