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자네들 뭐하고 섰나? 당장 나가서 왕처장 찾아오지 않고.”
냉정하고 거만한 아성의 말에 그녀의 부하들이 우루루 좁은 공간을 빠져나갔다. 멀리 문가에서 경직된 자세로 이쪽을 지켜보는 사람 몇몇 뿐이었다. 아성은 왕만춘이 앉아있곤 하는 의자에 앉고 손에 든 모자를 무릎 위에 올렸다. 아성은 명루의 대변자로 여기 왔다. 나이에 비해 직급이 높은 편인 그는 부하들에게도 왕왕 존대를 쓰곤 했으나 이 곳에서는 고압적인 태도를 취하기로 했다. 명가는 76호가 곽건화를 잡아들인 데 대해 항의할 권리를 가지고 있었다. 더군다나 그 행동이 명가를 겨냥한 것이 명백한 상황에서는 시정을 요구할 권리까지도 있었다. 아성은 담배를 피지는 않았지만 담배를 피는 사람들의 심리를 십분 이해할 것 같았다. 서두른다고 서둘렀는데도 청명의 꼴은 말이 아니었다. 잘생긴 얼굴에 상처가 나 있었다.
“아픈가?”
입 안이 터졌는지 겉으로도 희미하게 볼이 부어있는 티가 났다. 아성은 모자는 의자 위에 내버려둔 채 일어나 청명의 감긴 눈을 쓸었다. 피에 엉겨있던 눈은 피만 걷어내자 멀쩡한 살을 드러냈다. 다친 게 아니라 다행이었다. 청명의 고운 눈꺼풀에 상처가 났다간 제 목을 꿰찌르고 싶었을 것이다. 청명은 온기를 느끼며 두 눈을 온전히 떴다. 아성이었다. 아성이었는데, 여기 있었다. 네가 실수하지 않는 한 밝혀내기 힘들거야. 그가 그렇게 말했었다. 자신은 실수를 하지 않았다. 집과 연락을 시도하긴 했으나 자신이 해야 했던 행동들은 지극히 평범한 것들 뿐이었으니 청명의 신분을 아는 자가 고발하지 않는 한 자신은 의심받을 일도 없을 것이었다. 명가를 드나든 것이 그토록 예민하고 민감한 일이었던 것일 게다. 그 말고는 명가에 드나드는 사람 하나 없을지도 몰랐다. 청명은 그렇게 생각하고 싶었다. 그게 아니라면 눈 앞의 이 사람이 자신을 고발했다는 것 밖에는 설명이 안되지 않는가.
“울지 마.”
느리지만 선명하게 고여드는 눈물을 본 아성이 속삭이듯 말했다.
“너는 아무것도 모르는 거야. 너는 사촌을 찾으러 온 곽건화야. 너는 억울하게 잡혀온 거야.”
기어코 툭 눈물이 떨어져 내렸다. 눈물의 의미도 알지 못하면서 울지 말라는 소리를 하는 입이 우스웠다. 아성은 청명을 세뇌시키려는 듯 단정적으로 말을 이었다.
“너는 나와 아무 관련이 없는 거야. 나는 너를 모르는 거야. 알았어?”
알았단 대답이 쉬이 나오지 않았다.
“네가 나를 고발했어?”
청명의 목소리는 잔뜩 쉬어있어 의도하지 않아도 속삭여지기만 했다. 아성은 입을 꾹 다물었다. 청명은 아성의 턱에 어금니가 세게 맞물리며 도드라지는 근육의 흔적을 보았다. 그는 곧 터져버릴 고무공처럼 세차게 부풀어오르는 것을 애써 막고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 아성은 이런 상황에서 그가 자신을 의심하는 것이 당연하다고는 여겼지만 왠지 서글펐다. 비틀거리며 뒷걸음질을 치던 찰나에 밖이 소란스러워졌다. 아성은 쏟아져내리려는 감정들을 참으며 의자 위에 올려둔 모자를 깊게 눌러 썼다. 눈을 감고 숨을 골랐다.
아성은 일찍이 곽건화의 신분에 대해 조사한 뒤 그의 신분의 정교함을 깨닫자마자 신정부 내 자신의 수하에게도 조사를 시켜놓은 뒤였다. 그와 명가를 분리시켜 리스크를 최소화하기 위한 안배였다. 청명으로부터 어떤 연락이나 방문이 없은 지 한 달이 넘어갔고, 아성 또한 가끔 명경의 아쉬운 듯한 질문이 있는 것 외에는 그에 대해 떠올릴 그 어떤 외부적 자극조차 갖지 못했다. 그러니 아성이 반쯤 청명의 존재를 잊었을 무렵, 곽건화에 대한 조사를 맡겼던 신정부의 그 수하가 사색이 되어 다시 나타난 것은 예상에 없던 일이었다. 아성은 앉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뭐라고요?”
“곽건화가 76호로 호송되는 것을 보고 오는 길입니다.”
아성은 평정을 지키려 애썼다. 속으로는 가슴이 자꾸 두방망이질쳤다.
“사유는.”
“76호에서 데려가는 이유가 달리 뭐가 있겠습니까. 항일분자랍니다.”
미끄러지듯 자리에 주저앉은 아성은 생각했다. 생각을 해야만 했다. 이것은 청명에게뿐만 아니라 청명이 드나들던 명가를 위협하는 행위였기 때문이었다. 아성은 책상 위에 놓인 검지 끝이 정확한 박자로 책상을 두드리는 것도 모르고 머리를 굴렸다. 한숨같은 혼잣말이 새어나왔다.
