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건화왕카이
문제있으면 자삭
3.
식당 안에는 사람이 미어터졌다. 커다란 유리창 안으로 흘깃 보아도 남은 테이블이 없는 것이 보였다. 청명은 다른 식당으로 가는 것이 나을까 잠시 고민하다 얼마나 기다리면 되는지 직원에게 묻기로 결정했다. 혼자 왔냐는 질문에 그렇다고 대답하자 그 직원은 잠시만 기다리라며 종종걸음으로 사라지더니 곧 돌아와 합석을 제안해왔다. 그가 가리킨 손 끝에는 동그랗고 작은 머리의 동양인 남자가 하나 있었다. 분명 의자 하나가 남아있었고, 직원은 합석을 하면 지금 당장 앉아 식사를 하실 수 있을 거라며 유혹 아닌 유혹을 해왔다. 파란 눈이 이글이글 타오르는 것 같아 청명은 얼결에 알겠다고 대답을 해버렸다.
남자의 눈은 송아지마냥 크고 둥글었다. 어색하게 인사를 나눈 것 같은데 돌이켜보면 어느 나라 말로 인사를 했는지도 미지수였다. 청명은 메뉴판으로 얼굴을 가리다시피 한 채 뚫어져라 그림만 바라보다 남자에게 말을 걸었다. 메뉴 좀 추천해주실 수 있나요? 무표정한 채 큰 눈만 말똥말똥 뜨고 있던 남자의 얼굴이 웃음기에 배었다.
“동향인 것 같은데.”
자신의 이름을 아성이라 소개한 남자는 자신이 먹던 것과 같은 것을 추천했다. 청명은 역시나 자신이 먹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어디로 들어가는지도 모르게 음식들을 해치웠다. 청명은 내내 황망했고 아성은 내내 여유로워 보였다. 그 덕분에 청명이 식사에 걸리는 시간은 평소보다도 짧아져, 아성이 훨씬 먼저 도착해 저녁식사를 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둘은 거의 같은 시간에 식사를 끝냈다.
그 때까지도 식당에는 사람이 많았고 둘은 식사가 끝나자마자 식당 밖으로 나왔다. 바로 헤어질 수도 있었지만 둘 다 그럴 생각은 없었다. 태만 내지 않을 뿐 간만에 중국인을 만나 반갑고 기쁜 것은 매한가지였던 것이다. 맥주를 한 병씩 사들고 둘은 밤거리를 걸었다. 더웠지만 간간히 건물 사이로 바람이 불었고 맥주는 차가워 오히려 기분이 좋았다. 청명이 긴 휴일을 가지게 되어 베를린으로 온 것과 마찬가지로 아성 또한 수업이 없는 때라 여행을 왔다고 말했다. 청명은 그 스스로 평소 낯선 이에게는 과하게 정중하고 귀찮은 일을 싫어한다고 여기고 있었으나 이번만은 예외였다. 이국 땅에서 만난 소년같은 중국인은 자신보다 유연했고 말이 능숙했으며 거리낌이 없었다. 청명은 자신이 이 청량한 이에게 휩쓸리는 것인지 이끌리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아성이 며칠 째 그 식당을 이용했다기에 근처에 지내냐고 묻자 그는 순순히 머무는 곳을 알려주었다. 청명의 숙소와 멀지 않은 곳이었다. 둘은 남은 일주일 가량의 시간을 함께 보내기로 합의했다.
아성은 자신의 본래 신분을 안다. 그리고 자신이 가명을 대는 것도 들었다.
아성에 대해 청명이 가지고 있는 정보는 많지 않았다. 청명은 다음날 아침 눈을 떠 침대에 누워 깨어나며 그 생각을 했다. 명씨 가문의 아이다. 이름은 아성이다. 파리 소르본느에서 유학을 했다. 베를린에 잠시 있었고 거기서 자신을 만났다. 명씨 가문의 장남 명루는 신정부 경제부 차관이다. 아성은 명루와 일하고 있다. 사실을 늘어놓은 뒤 청명은 추측을 시작했다. 만일 아성이 명루처럼 한간이라면 그는 고청명이라는 사람이 일본군에 맞서 싸우던(실제로 자신이 전선에 있느냐 후방에 있느냐와는 관계없이) 군인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가. 알고 있다면 아성은 자신을 76호에 잡아넘길 생각이 있는가.
