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건화왕카이
5.
그 날의 꿈을 꾸었다.
아성과 지냈던 시간은 청명에게 있어 손 안에 잡히지 않는 담배연기 같았다. 청명은 그 인상이 전적으로 아성에게서 왔다고 확신할 수 있었다. 아성은 물 흐르듯 곤란을 빠져나가는 데 능했고 그것은 청명의 팔 안에서도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청명이 마침내 그의 민낯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생각했을 때 아성은 더 이상 베를린에 없었다. 청명은 아성이 머무는 호텔에까지 가보았지만 프론트에서 이미 체크아웃했다는 답을 들었을 뿐이었다. 이번에는 빠져 나갈 수 없을 거야. 그렇지? 청명은 자꾸 냉소가 나오려는 입에 담배를 들이물었다. 타들어가는 끝에서 실처럼 희고 가는 연기가 풀어지듯 공기로 흘러 사라졌다. 그와의 만남도 자신이 원한 대로 풀린다면 바랄 것이 없을 것 같았다.
청명은 집에 두 도련님께서 계시니 제 방으로 오시는 편이 낫겠다는 아성을 따라 태연하게 이 층으로 걸어올라갔다. 집안에 계신다는 그 두 도련님은 청명이 문으로 들어와 계단을 걸어올라가 아성의 방 안으로 들어갈 때까지 코빼기도 보이지 않고 대신 아성과 여성 사용인 두 명만 멀찍이 보였을 뿐이었다. 명경에게 들었던 대로 아성은 정말로 집안의 둘째 아들ㅡ막내의 작은 형과 같은 위치였던 모양인지 방은 크고 깔끔했으나 예전에 그랬듯 사람 사는 냄새가 별로 나지는 않았다. 햇볕이 잘 드는 창가 옆으로 짙은 색의 원목 책상이 있었고 등받이만 있는 색이 바랜 나무 의자가 하나 놓여 있었다.
“부탁하신 자료들은 바로 가져 오겠습니다. 혹시 차도 가져다 드릴까요?”
이미 문이 닫힌 시점이었다. 청명은 아성이 안내해준 대로 의자에 앉아 별스럽다는 듯 아성을 올려다보았다.
“부탁하신 자료 필요 없어. 너 보러 왔으니.”
청명은 괜히 책상 위에 놓인 것들을 만지작거렸다. 나무로 된 질박한 연필꽂이 안을 이리저리 휘젓다가 한 켠에 쌓인 몇 권의 양장 책들을 뒤적거리며 제목을 소리내 말했다. ‘신곡’, ‘인디아스 파괴에 관한 간략한 보고서’, ……. 아성은 청명이 제 집처럼 예의없게 구는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성이 꽤나 제 예상을 벗어나는 사람인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다지도 아무 말을 하지 않을 줄은 몰랐던 터라 청명은 한량처럼 행동하면서도 속으로는 내심 당황하고 있었다.
“그래도 가져 올게. 그래야 니가 빨리 없어질 거 아냐.”
취급이 반갑지는 않았다.
아성이 휑하니 나가버리고 완전히 기척이 사라진 것까지 확인한 후 청명은 책상에 달린 서랍들을 건드리기 시작했다. 주머니에서 튀어나온 가는 철사핀이 열쇠가 필요한 서랍까지 열게 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청명은 기민한 동작으로 쌓여있는 서류들을 하나하나 살폈다. 그 와중에도 다가오는 발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세 개의 서랍 중 하나에는 주가 상황만 분석한 자료가 가득 쌓여 있어 대충 훑어만 보고는 도로 쑤셔 넣었고 다른 하나에서는 여러 개의 네모난 양철통 안에 싸구려 만년필부터 정체를 알 수 없는 옥돌 따위를 찾을 수 있었다. 푸르고 가는 선의 무늬가 익숙한 것이, 아성과 이전에 보았을 때도 가지고 있던 것인 모양이었다. 마지막으로 잠겨진 서랍을 열었을 때 청명은 거기서 자신의 가짜 신분에 대한 세밀한 자료를 찾을 수 있었다. 신분을 가진 본인마저도 이토록 치밀하고 정교하게 만들어졌는지 모르고 있었다는 점이 탄식할 만했다. 청명은 순간 거칠어진 숨을 후욱 골라 쉬었다.
