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 있으면 말해조우
곽건화왕카이
위장자 전장사 크오
의식의 흐름대로 써갈겨서 앞뒤 흐름 맞지 않는 거 존많
중국 역사 1도 모름 실제 지식도 1도 없음
그러고보니 아성도 아직 안나옴
1.
청명은 햇빛이 잘 드는 커피숍 창가에 앉아 무표정하게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테이블 위에는 삼십 분 전 시켰던 블랙 커피가 미지근하게 식다 못해 차가워지고 있었다. 장사보다 훨씬 더 바다에 가까이 접해있는 주제에 겨울의 상해는 냉정하고 건조했다. 청명은 그 척박함이 싫었다. 집안의 강요가 아니었다면 더운 물에 질식하는 한이 있어도 상해에는 오지 않았을 것이다. 청명은 만일 이 곳에 와야 한다면 당당하게 제 이름을 대고 들어오고 싶었다. 일본에 점령당해 괴뢰정부가 세워진 상해가 다시 수복된다면 바랄 것이 있겠는가. 그러나 1937년 점령된 상해는 아직 일본의 손아귀 안에 있었다. 하여 청명은 가명으로 상해에 들어왔고 내내 중절모로 얼굴을 가렸다.
청명은 잃어버린 것을 찾으러 왔다. 그것은 꽤나 덩치가 컸고 남의 눈에는 전혀 값비싸보이지 않았지만 안타깝게도 맥동하는 두 다리를 달고 있었다. 하물며 손에서 놓친 것은 이십여 년도 더 전의 일이었다. 청명은 마지못해 상해로 오는 차에 몸을 실으면서도 그렇게 생각했다. 절대 찾을 수 있을 리 없어.
자신과 같은 해, 자신보다 몇 개월 늦게 태어났다는 사촌은 아주 어릴 적 상해에서 실종되었다. 설상가상으로 고모는 아이를 잃어버린 충격으로 배고 있던 아기마저 유산했다. 그것은 집안의 비극이었고 모두가 입을 닫은 지 오래 된 일이었다. 청명은 이 때 갑자기 자신이 상해에 와 하릴없이 시간이나 비우는 이유가 그 아이만은 아닐 것이라 추측하고 있었다. 말하자면 아이는 좋은 핑계가 아니겠나. 전쟁은 점점 불붙어가고 있었고 집안 어른들은 독자 청명을 전쟁터에 남겨두고 싶어하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그 핑계는 적당히 청명을 유인하는 구실이 된 게 틀림 없었다. 네가 죽더라도 핏줄은 이어야 할 게 아니냐. 전쟁에서 나서고 싶고 혼인도 하고 싶지 않다면 네 사촌이라도 되찾아오라. 청명은 결국 그들의 말에 따랐다. 그 아이는 청명조차 절대 거역할 수 없는 집안의 역린이었고 그가 아무리 전장을 바란다 하여도 거부할 수 있는 권리가 없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청명은 옷 속에서 손때 탄 작은 사진을 꺼냈다. 그저 흑과 백이 뒤섞인 것처럼만 보이는 낡은 사진 속에서는 막 걸음마를 걷는 아기가 까르르 소리날 것처럼 웃고 있었다. 웃어 반쯤 접힌 눈이 커다랬다. 청명은 그제야 다 식어빠진 블랙커피를 각설탕 하나도 넣지 않은 채로 입으로 가져갔다. 신 맛이 올라왔다. 어쨌건 그는 나의 형제가 아니던가. 아이 특유의 동그란 눈이 책망하듯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너는 나의 형제잖아.
청명은 상해의 아파트 한 채를 빌렸다. 망해가는 경제가 물가만 기이하게 띄워놓았는지 터무니없이 비쌌다. 청명은 기민하게 방 안에 비밀 공간을 만들고 밀반입한 제 소중한 권총과 실탄을 숨겼다. 국민당 소속 군인이자 그 고씨 집안의 아들이라는 두 가지 신분 중 하나라도 드러나는 날에는 총 맞는 일로만 끝나지는 않을 것이다. 권총을 숨기고 나니 남은 것은 옷가지 몇 벌과 책 두어 권, 그리고 사진 한 장 뿐이었다. 청명은 정리를 마칠 때쯤 울리는 초인종 소리에 반색하면 문을 열었다.