청명의 이 모든 생각은 과히 느긋하게 이루어져, 그가 아성과 만나야겠다는 결론을 내렸을 때 이미 그는 국수를 말아 식사를 끝낸 뒤였다. 청명은 그제야 거리로 나가 신문을 한 부 사서 도로 돌아왔다. 신문의 글자들은 꿈처럼 흐릿했고 청명은 자신이 아직도 꿈 속을 헤메는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꿈 속은 여름 밤이었고, 지금 창 밖은 스산한 겨울 아침이었다. 청명은 신문에 집중하지 못하고 자꾸 흐린 창밖을 내다봤다.
청명은 2주일에 걸쳐 매번 다른 요일, 다른 시간에 명공관을 방문하고 있었다. 그의 속셈이 무엇인지는 몰라도 오늘은 목적을 성취할 수 있을 것처럼 보였다. 명경은 일 때문에 멀리 외출하여 모레나 돌아올 것이고, 외출 직전 걸려온 정중하고 예의바르며 반듯한 전화에 명경은 별 의심없이 흔쾌히 그의 방문을 허락했던 것이다. 덕분에 아성은 명경의 대리자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 최대한 맡은 일들을 빨리 마무리해놓고 명가로 돌아가야했다.
“집에 명대도 있잖느냐.”
“누님께서 언제 명대에게 그런 일을 맡기셨어야지 말이죠.”
아성이 싱긋 웃었다. 명루의 미간에는 도통 펴지지 않는 두 줄의 주름이 선명히 자신을 뽐내고 있었다. 아성은 한 손으로 컵받침까지 말끔히 받친 커피 한 잔을 내밀어 명루의 책상 위로 올려두었고 남은 한 손에 든 제 커피를 감싸쥐었다.
“지금이 어떤 때인데 그런 일까지 겪어놓고 함부로 사람을 집에 들이시니……. 집에 있는 사람도 조심해야 할 판에.”
집에 있는 사람이란 오늘도 아침부터 친구들을 만난다는 핑계를 대고 나간 명대 얘기였다.
“누님이 도와주고 싶어하시는 이유 아시잖아요.”
아성 또한 명대를 떠올렸다. 명경과 명루는 항상 명대에게 아버지를 찾아주고 싶어했던 것이다. 낯선 이에 대한 누이의 과하다싶은 호의가 거기에서 기인했다는 것은 명대 본인도 아는 이야기였다. 명경이 아마 그래서 더욱 명대와 그 이를 단 둘이 남겨놓고 싶어하지 않았던 것이 아닐까 아성은 생각했다.
“혹시 그 사람이 찾는다는 아이,”
아성은 고개를 저었다. 명루의 말이 뚝 끊겼다.
“명대는 아닙니다. 그 아이는 부모님이 양쪽 다 살아계시답니다.”
“그럼 그 사람은 제대로 조사해 봤느냐?”
곽건화요. 예. 아성은 다시금 문이 제대로 잠겨 있는지 확인했다. 명루는 예민하게 주위를 살피는 아성의 모습을 보더니 일어나 문과 먼 안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아성은 커피를 테이블에 놓아두고 그 뒤를 따랐다.
“지방 유지의 아들입니다. 현재는 무직이고 이전까지는 집안 재산 관리나 하던 모양입니다. 상해에는 작년 12월에 들어왔습니다.”
“얼마 안 됐군.”
“북쪽 에비 로드 23번지 2층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정말로 사촌을 찾으러 온 건 맞는 것 같더군요. 계속 고아원과 접촉하고 있습니다. 그 집안에도 정말로 잃어버린 아이가 있긴 하고요. 솔직히 조사한 것을 그대로 믿는다면 정말 평범한 보통 사람처럼 보입니다.”
“접촉한 사람은?”
“특별한 사람은 없습니다. 적어도 지켜보기 시작한 이후로는요.”
