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ㄴㅈㅈㅇ 알오ㅈㅇ 현대AU 곽건화왕카이


명경의 청이라서 어쩔 수 없이 나온 선 자리였다. 베타인 줄 알았던 아성이 유학을 갔다가 오메가로 발현해서 돌아왔을 때, 집안 분위기가 얼마나 기묘했었는지 기억하는 아성은 순순히 명경의 말대로 선을 보러 다녔다. 명경과 명루, 명대 모두 알파였다. 게다가 아성은 하루 종일 명루의 곁에서 명루를 보좌하는 일을 하고 있었다. 24시간 알파인 명루의 옆을 지키는 아성이 피가 섞이지 않은 오메가 형제라는 건 남들이 보기에 꽤 기묘한 모습일 수 있다는 것을, 자신이 옆에 있음으로써 명루와 명가의 남매들이 세간에 추악한 소문에 휩싸일 수 있다는 것을, 아성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아성은 본인이 오메가라는 걸 알면서도 10대 중반 이후로 쭉 발현 억제제를 먹으며 억지로 발현을 막아 왔었다.


그 사람만 만나지 않았다면...

아니, 그날 그 시간에 그 사람을 만나지만 않았었다면...


몇 년이 지난 지금도 선명히 남은 그 사람의 얼굴을 떠올리자 단 한 번 닿았던 뜨거운 입술의 감촉이 같이 떠올랐다. 들끓는 열로 머리가 멍하고 온몸이 뜨겁던 그 밤, 한참을 이어졌던 그 키스. 키스 이상의 그 어떤 것도 할 수 없어서 서로의 입술만 탐했던 그 시간.


아성은 한숨과 함께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추억 속의 사람을 떠올릴 때가 아니었다. 어느새 눈앞에 약속 장소인 카페의 문이 보였다. 아성은 잠시 흐트러졌던 표정을 수습하고 차가운 표정으로 문을 열었다. 명경이 승낙한 집안인 만큼 남자의 집안은 평판이 좋은 사업가 집안이었다. 하지만 집안이 좋다고 자녀교육이 반드시 성공하는 건 아니라는 걸 증명하듯, 남자는 개차반이었다. 아성도 실제로 만나는 건 처음인 남자였지만, 명루의 일을 도우면서 여러 기업 오너 가족에 대한 정보는 차고 넘칠 만큼 가지고 있었다.


아직 외부로 소문은 나지 않았지만 쓰레기에 가까운 삶을 사는 남자여서 마주 앉아서 차를 마시는 것조차 짜증났지만, 아성은 명경을 생각해 예의 바른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어차피 남자가 늘어놓고 있는 더러운 소리를 조금만 명경에게 전해도 한동안은 이런 불편한 선 자리도 없을 거라고 생각하면 남자의 헛소리가 그렇게 못 견딜 정도로 괴롭지도 않았다. 아성이 화가 났던 건, 노골적으로 자신의 향을 풀어놓고 아성의 몸을 훑어보던 시선과 아성의 몸에 닿아오는 기분 나쁜 손길이었다. 그러나 아성은 불쾌함을 감추고 정중하게 손을 내밀고, 남자의 손을 잡은 손에 힘을 주며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적당히 해.]

[어이, 내가 누군지 몰라?]

[알지. 그런데 그쪽 부모님도 그쪽이 어떤 놈인지 알아?]

[뭐?]

[작년 4월 29일, A호텔 스위트룸.]

[... 너.]

[올해 2월 1일, B클럽.]

[...]

[그쪽이 유학을 핑계로 놀러갔던 미국에서의 일도 이야기해 볼까? 국내외에서 저지르고 다닌 사건들을 그쪽 부모님도 다 아시는지 모르겠네. 몇 가지는 충분히 법정까지 갈 만한 범죄들도 있을 텐데.]

[... 너 입양된 오메가 주제에 집안을 믿고 지금 날 협박...]

[맞아, 협박. 내가 믿는 건 명가가 아니라 충분히 증거가 될 만한 사진과 녹취록들이지만. 그러니 신세 망치고 싶지 않으면 몸 사려라.]

[...]

[부모님한테 오늘 선에 대해서 어떻게 말해야 하는지는 잘 알겠지?]


아성은 남자의 어깨를 툭 치고 카페를 벗어났다. 어쨌든 해결이야 했지만 역시 불쾌한 건 마찬가지라서 문을 나서자마자 담배를 꺼내 입에 물자, 옆에서 라이터가 튀어 나와 불을 붙여 주었다.


