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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건화는 작품 선택에 있어서는 유난하다 싶을 정도로 까다롭게 구는 배우였지만, 일상생활에서는 뭘 먹이든, 뭘 입히든 전혀 신경 쓰지 않아서 케어하기가 어렵지 않은, 아니, 정확히 말하면 매우 손이 가지 않는 배우였다. 그래서 곽건화의 이름값에 비해 공작소 직원들의 수는 이상할 정도로 적었지만, 공작소는 늘 아무런 문제없이 잘 굴러가고 있었다. 오늘까지는.


문제가 생긴 건 건화의 매니저가 집안 일로 급히 고향에 내려가 버리게 돼서 벌어졌다. 직원이 적은 탓에 건화를 전담 케어해줄 수 있는 예비 인력 같은 건 없었고, 아무리 손이 가지 않는 배우라고 해도 신입을 대뜸 붙여주는 건 불가능했다. 건화가 신입 매니저를 갈굴 것이 걱정돼서가 아니라, 신원이 충분히 파악되지 않은 매니저를 붙였다가 아직 앞날이 창창한 배우가 해를 입는 일이 생길까 봐. 그래서 공작소의 대표는 매니저와 주로 소통하며 건화의 스케쥴을 짜는 일을 전담하던 왕카이를 건화에게 붙여주겠다고 했다. 건화가 제법 호감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동안은 바쁜 스케쥴 탓에 몇 번 얼굴을 마주치지 못했던 카이와 친해질 기회가 생긴 것에 즐거워하며 공작소에 들어갔을 때였다.


대표실의 문을 열자, 카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 저 안 된다는 거 아시잖아요. 정말 곤란합니다.

- 지금 우리 사정이 어떤지 알잖아. 카이 씨 말고는 할 사람이 정말 없어. 내가 일 다 때려치우고 우리 건화 따라다닐까? 지금 그러란 거야?

- 그건 아니지만... 전 정말 안 돼요.

- 카이 씨. 지금 매니저 안 붙이면 우리 건화 일 못해. 건화 일 못하면 우리 다 길바닥 나앉는 거야. 그럴 순 없잖아.

- ... 그래도. 전 정말...

- 내가 그렇게 싫어요?


신입이라면 몰라도 지금껏 같은 공작소에서 일 잘해 오던 사람이 자기 매니저가 되기 싫다고 항의하고 있는 모습을 직접 본 데다, 건화는 카이에게 제법 호감을 가지고 있었기에 기분이 상한 터라, 마음보다 말이 더 까칠하게 튀어나갔다. 돌아보는 카이의 눈에 당황과 억울함이 가득 차 있는 게 훤히 보여서 제 오해임을 알았지만 그래도 기분이 좋지는 않았다.


- 곽건화 씨를 싫어하면 여기서 일하지도 않았죠. 곽건화 씨가 싫은 게 아니라, 제 개인적인 사정 때문입니다.

- 그럼 어떡할까? 나 혼자 다녀요?


원래도 빨리 매니저가 구해지지 않으면 당분간은 혼자 다닐 생각도 하고 있었지만, 자기 매니저를 하기 싫다는 카이의 항변을 들은지라 말은 계속 삐딱하게 나갔다.


- 카이 씨, 좀 해 줘. 최대한 빨리 믿을 만한 새 매니저를 구해 볼게. 당분간만, 응?


카이도 더 이상 버틸 수 없다는 걸 알았는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카이는 못한다고 그렇게 거부하던 것과 달리 제법 괜찮은 매니저였다. 싹싹하고 눈치도 빠르고 성실해서 건화가 따로 입을 댈 필요도 전혀 없었고, 촬영장에서도 금세 스태프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다. 그러나 지금은.


- 카이 씨, 어디 아파요?


감독이 원하는 그림이 나오지 않아서 촬영은 새벽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건화도 제법 지쳐 있었지만, 잠깐 카메라를 점검하는 동안 쉬는 건화에게 달달하고 따뜻한 음료를 건네는 카이의 얼굴은 하얗게 질려 있었고, 얼굴에는 식은땀이 잔뜩 배어 나와 있었다.


- 괜찮습니다. 감독님 말씀이 곧 원하는 느낌이 나올 것 같다고 몇 번만 더 찍어 보자고 하시네요.

- 얼굴이 너무 안 좋은데? 좀 앉아요.


카이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곧 건화의 옆에 있던 의자에 몸을 파묻고 앉았다. 눈높이가 비슷해지자 눈이 빨갛게 충혈돼 있고 온 얼굴이 식은땀으로 덮여 있는 게 더 잘 보였다.