명루는 커피가 조금 남은 잔을 내려놓고 손으로 책상 끄트머리를 짚었다. 아성은 버릇대로 약간 등을 굽히고 생각에 빠진 명루가 자신이 흘린 단어 하나를 기민하게 잡아채기를 기다렸다. 말한 대로 곽건화의 과거 행적은 진짜라 믿을 수 있을 만큼 촘촘하고 섬세했으며 또한 구체적이었다. 그가 현관문턱에서 건넨 반갑다는 인사가 아니었다면 아성마저 정말로 얼굴이 똑닮은 곽건화라는 인물이 실존하는 것이 아닐까 고민했을 것이다.
“너는 의문이 가는 거구나. 그렇지?”
돌아서 눈을 맞춰오는 명루에게 아성은 확신을 갖고 답변했다.
“의문이 아닙니다. 저는 그 자를 압니다.”
아성은 명루의 고개가 기웃하는 것을 보고 눈꺼풀을 내리깔고 최대한 객관적으로 들리도록 고청명의 이름을 꺼냈다.
“이름은 고청명. 아실 만한 집안의 아실 만한 아들입니다. 독일 군사학교에서 수학하는 동안 베를린에 가 있던 저와 만났었습니다. 당시 저는 임무 탓에 베를린에 머무르고 있었는데, 아시다시피 당시에는 제 신분이 형님께도 비밀인데다 지켜보는 눈도 있어서 적당한 구실이 필요했었습니다. 해서,”
“친구로 지냈다?”
“친구로 지내면서 같이 여행을 했습니다. 오래는 아니고. 일주일 정도요. 그 때는 서로에 대한 이야기를 거의 하지 않아서, 고청명의 집안에 대해서 알게 된 것도 중국에 돌아오고 난 후였습니다.”
“국민당이라고.”
“예.”
“그런 것을 왜 이제와서 말하는지 물어봐도 될까.”
돌아보는 명루의 눈빛이 살벌했다. 아성은 절로 몸을 움츠려 팔다리를 쭉 펴고 고개를 쳐들었다. 군인의 자세였다. 순간 머리가 하얗게 비는 것이 아성의 목을 메게 했다. 아성은 고청명과의 만남부터 시작해 그의 신분을 알게 되었을 때까지 제가 무슨 생각을 했었는지를 찬찬히 되살폈다. 명루는 차분하게 그를 기다렸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군인학교에 다니고 있을 거라는 생각은 했었습니다. 하지만 그저 유학중인 학생일 뿐이었고 그의 집안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없었습니다. 해서 말씀을 안 드렸습니다. 그의 집안에 대해 알게 되었을 때는 이미 지나간 일이고 만날 일이 없어 상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지난 번 다시 만난 뒤로는…… 그의 가짜 신분이 너무 완벽해서, 아무 문제가 없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작은 일이라도 별 일이 될 수 있으니 나와 상의하라고 몇 번을 말했지 않던?”
“죄송합니다.”
아성은 고개를 숙였다. 명루의 손이 목덜미에 툭하고 내려앉았다가 매끈한 어깨를 쓸며 떠났다. 아성은 스스로 고청명을 별 거 아닌 일로 치부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했다. 고청명과 있었던 시간이 사소하고 장난스러웠기 때문에 지금의 상해와 자신의 신분과 그의 신분마저도 사소한 것으로 착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성은 순간 뒷목이 차갑게 식는 것을 느꼈다.
“내가 알았다손 치더라도 무얼 했겠니. 선택은 네 누님이 하신 거지. 그의 신분은 얼마나 확실하냐.”
“철옹성 같습니다. 단순히 가짜 신분증만 가지고 들어온 것이 아닙니다. 과거 행적까지 꼼꼼하고, 서류들은 물론이며 주요한 것들은 실재하고 있습니다.”
“네가 그렇게 말할 정도면 괜찮겠지. 쳐들고 다니는 얼굴이 유일한 흠이로군.”
명루는 지난 날 집에서 나서다 고청명을 훔쳐 본 적이 있었다. 물론 명루에게 그럴 의사는 없었다. 아성은 잘난 얼굴을 내놓고 다니는 건 명대도 마찬가지 아니냐고 되묻고 싶었다.