깔끔하게 발라넘긴 남자의 머리에는 희끗희끗 흰 머리가 올라오고 있었다. 그러나 군인과 같이 각이 반듯하게 선 몸에서는 그 어떤 나태의 증거도 보이지 않았다. 이 자는 오래 전 청명의 아버지가 다양한 이유로 상해로 보낸 사람이었다. 청명은 그 이유들을 속속들이 알고 있지는 못했으나 단 한 가지 목적은 알고 있었다. '아이'를 찾는 것이었다. 오늘의 방문 또한 그동안 그가 알아낸 정보들을 전달하기 위한 자리였다. 남자는 서류 가방을 열어 노란 서류 봉투를 하나 꺼냈다. 청명은 그것을 받아들며 제일 상단에 쓰인 제목만 빠르게 읽었다. 봉투 안에서 나온 종이들은 생각보다 놀라운 것이었다. 남자는 시간이 별로 없는 듯 초조하게 굴었다. 청명이 서류를 자세히 훑어볼 시간조차 허락하지 않고 바로 말을 하기 시작했다.
“맨 처음 상해에 도착해서는 당시 존재하는 모든 고아원에 실종일 이후 삼 개월 동안 입원한 아이 명단을 모두 받았습니다만 아시다시피 멍청한 짓이었지요. 아이들의 수가 많은 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만 이렇다 할 단서가 없었습니다. 명단을 본다고 해서 거기 이름이 적혀있는 것도 아니니 말입니다.”
“듣기로는 아이가 실종되었을 때 아직 제대로 말을 못했다고 하니 당연합니다.”
청명이 서류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으며 답했다.
“도련님께서는 어릴 때 끼고 다니던 팔찌를 기억하십니까?”
“설마 그 아이도 그걸 갖고 있었습니까?”
“물론입니다. 애초에 어르신께서 그 팔찌를 주문하신 것이 미아 방지를 위했던 거니까요. 단서가 없어서 집안에서 보내주신 사진과 팔찌 두 가지를 갖고 온통 수소문을 해보았습니다만…… 팔찌를 보았다는 사람이 있긴 하였습니다.”
“말씀해 보십시오.”
사내는 맨 아래 있던 서류를 끄집어내 청명의 손에 들려주었다.
“고아원이라는 게 수익이 나는 일이 아니다보니 어디선가 돈을 지원받지 않으면 안 되지요. 상해 고아원들의 돈줄은 명가입니다. 그래서 오래 전부터 정기적으로 모임이 열렸다고 하더군요. 실종된 해 이후에 그 모임에서 팔찌를 보았다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한 원장이 아내와 동행했는데, 아내의 손목에서 비슷한 것을 보았다 합니다. 아시다시피 이 팔찌는 주문제작한 것이라 같은 것이 존재할 리 없습니다. 그 서류가 그 팔찌가 나왔다는 고아원에 관한 서류입니다만…….”
“없어졌군요.”
“예. 그 고아원에 있던 아이들은 뿔뿔이 흩어졌다고 하던데, 제가 알아낸 것은 거기까지입니다. 제일 앞에 있는 서류가 그 고아원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아이들 명단입니다.”
“추정이요, 원장은 만나보셨습니까?”
“십 년 전에 사망한 것으로 되어있었습니다.”
“원장의 아내라는 사람은요,”
“마찬가지입니다. 부부 사이에 아들이 하나 있었긴 한데, 아무것도 모르는 눈치였습니다.”
“그곳에서 일하던 사람은 없었습니까?”
“너무 오래 전 일이라 찾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죄송합니다.”