“증거가 있다던가.”
“끌려가는 것만 보았습니다. 알아봐 드릴까요?”
아성은 손을 내저었다.
“아닙니다. 됐어요. 당신이 안다는 걸 아는 사람이 혹시 있습니까.”
“없을 겁니다. 근처에 들렀던 것뿐인데다, 알고 나서는 바로 이리로 왔습니다.”
아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가보십시오. 비서는 꾸벅 인사하고서는 자리로 돌아갔다. 아성은 명루의 사무실 문에 대고 노크했다. 들어오라는 말이 무섭게 아성이 서둘러 자리로 들어갔다. 명루가 말끔히 차려입은 제복에도 없는 주름이 미간에 깊게 나 있었다.
“얘기는 들었다.”
마음이 급해 아래턱이 바들바들 떨리는 아성보다 먼저 명루가 선수를 쳤다.
“우리에게는 별 문제가 안 되는 이야기다. 그 자의 연락선이 군통과 맞닿아 있는 데가 있다더군. 이미 그쪽은 낌새를 눈치채고 일찌감치 철수했고 미나미다 요코는 아무 증거를 잡지 못했어.”
아성은 의외의 이름이 튀어나오는 데 머리를 갸웃했다.
“미나미다 요코? 특고과도 관련이 있습니까?”
“늑대.”
아성의 눈이 경악에 가득찼다.
특고과 과장 미나미다 요코는 먹이를 쫓다 놓친 하이에나마냥 바짝 독이 오른 상태였다. 화룡점정으로 5분 전 늑대에게서 걸려온 전화는 부하 주제에 저를 나무라기까지 하여 더더욱 화를 돋웠다. 자신이 준 정보와 기회를 이리도 허무하게 날려버릴 수 있냐…… 증거만 확실히 잡는다면 명가가 뭐라 나서든 할 말이 없는 게 아니냐……. 정치의 암투와 기싸움에 문외한인 여자가 고작 언더커버 주제에 저에게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어이가 없었다. 명루의 눈과 귀는 어디에나 있었다. 그가 미리 상황을 알고 개입해버린다면 ‘군통으로 의심되는 곽건화’는 물론이거니와 ‘곽건화’라는 인물 자체를 확보하지 못할 가능성이 컸을 것이다. 미나미다는 왕만춘의 방문을 알리는 목소리를 들으면서 재빨리 헝클어진 자신의 모습을 정돈했다.
인정할 것은 인정해야 한다. 위아래도 모르는 늑대의 말이 아니꼬웠으나 그녀가 틀린 말을 한 것은 아니었다. 자신은 명가를 손아귀에 넣고 휘두를 생각에 지나치게 서둘렀고 쥐새끼같은 군통놈들은 연결선을 미연에 잘라버렸다. 미나미다는 제 손에 남은 증거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절감했다. 미나미다 요코는 빳빳한 자세로 들어온 왕만춘이 제대로 서 인사를 하기도 전에 다급하게 물었다. 그러면서도 평정을 지키지 못한 것을 후회했다.
“그 자의 집에서는 발견된 것이 없었나?”
“보고드립니다. 특별한 것은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종이 한 장, 쓰레기 하나까지 확인 했나?”
“군통에서 쓰는 암호 비슷한 것도 찾지 못했습니다.”
“무기류는?”
“총기나 도검류도 없었습니다.”
미나미다는 결국 분을 참지 못하고 책상을 쿵 내리쳤다. 심증은 뚜렷한데 물증은 놀라울만치 전무했다. 모든 물적 증거들이 가리키는 것은 곽건화가 대단히 평범한, 지극하게 평범한 일반 시민이라는 것이었다. 미나미다 요코는 밤새 그의 과거 행적에서 군통과의 연관성이 있는지를 살펴보기 위해 글자 하나하나를 살폈고 지금에 와서는 앉아서 그의 신상을 그 대신 줄줄 외울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자는 입을 열었나?”
“자신은 아무 것도 모른다고만 합니다.”
“독한 놈이군 그래.”
늑대가 물어다 준 정보ㅡ명가에 드나드는 곽건화와 군통 간에 모종의 관계가 있다ㅡ를 들은 적 없는 왕만춘은 실제로 그가 정말로 결백한 이는 아닐까 의심하고 있었으나, 그저 입을 다물었다. 대신 그녀는 에둘러 묻기를 택했다.
“그 정보를 어디에서 입수했는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ㅡ미나미다가 눈을 가늘게 치켜올렸다ㅡ심문할 때 유용할 것 같아 드리는 말씀입니다.”
“믿을만한 정보원이다. 왜, 내 정보원은 못 믿나?”
미나미다는 말을 아꼈다. 늑대의 작태가 마음에 들지는 않았으나 곽건화가 신호를 보내는 듯한 모종의 행동을 했고, 그와 맞물려 상해를 빠져나간 사람이 군통과 접촉한 것은 사실이었다. 곽건화가 자신을 쫓는 눈을 눈치채지 못한 것 같다며 제 수하들이 방만하게 군 탓에 군통과 연결된 인간들이 모조리 내뺀 것까지는 믿을 만한 일이 아니었지만.
왕만춘은 붉게 칠한 입술을 깨물고는 답했다. 그런 의미가 아니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죽을 것 같으면 어련히 자백하겠지.”