“그런 얼굴을 누가 잊겠느냐고. 그 작자가 제 아들을 적진으로 내돌리는데 사전에 준비를 철저히 한 모양이다. 그 사촌이란 아이가 살아있는지 나도 궁금하구나. 아성.”
“예.”
“고청명에 대해서는 네가 가장 잘 알겠지. 그 자가 변칙적으로 방문하려 수 쓰는 이유가 뭘 것 같으냐.”
“저를 만나기 위해서입니다.”
“음.”
명루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성은 자신이 한 말이 명루에게 가 합리적이고 이성적으로 들리길 바랐다. 왜 그렇게 생각하지? 아성은 명루의 물음에 대답했다.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는 고청명이 자신의 본래 신분이 노출된 것에 대해 불안감을 느끼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를 만나 확인을 짓고자 할 겁니다. 두 번째는……”
핏줄이 쿵쾅쿵쾅 내달렸다. 아성은 심장이 튀어나오려는 듯 세차게 두박질치는 것을 안정시키려 본능적으로 한 손을 배 위에 대고 눌렀다. 그럼에도 귀가 멀 것 같은 심장소리는 줄지를 않아, 아성이 안배해놓은 말 대신 다른 말이 불쑥 튀어나갔다.
“단지 제가 반가워서 그럴 겁니다.”
낮은 목소리가 무게가 없어 꿈처럼 떠버렸다. 꽤 좋은 친구가 됐던 모양이지? 놀랍게도 명루는 그에 수긍하고 있었고 수상쩍은 아성 신체 내부의 활동에도 불구하고 밖으로는 별 티가 나지 않은 모양이었다. 순식간에 심장이 안정을 찾았다. 아성은 목구멍까지 들어찬 공기를 최대한 소리 없이 움직임 없이 느릿하게 빼냈다.
“아성.”
“예.”
아성이 대답했다. 명루는 어느덧 뒤돌아 옷걸이에서 코트를 내리고 있었다.
“내게 숨기는 것이 있으면 안 돼.”
“…물론이죠.”
바로 대답했어야 했다. 틈이 생겼다. 1초도 되지 않는 짧은 틈으로 명루는 아성을 들여다 볼 것이다. 틈으로 새어들기 시작한 것들이 언젠가 구멍을 넓히고 마음을 부서뜨려 산산조각내지 않을까 아성은 순간 불안감에 휩싸였다. 틈으로는 무엇이 새고 있단 말인가. 아성은 여느 때와 별 다를 것 없는 표정으로 자신을 보며 미소짓는 명루에게 마주 웃어보였다.
거짓말은 어려운 것이구나.
“같이 집에 들어가자. 오늘 하루는 그래도 될 것 같구나.”
4.
“뭐야, 부엌도 있네.”
아성은 청명의 숙소에 들어오자마자 대뜸 부엌부터 살폈다. 싱크대 위 찬장을 열고 그릇 상태를 이리저리 살피더니 급기야 냉장고를 활짝 열었다. 당연하게도 청명의 냉장고에는 식재료는 단 하나도 없고 온통 마실 것 뿐이었다.
“우유?”
식탁에 앉아 태연하게 아성이 하는 양을 지켜보던 청명의 눈에도 당혹감이 깃들었다. 아성은 기가 막히다는 듯 우유병을 꺼내들어 청명의 눈 앞에 딸랑딸랑 흔들었다.
“밥은 안 먹고 우유 마시고 살아?”
“밥은 사서 먹지.”
“한 끼에 얼만데 매번 사먹어.”
청명은 제 누나나 할 법한 잔소리에 못말린다 생각하며 고개를 저었다. 아성이 우유만 늘고 물어진 것과 달리 청명의 냉장고는 꽤나 다채롭게 구성되어 있었는데, 아성의 말대로 식재료는 단 하나도 없었고 들어있는 것이라고는 물, 우유, 맥주 뿐이었다. 아성은 싱크대 아래에서 지나치게 말끔한 팬과 냄비를 보고 혀를 츳츳 찼다. 내 방에 이런 부엌이 있었으면 매일 요리해먹었을 거야. 아무 음식이나 잘 먹는대도 가끔은 고향 음식이 그리운 거라고.