- 혹시 몸이 안 좋아서, 매니저 못하겠다고 했던 겁니까?

- 아닙니다, 그런 거. 딱히 안 좋은 곳은 없어요.

- 그럼 그냥 몸이 약해요?

- 그것도 아니고, 좀 피곤해서 그런가 봐요. 일찍 자는 편이라.

- 그래서 매니저 못하겠다고 한 겁니까? 일찍 자는 편이라?

- 네, 좀...


제시간에 자야 하니 새벽까지 일이 이어지곤 하는 매니저를 못한다고 했던 게 민망했는지 카이의 얼굴은 은은하게 붉어졌지만, 그래도 여전히 창백해서, 건화는 카이를 그대로 의자 뒤에 기대게 해 둔 후, 이동용 아이스백에 넣어 두었던 얼음 안대를 꺼내 눈에 올려주었다.


- 곧 촬영이 끝날 테니, 카이 씨는 좀 쉬고 있어요. 딱히 지금 매니저가 필요한 일은 없으니까.

- 그래도 일하시는데.


건화는 일어나려는 카이를 힘으로 꾹 밀어서 다시 눕혔다.


- 나중에 집에 갈 때 운전 안 해 줄 겁니까?

- ...

- 쓰러질 것 같은 얼굴이라 이대로는 운전도 못 맡기겠으니까 좀 쉬고 있어요. 끝나면 깨울게요.

- 네, 죄송합니다.


한 시간쯤 뒤 드디어 만족한 감독이 촬영 종료를 외쳐줘서, 피곤한 몸을 이끌고 자리로 돌아갔더니 카이는 푹 잠들어 있었다. 편안하게 잠들어 있으면 깨울 텐데, 자면서도 끙끙 앓고 있는 데다 창백한 얼굴에는 여전히 식은땀이 가득해서 깨우지 못하고 있을 때였다.


- 어머, 카이 왜 이래?


건화보다 경력이 오래된 주연 여배우는 싹싹한 카이를 제법 예뻐했었고, 잠든 게 아니라 쓰러진 것처럼 보이는 카이는 돌아가던 그녀의 눈길을 끌었던 모양이었다.


- 몸이 안 좋은가 봅니다.

- 얘 쓰러진 거 아니야? 병원 가야 되는 거 아닌가.

- 글쎄요.

- 자기 그럼 어떻게 집에 가? 피곤해서 운전할 수 있겠어? 우리 로드는 촬영 내내 쉬었으니까 내 차 타고 가. 카이도 같이 내 차 태워서 가자.

- 아닙니다. 선배님도 얼른 들어가 쉬셔야죠. 전 아직 괜찮으니 제가 데려가겠습니다.

- 그럴래? 카이는 저녁 내내 얼굴이 안 좋더니 몸이 안 좋아서 그랬나 보네. 자기, 오늘 고생 많았어. 모레 촬영 때 보자. 잘 들어가고.

- 네, 들어가십시오, 선배님.


건화는 주변에서 목소리를 죽이지 않고 떠드는데도 인상만 쓸 뿐 깨지 못하는 카이를 내려다보다 한숨을 푹 쉬고 조심스레 안아 올렸다. 카이는 키에 비해서 지나치게 가벼웠다. 어쩐지 그게 참 마음에 들지 않았다. 카이가 잠에서 깬 건, 건화가 새벽에 카이 집을 어디 알아보기도 곤란하고 해서 아예 자기 집으로 데려 와 손님용 방 침대에 내려놨을 때였다.


- 어, 곽건화 씨. 촬영 끝났어요?

- 네, 끝났습니다.

- 어... 어?


카이는 낯선 주변을 잠시 두리번거리더니 벌떡 일어나 앉았, 아니 벌떡 일어나 섰다.


- 여기 어디에요?

- 제 집입니다.

- 혹시 곽건화 씨가 데려오셨어요?

- 그럼 누가 데려왔겠습니까.

- 맙소사.


카이는 난처한 얼굴로 머리를 벅벅 긁다가 한숨을 푹 내쉬더니 허리를 거의 90도로 꺾으며 고개를 숙였다.


- 죄송합니다.

- 됐어요. 몸이 안 좋아 보여서 그냥 내가 데려온 거니까, 일단 자고 이야기합시다.

- 아니, 전 이만 가 볼게요.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창백한 얼굴을 해 가지고 가겠다는 카이를 보자 왠지 필요 이상으로 화가 났다. 그래서 건화는 카이의 가는 팔뚝을 잡아 침대 위로 밀었다. 아마도 새벽 3시가 넘도록 이어진 촬영 때문에 너무 피곤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건화는 저도 당황스러울 정도의 과도한 짜증이, 첫날부터 자꾸 자기를 피하려 하는 카이 때문은 아닐 거라고 믿었다.


