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건화왕카이





9.





아성이 청명에게서 손을 뗀 이후에 청명을 보살핀 것은 귀찮은 일을 맡았다며 입이 한 되는 불툭 튀어나온 명대였다. 청명이 올 때마다 자신은 과제 때문에 바쁘다며 보기를 거부하거나 시간이 엇갈렸던 명대는 의외로 청명을 보자마자 좋아하기 시작했다. 둘은 의외로 죽이 잘 맞는 것처럼 보였다. 청명은 아성 앞에서는 한겨울 눈싸라기처럼 냉랭하게 굴었지만 명대 앞에서는 명대 또래 청년처럼 허구한 날 장난을 치고 소녀처럼 웃었다. 아마 화꺼라고 친근하게 부르며 관심을 표하는 명대를 싫어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딱히 질투가 일지는 않았다. 아성이 생각하는 한 명대는 사랑하지 않을 이유가 별로 없는 사람이었다.


청명은 침대 헤드에 등을 기대고 앉아 명대가 훔쳐 온 명루의 책을 읽고 있었다. 명대는 청명의 곁에 비스듬히 누워서는 청명이 하는 양을 보며 킬킬대며 웃었다. 청명의 시선이 이상한 것 보는 듯이 흘끔 명대를 스쳤다가 다시 책으로 귀환했다. 아무래도 방금 뭔가 우스운 것을 보고 온 모양인데, 그대로 웃다가 말다가를 반복하니 이상해보이지 않을 수가 없덨다.



“형은 아성형이 싫어?”



웃음 끝에 불쑥 튀어나온 질문이 어이없어서 절로 헛웃음이 나왔다.



“그런 건 왜 묻는 건데.”


“형이 아성형 싫어하는 것 같아서. 화꺼, 나 형이 여기 있는 동안에 아성형이랑 말하는 거 한 번도 본 적 없는 거 알아? 아성형도 이상해. 아니야, 아무리 봐도 둘 다 이상해. 아성형이 형한테 죄졌어?”



명대는 별 것 아닌 척 정곡을 찌르는 능력이 있었다. 청명은 고개를 저었다. 누운 탓에 청명이 보기에는 거꾸로 돌아가있는 명대의 얼굴이 갸웃했다.



“아니면 아성형한테 잘 좀 해줘. 맨날 무슨 똥마려운 강아지마냥 형 앞에서 안절부절 못하는 거 보기 좀 그렇단 말야. 아성형이, 형 76호에 있을 때 못되게 굴었어? 응?”



이렇게 이야기해오는 것을 보면 그간 청명의 태도가 여간 신경쓰이는 게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아성과의 과거에 대해 아는 바가 없는 명대가 알아차릴 정도라면 아마 집안에 모르는 사람이 없을 터였다. 청명은 자신의 행동을 후회하지는 않았지만 그 수준에 있어서는 자신이 과했나 하는 고민을 하긴 했었다. 그는 아몬드 모양 눈을 있는대로 동그랗게 뜨고 자신을 올려다보는 명대의 앞머리를 괜히 헝클어뜨렸다. 명대가 으아악 신경질을 부리며 몸을 세워 일어나 양반다리를 하고 앉았다.



“그럼 왜 그러는데? 아성형이 물론 매국노들이랑 같이 일하고 있어서 천하의 개쌍놈이긴 하지만 그래도 그렇게 나쁜 사람은 아니야. 아성형은 그냥 큰형 따라 일하는 것 뿐인데 큰형도 사실 그렇게 못돼 처먹은 건 아니고. 하여튼 화꺼가 그렇게 대할 정도로 나쁜 사람은 아니란 말이야.”



청명이 생각하기에 아성은 매국노들이랑 일을 같이 하는 것이 아니라 내력이 어쨌든 매국노 집단에 소속된 사람이었다.



“한간이면 나쁜 사람 아닌가?”