“난 요리할 줄 몰라.”
“도련님들이 다 그러시지.”
아성은 문가에 내려두었던 커다란 종이 봉투를 가볍게 안아들더니 식탁 위에 쏟아냈다. 청명은 도저히 뭔가 많이 들어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깃털같은 종이 봉투에서 생닭이 쿵하고 떨어지자 눈만 동그랗게 떴다. 그 봉투는 흡사 화수분처럼 자꾸만 무언가를 뱉어내, 청명은 진심으로 뒤집어지기 전 봉투 안의 상태가 어땠는지에 대해 호기심이 생겼다.
“사온 게 이거였어? 아까 들어오면서 뭐야, 부엌도 있네, 라고 들은 건 내 착각인가?”
“여기에 주방 있는 건 알고 있었어. 니가 매번 나가서 먹으니 의구심이 들었던 것 뿐.”
“이걸 한 끼에 다 해치울 수 있는 거야?”
청명의 오른 손에는 시뻘건 생닭이 매달렸고 왼 손에는 커다란 무가 한 통 잡혀있었다. 청명은 마치 저울질을 하듯 제 양 손을 끊임없이 흘긋댔고 아성은 코를 만지더니 잔소리를 다시 시작했다.
“요리할 줄 모르는 도련님을 위해 집사 아성이 요리 좀 해드리겠다잖아. 싫어도 먹어야 해. 거절은 거절한다.”
“이걸 한 끼에 다 먹을 수 있느냐고 물었어.”
“오늘 못 먹으면 내일도 해먹고 내일 모레도 먹으면 되잖아. 내 돈으로 샀는데 무슨 문제야. 나는 도련님처럼 지갑 사정도 풍족하지 못한 근로장학생일 뿐이라고.”
아성은 허리에 손을 얹고 다다다다 쏘아댔다. 품 넓은 셔츠가 허리에 딱 붙으면서 마른 몸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청명은 다시 얌전히 생닭과 무를 내려놓고 항복했다는 의미로 양 손을 들어보였다. 아성의 얼굴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번졌다. 반대로 청명은 영 못마땅한 듯 얼굴을 구기고 있었다. 왜 그래, 먹기 싫어? 내 요리 실력이 의심스러운가? 아성이 청명 곁으로 다가가 툭 옆구리를 쳤다. 장난스러운 물음에 청명도 억지로 웃었다.
“너 모레면 간다며. 남으면 모레까지 어떻게 요리를 해먹어.”
청명은 생각보다도 더 순진하고 투명한 데가 있었다. 아성은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순수하고 강직한 도련님 앞에서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를 세심히 골랐다. 그 씁쓸한 고요함 속에서 아성은 가까운 손으로 청명을 팔을 그러쥐며 입꼬리를 끌어올려 어설프게 웃었다.
“아쉬워?”
아성의 말에는 목적어가 없었다. 아쉽냐는 물음은 그것이 기인지 아닌지는 묻는 것이 아니라, 무엇이 아쉬운지를 네 입으로 듣기 위한 것이었다. 청명은 아성이 내내 이런 식이었던 것도 떠올렸다. 둘 사이의 일이 자신과는 무관하다는 듯이 아성은 어느 상황에서건 태연했고 거리낌이 없었고 말을 아꼈다. 아성은 지극한 방관자였고 속내를 내색한 적 없는 수동자였다. 모든 관계에서는 지는 사람이 있다. 이 관계에서 지는 사람은 청명이었고 아성은 이기지도 지지도 않는 무관자였다. 청명은 자신만 매달리는 것 같은 이 관계에 대해 순간 울컥 원망이 솟아오르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청명의 시선이 똑바로 아성에게 들어오자 아성은 그 원망을 감지한 듯 화들짝 놀라며 청명의 손목까지 내려와 있던 제 손을 떼어버렸다. 청명은 이내 반쯤 포기한 듯 원망을 거두곤 장난스럽게 말했다.
“너 없으면 저거 다 버려야 하잖냐. 아니지, 혹시 또 몰라. 있어도 버려야 할지. 어디 그렇게 자랑하는 요리 실력 좀 보자. 뭐 해먹을 건데?”