청명은 장장 세 장에 달하는 빽빽한 리스트를 죽 훑어내렸다. 이름과 고만고만한 나이, 소재 고아원, 입원일 따위의 영양가 없는 정보들로도 눈이 아팠다.
“아닙니다. 고생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 저를 이리로 보내신 게 정말로 헛된 목적 때문은 아니었던 모양입니다.”
“제가 팔찌에 대한 단서를 찾았던 것이 재작년입니다. 길이 희미하게나마 보이는 것 같으니, 좋은 답을 들고 돌아가실 수도 있으리라 봅니다. 저는 공식적으로 이제 이 일에서 손을 떼라는 분부를 받았습니다만 혹여 제가 도와드릴 일은 없겠습니까?”
“명가가 후원을 한다면 그 고아원들이 명가에 운영 보고도 할까요?”
“운영 보고라면…….”
“후원금의 사용처부터 시작해서 보호 아동 수나 명단 같은 것 말입니다.”
“명경은 아주 어릴 때부터 명씨 집안의 가업을 이끌어 온 철두철미한 사람입니다. 후원금이 헛되이 쓰이지 않도록 관리하고 있을 것은 확실하고, 가끔 전반적 운영 보고도 받았을 가능성이 높겠지요.”
“저는 일단 그 쪽으로 접촉해보겠습니다. 가끔 도움을 요청하면 들어주시길 청하겠습니다.”
남자는 굳게 입을 다문 채 한동안 답이 없었다. 청명은 고개를 들어 그와 눈을 맞추었다.
“무슨 일 있습니까?”
“제가 그걸 몰라서 명가와 접촉치 않은 게 아닙니다.”
그는 다시 갈색 서류가방을 뒤져 한 장의 신문을 꺼냈다. 청명이 보기 좋게 돌려서 건네지기까지 하여 청명은 단번에 그 신문 한 가운데 박힌 사람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단호하고 안광이 형형한 사내였다. 청명은 그 안광에 압도되어 잠시간 신문의 내용을 볼 겨를이 없었다. 다음 이어지는 말이 없었다면 청명은 그 안광만 보고서 이 자가 항일운동을 하다 잡힌 군통의 사람이라던가 혹은 지하공산당원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상해 신정부 경제부 장관 명루입니다.”
“신정부 경제부 장관 명루?”
다시 보니 남자는 제대로 양복을 차려입고 있었고 신문 제일 위에는 대문짝만한 글자로 다음과 같은 말이 적혀 있었다. 상해의 경제가 다시 살아날 수 있을 것인가? : 경제부 장관으로 명루 취임. 조그맣게 박힌 글자들 사이로 다음과 같은 말들도 보였다. 인터뷰를 거부하다, 노 코멘트.
“한간이란 말입니까.”
“만일 접촉하시려면 조심하셔야 할 겁니다.”
“제 신분은 제대로 만들어져 있다 들었습니다만. 여기까지 오는 데도 아무 문제 없었고요.”
“그 집에 드나들기 시작하시면 주목을 받지 않을 수는 없을 겁니다. 가장 빠른 길은 맞습니다. 그런 만큼 위험도 클 테니 항시 주의하셔야 합니다.”
“알겠습니다. 걱정 마십시오.”
“필요한 일이 있으면 정해진 방법대로 연락 주십시오, 도련님.”