“나는, 있잖아, 형. 이건 비밀이야. 나는 아성형이 매국노라고 생각 안해. 뭔가 이유가 있을 거라고 예전부터 생각해왔고…… 아무리 생각해도 이유가 있는 것 같아. 난 형이랑 어릴 때부터 같이 자랐으니까 큰형만큼은 아니어도 아성형을 잘 알거든. 그럴 사람이 아니야.”



명대의 생각은 단순하지만 진지했고, 꽤나 확고해 보였다. 청명은 아성을 잘 알지는 못했다. 그와 공유한 시간은 인생 전체를 통틀어봐도 1년은커녕 반년도 되지 못했다. 하지만 이 순간 명대의 생각을 청명이 공유하면서 청명은 제가 꽤 아성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사람 중 한 사람이 아닐까 생각했다.



“나쁜 사람이 아닌 건 알아. 76호에 있을 때도 날 구해주려고 했거든. 물론 무슨 이해관계가 껴 있었을 수도 있지만, 아마 아닐 거라고 생각하기도 하고.”


“그럼 왜?”


“그래도 신정부에서 일하잖아.”



명대는 명루와 청명이 한없이 어색하지만 꽤 호의적인 태도로 인사하는 것을 봤었다.



“그짓말,”


“까분다.”



아성형이랑 똑같애. 명대는 입술을 쭉 내밀고 툴툴대며 야무지게 청명의 책을 빼앗아 침대 위에 패대기 치더니 쌩하니 방에서 나가버렸다. 청명은 허, 하고 헛웃음을 내뱉었다. 달리 뭐라 변명할 수 있단 말인가? 그에 대해 꽤 잘 안다고, 그가 나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고 말하면서 그를 외면하고 거부하고 핍박하는 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단 말인가. 청명은 자신도 정확히 규명하지 못한 이 감정의 현상을 남에게 설명해줄 수는 없는 문제라고 생각했다. 아예 관련이 없는 누군가도 난감한데 그것이 독일의 아성이 입에 침이 마르도록 귀여워했던 동생 명대라면 더욱 난처한 일이었다. 청명은 이 황량한 방에 스스로를 가두고서는 계속 같은 물음만 던져왔다. 그를 어떻게 대해야 하지? 나는 그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지? 어떤 감정을 갖고 그를 바라보고 있지? 하지만 청명은 자신과 아성에 대한 그 무수한 물음들에서는 한결같이 답을 찾지 못했다. 사람의 감정이란 스스로가 조절하기 너무도 힘이 드는 것이어서, 청명은 차마 그 감정을 조절할 생각은 하지 못했다. 그는 내내 자신의 감정 변화를 설명해줄 만한 적절한 말들을 골라내고 싶었으나 매번 실패했다. 


청명은 엎어진 책을 들어올렸다. 책은 제목부터가 너무나도 낯설어 아까 청명이 펼치고 있던 페이지가 맞는지 확인할 방법이 없었다. 청명은 결국 다시 책을 곱게 덮어 곁의 탁자 위에 올려만 두었다. 청명은 최초에 그가 신정부에서 일하는 매국노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를 미워하지 않았던 자신을 이해할 수 없었으며, 시간이 지나 그가 자신을 구하려 억지를 부릴 때는 어째서 그토록 그를 외면하고 싶었는지도 알 수 없었다. 한간은 미워한다. 아성은 밉지 않다. 그러나 아성은 매국노다. 삼단 논법에 전혀 들어맞지 않는 모순된 감정들과 자신의 모순된 태도들에 청명은 혼자 고통스러워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아성은 매국노가 아닐 것이다. 청명은 거기 어느 정도 근거없는 확신을 하고 있었으나 그렇다면 그런 확신을 가지게 된 순간부터 그에게 시선을 두지 못하는 이유는 뭐란 말인가?


의문의 소용돌이 속에서 청명이 확신하고 있는 것은 단 한가지였다. 고청명은 아성을 혐오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혐오하고 있다는 것. 결국 그를 혐오하는 대신 자신을 혐오하기로 택했다는 것.