왕만춘은 명루를 떠올렸다. 그리고 명경을 떠올렸다. 높이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남자의 날개를 잘라 묶어놓을 수 있다는 점에서 그녀 또한 그 자백을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그 남자가 군통인지 아닌지는 상관 없었다. 명가와 그 자가 긴밀한 관련이 있다는 것만 밝혀진다면 미나미다 요코는 명루를 압박할 수 있었고 왕만춘은 명경을 죽일 수 있었다.
노크도 없이 문이 벌컥 열렸다. 함부로 방해하지 말라고 했을텐데. 문을 열고 들어온 미나미다의 부하는 짧게 경례를 한 뒤 그녀의 말에 답했다.
“중요한 일이라 보고드립니다. 왕처장님, 아성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아성이? 어디, 심문실 말인가?”
예, 하며 끄덕여지는 고개에 미나미다는 목이 바짝 마르는 것 같았다.
“설마 심문실에 그 둘만 있는 건 아니겠지?”
인간세상의 혼란과 급박하게 달라진 공기의 기류 탓에 머리 위의 전등이 삐걱대며 좌우로 흔들렸다. 청명은 그 진자운동을, 그리고 그것에 맞추어 미묘하게 달라지는 음영을 다른 세상의 일처럼 멍하니 바라봤다. 아무래도 저 자들은 나와 다른 차원에 살고 있는 것 같다. 청명은 수없이 보았던 일본군의 군복 견장에 줄과 별이 저리 많이 나 있는 것은 처음 보았다. 아성의 사슴같은 목을 덮은 옷깃 또한 번잡스러운 모양새였다. 청명은 타고나기를 비겁한 것은 싫어하며 비굴하게 사느니 죽는 게 낫다고 생각했던 사람이다. 그 때문에 청명은 군인이 되는 것이 제 운명은 아니었겠거니 여겼지만 그럭저럭 적성에 맞는다고 생각할 때도 있었다. 눈 앞에 보이는 자들은 똑같이 군 직급을 가진 자들이었으나 그것은 단지 현재가 전시이기 때문이었다. 청명은 군인이고 저들은 첩자들이다. 그는 그것을 본능적으로 느끼면서 저들과 자신 사이의 간극을 절실히 깨달았다.
서로 다른 소속과 직급을 가진 두 여자와 한 남자는 살벌하게 눈빛만 주고받는 중이었다. 개중 가장 오만한 태도를 취하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아성이었는데, 그것은 아성이 피해자의 신분을 가장하고 있기 때문이며, 동시에 아성으로서가 아니라 명루의 대리인으로서 이 자리에 있기 때문이었다. 뻣뻣하게 서 있는 미나미다와 왕만춘과는 달리 아성은 느긋하고 여유로운 태도로 뒷짐을 지고 있기까지 했다. 진공과 같은 정적을 깬 것은 미나미다 요코였다.
“아성선생은 여기 왜 오셨습니까?”
“제가 못 올 곳을 왔습니까?”
미나미다는 그 거만한 태도에 씨근거리며 한바탕 쏘아 붙이려는 왕만춘을 손짓 하나로 제지했다. 다시 침묵에 잠겨들려는 찰나 아성이 말을 이었다.
“오히려 제 쪽이 물어야 할 것이 산더미가 아닌가 합니다만……. 이 자는 왜 여기 있습니까?”
아성이 턱짓으로 가리키는 것은 맹수처럼 매섭게 눈을 뜨고 있는 청명이었다. 기실 매섭게 눈을 뜨고 있는 까닭은 팔의 고통에 다시 정신이 흐려지기 시작한 탓이었다.
“그 자는 군통의 첩자요.”
“군통의 첩자라는 사실이 밝혀졌으면 바로 처형하실 일이지, 무슨 고문을 한단 말입니까?”
“어떤 정보를 빼갔는지, 어떤 자들과 접촉했는지 알아보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 않아? 이전에도 군통의 변절자를 통해서 항일분자를 잡아들인 일이 있었어.”
왕만춘이 답변했다. 그것은 그녀의 손속이 얼마나 잔인한 지를 보여준 대표적인 처사로, 그녀는 첩자는 물론 첩자로 의심되는 사람들을 모두 처형했던 것이다. 아성은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하다 다시 질문을 던졌다.
“그래서 어떤 정보를 빼갔는지, 어떤 자들과 접촉했는지 답을 얻어 내셨습니까?”
“그걸 심문하고자 이 사람을 여기 데려다 놓은 것입니다.”
“사람 풀면 되는 일을 왜 이렇게 번거롭게 하십니까. 제가 수고를 좀 덜어드리지요. 이 자는 상해에 들어온 뒤 총 7번 명가에 방문했습니다. 좀 더 알려드리자면, 한 번은 같은 식탁에 둘러 앉아 식사도 같이 하였고요. 어떻습니까, 꽤 마음에 드실 것 같은데.”
숨겨질 수 있는 일이 아니었기에 답한다고 문제가 될 일도 없었다. 아성이 관심있는 것은 그에 대한 저들의 답이었다.
“아성 선생, 지금 군통과 접촉하였단 것을 인정하시는 겝니까?”
