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본 보니까 좋은 점이 처음 볼 때 놓쳤던 장면들이 눈에 들어온다

고정엽 엄마가 쓰러지게 만들고 고정욱한테 고정엽 엄마 모함한 사람이 누군지도 얼굴 똑똑히 보이고

큰 마님 옆에서 마님 측근인 유모의 지위를 넘보고 이기려고 기를 쓰는 어린 하녀 행각도 눈에 들어오고

오늘처럼 묵란이 보낸 그림 뒤에 명란이랑 묵란이 대화도 더 와닿네


엄마사슴이 아기사슴을 핥는 그림은 지독정심의 주제를 담은 그림

묵란이 이 그림을 보낸 건 당연히 엄마 없는 고아인 명란을 비꼬는 뜻이다

명란이는 이모가 보낸 편지를 읽다가

장백이 보낸 선물을 보고 임서각(임금상네 처소)에서는 뭘 보냈는지 물어본다

명란의 의심이 조금씩 구체화되고 있는 중이란 걸 보여주는 장면이다

그런데 그때 하필 묵란이 명란의 처지를 꼬집는 그림을 보내왔어

니가 잘 나가봤자 넌 엄마도 없지 이런 뜻이기도 하고 거꾸로 보면 돌봐줄 사람이 든든한 나보다 못하단 말일테지

명란은 대번에 그림을 보낸 뜻을 알아차리지만 분노하지 않고

그 그림을 어머니 유품인 이낭자진수낭자관 옆에 나란히 걸어놓는다

어머니의 억울한 죽음을 잊지 않겠다 끝까지 파헤치겠다는 명란의 의지를 자극하게 되는 셈이야


명란이가 묵란이의 의사를 얼마나 잘 알아들었는지 다음 장면에 바로 나왔더라

명란이가 큰 마님 문안에 늦었을때 묵란이가 시비를 걸자

돌아가는 길에 묵란이를 살살 구슬린다

그때 나는 의지할 데 없는 고아고 언니는 집에서 가장 사랑받는 사람이다 라고 하면서


이거야말로 묵란이가 그림을 보내면서 명란이한테 하고 싶은 말이었는데

명란이는 그 메시지를 이용해서 묵란이가 안심하게 만든다

연환계를 쓰는 명란과 할머니 콤보에 이어서

명란이 심계가 드러나는 장면이었다


인물들 관계도 잘 드러나고

여자라서 진료받기도 힘들고 여자라서 뛰어난 재주를 펼칠 수 없는 시대상을

화란이와 하씨 할머니의 어려운 처지를 통해 보여주면서

그런 여자의 어려움을 이해하는 바람직한 남자 하홍문과 명란의 설레는 첫만남도 나왔던 화였어

근데 제일 설렌 건 예고편 여자의 어려움을 이해하는 또다른 남자 고정엽이

무심하게 던지는 대사였다

대놓고 썸 타는 건 명란이와 제형인데

멀리서 한 마디 던지고 눈길 한 번 보내는 고정엽이 왜 이렇게 설레는지 모를 일

딱히 기교 없이 설레게 하는 것도 재주다

잔잔한 이런 편도 좋은데 다음 편 같이 파란이 많은 편은 더 좋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