남자는 옷도 구겨지지 않을 것처럼 반듯하게 구십 도로 몸을 숙인 뒤 방에서 나갔다. 사내가 문을 나서고 난 뒤에도 청명은 서류를 내내 쳐다보고 있었다. 세 장의 종이 위에 세로로 죽 써진 빽빽한 이름들은 그 수가 많은 것은 둘째 치고 본명이 아닐 가능성도 높았다. 살아 있든 죽었든 빨리 결론을 내야 다시 제 한 몫 할 수 있는 곳으로 돌아가게 될 것이었다. 아이를 잃어버린 순간 아이의 이름도 나이도 리셋이 되어버리고 아이에 대한 정보들은 아이를 되찾는데 무용지물이 되고 만다. 정보가 너무나도 없었다. 그렇다고 최초의 고아원이 파산한 시점부터 다른 고아원에 들어왔다는 수많은 아이들을 일일이 추적하기에는 시간과 노동력의 한계가 절실한 것이다. 청명은 가능한 바운더리를 줄여나가는 방법을 택했다. 그는 종이들을 내려놓고 습관적으로 품에서 담배를 꺼냈다. 홀로 잠입하다시피 상해로 올라오면서 사치는 포기한 지 오래였지만 담배를 피지 않으면 안될 순간들이 있었다. 세 갑의 담배 중 최초의 한 개피. 청명의 시선 끝에 한 쪽에 밀쳐진 신문 낱장이 보였다. 주요 기사 아래에 작은 칸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76호가 항일분자들을 처형했다는 내용이다. 이 곳 또한 전장이구나. 청명은 맑은 하늘에서 내리쬐는 부드러운 햇살을 담배연기가 산산히 이지러뜨리는 것을 가만히 지켜봤다.
2.
명가의 저택은 어딘가 우아하고 고전적인 아름다움을 갖고 있었다. 저택은 화려하다기 보다는 단정하여 일견 소박해보였다. 그러나 청명은 정성스럽게 관리되는 것이 역력한 건물 자체나 작은 마을을 꾸릴 수 있을 것처럼 보이는 넓디넓은 정원에서 명가가 굴리는 돈의 크기를 충분히 눈치챘다. 청명은 저 시든 잔디들에 얼마만큼의 돈을 들여야 흙과 뒤섞여 풍화되지 않고 다음 해에 다시 땅을 온통 뒤덮는지를 알고 있었다. 청명은 제가 양복을 꺼내입고 오기를 잘했다고 생각하던 참이었다. 그러나 정복이라 하면 군복만 입던 사람에게 양복은 불편하기 짝이 없는 것이다. 찜찜한 기분은 내내 가시지 않고 껌딱지처럼 들러붙어 있었다.
간밤에 명가의 명경과 했던 통화는 굉장히 인상적이었다. 청명이 대강의 상황을 말하고 혹여 도움이 될 만한 자료가 있겠느냐 물었을 때를 기점으로 전화 선 속에서 변성되고 거칠어진 목소리마저도 나긋나긋했고 상냥했으며 청명에게 협조적으로 변했던 것이다. 당초 청명은 명경이 굉장히 사무적으로 나오거나 귀찮아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고, 때문에 아주 짧은 통화 속에서 어떻게 자신이 필요한 것을 모두 어필할지를 고민했다. 통화의 처음 삼십 초 간 그는 자신의 예상이 적중했다고 여겼다. 그러나 명경은 오래 전 잃어버린 아이를 찾는다는 말을 듣자마자 태도가 돌변하여 자신이 당사자라도 되는 마냥 최대한 모든 것을 돕겠다는 말을 전해왔다. 그럼에도 그녀는 청명에게 가진 자료들을 보여주는 것은 상관이 없으나 아이들의 정보를 마구 유출하는 것은 원치 않는다고 말해왔다. 명경은 청명에게 몇 가지 조건을 제안했다. 첫째로 자신, 혹은 자신의 대리자 앞에서만 자료를 볼 것, 둘째, 가능하면 명가에 와서 자료를 볼 것, 셋째, 청명이 정말로 아이를 찾기 위해 정보를 열람하고 있는지를 증명하기 위해 명경의 물음에 답할 것이 그것이었다. 종래에 청명은 명경의 끊임없는 질문 공세에 저가 질릴 듯한 지경이 되었다. 그녀는 조심스러운 어투로 아이가 실종될 당시 몇 살이었는지부터 시작하여, 가족 관계는 어찌 되는지, 아이의 부모는 잘 있는지(잘 있을 턱이 없잖은가), 전화를 한 본인은 누구이며 어느 집안 사람인지 꼬치꼬치 캐물었다. 청명은 위장신분으로 상해로 발걸음을 한 차였고 그 때문에 명경의 질문들은 답하기 괴롭기 짝이 없는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청명은 이 사람 또한 제 동생처럼 한간이라 자신을 잡아 가두기 위해 질문하는 것이 아닐까하는 엄한 상상까지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난데없는 호구조사를 끝내고 나자 명경은 어딘지 힘이 빠진 듯 내일 기사를 보내겠다고 말했다. 청명은 그에 거절하고 자신이 알아서 가겠다고 답했다. 그리하여 청명은 지금 명가 저택의 문간에 서 있었다. 초인종을 누른 지 한참이었다. 청명은 손목시계를 힐끗 내려다보았다. 오라던 시간이 맞는데 안에 사람의 기척이 없었다.