예상했던 대로 퍼덕이는 물고기들은 낚싯밥을 물었다. 아성은 내심 안도하며 자신이 계획해둔 판으로 슬쩍 그들의 목덜미를 붙들고 들어갔다. 적절하게 화를 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접촉이 아니라 이렇게 말해보죠. 잠입. 만나기만 하면 다 같은 편이랍니까? 아까 그러지 않았습니까. 어떤 정보를 빼갔는지에 대한 답을 얻어내셔야 한다고. 곽건화가 명가에 방문한 것은 맞지만, 명가에 군통의 첩자가 있어서 방문한 것이 아니라 군통이 어떤 정보를 빼가려는 목적으로 방문했을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만약 이 자가 군통의 사람이라면 우리는 피해자입니다! 군통과 접촉하였냐고요? 이런 접촉도 접촉이라면 접촉이겠지요. 마음대로 정의하십시오.”
“아성, 왜 이렇게 흥분해. 명가와 관련있다는 소리는 한 적이 없는데.”
미나미다 요코가 아성에게 일말의 예의를 보이는 것과 달리 명루의 집사로서만 아성을 인식하고 있는 왕만춘은 그를 숫제 동생 보듯이 대했다. 아성은 계획된 분노를 표출하며 왕만춘을 의도적으로 무시했다. 그의 시선은 미나미다 요코에게만 향해 있었다.
“허어. 그렇군요. 명가와 관련이 있다는 소리는 한 적이 없다? 그럼 어디 물어봅시다. 이 자가 군통의 첩자라는 것은 어떤 경위로 알게 된 겁니까?”
“이 자의 행동에 중경과 연결된 군통의 연락선이 움직이는 것으로 확인했습니다.”
“이 자의 행동을 주시하게 된 계기는요.”
“이 쪽 정보원이,”
“정보원을 명가에 심어두셨나봅니다?”
사실이라 말이 막힌 것인지 그저 당황하였는지 상대는 멈칫하며 말이 없었다.
“미나미다 과장, 이 사람이 명가에 방문했다는 걸 당신이 모를 리가 없겠지요. 그 정도는 조사라고 할 것도 없이 나올 겁니다. 숨겨진 일도 아니었고, 숨길 일도 아니었으니까요. 거기서 시작한 게 아닙니까? 명가에 드나드는 사람이 있는데, 이 사람을 어떻게 하면 수상한 사람으로 만들어 명가와 같이 조져 버릴까, 그런 생각에서.”
“지나친 억측이십니다. 제가 일부러 명가를 공격하기 위해 함정을 팠다는 소립니까.”
“어디 억측인지 한 번 볼까요, 저 사람이 군통 첩자라 하셨죠. 증거는 있습니까?”
증거를 잡지 못했다. 이미 증거가 없어 이를 박박 갈고 있던 때에 이대로라면 증거를 내놓으라는 아성의 목소리가 미나미다의 꿈 속에서까지 들릴 판이었다. 어처구니 없이 증거를 놓쳤냐는 늑대의 목소리는 덤일 것이다. 그녀는 입 안 살을 잘근잘근 씹었다. 아성은 씹어뱉듯이 말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증거가 없으신가 봅니다. 그렇군요. 자, 여기서 하나 가정을 해봅시다. 저 사람이 군통에서 상해로 보낸 첩자입니다. 명가가 피해자이든, 혹은 항일분자든, 군통이 명가에 드나들었으니, 명가도 같이 항일분자로 몰 수 있겠지요? 그렇다면 이번에는 저 자가 아무 죄 없는 불쌍하고 억울한 사람이라고 해 봅시다. 그런데 명가에 방문이 잦군요. 애먼 사람을 잡아다 험악한 고문을 가한다면, 아마 고통에 못 이겨 거짓 대답을 해주지 않겠습니까. 가령, 자신이 군통의 첩자가 맞고, 명가에 지령을 전달하기 위해 여러 번 방문했다, 던가. 증거가 없다고 하셨죠. 증거도 없지만 첩자인지 아닌지 알 게 뭐랍니까. 그냥 잡아다 족치면 알아서 원하는 대답을 해줄텐데요. 원하는 대답이 안 나오면 또 어떻습니까. 자백서를 써서 정신을 놓게 한 뒤에 손가락만 끌어다 지장을 찍으면 누가 뭐라 하겠습니까. 결국 결과만 보면 이 사람이 항일분자든 아니든 무슨 결과의 차이가 있겠습니까?”
“명가와 상관 없다고 말씀 드렸잖습니까. 이 자가 접촉한 데가 명가 뿐일거라는 생각은 피해망상이지요. 명가가 아니라 다른 곳에서 심증을 잡아 조사했습니다. 답이 됐습니까.”
애초에 명가를 겨냥한 함정 수사였다. 미나미다는 그것을 뻔뻔스럽게 인정하기에는 증거도 없으며 명루의 힘이 은근히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라는 것을 알았다. 급조된 변명이 어설펐는지 아성은 오늘 두 번째로 대놓고 헛웃음을 토했다.
“어디요? 저를 너무 얕보시는 것 같습니다만, 명장관께서 그렇게 함부로 집에 드나드는 사람을 가만히 보고만 있으셨을 것 같습니까? 이 쪽은 손 놓고 보기만 하고 조사는 하지 않았을까요? 사촌을 찾는다며 고아원, 제 집, 명가, 식당, 다방, 끝입니다. 어디서 심증을 잡으셨는지 모르겠습니다마는, 만약 어디선가 심증을 잡으셨다면 잡아들여야 했을 사람이 이 사람 하나는 아니겠지요. 제가 조사했는지 의심스러우셔서 증거가 필요하시면, 제 책상에 저 자에 대한 자세하게 조사한 서류가 있으니 필요하면 가져가시지요.”