[다시 만날 날이 온다면, 제 질문에 답해 주기로 하셨죠, 이제 물어도 됩니까?]


틀림없었다. 그 사람이었다. 옛날과 전혀 달라지지 않은 것 같은 얼굴의 남자가 싱긋 웃고 있었다.


*****


청명이 남자를 만난 건 몇 년 전 프랑스에서 유학을 하고 있을 때였다. 청명보다 2년 늦게 프랑스에 온 남자는 단정하고 예쁜 얼굴에 묘하게 차가운 표정이 인상적인 사람이었다. 남자는 다른 학생들과 친하게 지내지 않았고, 아르바이트를 핑계로 수업이 끝나면 종종 사라지곤 했다. 청명이 남자와 친해질 수 있었던 건, 점심시간을 사이에 두고 앞뒤의 수업을 같이 들을 수 있게 됐던 학기였다. 종종 함께 점심을 하면서 남자와 자주 시간을 보낼 수 있었지만 둘 사이에는 좀처럼 대화가 없었다. 남자는 자신의 본명도 알려주지 않았다. 남자는 고청명이라는 이름을 듣고도 흔한 영어 이름을 하나 댔을 뿐이었다. 남자는 스무 살이 넘었는데도 알파나 오메가의 페르몬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대놓고 알파나 오메가냐고 묻는 건 무례한 일이어서 묻지는 못했지만, 청명은 남자가 베타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걸 알면서도 남자에게 끌리는 마음을 접지 못했다.


자신만만해 보이는데도 어딘가 쓸쓸한 느낌이 감도는 얼굴이나 마음을 울리는 듯한 근사한 목소리, 언제나 등을 꼿꼿하게 펴고 있는 반듯한 자세, 길쭉하고 늘씬하게 뻗은 아름다운 몸. 모든 것이 청명의 시선을 끌고 마음을 흔들어 놨다. 그리고 무엇보다 청명의 마음을 휘저었던 건 남자의 눈빛이었다. 분명히 베타일 텐데, 남자는 종종 청명을 애타는 듯한 눈으로 바라봤다. 청명은 남자의 눈빛을 볼 때마다 남자의 눈 속에서 갈망을 본 듯한 착각을 느꼈다. 그럴 리가 없는데. 남자가 오메가가 아니란 걸 알면서도 그 눈빛을 볼 때마다 마음이 술렁였다.


청명은 두 사람 사이에 자리한 벽을 느끼면서도 남자와 함께 있는 시간을 즐겼다. 어차피 남자는 자신의 신상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았지만, 같은 공간에서 책을 읽거나 과제를 하고 있기만 해도 기분이 좋았다. 그러나 둘 사이에는 동시에 항상 팽팽한 긴장도 존재했기 때문에 청명은 오메가도 아니면서 자신을 애태우는 남자가 원망스럽기도 했다. 남자를 원망할 일이 아니란 걸 알면서도 가끔씩 욱하는 마음이 터져 나올 때가 있어서 청명은 남자와 단 둘이 남게 되면 종종 자신의 페르몬을 풀어놓고는 했다. 남자가 알파나 오메가라면 청명이 페르몬을 조절하지 않는 건 무례한 행위지만, 어차피 알파나 오메가의 페르몬을 느끼지 못하는 베타에게는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않았다. 그러니 페르몬을 흘리든 말든 남자에겐 아무런 영향도 주지 못한다는 걸 알면서도, 그저 작은 심술이었다.


어느 가을이었다. 남자와 겹치는 수업이 없어서 심심한 하루를 보내고 당시 청명이 지내고 있던 스튜디오 건물로 들어가는 길이었다. 문득 눈을 들어보자 가을 하늘답게 깨끗하고 맑은 하늘이 보였다. 구름 한 점 없이 말간 하늘이었다. 당시 청명과 같은 학교에 다니던 유학생들이 많이 살던 스튜디오 건물이었다. 로비에 들어가 엘리베이터 쪽으로 다가가자 벽에 기대 서 있는 남자가 보였다. 그 남자였다.


남자는 칼같이 단정한 옷차림을 고집하던 평소와 달리 옷차림이 흐트러져 있었고, 언제나 서늘함이 가득하던 얼굴은 식은땀 범벅이었다. 청명이 다가가서 남자를 부축하려 하자, 남자는 고개도 들지 않고 거칠게 팔을 휘둘러 청명의 몸을 밀쳤다.