이제 이 집에서 떠날 때도 되었지. 청명은 스스로를 타일렀다.




아성의 언질 덕분에 76호에서 청명에게 가했던 고문의 수위는 그다지 높지 않았다. 청명은 상처들을 제외하고는 금방 건강을 회복했고, 결국 명경과 명대는 아쉬운 티를 팍팍 내면서도 청명을 보내줄 수밖에 없었다. 아성은 청명을 배웅하기 위해 문 밖에 명대와 같이 나서는 짓 따위는 하지 않았다. 물에 잠긴 듯 제대로 뜨기 어려운 눈만 억지로 뜨고 청명이 탄 차가 나가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을 뿐이었다.


청명이 제 집으로 돌아와 가장 먼저 한 일은 커튼을 모조리 닫고 총기의 상태를 확인하는 것이었다. 청명은 총 한 자루로는 상해에서 살아 나가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청명이 상해에 머무는 목적은 같이 살아 나가는 것이지 누군가를 죽이는 것이 아니었기에 그는 총을 어떻게든 처분하는 것이 나으리라는 생각을 했다. 총을 은밀히 처분하기에는 아버지의 사람에게 건네는 편이 가장 좋았고, 그렇게 해야 청명이 받지 못하고 끝났던 어린 시절의 팔찌도 받을 기회가 다시 생길 것이었다. 청명이 잡혀가기 전 구축되어있던 연락방법은 모두 폐기되었으므로 그는 고립된 상태였다. 청명은 새로운 접촉방법을 찾고 만들기 위해 고심했다. 연락할 수가 없으니 그는 기다리는 것밖에는 방법이 없었다. 의외로 청명의 고민은 아주 가까운 데에서 풀렸다.



“날 믿지 않아도 좋지만, 이게 필요한 게 맞지요?”



명가에 있는 동안 이틀에 하루 꼴로 청명을 살폈던 의사였다. 의원은 왕진에 들고 다니는 가방에서 정사각형의 작은 꾸러미를 꺼냈다. 아마 명가에 놓고 온 물건이리라 예상하며 상자를 연 순간 청명은 기함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작은 종이 쪽지 않에는 청명이 어린 시절 끼던 팔찌가 함께 들어있었던 것이다.



“이, 이게 뭡니까. 어째서 선생님께서…….”



팔찌는 아기들의 돌반지가 그러하듯 아이의 손목 굵기에 맞추어 둘레를 약간 늘릴 수도 있는 종류로, 합금은으로 되어 있고 독특한 무늬의 구체 옥돌 두 개가 달려 서로 부딪히며 잘그락거리는 소리를 냈다. 청명은 어린 시절의 희미한 기억과 똑같다는 생각을 하며 팔찌를 이리저리 살폈다. 손바닥 위에서 몇 번이나 황망하게 뒤엎어지던 팔찌는 다시 얌전한 평화 속에 놓였다.



“친구의 부탁을 받았어요.”



말은 그 뿐이었다. 청명은 그 팔찌가 전달되어 오기까지 얼마나 복잡한 루트를 거쳤는지는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그저 어쩌면 자신의 목숨을 앗아가는 계기가 되었을지도 모르는 물체가 살아있는 자신의 손 위에 놓여있다는 것에 감격했다. 아마 청명은 그 물체가 집요한 국민당 간첩 두엇과 아무 것도 모른 채 순진하게 건네받고 건네주는 역할을 맡게 된 공산당 간첩 두엇의 손을 거쳤는지는 영원히 모를 것이다. 멋도 모르고 친구의 부탁으로 물건의 전달을 맡게 된 의원은 남은 시간동안 인자한 미소만 지으며 청명의 상처를 확인하고 진찰하더니 이내 재빨리 돌아가버렸다.


청명은 혼자 남게 된 후 상자 안에 담겨 있던 쪽지를 신속하게 꺼내보았다. 종이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 있었다.