“아성 선생, 이렇게까지 흥분하실 일이 아닙니다. 설령 이 자를 조사해 군통의 첩자란 것을 확인한다 해도 그걸 명가까지 덮어씌우지는 않을 겁니다. 약속드리지요.”
명가를 끌어들이는 일은 다음으로 미뤄야 할 것 같았다. 아성은 눈썹을 까딱이고는 험상궂어진 얼굴로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명가와 청명을 분리하면서 그에게 얹힌 심증까지 옅어지게 하려다보니 그의 입장에서도 자충수를 둔 것이 많았다. 당장 명가가 얽혀들어가는 것은 막았으나 의심이 걷히지는 않을 것이다. 자신들은 더더욱 조심할 필요가 있었다. 더불어, 여기서 더 청명을 보호하려 들다가는 꼬리가 잡힐 가능성이 높은 것도 아성은 알고 있었다. 동료로서 특고과와 76호에 적당한 존중을 보일 때였다. 아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어디 한 번 두고 보지요.”
아성의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미나미다는 왕만춘에게 눈짓을 했다. 하던 일을 계속 하라는 분부였고, 왕만춘은 효과적인 고문을 위해 필요한 것들을 챙기러 떠났다. 왕만춘이 완전히 사라진 것을 확인한 미나미다는 비릿하게 웃으며 아성을 비꼬았다.
“명가를 사랑하시는 마음이 참으로 지극하십니다.”
“제가 명가를 떠나고 싶은 것과 무관하게 제 이름자 앞에 붙은 것이 명이라는 성이니 당연한 일 아니겠습니까. 지금 저는 아직 명가를 벗어나지 못했으니, 명가가 끝장나면 저 또한 끝입니다. 그리고 제가 말씀 안 드렸던가요, 저는 명장관의 대리인으로 여기 왔습니다. 시키는 일을 제대로 해야지요. 조사가 끝나면 연락 주십시오. 집안의 손님이 저희 때문에 곤욕을 치렀으니, 누명을 쓰신 거라면 데려와 보살피는 것이 옳을 것이라고 큰 아가씨께서 말씀하셨었거든요.”
“어떤 수를 써서든 저 자가 군통이라는 증거를 찾아낼 것이니 그런 걱정은 안 하셔도 될 겁니다.”
“부디 옳은 수만 쓰시길 바라겠습니다. 기왕이면 고문도 너무 과하지 않았으면 좋겠군요. 그리고 저 자가 정말로 군통의 첩자라면……. 제 몫까지 부탁드리겠습니다.”
아성은 청명 쪽을 흘긋 보고는 단번에 돌아서 사라졌다. 뒤돌아 보지는 않았다.
8.
청명은 살아서 풀려났다.
청명이 집에 숨겨둔 권총을 76호가 끝까지 발견하지 못한 것은 천만다행이었다. 청명은 고문으로 타고 찢어져 피가 비치는 셔츠를 그대로 입고 76호를 나섰다. 하필 그 전날까지는 따뜻하던 날씨가 급격히 추워지고 구름이 잔뜩 껴 해도 비치치 않았다. 청명은 피에 군데군데 젖은 셔츠 위에 입고 들어왔던 코트를 입어 코트까지 못 쓰게 하느니 그저 추운 것을 택했다. 청명은 바들바들 떨며 76호의 철문을 지났다. 다리는 건드려지지 않아 멀쩡했다. 아성이 기다리고 있었다.
푸른 코트를 입은 아성은 세워둔 차 옆에 고요하게 서 있었다. 청명은 물 속에 잠긴 듯한 아성의 눈을 한 번 보고는 그대로 고개를 돌려 무시했다. 아성은 청명이 자신을 못 본체하고 삐걱대며 추위 속을 걷던 것을 지켜만 보다가, 다가가 어깨를 붙들었다. 하필 지져진 쪽 어깨였다. 살을 그대로 잡아 뜯는 듯한 고통에 청명의 다리에 훅 힘이 풀렸다. 아성은 놀라 손을 떼었다.
“나라 팔아먹은 놈 도움은 받을 생각 없어.”
아성은 그제야 그 좁은 심문실에서 미나미다 요코와 왕만춘을 대면하고 있을 때 청명의 눈동자가 바닥만 노려보고 있던 이유를 알게 되었다. 그는 아성이 나눈 대화를 들으면서 자신을 구명하려는 그에게 감명받기보다는 아성이 한간이라는 심증을 굳힌 모양이었다. 어째서? 의문이 불쑥 솟았지만 제 의문을 해결하는 것보다는 피에 젖은 청명을 구하는 것이 먼저였다.
“그런 말은 조금 있다 합시다. 일단 가요. 모시겠습니다.”
청명은 고집이 셌다. 아성은 그 곁을 따라 걸으며 흰 셔츠를 유의깊게 살피다가, 셔츠가 멀쩡한 부분을 붙잡았다. 오른 손목과 허리였다. 청명은 그 옛날 아성이 그에게 지기만 하던 것이 무색하게 힘없이 끌려왔다. 아성은 그렇게 억지로 청명이 몸부림 치는 것을 이겨가며 그를 차 안에 구겨넣었다.
“정신을 놓게 만들어 드릴까요, 아니면 얌전히 저를 따라 오시겠습니까.”
“차에 피가 묻습니다.”
아성은 답했다.
“상관 없습니다.”
청명을 실은 차가 명공관으로 향했다.