- 비켜.


몸에 닿은 남자의 손이 뜨거워서 부축하려하자, 남자는 또 팔을 휘둘렀지만, 팔을 너무 세게 휘두른 탓인지 남자의 다리가 꺾이며 남자의 몸이 청명의 품 안으로 무너졌다.


- 열이 심하잖아요.

- ...

- 안 되겠어요. 병원에-


남자는 제 몸도 제대로 지탱하지 못하면서도 청명의 팔을 붙잡았다. 남자는 고개를 들었지만 열기가 오르는 몸을 견디기가 힘든지 이를 악물고 흐릿한 눈으로 청명을 노려보다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


- 고... 청명?

- 네, 고청명입니다. 일단 병원에 좀 갑시다.

- 병원은... 안 돼.

- 이렇게 열이 오르는데 무슨.

- 안 됩니다.


열이 펄펄 끓는데도 부득불 안 된다고 하는 걸 보면 지병이라든가 이유가 있을 것 같아 망설이던 청명은 비틀거리는 남자를 일단 자기 방으로 데리고 갔다. 남자는 계속 정신을 차리려고 애쓰고 있었지만, 침대에 몸이 닿는 순간 한계에 도달했는지 눈도 제대로 뜨지 못했다. 남자는 정신을 잃기 전까지도 청명의 팔을 붙잡고 중얼거렸다.


- 의사나 병원은... 안...

- 열이 높습니다.


그러자 금방이라도 의식을 잃을 것 같았던 남자가 이를 악물고 청명의 팔을 붙잡았다. 순간적으로 비명이 터져 나올 뻔했을 정도로 강한 힘에 남자를 바라보자, 남자가 열이 올라 충혈된 눈으로 청명을 노려봤다.


- 병원은. 안 됩니다. 의사도.


청명은 사나운 눈을 하고 있는 남자를 똑바로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 알겠습니다. 병원에 안 데려가고, 의사도 안 부를 테니, 좀 자기라도 해요.

- ...

- 정말입니다. 약속할게요.


그제야 남자는 청명의 팔을 붙잡고 있던 손에 힘을 빼고 눈을 감았다. 청명이 차가운 물수건을 만들어 와서 남자의 얼굴과 목, 팔 등을 닦아줬지만, 열은 좀처럼 내리지 않았다. 청명은 결국 서랍에서 해열제를 꺼냈다. 청명이 가지고 있는 해열제는 알약이었다. 고민하던 청명은 열이 떨어질 생각을 안 하는 남자를 바라보다 알약을 제 혀 위에 올리고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남자는 열에 들떠서 헐떡거리고 있었다. 얼굴을 가까이 대기만 해도 남자의 뜨거운 숨이 느껴졌다. 청명은 열 때문에 고통스러워하느라 벌어진 남자의 입 속으로 혀를 밀어 넣었다. 남자의 입 안은 열 때문에 바짝 말라 있었는데도 감미로운 음료를 마신 것 같은 기분이었다. 이미 약은 남자의 목 안으로 넘어갔다는 걸 알면서도 입을 뗄 수 없었던 이유는 그것 때문이었다. 열 때문에 까칠하게 일어난 입술도 바짝 마른 입 안도 그저 미칠 것처럼 달콤하기만 했다.


청명이 겨우 입술을 뗄 수 있었던 건, 미약한 양심이 남자가 아픈 상태라는 걸 깨우쳐 줬기 때문이었다. 청명은 아픈 남자를 내려다보다가 마른세수를 했다. 그리고 남자의 열을 식혀주기 위해 다시 차가운 물수건을 만들어 줄 겸, 세수를 하며 흥분도 가라앉힐 겸 대야와 물수건을 가지고 욕실로 향했다.


그러나 청명은 욕실에서 나오자마자 들고 있던 대야를 떨어뜨렸다. 대야에 가득했던 차가운 물이 발과 다리를 적시는 것조차 느끼지 못했다.


방 안에는 아찔한 오메가의 페르몬이 가득했다.


방 안을 가득 채운 페르몬은 청명이 살면서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향이었다. 깨끗하고 청량하면서도 분명히 짜릿하고 아찔한 향은 청명의 정신을 완전히 흔들어 놓을 정도였다.


방 안에는 청명과 남자 둘 뿐이었다.