연락 불요

일이 끝나면 최대한 정상적으로 나와 제 3국을 경유할 것.



청명은 종이를 그 자리에서 태워 버렸다. 연락을 하지 말라는 말은 지난 일로 인해 삼엄해진 청명에 대한 감시 탓일 것이다. 이제 감시할 필요도 없어. 어차피 이제 청명이 할 수 있는 일은 지극히 평범한 사촌찾기 뿐일 터였다. 청명은 뒤이어 팔찌를 바로 앞 책상에 곱게 올려놓고서는 팔짱을 끼고 뚫어져라 노려보았다. 청명이 이 것을 무리해서 들여오려고 한 까닭은 아성에게 있었다. 아성의 방 두 번째 책상 서랍에 들어 있던 녹빛 부서진 옥돌이 떠올랐다. 그것은 청명의 것처럼 매끈한 구체는 아니었다. 반 정도는 매끈하고 반 정도는 부서진 것인지 원래 그런 세공을 해둔 것인지 옥돌은 철월의 모양을 띠고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청명은 팔짱을 책상 위에 그대로 얹고 거기 턱까지 파묻고는 팔찌를 바라보았다. 이것과 관련이 있는 것일까? 닮았으나 완전히 다른 것처럼도 생겼다. 청명의 옥돌처럼 독특한 무늬가 있기는 하나 돌이 띠는 색이 미묘하게 달랐다. 청명은 결국 자신의 목숨까지 걸려버린 팔찌 반입이 별 의미가 없었다는 결론을 내렸다. 청명의 것과 닮은 옥돌은 지나가던 여인의 목걸이나 팔찌에서도 충분히 볼 수 있었던 것이다. 청명은 팔찌를 상자에 대충 쑤셔넣고는 옷장 아래 넣어 감춰버렸다. 의미가 없게 된 이상 저것을 보면 아성밖에 생각나지 않을 것이다.







10.




아성이 상해 변두리의 그 술집에 들른 것은 순전히 지나가듯 농을 친 명대의 말 한 마디 때문이었다.


나 아까 화꺼 봤다? 그 철교 건너기 전에 있는 엄청 낡은 술집 있잖아…….


화꺼가 누군데.


건화형이지 누구야. 많이 취한 거 같던데? 안주도 하나도 없이 술만 마시고 있던데?


그래서.


밖에 지금 비오잖아. 혼자 집에 못 갈거 같던데, 형이 데려오면 안돼?




아성은 순순히 명대의 말을 들었다.


청명은 테이블 위에 머리를 박고 험하게 널부러져 반쯤 잠들어 있었다. 아성은 밤 늦게 온 새 손님에 반색하는 것인지 난감해하는 것인지 어색한 미소를 짓고 있는 주인에게 손짓으로 양해를 표시하고 청명을 흔들어 깨우려 했다.



“곽건화씨.”



청명은 꼼짝 않고 잠들어 있었던 모양이다. 건화씨. 곽건화. 점점 높아지는 목소리에도 청명은 테이블 위에 뺨을 부빌 뿐 허리를 세울 생각은 하지 않았다. 아성은 명대 말을 끝까지 듣기로 했다. 가게 주인에게 테이블 위의 수많은 술병-세어 보지는 않았지만 혼자 먹기에는 지나치게 많은 양이었다-의 술값을 계산한 뒤 청명의 한쪽 팔을 들어 제 어깨 위로 올렸다. 아무래도 들고 들어온 우산은 일단 포기하고 꼼짝없이 비를 맞아야 할 것 같았다. 어깨동무를 하며 일어서자 청명은 용케도 두 다리로 섰다. 약간 정신이 든 것 같았다.



“뭣 때문에 이렇게 많이 마셨어.”


“……으떤 개색기 때매…….”



말의 내용과는 상관 없이 아성의 마음 속에는 청명이 자신의 물음에 대답을 주었다는 순수한 기쁨이 가득 찼다.