아성은 잠시 망설이는가 싶더니 셔츠 소매를 팔꿈치까지 둥둥 걷어붙이고 부엌 안으로 들어갔고 청명은 그대로 식탁에 앉아 그 기꺼운 장면을 감상했다. 아성은 드물게 뼈대가 가늘었고 붙은 살점도 얼마 없어 한 눈의 풍만함이나 풍족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대신 가는 만큼 긴 터라 그 우아하기까지 한 손끝이 무언가를 만지고 힘을 주며 자연스럽게 움직일 때면 아름다운 것을 숱하게 본 청명의 입에서도 감탄이 나오지 않을 수가 없었다. 동그란 머리통에 삐죽하게 달린 귀를 거쳐 흐르듯 목선으로 내려온 시선이 금세 붉게 드러난 팔꿈치를 거쳐 옷 속으로도 그 너비를 가늠할 수 있는 허리까지 다다랐다. 청명의 키가 아성보다 조금 작기는 하지만 맘 먹고 붙든다면 한 팔 안에 가둘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아성의 말마따나 음식은 정말로 음식 꼴을 하고 있었고 꽤 맛도 있었으며 무엇보다 그는 그 음식의 양과 종류에 비하면 꽤 짧은 시간 안에 요리를 완성하기까지 했다. 샐러드 볼 가득 담긴 밥, 닭을 삶아 찢어넣고 무과 끓인 뒤 따로 삶아 넣은 이름 모를 국수요리, 토마토 계란 볶음 모두를 한 시간 안에 완성하는 동안 청명은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분주히 돌아다니는 아성의 뒷모습만 바라봤다. 심심할 턱이 없었다. 청명은 진심으로 맛있다고 할 수 있는 요리들을 입 안에 쑤셔넣으며 학교 급식이 얼마나 퍼석하고 맛이 없는지와 독일 음식의 낯섦에 대해 토로했다. 아성은 그저 빙긋이 웃었다.
“넌 대체 뭐 하는 사람이야?”
아성이 청명의 냉장고에서 맥주를 두 병째 꺼내 마시고 있을 때 청명이 대뜸 물었다.
“우리 나라 술이 마시고 싶은 사람. 맥주는 너무 도수가 낮지 않아?”
“뭐 하는 사람이냐니까.”
밍밍한 술맛에 대해 의견을 나누고 싶은 것은 청명도 마찬가지였지만 청명은 자신의 욕구는 억누르기로 했다.
“근로장학생.”
“호텔에서 자고?”
“별로 비싼 데도 아니잖아.”
“너 내가 모를 줄 알았나본데, 니가 입고 다니는 셔츠 비싼 거 다 알아.”
“근로장학생인데 집이 좀 잘 살아.”
“집이 잘 사는데 근로장학생이야?”
“파리에선 외국인이라서 집안 재산 보는 것도 아닌데 무슨 문제야.”
아성은 그 쯤 맥주 한 병을 다 마셨다. 냉장고에 가까이 앉은 청명이 손을 뻗어 새 맥주를 꺼냈다. 그는 당연한 듯 그걸 아성에게 건네주려다, 아성의 손 끝이 맥주병 표면에 닿는 것을 보고는 홱 뒤로 손을 뺐다.
“뭐해, 줘.”
“뭐 하는 사람인지 알려주면 줄게.”
“사다먹고 만다.”
“지금 문 다 닫았을걸.”
아성의 팔은 길어서 그가 있는 힘껏 팔을 뻗자 다시 손 끝이 맥주병 표면에 생긴 물기를 만지고 지나갔다. 잡지 못한 것은 청명이 의자에서 일어나면서까지 몸을 뺐기 때문이었다. 아성이 인상을 찌푸리며 짜증내는 모습을 처음으로 본 청명이 깔깔대며 소년처럼 웃었다. 아성의 몸은 날랬고 가벼웠으나 군사학교에서 훈련을 받고 있는 청명의 힘도 뒤지진 않았다. 둘은 잡힐 듯 잡히지 않을 듯 자그만 플랫에서 술래잡기를 하며 뛰어다니다가 청명이 침대에 발이 걸려 넘어지면서 잠잠해졌다. 아성은 원하던 맥주를 얻었고 청명은 원하던 아성의 허리를 안았다.