순간 안에서 쿵쿵거리는 발소리가 들리는 것도 같았다. 청명은 서 있던 그대로 차분하게 기다렸다. 발소리가 더 둔탁해지며 커졌다. 그리고 문이 활짝 열렸다. 청명은 입도 못 열고 눈만 동그랗게 떴다.
“…고청명?”
문 안에서 등장한 것은 놀랍게도 면식이 있는 자였다. 청명은 익숙한 눈과 얼굴에 낯선 옷과 머리모양을 받아들이려 애썼다. 이름이 아성이었던가. 독일에서 만난 적이 있었다. 익숙한 공간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을 조합하려는 시도는 아성도 하고 있었다.
“누님이 말하던 온다던 분이 당신인가.”
아성이 혼잣말처럼 툭 내뱉는 것에 청명은 아무 답도 할 수가 없었다. 당황과 반가움이 어지럽게 섞여 침묵만 흐르던 가운데 청명이 간신히 입을 열었다. 반갑다. 어? 응, 그래. 맹하니 눈꼬리를 늘어뜨리던 아성의 눈에 부지불식간에 총기가 돌았다. 아성은 몸을 바르게 세우고서 말끔한 미소를 만들었다.
“일단 들어오시지요. 누님께서 부탁하셨습니다. 일이 조금 늦어지신다고요.”
아성은 손님을 앉혀놓고선 주방에서 미적거리고 있었다. 괜히 찬장을 열어보고 차를 들여온 날짜를 하나하나 확인하여 오래된 것을 꺼내 정리하고 있는 것이다. 차는 우리는 데 시간이 걸린다. 차를 부탁했다면 아주 조금이나마 더 부엌에 머물며 그를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청명이 부탁한 것은 그저 물 한 잔이었다. 다시 말해 아성이 주방에서 이러고 있을 이유가 하등 없다는 의미였다. 아성은 그럼에도 아주 조금이라도 주방에 더 있고 싶었다. 안타깝게도 아향은 여느 때처럼 주방을 청결하게 정리해놓았고 아성이 할 수 있는 것은 묵은 차 정리하기 따위뿐이었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명가에 묵은 차는 없었다. 아성은 기다란 손가락으로 괜히 찻통만 뒤적거리다 이내 포기하고 찬장 문을 닫았다. 날씨가 차가운 것을 감안하여 데운 물을 담은 컵을 나무로 된 수수한 트레이에 받쳐 나갔다. 깎아놓은 것처럼 생긴 청명은 남의 집에 온 것이 적나라하게 보이는 어색한 자세로 앉아있었다. 아성은 자신이 느끼는 어색함을 청명도 느끼지 않기를 바랐다.
“여기 물입니다.”
“아, 예…….”
아성은 어색하고 당황스러운 것을 못 견뎠다. 그가 그런 감정을 느낄 때는 진심어린 관계를 만들 때 뿐이었다. 소년기를 거쳐 청년기까지 아성이 아는 것은 명경과 명루, 명대 뿐이었고 파리로 가 이쪽 일을 하게 되면서는 모든 만남이 곧 일이었기 때문에 친해지기까지의 어색함을 견딜 필요가 없이 가면 하나만 쓰면 되었다. 아성은 이번에도 일의 탈을 썼다. 생각해보면 우스운 일이었다. 청명과는 이미 독일에서…….