“그 개새끼가 누군데.”


“이쁘기만 한 시발롬이…….”



청명은 더 이상의 질문은 그만두기로 했다.


청명은 아성보다 확실히 무거웠다. 아성은 추적추적 내리는 비를 맞는 채로 낑낑대며 한 팔로는 청명을 지탱하고 한 팔로는 제 차의 뒷좌석 문을 열었다. 절대 고의는 아니었으나 청명을 뒷좌석에 내려놓으면서 아성의 팔에 힘이 탁 풀렸고 청명의 뒷통수가 세차게 의자로 낙하했다. 좌석이 푹신하긴 하지만 술 취한 골이 좀 아플 것이다. 청명은 잔뜩 뭉개지는 소리를 이 사이로 내뱉으며 구워지는 오징어처럼 반사적으로 몸을 웅크렸다. 아성은 문 밖으로 쏙 튀어나온 청명의 두 다리를 대충 차 안으로 구겨넣고는 운전석에 앉았다. 뒷좌석이고 운전석이고 몽땅 젖었다. 내일 아침이면 명루가 기함할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저러다 토하면 어쩌지. 아성은 희미한 불안을 담고 술집 안에 다시 들어가 우산을 회수해 돌아왔다.



“아파……. 개색기야.”



아무래도 청명의 정신은 꽤 돌아온 모양이었다.



“나더러 하는 소리야?”


“그래, 너. 아니야, 너 아니야.”



백미러에는 마침내 청명이 횡설수설하며 제 몸을 꼬물꼬물 움직여 의자에 제대로 앉는 것이 고대로 비쳤다. 청명은 눈을 감고 고개를 뒤로 젖히고서는 색색 숨을 내뱉었다. 아성은 그 희게 질린 얼굴이 과음한 탓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청명은 술을 마시면 얼굴이 붉어지기는커녕 희게 질렸다. 아성은 시동을 걸고 차를 움직였다. 차는 술집 앞을 빠져나가 쥐새끼 하나 보이지 않는 좁은 도로에 접어들었고 철교를 지나 빗소리에 빠진 건물들 사이로 들어섰다. 아성의 목적지는 명공관 뒤편의 인적이 드문 길이었다. 이윽고 청명의 눈이 느리게 떠졌다.



“왜 데리러 왔어.”



그리고 나온 말은 다시 냉랭하기 짝이 없었다. 아성은 그래도 그가 자신에게 먼저 말을 걸어준 것에 의의를 가져야 하나 싶었다.



“명대가 널 봤대. 데려오랬어.”


“됐어. 내려줘.”


“말 들어. 너 많이 취했어.”


“다 깼어.”



다 깼다기에는 무릎 위에 올려둔 손이 미세하게 경련하고 있었다. 아성은 결국 더 가지 못하고 길가에 차를 세웠다. 어느덧 빗줄기는 굵어져 차유리는 더 이상 외부를 보여준다는 본래의 효용을 다하지 못하고 있었다. 아성은 비가 주룩주룩 유리를 타고 내리는 것을 지켜봤다. 차 안은 고요로 잠겨들었고 차창은 비와 결합해 가로등의 빛을 차 안으로 산란시켰다. 아성은 어느 땐가 꾸었던 꿈 속 같다고 생각했다. 물 속에서 허우적거리던 꿈.



“여기가 어딘지도 모르잖아.”


“어떻게든 찾아갈 수 있겠지.”



우산도 없이 꼴딱 비를 맞으며 갔다간 열이 올라 죽지나 않으면 다행일 상황에 처할 것이다. 아성은 백미러 너머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창 밖만 바라보는 청명의 단단한 아래턱을 응시했다. 그는 거진 술이 깬 것 같았고, 이를 악물고 있었다.



“나랑 있는 게 그렇게 싫어?”