“넌 아쉽지 않아?”
아성의 허리가 청명의 한 팔 안에 다 들어오지는 않았다. 청명은 아성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엉망으로 엎어진 탓에 얼굴을 보지 못한다는 것이 이렇게 원통할 수가 없었다. 아성은 말이 없었다. 청명은 몸을 일으키려는 아성의 허리를 꽉 붙들었다. 숨결이 자연스럽게 섞여들 만큼 근거리에서 마주친 얼굴에는 아무 표정이 없었다. 다음 순간 청명의 손에서는 맥없이 힘이 풀렸고 아성은 고무공이 튀듯 매끄럽고 빠르게 일어나 섰다.
“그냥 흐르듯 만났다 흐르듯 헤어지는 것 뿐이야. 꼭 어디엔가 흔적이 남아야만 하는 건 아니니까.”
보통 말끔하게 넘겨져 있던 아성의 머리는 잔뜩 흐트러져 이마를 반쯤 덮고 있었다. 청명은 몽롱한 기분으로 일어났다. 아성은 잔뜩 골이 나서는 제 바지 무릎께를 가리키고 있었다. 액체에 젖은 자국이 무릎을 기점으로 하여 아래로 갈수록 짙어졌다.
“너 때문에 맥주 쏟았어.”
아성이 든 맥주가 아니라 테이블 위에 놓여있던 청명의 것 말이었다. 아성의 말마따나 테이블 위에는 노란 액체가 범람해 뚝뚝 흐르고 있었다. 저걸 몰랐다니 참 신났던 모양이라 스스로를 자책한 청명은 화장실에서 수건을 가져와 바닥부터 닦았다.
“나는 안 닦냐.”
“옷 버린 걸 닦아서 어떡해. 내가 빨아둘게.”
“나는 뭐 입으라고.”
“내 옷 꺼내 주며 되잖아.”
“너 키가 작아서 내가 입으면 짧아.”
“하루정돈 괜찮아.”
“…미안. 내가 쏟은 거야, 그거.”
바닥을 다 닦고 테이블 위의 액체를 한 데 모으는 데 열중하던 청명이 문득 고개를 들었다. 확 수건을 던져버릴까 하다가 청명은 참았다. 어차피 매달리는 쪽은 저였고 이까짓 수발 정도는 대신 들어줄 수 있었다. 내가 할게. 아성이 가까이 다가와 안절부절 못하는 꼴이 오히려 반가웠다. 청명은 묵묵히 아무 말도 안하고 젖은 것들을 닦았고 아성의 좌불안석은 갈수록 심해져 수건 두 장을 들여 쏟아진 맥주를 다 닦아냈을 때 아성의 눈꼬리는 한껏 내려가 있었다.
“니가 그렇게 미안해할 줄 몰랐어. 내가 한 거야. 내가 미안해.”
“자고 가.”
청명이 대뜸 그렇게 청한 것은 우는 눈을 한 아성이 이번만큼은 자신의 말에 휘둘릴 것을 예감했기 때문이다. 아성이 뭣 때문에 자신에게 거짓말씩이나 해가며 심술을 부렸는지는 몰라도 청명은 오히려 잘 됐다고 생각했다. 그는 옷장에서 편하고 깔끔한 바지 하나를 꺼내 아성에게 건넸고 아성은 갑자기 낯가리는 소녀가 되어 화장실로 쏙 들어갔다. 아성은 화장실에서 나오자 마자 청명에게 말했다.
“짧아.”
“크네.”
바지는 길이는 짧았고 품은 컸다. 청명은 자신이 매고 있던 벨트를 훌훌 풀어 아성에게 건넸다. 자신에게 딱 맞는 바지였고 어차피 곧 자려던 차였으니 딱히 자신에게 벨트가 필요하지는 않았지만 아성에게는 아니었던 것이다. 청명은 금방이라도 흘러내릴 것처럼 보이는 바지를 보며 씩 웃었다. 웃지마.
한 침대에서 자고 난 다음날 아침 아성은 없었다.
그 날의 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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