바닥을 울리는 발소리가 들렸다.
재빨리 서랍을 닫고 다시 잠그자마자 아성이 들이닥쳤다. 아성은 태연히 창 밖을 내다보는 청명의 말끔한 뒷통수를 보고 한숨만 푹 내쉬었다.
“애를 찾고 있기는 한 거야?”
“내가 뭘 하고 다니는지는 네가 더 잘 아는 것 같은데.”
“가짜 신분 갖고 있는 게 누군데.”
“그 신분까지 뒷조사 다 해서 나보다 더 잘 알고 있는 거 내가 모를 줄 알아?”
아성이 책상 위에 커피를 내려놓았다. 청명은 내내 아성 쪽은 보지 않고 귀만 열어둔 채였다.
고요한 것도 잠시였다.
순식간에 아성의 손이 청명의 뒷목을 잡아채 창턱으로 밀어붙였다. 청명은 의자에 발이 걸려 중심을 잡지 못했고 아성의 손이 후려치는 대로 창턱 위로 엎어져 유리에 이마를 박을 수밖에 없었다. 아성의 큰 손이 청명의 양 손을 결박하려 애쓰는 동안 청명은 아직 자유로운 한 손으로 창을 밀어내 몸을 돌리는 데 성공했다. 아성의 팔이 쇄골 아래를 단단하게 짓누르는 탓에 숨쉬기가 힘들었다. 청명은 창턱 부근에서 허리가 뒤로 한껏 휘어진 채로 분노 비슷한 것으로 일그러진 아성의 얼굴을 보며 부드럽게 웃었다.
“너 힘 세졌구나.”
“닥쳐.”
“화내야 할 건 내 쪽 아닌가?”
“장관님, 당신이야말로 날 죽이려고 여기 드나드는 거 아니야?”
“너 같은 매국노는 죽어도 싸.”
“날 잡아 죽이려고 일부러 찾아오는 거라고?
“아니.”
청명은 순간 아성의 몸에서 힘이 풀리는 것을 느꼈다.
“네가 보고싶어서.”
햇빛을 비스듬히 받은 아성의 옅은 색 눈이 깊게 소용돌이쳤다. 청명은 그 밀크 초콜릿빛 눈에서 광대한 시공간을 보았다. 그것은 아성의 머릿 속일 수도 있고, 청명과 아성 사이의 거리일 수도 있으며, 단지 착각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었다. 자신의 말 두어 마디에 아성이 속절없이 무너져 내리는 모습을 보는 것에는 지극한 쾌감이 있었지만 청명 자신은 아직도 그 마음 속을 들여다보는 것에 대해서는 할 수 있는 바가 없었다. 그는 아성의 반듯한 얼굴에서 나타나는 경직된 표정 안에 무엇이 숨겨져 있는지 궁금했다. 알고 싶었다. 모르고 싶었던 적은 없었다.
“나 같은 매국노는 죽어도 싸다며.”
아성의 음성은 약간 벅차게 들렸다.
“네놈이 매국노일 때의 얘기야. 아직 나 안 죽었잖아.”
아성은 스르륵 물러나 멀리 침대 옆의 의자를 손수 가지고 책상 맞은 편에 앉았다. 앉으라는 손짓에 청명이 마주 앉자 아성이 입을 열었다.
“신정부에서 일하고 있는 건 사실이다.”
그건 청명도 익히 알고 있었다.
“네가 하는 일이 좋은 일이냐 나쁜 일이냐에 따라 다른 거지. 어때? 넌 어떤 일을 하고 있어?”
“좋은 일 나쁜 일을 어떻게 나눌 수 있겠어.”