청명의 고개가 느리게 돌아왔다. 유독 짙고 입체적으로 보이는 눈동자가 아성을 쥐고 놓아주지 않았다. 물음을 던진 것은 아성인데 그 질문에 속박당한 것도 아성이었다. 아성은 그의 입에서 그렇다는 대답이 나온다면 자신이 어떻게든 그 영향을 받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너무도 섣부른 질문이었다.



“싫다면.”



너무도 섣부른 질문이었다. 아성의 입에서 반사적으로 답이 튀어나갔다.



“싫어하지 마.”



심장에 돌이 얹힌 것 같았다. 영원히 묻어두려던 말이 튀어나간 것으로 모자라 아성은 호흡이 곤란한 것을 느꼈고 자꾸 목소리에 물기가 섞이려는 것을 눈치챘다. 그러나 첩자에게 호흡을 조절하고 목소리를 제 마음대로 내는 것은 필수 덕목 중 하나였다. 아성은 자신의 능력이 자신의 감정을 따라가지 못하는 것을 허무하게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청명에게는 자신을 미워할 자격이 있었으니 자신은 서러워할 자격이 없는데도 자꾸 아성은 서러워졌다.



“미워하지 마.”



결국 잔뜩 젖은 눈에서 눈물이 툭 떨어졌다. 그 소리가 빗소리를 닮아 다행이라고 아성은 생각했다. 비가 오지 않았다면 분명 눈물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을 것이다. 밤이 아니었다면 눈물을 흘렸다는 것을 청명이 꼼짝없이 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다행이라 할 것도 없이 목소리는 물에 잠긴 것처럼 처량했고 애달프기만 하여 눈물을 들킨 것이나 진배없었다. 청명은 고요와 어둠 속에 가만히 고여 숨만 내쉬었다. 아성은 거울 속에 비친 그의 모습에서 어떤 감정적 변화도 찾아볼 수 없었고 그것이 아성을 더 섧게 만들었다.



“미워하지 마.”


“나쁜 사람이 아니야?”


“나쁜 일은 안해.”



아성은 청명에게로 몸을 돌렸다. 어둠 속에 평소보다 더 반짝거리는 청명의 눈이 보였다. 아성은 온갖 고민과 감정이 들어찬 눈을 보았고 그리하여 어느 때보다 빛나는 청명의 눈을 보았다. 아마 제 눈도 저것과 그리 다르지 않을 것이다. 아성은 한 번 트인 길로 자꾸 흘러 내려가는 눈물을 닦지도 않고 허리춤에 꽂아놓았던 권총을 꺼냈다. 아성의 어깨가 뒤로 기이하게 틀어지는 것을 본 청명의 미간에 미묘하게 더 주름이 졌으나 청명은 아무 반응도 하지 않았다. 아성은 권총의 잠금장치를 푼 뒤 권총 머리를 손으로 붙잡고 청명에게 손잡이를 건넸다.



“나빠도 미워하지 마.”



권총은 곧 아성이 최초로 청명에게 내리는 시험이었다. 죽어도 좋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다만 아성은 청명을 시험하고 또 시험하여 자신을 부정하지 못하도록 하고 싶었다. 그런 눈을 하고 나를 보면서 나를 미워한다고 말하면 안 되는 것이다. 나에 대한 수많은 기대와 감정을 놓고서 그렇게 외면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아성은 제 입으로 죽어도 말하기 힘든 것을 청명이 해 주었으면 했다. 결국 그가 인정하고, 자신은 인정치 않고, 그리하여 예전에 그랬듯 다시 기가 막힌 평행선을 걷던가 혹은 아성이 그를 받아주는 형국이 되기를 원했다. 지독히도 이기적이고 서툴다는 것은 인정한다. 아성은 그저 제가 그런 감정을 품는 것조차 낯설었을 뿐이다. 둘은 서로 감정을 외면하기 급급하면서도 관계는 이어가기를 원했다. 관계를 잇는 데는 일방적이던 그렇지 않던 어느 정도의 인정과 애정을 필요로 하지만 둘 다 그것을 기꺼이 책임지려 하지 않고 미루고만 있었다. 청명은 아성을 미워하고 외면했고 아성은 청명에게 총을 내밀었다.