잠들어 아성의 등에 업혀 온 청명을 본 명경의 반응은 가히 파괴적이었다. 명경은 명대가 다치기라도 한 듯 안절부절 못하며 울먹이더니 청명이 손님용 방으로 들어가고 난 뒤에는 돌고래의 고주파처럼 끊임없이 76호와 신정부와 일본에 대한 불만을 토로했다. 집에 첩자가 들 가능성을 고려하고 있는 아성이 보기에는 위험할 정도로 민감한 말들도 더러 있었다. 명루는 아직 사무실에서 돌아오지 않았고 명대는 청명을 신기한 생물이나 되는 것처럼 구경했으며 초고속으로 불려온 명가의 주치의는 잠이 든 것은 환자가 원기를 회복하는 과정일테니 굳이 깨우지 않겠다면 아성의 목격담과 환부들만 보고 항생제를 처방하고 돌아갔다. 명경은 아향에게 이불 빨래를 부탁했고 계이에게는 환자가 먹을 만한 유동식을 부탁했다. 청명에게 딱히 내상이 있을 것 같지는 않다는 게 아성과 의사의 소견이었으나 피에 잔뜩 겁을 먹은 누이의 소란을 말리지 않는 것이 좋다는 것 또한 그의 생각이었다.
아성은 기절하듯 잠든 청명 옆에서 간병인을 자처했다. 주무르듯 잡은 손발 끝이 차가웠다. 아성은 침대 위에 청명은 앉힌 뒤 군데군데 찢어지고 피에 젖은 셔츠부터 벗겼다. 수건을 물에 적셔 상처 하나하나를 닦아내자 다행히 피부는 곧 멀끔해졌다. 두 군데의 화상자국을 제외한 상처는 다행히 찰과상에 그쳤다. 아성 혼자 가누기에 청명은 몸은 꽤 무거웠으나 다른 이에게 맡길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아성은 땀을 뻘뻘 흘려가며 젖고 화상과 들러붙은 셔츠를 벗겨냈고 이번에는 희고 헐렁한 긴 팔 스웨트 셔츠를 입히고 있었다. 바지도 갈아입힐 수 있다면 좋았겠으나 그것은 힘에 부칠 듯하여 벨트를 풀러주는 것으로 혼자 합의를 끝냈다. 이불을 덮어주고 나니 청명은 예전에 보았던 모습처럼 깨끗하고 희어졌다. 아성은 지쳤다.
그의 속눈썹이 길다.
아성의 손 끝이 눈꺼풀을 다시 쓸고 지나갔다. 아성은 이것과 꼭 같은 모습을 본 적이 있었다. 바지에 맥주를 쏟고 청명이 붙잡았던 그 날이다. 청명은 아성이 잠든 줄 알았겠지만 아성은 그 날 잠들지 못하고 한참을 눈만 감고 있었다. 아쉬워? 자신이 물었을 때 그가 뭐라 답했던가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가 아쉽지 않냐고 물어왔을 때 나는 무어라 대답했던가. 기억력도 좋고 가르치는 것은 뭐든 잘 배우는 아성의 머릿 속에서도 절로 스스로를 지워가며 뿌옇게 흐려지는 것들이 있었고 청명과의 시간은 그런 종류의 것들이었다. 아성이 하룻밤 꿈처럼 여겼던 시간들을 너는 어떻게 기억하고 있기에 그토록 간절한 눈빛을 하는가. 아성은 내내 청명의 시선이 쫓는 것에 무덤덤한 척 해왔고 실제로도 별 감흥이 없었다. 이제와, 온통 고요에 잠긴 어둔 사위에 빛이라고는 비내린 뒤 갠 하늘의 달빛밖에는 없었고, 아성은 그 날의 그 장면을 마주했다. 말라가던 나무에 물이 쏟아지고 빛이 쏟아졌으니 나무에서 다시 새순이 돋지 않겠는가. 희미한 빛이 비추는 곱게 감긴 눈매는 태풍이 되어 아성을 후려쳤다. 뿌옇게 흐려앉아 가라앉던 기억들은 다시 휘몰아쳐 수면 위로 떠올랐다.
잠든 청명의 곁에서 그보다도 먼저 잠든 척 하던 아성은 완전히 세상이 고요해졌다는 확신이 들 때쯤 눈을 떴다. 좁은 싱글 침대 위는 성인 남자 한 명으로도 꽉 차는지라 아성과 청명은 어쩔 수 없이 반쯤 달라붙어 누워있었기에 아성이 눈을 뜨고 고개를 돌리자 가장 먼저 시야에 들어온 것은 회색 빛을 등진 청명의 옆모습이었다. 아성은 최대한 매트리스가 움직이지 않도록 몸을 가누며 엎드려 팔을 괴었다. 청명은 세상 모르고 잠들어 있었다.
그와 베를린 곳곳을 떠돌며 아성은 즐거웠다. 학교 기숙사 밖으로 나갈 수 있는 휴일마다 베를린에 온다던 청명은 첫 방문인 아성보다는 아는 것도 많았고 본 것도 많아 아성을 여기저기 데려갔다. 아성은 새로운 것과의 접촉에 떨며 내내 가슴을 쿵쿵대며 박동하는 소리를 들어왔다. 아성은 그저 간만에 주어진 자유가 즐거운 줄 알았고 아름다운 풍경이 즐거운 줄 알았다. 아성은 잠든 청명의 보송보송한 얼굴을 보며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아성의 손이 청명의 뺨에 닿았다가 화들짝 놀라며 떨어졌다. 아성이 내내 밀어내고 눌러두며 자신의 것이 아니라고 부인하던 감정들이 용수철처럼 솟아올라 누른 만큼 매섭게 그를 적셨다. 아성은 결국 청명을 더 이상 바라보지 못하고 침대에서 내려왔다.