아성의 귀는 저 멀리서 명경의 차가 들어오는 소리를 잡아내는 능력이 있었다. 아성은 청명이 입을 여는 것을 보고서는 웃으며 재빨리 말했다.
“누님이 오신 모양입니다.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아성은 도망가듯 저택 밖으로 나가버렸다.
청명은 뭔가 얼떨떨한 기분을 지울 수가 없었다. 목구멍을 타고 넘어오는 물은 따뜻했고 청명은 아성이 사라진 틈을 타 소파에 몸을 늘어뜨렸다.
아성과는 독일에서 만난 적이 있었다. 청명은 흰 셔츠와 짙은 색 면바지가 얼마만큼 품이 남아돌았는지를 기억하고 있었다. 머리칼이 어떻게 제멋대로 이마를 덮었는지, 그리고 갖은 걱정으로 인한 미간 주름 하나 없던 얼굴이 얼마만큼 깐 달걀처럼 매끈했는지를 알고 있었다. 고작 일주일 여를 같이 지냈는데 이토록 선명하다.
딸랑이는 종소리에 청명이 몸을 일으켰다. 여전히 당혹스러움을 숨기고 있는 밋밋한 표정의 아성 뒤로 모피를 두르고 있으면서도 사치스런 느낌이 거의 없는 단정한 이목구비의 여자가 따라들어왔다. 아성과는 닮은 데가 하나도 없었다. 청명은 구십 도로 몸을 숙여 인사했다. 청명은 가명을 대는 것도 잊지 않았다.
“곽건화입니다. 시간 내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본명과는 다른 이름에 아성이 반응할까 걱정했지만 아성은 내내 그 밋밋한 표정을 유지하고 있었다.
“명경입니다. 당연히 도와야 할 일인걸요. 아성, 내 방에 가서 꺼내둔 서류 봉투 좀 가져다주렴.”
“예, 누님.”
아성이 신속한 몸짓으로 시야에서 사라졌다. 청명은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해서 불쑥 올라오는 호기심을 애써 억눌렀다. 아성은 금방 누런 봉투를 들고 내려왔다. 직각으로 몸에 붙여 구부린 팔에 새파란 코트가 들려 있었다. 아성은 명경에게 봉투를 건넸다.
“더 시키실 일 없으시면 저는 이제 나가봐야할 것 같습니다.”
“그래, 내가 갑자기 너를 불러서 네 형이 혼자 고생이 많겠다. 이따 저녁은 집에 와서 먹니?”
“잘 모르겠어요. 보고 전화하겠습니다. 그럼.”
아성은 반듯하게 고개를 숙여 청명에게까지 인사를 한 뒤 뒤돌아보지 않고 나갔다. 경계의 눈빛이 핥듯이 청명의 얼굴을 치고 지나가는 것에 그는 속으로 헛웃음을 터뜨렸다. 따지고 보면 아성이 경계할 것이 넘쳐나기는 했다. 청명은 신분을 숨기고 가명을 댔으며, 어쩌면 아성과 청명이 공유한 짧은 시간 속에는 몇 가지 비밀이 숨겨져 있을 지도 모를 터였다. 어쨌든 아성이 완전히 사라지고 나자 청명은 이제 호기심을 풀 때가 되었다 생각했다.
“동생분이십니까?”
“우리 둘째죠―명경은 내내 아성이 나간 문 쪽을 보고 있다가 홱 몸을 돌렸다―그럼 해야 할 이야기나 할까요. 해주신 얘기에 맞춰서 가져온 명단이예요. A고아원, 1916년 실종. 해서 그 이후로 A고아원이 문을 닫을 때까지 일 년에 한 번씩 올라온 보고서에서 아동 명단만 발췌했습니다.”
“가지고 나가는 건 안된다고 하셨죠?”
“혹시 모르니까요. 신상 정보도 다 적혀 있고....... 함부로 나돌아다녀서는 안되지요.”