페르몬의 주인은 청명의 침대를 차지한 남자였다.


오메가 발현열로 고통스러워하고 있는.


*****


알파나 오메가 여부를 스스로 밝히지 않는 한 직접 묻는 것은 무례하게 여겨지는 관습상 아무도 아성에게 대놓고 형질을 묻지 않았고, 아성은 베타인 척 살아가고 있었다. 그래서 아성은 청명이 아성과 둘이 있을 때마다 뿜어내는 페르몬을 모른 척해야 했지만, 청명의 페르몬을 느낄 때마다 모든 게 혼란에 빠지는 기분이었다. 머리가 어지러워지고 팔, 다리, 손, 발까지 저릿해지고 떨리는 기분이었다.


아성은 청명과 함께 있어서는 안 된다는 걸 알고 있었다.


알파나 오메가 발현을 막는 약의 연구 개발은 진전이 더딘 상태라서, 아성이 먹고 있는 발현 억제제는 충분한 임상 실험을 거치지 못한 약이었다. 복용자의 인체에 어떤 부작용이 있을지 알 수 없다고 했고, 쉽게 내성이 생길 수도 있다고 했다. 불안정한 상태의 약이라서 다른 약물과 충돌했을 때, 약효가 쉽게 무력화될 수도 있다고 했다. 아성은 청명과 함께할 때마다 자신의 몸 속 깊숙이 강제로 가둬 둔 페르몬이 흔들리려 하는 걸 느꼈다. 안 그래도 불안한 약이기 때문에 알파의 페르몬에 오래 노출되는 건 좋지 않았다. 청명은 아성이 목숨을 걸면서까지 먹고 있는 약의 효과를 무력화시킬 수 있었다.


그런데도 아성은 청명과 함께 있는 시간을 피하지 않았다. 아니, 아성은 청명과 함께 있을 때마다 겪게 되는 감미로운 혼란과 달콤한 고통의 시간을 즐기고 있었다.


그러나 아성이 현실에 눈을 감고 즐겨온 혼자만의 비밀스러운 일탈은 갑자기 끝났다.


그날 청명은 다른 날보다 유독 더 페르몬을 짙게 뿜어내고 있었다. 아성을 베타로 알고 있던 베타 여학생이 아성에게 조심스럽게 사귀자고 말해 왔었고, 공교롭게 그 장면을 청명이 목격했었다. 아성은 가능하면 베타로 살고 싶었지만, 베타가 아니었고, 그 여학생에게 조금의 관심도 없었기 때문에 깔끔하게 거절했지만, 청명은 뭔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듯했었다.


- 예쁘게 생겼던데 사귀지 그랬습니까?

- 예쁘다고 다 사귑니까?

- 연애는 안 할 겁니까?


청명의 페르몬이 들끓고 있었다. 아성은 형태를 가진 무기인 듯 온몸을 격렬히 찌르는 청명의 사나운 페르몬을 못 느끼는 척, 담담하게 청명을 바라봤다.


- 생각, 없습니다.


청명은 한참을 펼쳐만 두고 있던 책을 덮으며 아성을 보고 싱긋 웃었다.


- 말한 적 있었나요?

- 뭘 말입니까?

- 내가 좋아한다고.

- ...

- 당신을.


아성이 숨까지 멈추고 가만히 바라보자, 사납게 넘실거리던 청명의 페르몬이 순간 흔들리면서 약해졌다. 그날 청명의 입가에 어리는 쓸쓸한 미소만큼 아성의 마음을 아프게 한 건 없었다.


그 다음 날 아침 눈을 떴을 때, 아성은 미열을 느꼈다. 발현 억제제가 불안정한 데다, 청명의 페르몬에 자주 노출되는 탓에 종종 열이 약하게 오르곤 했었다. 그러나 미열일 뿐이었고 약을 먹고 열을 내리면, 발현까지는 가지 않았다. 아성은 발현 억제제와 충돌하지 않는 해열제를 하나 먹고 집을 나섰다. 점점 발열 주기가 짧아지는 게 불안하긴 했지만 그때만 해도 단순한 미열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날은 다른 날과 달리 학교에 갔다 돌아오는 길에 열이 가파르게 오르기 시작했다. 살고 있던 스튜디오 건물의 로비까지는 가까스로 갔지만, 온몸이 뜨거워지는 기분에 로비 엘리베이터 옆에 기대서 있을 때였다. 누군가 다가오는 기척에 팔을 휘둘렀으나, 그 사람은 개의치 않고 아성을 부축했다. 힘을 주려고 했지만 그 사람의 몸에서 익숙한 페르몬이 흘러나오는 것을 느끼자 다리가 꺾였다. 그 사람이 고청명이라는 걸 안 순간, 긴장이 풀렸고 그 이후로는 기억이 흐릿했다. 병원에 가서는 안 된다고 말했던 기억만 났다.