아성은 언젠가 명대에게 농담처럼 대꾸했던 변명을 떠올렸다. 그 변명은 상황을 빠져나가고 상대의 입을 틀어막거나 이야기를 다른 데로 돌리는 데 성공했었다. 아성은 보란 듯이 느리고 큰 동작으로 등받이에 몸을 편히 기댄 뒤 다리를 꼬고 두 손을 깍지를 껴 허벅지 위에 올렸다.
“서로 다른 사람들의 관점에서 보면, 좋고 나쁜 건, 사람마다 다르겠지. 한 사람에게 이익이 있으면, 그 사람에게는 좋은 일일 테고. 이익이 없으면, 나쁜 일인 거 아니겠나. 네게 좋지 않은 일이 나한텐 좋은 일일 수도 있는 거고.”
“상해 밖에서는 죄 없는 사람들이 일본 놈들 때문에 죽어가고 있는데 그게 네게 좋은 일이라고?”
청명의 눈 앞에 피흘리며 죽어가던 제 부관의 모습이 스치고 지나갔다. 아성은 담담하고 냉정하기 그지없어서 청명은 기가 막혀 어쩔 줄을 몰라했고, 결국 그가 짰던 시나리오는 절로 머릿속에서 날아가 버렸다. 아성은 제 변명이 청명에게는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좋은 깨달음이었다.
“난 그렇게 말하지는 않았어.”
“너 진짜 한간이 맞구나. 대체 나를 왜 밀고하지 않은 거냐?”
“내가 내 손으로 널 죽이길 바라나?”
“네가 말했잖아. 네 손으로 날 죽이지 않으면 니가 죽을 거야. 76호가 조사를 시작하면 내 신분쯤 못 밝혀낼 거 같아?”
“니가 실수만 하지 않는다면 밝혀내기 힘들 거야. 네 신분은 정교하거든. 원하면 그 서랍에 있는 네 신분에 대한 자료라도 보여줄까.”
청명의 눈이 이채를 띠었다.
“너,”
“내 방인데 내가 모를 줄 알았어?”
“그것도 모르면 바보라고 생각은 했지.”
아성은 입가에 비릿한 웃음이 퍼지는 것을 굳이 막으려 들지 않았다. 청명의 눈이 위로 동그랗게 떠지며 자리에서 일어서는 아성을 담는 동안 아성은 청명이 변했다는 생각을 잠시 했다. 적어도 그 이름처럼 보이는 그대로 맑게 빛나는 물처럼 제 속을 비춰주는 사람은 더 이상 아니었다. 아성은 청명이 거쳐온 시간에 대해 가늠하다 이내 그 변화에 수긍했다. 나 또한 긴 시간을 거쳐 변했으니 너라고 변하지 말란 법이 있을까. 일어나 그대로 나가려던 아성이 문을 붙잡고 청명에게 말을 걸었다.
“네가 필요하다던 자료들은 얼마나 많이 확인했지?”
“얼마 안 남았어.”
“그러면 오늘 다 확인하고 가. 내가 널 고발하지 않을 거라는 거 확인시켜 줄 테니 다시는 오지 마.”
“내가 네 명령을 들어야 하나.”
“너한테 선택권이 있는 줄 아나본데.”
부서뜨릴 것처럼 문이 세차게 닫혔다. 청명은 문이 닫힌 직후 희미하게 시끄럽다고 소리치며 투덜대는 사내아이의 소리도 들었다. 그러고 나니 고요해졌다. 빗겨들어오는 햇빛에 먼지만 희게 빛났고 청명은 제 긴 속눈썹을 내리깐 채 먼지가 느리게 가라앉아 잡다한 서류 위로 내리앉는 광경만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무기력이 거대한 파랑처럼 청명을 덮쳤다. 상해는 제 첫 인상보다도 더 냉막했고 답답했고 살벌했다. 겹겹이 입은 아성의 양복과 넥타이가 마치 제 목을 쥐어오는 것 같다, 고 그는 생각했다.