- 나 내일도 광고 촬영 있어요. 알죠? 일찍 자야 제대로 촬영을 하죠. 카이 씨가 여기서 그냥 자는 게 날 도와주는 거예요. 부탁합시다.

- ... 죄송합니다. 신경 쓰시게 해서.

- 그럼 자고 가요. 11시에는 출발해야 하니까 10시쯤에 이 앞 까페에서 간단히 뭐 먹고 가자고요. 그렇게 준비하세요.

- 저기...

- 뭡니까.


기어코 집에 가겠다는 건가 해서 인상을 쓰고 쳐다보자, 카이는 우물쭈물하더니 한숨을 푹 내쉬었다.


- 혹시 손님용 욕실이 있습니까? 제가 좀 오래 씻어서요.

- 있습니다. 방문 열고 나가면 바로 맞은편 문이 손님용 욕실이에요. 욕실 안 서랍장에 손님들 용으로 새 속옷도 몇 개 들어 있으니까 뜯어서 꺼내 입어요.

- 네, 감사합니다. 피곤하실 텐데 얼른 쉬세요.


그제야 정신 차리고 매니저의 얼굴로 돌아와서 어서 주무셔야 된다며 건화를 내보내는 카이에게 등이 떠밀려 침실로 가던 건화는 저도 모르게 픽 웃었다. 피곤해 죽겠고, 저 고집 센 매니저는 말도 안 듣고 안 그래도 피곤한 사람 진을 빼 놨는데도, 왕카이가 자신과 같은 집의 지붕 아래 잔다고 생각하니 왠지 기분이 들떴다. 좋아할 이유가 전혀 없는데도.


그러나 다음 날 아침 눈을 뜨고, 카이가 잤을 손님용 객실의 문을 두드린 건화는 조용한 객실의 반응에 인상을 썼다. 말 안 듣고 기어이 집에 갔나? 그 의심은 방문을 열고 누군가 누웠던 흔적이 전혀 없는 침대를 본 순간 확신이 됐다. 건화가 울컥 화를 내며 카이에게 전화하기 위해 핸드폰을 꺼냈을 때.


바로 맞은편에 있는 손님용 욕실에서 노랫소리가 흘러 나왔다.


다른 사람이 이 집 안에 있을 이유도 없지만, 가만히 귀를 기울여 들어보자 역시 낮으면서도 상냥한 느낌이 가득 묻어 있는 왕카이의 목소리였다. 아침부터 뭐가 그리 기분이 좋은지 욕실에서의 노랫소리가 끊이지 않자, 건화는 조금 전 손님용 객실의 방문을 걷어찼던 것도 잊고 웃으며 자신의 침실로 향했다.


그날 밤, 건화는 집에 가겠다고 우기는 카이를 데리고 또 자신의 집으로 왔다. 이제 한동안 촬영 강행군이 이어질 테니, 몸도 약한 카이 씨도 길바닥에서 시간을 허비하지 말고 아예 손님방에서 한동안 지내라. 카이 씨도 피곤한데 굳이 그 먼 집까지 (공작소에 알아보니 카이의 집은 도심에서 한참 떨어진 해변가에 있었다.) 언제 왔다 갔다 할 거냐. 손님용 욕실은 마음껏 써도 좋다. 말을 많이 하는 걸 귀찮아하는 건화답지 않게, 건화는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이유를 들이대며 카이를 설득했다. 자기도 왜 그러고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그저 이 남자를 자신의 옆에 두고 싶었다.


카이는 결국 건화의 설득에 넘어 왔다. 카이가 넘어온 부분이 ‘욕실을 마음껏 써도 좋다’ 는 부분이었던 것 같아서 좀 황당했지만, 어쨌든 잘된 일이니 넘어가기로 했다.