몇 시간이 지났는지 알 수 없었다. 다시 흐릿하게 정신이 돌아왔을 땐 온몸이 뜨겁고 머리가 깨질 것 같았다. 아니, 그보다 일반적인 고열과는 다른 온몸을 가득 채우는 낯선 열기가 느껴져서, 아성이 가장 무서워했던 일이 벌어졌음을 깨닫게 했다. 익숙지 않은 흥분감과 고통에 가까스로 눈을 떠 보자, 굳은 얼굴의 청명이 내려다보고 있었다.


방 안에는 익숙한 청명의 페르몬과 다른 페르몬이 뒤섞여 강하게 넘실거리고 있었다. 아성 자신의 페르몬이었다. 이 페르몬이 청명에게 어떻게 느껴질지는 청명의 표정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청명은 오메가였던 거냐고 묻지는 않았지만, 청명의 표정에는 여러 가지 복잡한 감정이 떠올라 있었다. 배신감과 희망, 욕구가 뒤섞인 표정은 사나워 보이기도 하고, 간절해 보이기도 했다.


아성이 팔을 들어, 청명의 팔을 잡자, 청명은 저항 없이 끌려와 주었다.


- 키스만...


오메가로 발현하지 않기 위해서 목숨을 걸고 쭉 약을 먹어 왔는데도, 몇 년 동안의 노력이 무위로 돌아갔는데도, 아성이 오메가로 발현하게 되면 자신을 거둬준 명가에 어떤 부담과 짐을 지워야 하는지 아는데도, 온몸이 열과 흥분감 때문에 괴로운데도, 그런데도 웃음이 나왔다.


어차피 이미 실패로 돌아간 일이었다. 그렇다면 아직 프랑스에 있는 이 시간까지는 그동안 억눌러왔던 소망과 갈망과 욕구를 조금은 풀어놔 봐도 되지 않을까...


그냥 키스 정도니까.


- 키스만...


청명은 무슨 생각이었는지 알 수 없지만, 아성에게 얌전히 끌려와 입을 맞춰 주었다. 생전 처음 누군가와, 한 번도 표현할 수는 없었지만 태어나 처음으로 좋아했던 사람과 키스를 나누는 기분은 아성이 알고 있는 어떤 단어를 동원해도 설명할 수 없었다. 아성의 입술과 닿은 입술, 혀, 치아의 느낌과 아성의 어깨를 잡은 청명의 손과 팔, 아성의 가슴과 닿은 청명의 가슴까지 전부 생생하게 느껴졌다. 서로의 혀와 혀가 섞이고, 향과 향이 섞이고, 손가락과 손가락이 섞였다. 키스뿐이었지만, 서로의 몸이 얽혀있는 상태다 보니 청명이 흥분했다는 것은 맞닿은 몸의 변화로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청명은 그저 아성의 입술에만 매달렸다. 몇 시간이 흘렀는지 알 수 없었지만, 꽤 오랜 시간이 지난 것만은 분명했다. 이제 입술이 아리기까지 해서 고개를 돌리자, 청명은 얌전하게 고개를 들었다.


흥분감은 꽤 가라앉았지만 여전히 열은 떨어지지 않았다. 몸이 뜨겁고 머리가 아파서 눈을 깜빡이다가 문득 청명의 입술을 본 아성은 저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 입술이... 부르틀 것 같네요.

- 지금 그게 중-

- 미안합니다.


*****


청명은 열 때문에 젖은 눈을 깜빡이며 바라보는 아성을 바라보다가 결국 입을 다물었다.


히트사이클과 비슷하긴 했지만, 남자는 몇 시간 전과 비교해서 제법 안정돼 있었고 남자의 페르몬도 약해져 있었다. 청명은 10대 때 겪었던 자신의 발현 시기를 떠올렸다. 히트사이클과 비슷하지만, 고열이 동반되고 기간이 아주 짧은 게 형질 발현 때의 특징이었다. 20살이 훨씬 넘은 이제야 발현이라니 극히 드문 일이긴 했지만, 아주 없는 일은 아니었다.