요즘 들어서는 매일같이 아성의 꿈을 꾸지만 본래 그는 꿈에 잘 나와주는 사람이 아니었다. 예전의 청명은 자신이 그리워한 것이 아무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는 짧은 순간이었는지 아니면 아성이었는지 줄곧 헷갈려했음에도 가끔, 정말 가끔 그가 제 꿈에 나오는 날이면 그의 생각을 할 때가 있었다. 아성을 다시 만난다면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청명의 상상이 비춰준 아성은 여전히 여름 나무를 닮았었다. 생기가 넘치고 유연하며, 가늘지만 단단했고 바람에 흔들릴 줄 알았지만 땅에 굳건히 뿌리를 박고 있었다. 그것이 실제 그 당시의 아성과 어느 정도의 차이가 있을 지는 몰라도 적어도 방금 청명이 목도한 인간상과는 비교할 수 없을 것이다. 청명은 저를 아성이라 칭하는 자가 정말로 아성이 맞나 섧어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
스스로 주관이 뚜렷하다 생각했는데 아성에게만은 아니었다. 청명은 전쟁터의 후방에 있으면서도 일본에 의해 죽어가는 사람들을 보았고 제 양심을 버리고 동족을 죽이는 매국노도 많이 보아왔으며 한결같이 그들을 혐오해왔다. 청명은 도통 눈에 들어오지 않는 종이 위의 글자들을 빤히 쳐다보며 제가 아성에 대해 어떤 감정을 가져야 옳은 것인지를 가늠했다. 가장 당혹스러운 사실은 머리로는 그가 싫다고 생각하면서도 도무지 그런 감정이 생겨나지를 않았다는 것이다. 이러면 내가 그자들과 다를 게 무어야. 청명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명가에 부탁했던 서류의 확인을 마친 것은 이미 오래 전의 일이었다.
“그 사람은 갔느냐.”
서재에서 남은 일을 처리하고 있던 명루는 눈도 떼지 않은 채 땅거미가 질 때쯤 찾아온 아성에게 물었다.
“예.”
“누님이 내어줬다던 서류는 놓고 간 것 확인 했니.”
“손도 대지 않은 모양입니다.”
“손님 가시는 걸 내가 왜 몰랐을까.”
“제가 배웅하지 않아서입니다.”
그제야 본 아성의 눈가가 희었다. 가족 외의 사람에게 이토록 감정을 드러내는 아성이 처음이라, 명루는 이렇게 끝나는 것이 어쩐지 좀 안타깝다는 생각을 했다.
늑대만 아니었다면 그렇게 끝났을 일이었다.
6.
세 번의 낮과 밤이 지나갈 동안 컵을 세 번 엎지르고, 그릇을 한 번 깨먹을 뻔하고, 만년필 뚜껑을 제대로 닫아두는 것을 다섯 번째 까먹은 뒤 마침내 외출하면서 열쇠로 문을 잠그지 않았다는 것까지 깨닫자 청명은 더이상 자신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에 맞닥뜨렸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래야 않을 수가 없었다. 조금 우습지만, 아성과 소위 작별을 하고 난 뒤 자신은 내내 얼이 빠져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아성과의 작별이 현재의 상태에 대한 단 하나의 원인은 아니었다. 인간의 감정이란 하나의 사건에서 결과가 도출되는 종류의 일차방정식이 아니었기에 그 또한 여럿 중의 하나에 불과할 것이란 추측만 할 수 있을 뿐이었다. 청명은 제 상태의 심각성을 알아차리자마자 하고 있던 모든 조사활동을 그만뒀다. 명가의 저택을 드나들면서까지 추린 이름은 15여 개로, 흔히 성인 한 사람이 얼마나 복잡한 배경을 가졌는지를 생각한다면 말이 쉬워 열다섯이지,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릴지는 모르는 것이었다. 그럴수록 서둘러야겠다는 마음만 바빠졌지만 어쩌랴. 오랜 시간이 걸린다는 것은 이틀쯤 쉰다고 해서 별 문제가 아니라는 뜻과도 상통하지 않겠는가. 청명은 자신을 추스를 시간이 절실하게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아성과의 대면은 시간이 갈수록 뾰족해져 고드름처럼 청명을 찔렀다. 그 날카롭고 비정한 끄트머리가 청명을 찌를 때마다 기억은 더더욱 선명해졌다. 제가 짜간 시나리오가 모두 어그러지고 결국 할 말조차 제대로 하지 못했다는 것이 문득 떠오를 때마다 청명은 자괴감에 빠졌다. 일본의 앞잡이라며 욕이라도 한바탕 퍼부어줬어야 했다. 그도 아니라면 내가 그렇게 싫으냐고 묻기라도 했어야 했다. 하지 못한 말들이 불쑥 떠오를 때마다 자괴감은 더 짙어졌다. 결국 아성에게 하고 싶었던 말들은 죄다 속이 달아 아릴 정도로 간지럽고 감정적이었던 것이다. 내가 그렇게 싫으냐니, 그런 말을 하고 싶었다니, 흡사 연애라도 하자는 것 아닌가.