창 밖으로 내려다보이는 베를린은 회색이었다. 아성은 푸른빛이 들기 시작한 새벽을 보며 이제야 베를린이 잿빛이라는 것을 알았다. 잿빛 도시 어딘가에 청명과 함께 했던 시간들이 있었다. 그는 조문객처럼 단정한 자세로 서서는 조의를 표했고 눈을 감고 고개를 숙여 묵념을 했다. 그 자의 심장은 도려내진 채로 아직 팔딱거리며 뛰고 있었고 아성은 다시 한 번 심장에 칼을 내려 꽂고는 다시 죽음이 서글퍼 울었다. 죽은 자가 다시 자신을 죽이고는 죽여버린 것이 슬퍼 울었다. 죽이고, 죽여버린 것이 슬퍼 울고, 다시 죽음이 서글퍼 울면 살인자는 아직 죽지 않은 줄 알고 다시 죽였다. 그 죽음과 애도의 선순환이 되지 못한 연결고리에서 아성은 끊임없이 자신을 죽이고 또 그에 상처받았다. 아성은 자신의 죽어버린 감정을 애도해야 하는지 아니면 자신의 감정을 죽여버릴 수밖에 없던 살인자를 애도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아성은 결국 혈관에서 피가 솟듯 울컥이는 울음을 참지 못했다. 입술을 깨물고 소리를 죽여 끅끅대다 결국 자리에 주저앉았다.
아성이 도망친 것은 두 번 스스로를 죽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죽었다고 생각했던 감정은 화려하게 부활하여 다시 아성을 적셨다.
“일어나셨습니까?”
청명은 밤이 한참 깊은 뒤에야 깨어났다. 수려한 얼굴은 당장 깨어질 것처럼 연약해보였으나 그는 결국 속눈썹을 들어올리며 잠에서 깨었고 마침내 그 눈동자를 본 아성은 마음 속의 어린아이가 기쁨으로 춤을 추는 것을 느꼈다. 아성은 침대 머리맡의 야간등을 켰다. 빛을 받은 청명의 연한 홍채는 보석만큼 아름다웠다.
“의사가 왔다 갔습니다. 식사를 준비해드릴테니 드시고 약도 드셔야 할 겁니다. 특별히 불편하신 데가 있다거나 필요한 게 있으시면 저한테 말씀해 주세요.”
청명은 기이할 정도로 말이 없었다. 아성은 머뭇대다가 얼른 방 밖으로 나가 베드트레이에 미음과 약과 물을 담아 돌아왔다. 청명은 여전히 꿈쩍도 않은 채로 있었다. 아성은 덜컥 겁이 나 전등부터 환하게 켰다. 아슬아슬하게 뜨인 청명의 눈이 위태로워보였다. 아성은 76호가 심문 중에 마약이나 심신 미약을 유발하는 약물을 즐겨 사용하는 것을 알고 있었다. 긴 다리가 날 듯이 침대 곁으로 다가갔다. 트레이는 탁자 위에 내팽개치듯 올려놓고 허리를 숙여 청명과 정면으로 시선을 마주쳤다. 아성은 이 한 밤중에라도 의사를 불러올 용의가 있었다. 청명은 명백하게 시선을 피하려는 듯 눈을 감았다. 아성은 그 감은 눈을 보며 한 편으로는 안도하고 한 편으로는 왠지 서글펐다. 평소의 그였다면 그저 미움을 받겠거니 하고 돌아섰을 테지만 오늘의 아성은 다른 사람이래도 믿을 만큼 한껏 감정적인 상태였다. 그도 그럴 것이, 아성은 죽어가는, 혹은 죽을지 아닐지도 모르는 청명을 보았지 않았던가. 애초에 손 안에 쥔 적도 없는 그를 잃으면 어쩌나 전전긍긍한 것이 바로 어제였다.
“저와는 말을 나누기 싫으십니까.”
청명은 아예 아성과 반대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성은 허리를 숙인 그 자세로 한 쪽 무릎을 꿇었다. 이것도 자신의 업보이겠거니 했다. 그는 독일에서는 청명을 기만했고 그의 감정을 알고서도 가장 가혹한 방법으로 그를 뿌리쳤으며 상해로 와서도 별반 달라질 것이 없었다. 별 수 없었다. 자신은 조국을 위해 남을 기만하는 것을, 속이는 것을 일상으로 하며 살아야 했고 청명은 그 속은 무수한 사람들 가운데 하나였으니 아성을 미워하는 것 또한 당연하다 해야 했다. 아성은 그 당연함을 알고 있었다. 그것이 자연스러움을, 그리하여 자신은 미움을 견디고 인내해야 함을 알았다. 그러나 그 또한 사람이라 서러움을 금할 길이 없었다. 아성은 분명 뿌리칠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하며 배 위에 얌전히 올려진 청명을 손을 잡았으나 청명은 미세하게 움츠릴 뿐 아무 반응도 하지 않았다. 이것이 더 서럽구나. 미움보다 무관심이 더 서글픈 것이라는 말을 아성은 그제야 이해할 수 있었다. 좋습니다. 아성이 말했다. 그는 청명의 귀에 입술을 바짝 갖다댔다.