문제는 알파나 오메가는 태어나는 순간 알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남자는 분명 자신이 아직 발현하지 않은 오메가라는 걸 알면서도 베타인 척했던 것이다. 청명이 자기에게 어떤 마음을 품고 있는지 알면서도. 게다가 남자는 갑작스러운 발현에도 전혀 당황하지 않았다.


마치 이런 일이 생길 거라는 걸 알고 있었던 것처럼.


- 이름이... 뭡니까?


남자는 잠시 망설이는 것 같았으나, 곧 담담한 표정을 지었다.


- 아성입니다.

- 아성, 좋네요, 이름.


남자, 아니 아성은 몸을 일으키려 했다.


- 더 자요. 아무 짓도 안 할 테니까.

- ... 여기선 청명 씨가 자야 하지 않습니까.

- 소파도 있고.

- ...

- 진짜 아무 짓 안 할 테니까 자요.

- 그럼 조금만 더.


아성은 다시 눈을 감았다. 청명은 벌써 붉게 부풀어 오르기 시작하는 아성의 입술에서 애써 시선을 떼고 이불을 덮어주었다.


- 일어나면, 물어볼 게 많습니다. 아성.


아성은 눈도 뜨지 않고 픽 웃었다.


그러나 소파에서 잠시 눈을 붙였던 청명이 눈을 떴을 때, 침대는 비어 있었고, 아성에게 덮어 주었던 이불은 청명의 몸 위에 덮여 있었다. 소파 옆에 놓인 탁자에는 아성이 남긴 메모가 남아 있었다.


‘여러 가지로 고마웠습니다.

제게 묻고 싶었던 것들, 우리가 다시 만날 날이 온다면, 그때 답해 드리겠습니다.‘


두 줄을 쓰고 망설였는지 여백을 잔뜩 두고 메모지 제일 아래쪽에 덧붙여져 있는 짤막한 한 줄을 본 청명은 황당한 상황인데도 피식 웃었다.


그러나 날이 밝고 학교에 간 청명은 웃을 수 없었다. 아성은 아무런 흔적도 남겨놓지 않고 그대로 학교에서 사라져 버렸다.


*****


그리고 마침내.


[다시 만날 날이 온다면, 제 질문에 답해 주기로 하셨죠, 이제 물어도 됩니까?]


아성은 놀란 듯 쳐다봤지만, 곧 그때 타국의 하늘 아래에서 늘 그랬던 것처럼 싱긋 웃었다.


[너무 늦어서 영영 안 찾아올 줄 알았는데요.]

[‘아성’이란 이름 하나만 가지고 이 큰 땅에서 사람을 찾기가 쉬운 줄 압니까?]

[나한테 묻고 싶은 건 뭡니까?]


청명은 아성이 사라지고 난 뒤 많은 걸 혼자 고민했다. 혼자 답을 유추해낼 수 있는 것들도 있었고, 아성이 명가의 사람이란 걸 알게 된 지금도 여전히 답을 알 수 없는 것들도 많았다. 그러나 아성의 얼굴을 다시 보게 되자 당장 묻고 싶은 건 그 많고 많았던 의문들 중 그 어느 것도 아니었다.


[내가 보고 싶었습니까?]


아성은 버릇처럼 빙긋 웃으며, 담배를 껐다.


[네.]

[내가 찾아오길 바랐어요?]

[네, 기다렸습니다.]

[이 메모.]


청명은 명함집에 곱게 끼워 두었던 메모지를 꺼냈다. 당시 아성이 청명의 방에 남기고 간 메모였다.


[이 메모 끝에 붙은 추신, 지금도 그대로입니까?]


아성은 청명의 손에 들린 메모를 보다가 고개를 들고 청명의 눈을 바라봤다. 여전히 사람의 마음을 흔들어 놓는 눈빛이었다.


[그대로입니다.]


청명은 그대로 아성을 끌어안았다. 아성의 등을 끌어안은 청명의 손가락 사이에 끼워진 메모지 끝에는 아성의 단정한 글씨로 짧은 한 문장이 적혀 있었다.


‘좋아합니다.’





옛날에 진단기 돌리고

청명아성의 세 문장 : '틀림없었다.', '구름 한 점 없이 말간 하늘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이런 세 문장을 저장해 둔 걸 발견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