건화는 카이와 함께 지내면서 카이에 대해 많은 걸 알게 됐지만, 알 수 없는 것들도 늘어났다. 카이는 많은 수수께끼를 품고 있었다. 첫 번째는 체력이었다. 카이는 처음 아픈 카이를 봤을 때 건화가 예상했던 것과 달리 체력이 아주 좋았다. 낮 동안에는 무슨 일을 해도 쉽게 지치지 않았고, 몸을 써야 하는 일이 있어도 언제나 가뿐하게 해치웠다. 그러나 저녁 7시가 지날 쯤이 되면 카이는 안색이 창백해지고 식은땀을 흘리면서 비실거렸다. 낮과 밤의 카이는 다른 사람처럼 느껴질 정도로 체력 차이가 심했다. 밤에 너무 지쳐 있어서 아픈 게 아닌가 걱정하다 다음 날 아침에 보면 또 여느 때처럼 쌩쌩하게 돌아와 있었다. 두 번째는, 카이에게 준 손님용 침실은 단 한 번도 사람이 누웠던 흔적이 남아 있었던 적이 없다는 점이었다. 한두 번이야 카이가 깔끔하게 정리를 잘해 놨겠지 했지만, 매일 아침 그런 광경을 보면서 건화는 카이가 침대에서 안 자는 게 아닐까 의심했다. 실제로 건화는 카이가 침대에 누워 있는 모습을 본 적도 없었다. 아침에 일어나 보면 카이는 늘 욕실에서 흥얼거리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카이에게서는 깨끗한 물이 흐르는 물가에 있는 것처럼 싱그럽고 시원하고 깨끗한 향이 풍겼다. 건화가 아는 향수 중에는 그런 향수가 없었고, 카이도 자기는 향수를 쓰지 않는다고 이야기했다. 그리고 건화 말고는 아무도 카이의 그 향기를 맡지 못했다.


어느 날 밤, 다른 날과 달리 촬영이 비교적 일찍 끝나서 10시 쯤에 집에 들어온 건화는 씻고 나온 뒤 마실 걸 찾으러 거실에 나왔다가 언제나처럼 욕실에서 들려오는 노랫소리에 피식 웃었다. 카이는 자기가 처음 말한 대로 제법 오래 씻는 편인지, 언제나 건화가 씻고 나온 뒤에도 여전히 욕실에서 나오지 않고 있었다. 오랜만에 다음 날 촬영이 빈 휴일이 생겨서, 술을 한 잔 할까 했었다. 그러니까 처음엔 그저 술을 한 잔 할 생각뿐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맥주를 까서 몇 캔을 마시는 동안, 카이가 들어가 있는 욕실의 문이 열리지 않았을 때는, 욕실에서 들리는 카이의 목소리가 귀엽게만 들리지는 않았다. 카이는 벌써 몇 시간째 욕실에서 나오지 않고 있었다. 문득, 건화의 코끝에 언제나 카이에게서 풍기던 싱그러운 물 냄새가 스쳐가는 듯했다. 


늘 물 냄새를 풍기는 남자. 밤새 욕실에서 나오지 않는 남자...


건화는 그대로 거실에서 밤을 샜고, 카이가 나오기 전에 제 침실에 붙어 있는 욕실에 가서 샤워를 하며 술기운을 털어내고, 거실에 쌓인 맥주 캔도 모두 치운 뒤, 손님용 욕실의 문을 두드렸다.


- 카이 씨, 아침 먹으러 안 갈 겁니까?

- 지금 나갈게요.


문을 열고 나온 카이는 매일 아침 그랬듯 싱그럽고 씩씩했다. 아침 이슬을 가득 머금고 활짝 피어난 꽃처럼, 그렇게 싱그러워진 카이에게서 물 향기가 산뜻하게 흘러 나왔다.


낮에 운동을 하고 돌아와서 잠시 눈을 붙였던 건화는 새벽에 조용히 침실 문을 열고 나왔다. 카이의 욕실은 여전히 불이 밝혀져 있었지만, 노랫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카이의 침실 문을 열어보자, 언제나 그랬듯 사람이 누운 흔적이 없는 침대만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건화는 욕실 문을 조용히 두드렸지만, 욕실에서는 아무 반응이 없었다. 왠지 쿵쿵거리며 불안하게 뛰는 심장을 애써 진정시키며 조용히 욕실의 문을 열었다. 그리고 안에는 욕조에 가득 받아둔 물 위에 둥둥 떠서 눈을 감고 있는 카이가 보였다.


그 섬뜩한 광경을 보고도 ‘익사’가 생각나지 않은 것은, 물 위로 드러나 있는 카이의 배와 얼굴 등 몸 앞부분 전체를 마치 투명하고 도톰한 비닐을 덮어둔 것처럼 수막이 둥글게 감싸고 있고, 그 주위를 물방울들이 오글오글 달라붙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카이의 몸에서는 희미한 빛과 언제나 카이 옆에 있으면 건화의 코끝을 스치던 싱그러운 향이 가득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어떻게 봐도 익사는 아니었다.


어째선지 건화의 머릿속에 어릴 때 읽었던 인어공주 이야기가 스쳐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