“드릴 말씀이 있어요. 저를 무어라 생각하시든 좋습니다. 다만 이 집에는 일본 특고과 쪽이 보낸 사람이 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부디 신분을 드러내는 행동은 하지 말아주십시오.”
청명은 바위처럼 그대로였고 아성만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틀동안 제대로 조섭을 못하신 것 같아 미음을 준비했습니다. 꼭 드시고, 약도 드셔야 합니다. 아프신 데 있으면 말씀하십시오. 굳이 저에게 하지 않아도 됩니다. 제가 밉다고 스스로를 해치시면 안됩니다. 가보겠습니다. 주무시고, 필요하면 부르십시오.”
아성이 돌아섰다. 뒤돌아보지 않았다. 평소보다 보폭을 크게 하여 걷던 것이 방 밖으로 나서자 거의 뛰는 모양새가 되었다. 아성은 자꾸 배 아래쪽에서 차오르는 것이 무엇인지 몰랐다. 그것은 그저 숨을 쉬기 어렵게 했고, 가슴을 답답하게 했을 뿐이다. 난간도 잡지 않고 두 칸씩 계단을 오르려던 것이 문제였다. 아성은 제대로 몸을 가누지 못했고 결국 꼴사납게 계단에서 굴렀다.
처음에는 우물 속이라고 생각했다. 아성은 절벽 아래 있었다. 절벽 아래 왜인지 깊이 패인 땅은 풀 한 포기 없이 쩍쩍 갈라졌다. 하늘엔 구름이 가득 덮였고 아성은 그 땅굴에서 나가지도 못하고 하늘만 가만히 올려다보고 있었다. 어디선가 지축을 울리는 소리가 아성의 몸까지 한데 울렸다. 겁을 먹은 아성이 손톱까지 세워가며 구덩이 속에서 나오려고 하였으나 실패했다. 손에서 뻘건 피가 줄줄 흘렀다. 아성은 절벽을 올려다보았다. 순식간에 벼락같이 물이 쏟아져 아성을 때렸다. 깊은 구덩이는 금세 맑은 물로 가득 차고 아성은 꼼짝하지 못하고 물에 잠겼다. 그는 탁월할 정도로 몸을 잘 썼지만 수영은 젬병이었다. 아성은 물에 뜨지도 못하고 빠져나오지도 못하고 쏟아지는 물세례를 고스란히 받아야했다. 생각만큼 고통스럽지는 않았다. 그 물은 너무도 맑게 빛나 물 밖으로 굴절된 하늘과 절벽이 고스란히 보였다. 아성은 물 속에 잠겨 정신을 잃어갔다. 입 속으로 꼬륵거리며 들어오는 물이 배 아래부터 아성의 몸을 가득 채웠다.
“아성형! 형!”
명대의 목소리였다. 아성은 자신이 구르다가 어디 머리를 세게 박고 기절했음을 알았다. 아직도 두개골을 지잉 울리듯 아팠고 정신은 몽롱했지만 아성은 그래도 눈을 떴다. 잔뜩 걱정하는 막내의 얼굴이 희미한 불빛에 비쳤다. 아성은 그 불빛만큼 희미하게 웃었다.
“업혀. 가서 눕자. 의사 선생님 데려올게.”
연약한 도련님이 누구에게 업히라고 하는 건지 모르겠다. 아성은 멀쩡한 두 다리로 다시 훌륭하게 바닥을 딛고 서는 데 성공했다.
“됐어. 내일 어차피 또 오실거야. 내일 여쭤보면 돼. 많이 시끄러웠어?”
“시끄러운 게 문제야? 아프지 않아? 어디 크게 문제 생긴 거 아니야? 내가 계단에서 안 구르니까 형이 구르는 거야?”
떽떽거리는 명대의 목소리는 정말로 현실이었다. 아성은 물이라도 마시라는 명대의 팔을 잡으며 물은 이미 충분히 먹었다고 답했다. 명대는 기특하게도 아성의 팔을 붙잡고 부축하며 그를 방까지 데려다주었다. 불을 켜놓고 가까이 와서 얼굴을 관찰하더니 애가 사색이 되는 것을 보니 아성이 정상이 아니긴 한 모양이었다.
“형 얼굴이 허연데. 정말 괜찮아? 나 그냥 자러 가?”
명대는 자다 나온 듯 노란 잠옷을 입고 있었다. 침대 헤드에 등을 기댄 아성이 팔을 뻗어 명대의 머리를 엉망으로 헤집었다. 잔뜩 골이 나더니 괜찮은가보네. 하며 쏜살같이 방에서 도망갔다. 그러다 다시 문을 열고 고개를 삐죽 내민다.
“아프면 말해야 해.”
아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육체적인 고통은 별 것이 아니었다. 아성은 입이 파묻힐 정도로 이불을 올려 덮었다. 어딘가 추웠다. 겨울이니 당연했으나 그 때문이 아니란 것쯤은 알고 있었다. 아성은 문득 여름이 그립다고 생각했다.
명대 앞에서 울지 않은 것은 잘한 일이었다. 아성은 이불로 머리 끝까지 덮어버렸다. 몸 안을 가득 채운 물이 찔끔찔끔 눈구멍으로 흘러나왔다. 청명의 냉대가 이토록 서러웠다.
ㅅ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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ㅅㄹㅅㄹ
ㅅㄹ!
개처럼 기어와서 광광 운다ㅠㅠㅠㅠㅠㅠ 재업은 사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