심란한 마음이나 환기시키려 산책을 하다 다가오는 전차 소리도 못 듣고 치일 뻔하자 청명은 진심으로 제 목숨을 지키려면 집구석으로 처박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 생각은 단 하룻밤 사이에 바뀌었다.
청명은 꿈에서 귀신이라도 본 양 눈을 한계까지 뜨며 일어났다. 가위에 눌린 것도 아니었고 악몽을 꾼 것도 아니었다. 청명은 누운 상태로 눈만 말똥말똥 뜨다가 상체만 세워 앉았다. 시야에 푸르고 매끄러운 조약돌이 아른거렸다.
청명이 제 가족과 접촉하기 위해서는 정해진 방법에 따라 신호를 보내야 했다. 전화를 거는 것은 위험이 너무 컸다. 교환원에게 누구를 부탁한다고 말하는 것 자체가 모종의 관계를 인정해버리는 처사가 되기 때문이었다. 청명은 먼저 유리창을 덮은 흰 커튼을 선명한 붉은 끈으로 묶어두었다. 그것은 청명이 할 말이 있다—고 전달하는 신호로 매일 점심이 되기 전에 이 건물 앞 대로를 지나간다는 그 사내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었다. 청명은 집에서 초조하게 2시가 되기를 기다리느니 외출을 택했다. 점심을 먹을 기분도 들지 않아 빈 속에 커피로 배를 채웠다. 대신 답지 않게 커피에 각설탕을 넣었다. 3개. 다디 단 속에 달아빠진 커피를 부어넣고 있자니 속이 울렁거렸다.
그 서점은 상해 신정부청사 뒤 두 번째 블럭에 있었다. 상해는 37년 일본의 공습을 받고 함락된 뒤 전투 중의 때와 재가 묻은 건물들 사이에 덕지덕지 새 건물이 재건된 모양새를 하고 있었는데, 그 서점은 비교적 새로 지어진 건물에 자리잡고 있었다. 간판도 없는 서점에 처음 들어선 청명이 만약 이 곳이 아성이 어릴 때부터 명루의 손에 이끌려 드나들던 곳이라는 것을 안다면 꽤나 놀랄 것이다. 청명은 제가 살고 있는 집 만큼이나 신식인, 벽돌에 시멘트를 엉겨바른 벽과 높은 천장을 보며 이 곳이 생긴 지 얼마 되지 않았겠다고 단정지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껍데기가 바뀌었다고 본질이 바뀌는 것은 아니었으므로 그 서점은 외관과 상관없이 유구한 역사를 지니고 있는 곳이 맞았다.
연락수단으로 사용하는 책은 서점 입구에서는 보이지 않는 책장에 있었다. 청명은 제 이름들을 뽐내는 빤딱한 책등들을 손끝으로 쓸어가다 이내 한 곳에서 멈추었다. 「呼啸山庄」. 청명은 두꺼운 양장 표지에 붙은 종이 사이에 틈이 있는 것을 확인했다. 미리 써두었던 쪽지가 청명의 안주머니에서 딸려나왔다. '팔찌 필요 전달 부탁'. 최대한 간결하고 남의 눈에 띄어도 그 의미를 알 수 없도록 의뭉스럽게 쓰려다보니 단 여덟 글자로 끝이 났다. 청명은 표지와 종이 틈에 쪽지를 밀어넣었다. 손으로 만져보아도 안에 얇은 쪽지가 든 티는 나지 않았다. 청명은 그대로 매끄럽게 움직여, 이것저것 책을 살펴보는 척 하다가 무작위로 고른 책을 한 권 사서 나왔다.