청명의 손 끝이 아성을 스치고는 단단히 권총을 잡았다. 아성은 차 문을 열고 비내리는 소리로 가득 찬 밖으로 나가더니 뒷좌석을 열고 반대편으로 들어왔다. 아성의 상체가 청명에게 훤히 드러났고 제정신을 차린 청명은 그제야 아성이 잔뜩 젖어버린 흰 셔츠에 있는 대로 헝클어진 머리를 한 것을 알았다. 총 끝이 툭 떨어졌다. 꿈을 꾸고 있는 게다. 청명은 피처럼 목구멍을 타고 치밀어오르는 감정을 도로 삼켰다. 또 기어오르기에 또 삼켰다. 그러나 혈관을 타고 오르는 것은 어쩔 수 없어, 자꾸 눈만 젖어갔다.



“너는 참 지독하구나.”



너야말로. 아성은 속으로 조그맣게 속삭였다. 총구가 정확하고 빠르고 매섭게 아성의 가슴까지 올라갔다. 청명의 손속부터 눈빛까지 어디 하나 망설이는 구석이 없었다. 아성은 어디 한 번 쏴보라는 듯 팔을 벌리기까지 하고선 눈만 꾹 감았다.


딸깍.


그 소리는 분명 아성이 미리 풀어둔 안전장치가 걸려 나는 소리였다. 아성의 몸이 순간 파들거리며 놓여났다.



“탕.”



권총의 격발음을 닮은 그 소리는 차가운 쇠붙이에서 나지 않고 청명의 입 속에서 났다. 그는 극도의 긴장 속에서 갑작스럽게 풀려난 아성의 황망한 모양새를 보더니 다시 한 번 탕, 하고 총소리 비슷한 파열음을 내고는 씩 웃었다. 청명은 다시 총을 건네주려는 듯 총신을 잡았다가 도로 제 허리춤에 집어넣었다. 너한테는 내 생명은 못 맡기겠다. 청명의 말은 썩 장난스러웠으나 아성은 어린 애처럼 눈만 붉어져 울음만 꾹꾹 참고 있었다.


쏘느냐 쏘지 않느냐의 사이에서 청명은 쏘았으나 쏘지 않았다.



“미워하지 않아?”


“미워하지 않아.”



여기에 이르러서도 미워하지 않는다고, 말해오는 청명이 아성 마음 한 켠의 무언가를 찍어누른 모양이었다. 아성은 제 몸을 가만 두지 못하고 덜덜 떨며 무릎걸음으로 청명에게 던져 안겼다. 비로 척척히 젖은 옷 사이에서 기묘한 온기가 피어올랐다. 청명은 자유로운 두 팔로 아성의 허리를 끌어안았고 아성은 양 팔로 청명의 목을 가득 끌어안고는 어깨에 얼굴을 파묻었다. 감정에 대한 답을 찾을 필요 없었다. 감정이 논리적일 필요도 없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청명은 그저 마음 가는대로 행동하기로 했을 뿐인데 아성의 모든 요구는 수용되었다. 청명은 쏨으로써 아성에게 솔직한 감정을 내보였고 쏘지 않음으로써 그를 아낀다는 것을 보여줬다. 청명의 의도가 어땠던 간에 아성은 청명의 행동과 순수한 마음에 감격했다. 아니, 틀렸다. 청명이 무엇을 했더라도 자신은 그것을 좋게 받아들였을 것이다.



“너하고만 있으면 내가 이상해져.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아.”



스스로 이성적이라고 자부하는 아성이 정신줄을 놓는 대상은 가족 뿐이었으나, 현재는 아니었다.



“그것도 너일거야.”


“집에 가자. 네 집에 가자.”


“여기 있어. 내가 운전할게.”


“운전 할 줄 알아?”


“못할 건 또 뭐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