“그럼 여기서 제가 가진 자료와 비교 대조를 해봐도 괜찮겠습니까?”
“얼마든지요. 조용한 곳에서 보고 싶으시겠지만, 가급적이면 제 앞에서 봐주시면 좋겠네요.”
“물론입니다. 잠시면 됩니다.”
희끗한 머리의 사내가 청명에게 주었던 서류는 이미 한 부씩 복사되었다. 청명은 두 가지 자료를 차분히 비교하면서 만년필을 꺼내 자신이 가져온 복사본에 소위 우선순위를 표시했다. 그의 사촌이 거쳐간 길들은 어떤 흔적만 존재할 뿐 그 경로와 최종 목적지를 가릴 수 없으므로 이렇게 우선순위를 표시해봤자 그 또한 추측에 의존한 것이었다. 청명은 좀 더 가능성 있는 추측을 하는 데에 만족하고 있었다. 어쨌건 ‘최초의 고아원’에서 팔찌가 발견된 것은 사실이었고(이 또한 단 한 명의 증언에 의거한 것이었지만) 그의 사촌이 그 고아원에 머물렀을 가능성이 다른 고아원에 있었을 가능성보다 부쩍 높은 것도 사실이었다. 청명은 자신이 만년필로 표시하고 있는 이름들 중에서 그의 사촌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자 기분이 이상해졌다. 명경은 차를 마시면서 차분히 청명을 기다리고 있다가 청명이 만년필 뚜껑을 닫자 불쑥 말했다.
“그 고아원이 문을 닫았을 때 아이들은 다른 곳으로 보내졌다고 들었어요. 다들 흩어졌지요. 알고 있나요?”
“예, 알고 있습니다.”
“명단끼리 비교를 하면 누가 어디로 갔는지 알아낼 수는 있겠죠, 하지만, 아시겠지만, 상해의 고아원이 한두 개가 아니라 너무 오랜 시간이 걸릴 거예요. 혹시 어떻게 찾아볼지, 생각해둔 방법이 있나요?”
있을 턱이 없었다. 명경은 이미 그런 결과를 예상한 듯 말을 이었다.
“복사는 안돼요. 제가 안된다는 걸 몰래 하실 분은 아닌 것 같지만 그래서 반출도 안 됩니다. 만일 정말 그렇게 많은 자료가 필요하다고 여기시면, 다시 여기 오세요. 몇날 며칠을 계셔도 괜찮습니다. 나가실 때 몰래 가지고 나가지 않는다는 걸 증명만 하시면 돼요.”
청명은 진심으로 명경에게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청명이 일어나 인사를 하려는 것을 명경이 손을 들어 막았다.
“그리고…… 그 아이가 고아원으로 간 것이 아니라, 바로 다른 집으로 입양되었을 가능성은요?”
“…생각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되었다면 행방을 찾기는 더 힘이 들겠지만, 아예 없을 일은 아니지요.”
“만일 그렇다면 제 선에서 찾을 수 있는 방법은 없을 겁니다. 아니길 바라야지요.”
청명은 자신이 가져온 서류를 다시 가방에 넣었다. 그는 반쯤 일어서다, 불현 듯 어떤 예감이 뇌리를 스치는 것을 느꼈다. 청명은 돌아 나가던 아성의 뒷모습을 떠올렸다.
“외람되지만 혹시 그렇게 아이를 데려다 키우셨습니까?”
명경은 그저 인자하게 웃었다.
“제가 말하는 아이와 관련이 없습니까?”
“데려온 연도부터 거리가 먼걸요.”
청명은 스스로 납득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에 연락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청명이 나와보니 해가 저물고 있었다. 겨울 낮은 짧다. 희고 잘 다듬어진 돌바닥을 걸어 대문을 나서면서 그는 저녁거리로 무얼 포장해 갈지를 고민했다.
재
업
은
사
랑
미친 말도 안돼 내아내 입갤ㅠㅠㅠㅠㅠㅠ
꿀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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