청명이 집에 도착할 무렵, 회색 머리의 군인같이 단단한 남자가 서점에 들렀다. 청명의 상해 방문 첫 날 집에 방문했던 그 자였다.
그 날은 청명이 상해 온 첫 날 들렀던 다방에 30일 연속 방문을 갱신한 날이었다. 그리고 아성에게 난데없는 청명의 가명이 다시 들린 날이기도 했다. 청명은 그간 30일 내내 그 다방 창가에 앉아 맞은 편 건물 2층을 내다보았다. 2층 창문에는 항상 화분이 창문의 가장 오른쪽에 붙어 세워져 있었는데, 청명이 기억하기로 이것의 의미는 ‘만날 수 없음’ 이었다. 청명은 화분이 왼쪽으로 옮겨지기를 내내 기다렸으나 그 날까지도 화분은 오른쪽에 놓여 있었다. 그리고 청명은 결국 화분이 왼쪽으로 옮겨진 것을 볼 수 없었다.
문득 정신이 들었을 때는 어깨가 잘려나간 줄 알았다. 청명은 고개를 들어 천장으로부터 길게 내려와 팔을 틀어묶은 듯한 쇠사슬을 한 번 보고, 조금 떨어진 곳에 달린 전등을 한 번 보고, 빛을 반사하지 않는 더럽고 시커먼 시멘트 벽을 보았다. 쇠사슬이 팔을 묶고 있다는 항목은 순전히 추측이었다. 어깨 아래로 손 끝까지 감각이 제대로 살아올라오는 곳이 없었다. 부러 관절을 비틀어 놓은 탓에 가만히 있어도 어마어마할 고통이, 청명이 제 다리로 땅을 딛지 못하고 미끄러지면 더더욱 아프게 그를 죄어왔다. 팔을 못 쓰게 되려나. 청명은 눈꺼풀만 깜빡였다. 양쪽 팔은 감각이 없었고 뺨을 얻어맞은 덕에 입 안만 험상궂게 터졌다.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위치 ̄다방 ̄에서 2층 창문만 하염없이 지켜보던 평화롭고도 심심한 나날이 산산조각난 것은 한순간이다. 여자들의 비명소리와 의자가 구르는 등의 소란에 돌아본 다방 입구에는 검은 제복을 입고 꺼떡대는 한 무리의 양아치들이 애꿎은 종업원을 붙잡고 윽박을 지르고 있었다. 그 우악스러운 모양새가 심히 마음에 들지 않았으나 곧장 소란이 잦아드는 것 같아 청명은 다시 2층 창문으로 고개를 돌렸다. 기실 그의 신경이 쏠리는 곳은 그 2층 창문이었다. 분명히 사람이 살고 있는 곳이라고 들었건만 지난 10여 일간 커튼이 휘어지고 접힌 모양마저 똑같았기 때문이었다. 더군다나 화분 속 식물은 명백하게 시들어가고 있는 상태였다. 청명은 그 노란 커튼의 2층 집 주인이 진심으로 걱정되었다.
뒷목의 솜털이 쭈뼛 섰다.
그는 본래 남들의 시선에 익숙한 사람으로, 자신의 말만 따르는 한 무리의 남성 군인들은 물론이거니와, 다시는 마주칠 일 없는 한 무리의 여성들의 시선은 그에게 이런 신체적 변화를 불러일으킬 수 없었다. 청명은 날 때부터 주목받았다. 힘들게 낳은 아들이었고 자라서는 고 씨 집안의 장손이었으며 골격이 완성되고 나자 타고난 얼굴은 지나치게 잘났음이 밝혀졌고 군인이 되고서는 수많은 손아랫사람을 두게 되었다. 그 결과 청명은 우호적인 시선과 그렇지 않은 시선을 구분할 수 있는 재주를 가질 수 있었다. 뒷목의 솜털이 경고하고 있었다. 너는 위험에 처했다. 곧바로 다방 안에 날카로운 고함소리가 퍼져나갔다.
“잡아!”
순간 패닉이 온 청명이 창문이라도 깨서 달아날까 하는 멍청한 생각을 하며 벌떡 일어선 찰나에 그 뒷목 솜털은 차가운 총구와 키스하는 영예를 누리게 되었다. 그리고 바로 손잡이로 머리를 얻어맞아 정신을 잃었다가, 깨어보니 여기 의자에 묶여 도자기같은 얼굴을 하고 곱게 머리를 말아올린 여자와 건전한 말싸움을 좀 하다가, 다시 몇 대 얻어맞고는, 채찍으로 사정없이 후려쳐지고, 의자도 잃고 팔도 감각을 잃고, 총으로 얻어맞은 머리에는 피를 줄줄 흘리며 지금 여기 매달려 있는 것이다. 이대로 나는 이 나라를 지킬 의무가 있는 엄연한 중국인이고 너네는 나라 팔아먹은 매국노가 아니냐고 평소 하던 생각만 입 밖으로 늘어놓으면 아주 구국열사가 따로 없을 것 같았다.
청명은 그가 깨어난 것을 확인하고 다시 그 여자를 찾으려는 듯 움직이는 검은 옷의 사람들을 보며 머리를 굴리려 애썼다. 안타깝게도 청명은 우직한 군인이 되기 위한 훈련은 받았어도 어떤 말에 의도적으로, 혹은 아무 생각 없이 숨겨져 있는 함의를 찾는 훈련은 받지 못했다. 거짓말을 하면서 거짓말이 아닌 척 천연덕스럽게 구는 훈련도 받지 못했고, 고문에서 스스로의 비밀을 지키는 훈련 따위는 받아본 적도 없으며, 자신의 말에 최소한의 의미만을 담는 법도 몰랐다. 청명은 소란에 까딱이며 미세하게 흔들리는 전등 불빛을 올려다봤다.
아마 죽어 시체로나 나갈 것이다.
아무리 제가 일본과 괴뢰정부를 공격하기 위해 잠입한 스파이가 아니더라도 상관 없었다. 고청명은 명백히 국민당의 군인으로 일본과 싸웠었고 그의 아버지는 국민당의 임시정부가 있는 중경에 있었다. 원래 신분이 탄로났다면 말할 것도 없이 처형당할 터이고 설령 그렇지 않더라도 76호는 잡아들인 인간을 살려 내보내지 않기로 유명했다. 운이 좋으면 혼자 죽을 것이고 자신이 실수한다면 애먼 사람들과 같이 저승길로 갈 터였다.
청명은 멀리에서 끼익, 하고 쇠문이 열리는 소리를 들었다. 처음에는 그 여자가 다시 돌아왔다고 생각했으나 돌바닥과 부딪히는 구둣소리는 분명 남성용이었다. 청명은 핏물에 젖어 굳은 속눈썹에 뿌옇게 변한 시야를 회복하려 애썼으나 성공한 것은 오른 쪽 뿐이었다. 남자가 가까이 다가온 탓에 그림자가 졌다. 청명은 고개를 들면서 한쪽 눈을 치떴고, 익숙하다 못해 매일 밤 꿈에서 보던 얼굴이 모습을 드러냈다. 전등에 씌워진 갓과 어두운 벽 탓에 불빛의 반사가 적은 공간 안에서 그의 얼굴에 극단적으로 음영이 졌다.
“곽건화 씨.”
사무적인 목소리가 흘러나오는 옷은 분명히 신정부의 제복이었다. 명성 선생님. 청명은 익숙한 얼굴을 보고 낯선 이름을 듣고는 그저 눈을 감았다.
센
세
는
사
랑!
씨발 존나 좋다ㅠㅠㅠㅠㅠㅠ 시엔셩 자삭을 하려거든 병병이부터 밟고 가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