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건화왕카이





11.



빗소리를 제외하고는 개미 새끼 한 마리 없는 거리에 차가 섰다. 차에서 내리기도 전부터 이미 홀딱 젖은 두 인영이 앞다퉈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우산은 차 안에 버려졌다. 누가 본다면 싸우러 들어간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아성의 입매는 분노를 참는 것처럼 단단히 굳어있었고 청명의 얼굴은 비에 맞은 탓에 더 희게 질려 안광만 형형했다. 청명이 열쇠를 열쇠구멍 안에 들이밀고 돌려 문의 잠금장치가 풀리자마자 아성이 달려들었다. 청명은 저돌적으로 입술을 들이미는 아성을 온전히 받아내며 그의 등을 쓸어내렸다. 안 급해, 천천히 하자. 말은 그렇게 하는 청명의 다른 손도 상대의 젖은 셔츠를 벗겨내기 바빴다. 아성이 큰 키를 접어 청명에게 안기려고 드는 바람에 청명은 아주 오래 전부터 그토록 원해왔던 아성의 맨허리를 고스란히 팔 안에 넣을 수 있었다. 청명은 아성에게 뒤로 밀리면서 차분하게 침대로 방향을 잡았다. 뒷꿈치에 침대가 걸려 넘어진 순간 아성의 셔츠는 저 멀리 떨어져 있었고 청명의 옷은 완전히 풀어헤쳐져 팔에만 걸린 상태였다. 아성은 소동물처럼 머리로 청명의 턱을 툭툭 쳤다.



“니가 더 급하잖아.”



아성이 덥석 청명의 고간을 잡고는 벨트를 풀어내리기 시작했다. 자신이 그토록 흥분했던지 모르고 있던 청명은 그 기이한 느낌에 으르렁거리며 아성을 메쳐 자리를 바꾼 뒤 그 위를 타고 올랐다. 아성이 아무리 훈련을 받고 힘을 키워도 청명에게 비할 바가 아니었던 모양이다. 아성은 즐거운 듯 청량하게 웃었다.



“장난치지 마.”


“보기 좋은데 뭘.”



손은 매번 아성이 빨랐고 힘은 매번 청명이 조금 더 셌다. 청명이 아성의 상체 대부분을 씹어놓을 동안 아성의 손이 빠르게 움직여 청명의 옷을 벗기고 제 옷도 벗었다. 섹스하듯 엉켜드는 혀와 점막에 아성은 속으로 끄응 하는 신음만 뱉었다. 아성은 전에도 몇 번 남과 몸을 섞은 적이 있으나 그 때는 이토록 감각이 강렬하게 다가오지는 않았었다. 아성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생리현상의 하나로서 다른 이와 밤을 보냈다. 상대가 좋아서 하는 것은 처음이다. 아성은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정신을 차릴 수 없고 몸이 마구 달아오르는 것만 속절없이 느꼈다. 아성은 입술이 떨어지자마자 부르짖었다.



“흐으, 고청명 너 술냄새나…….”



청명은 술에 떡이 되도록 마셨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다 깼어.”



이런 동문서답이 또 없었다.



“너 기억 못하면 어떡해?


“다 깼다니까.”



다시 새가 모이를 쪼듯 가볍게 입맞춘 청명이 집요하게 살갗을 탐하며 아래로 내려갔다. 가슴에 닿을 때쯤 아성이 청명의 양 뺨을 잡고 다시 제 얼굴까지 들어올렸다. 빨리, 그냥 넣자, 아성이 조급하게 이르자 청명은 있는대로 인상을 찌푸렸다.



“많이 아플거야.”


“풀고 왔으니까 괜찮아.”



청명이 순간 굳었다.



“뭘 할 줄 알고 풀…… 그것보다, 너 처음 아니야?”



아성은 태연하게 대답했다.



“프랑스에서 혼자 유학하면서 배운 게 많은데. 그리고, 니가 싫다고 하면 애초에 내가 덮치려고 했지.”


“아아?”



고지식한 청명도련님께서는 도무지 생각해본 적이 없는 방향이었다……. 아성은 요염하게 웃으며 손 끄트머리로 청명의 뺨을 간질이듯 쓰다듬더니 마른 다리를 들어 냉큼 청명의 허리에 둘렀다. 나 왠지 너한테 놀아난 것 같아……. 혼이 반쯤 빠져나간 청명이 중얼거리다 아성이 청명의 허리를 제 쪽으로 슬며시 당기자 다시 다른 의미로 얼굴을 굳혔다. 순간이었다. 아성은 마찰로 인한 뻑뻑한 고통이 온 몸을 태우는 것을 느끼며 손발로 시트를 잡아 뜯었다. 짐승새끼, 내가 내 생각 안하고 지 생각만 할 줄 알았다. 청명은 거침이 없었고 조금만 천천히 해달라거나 살살 해달라는 아성의 요구는 일절 묵살되었다. 청명의 입술이 찡그린 이마와 코 끝에 사뿐히 내려앉았고 손과 손이 간지럽게 얽혔다. 고통으로 인해 거칠기만 하던 숨에 비음이 섞이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내가 널 쏴버렸으면 어떡하려고 그랬어.”



아성은 가볍게 청명의 입술을 물었다 놓고는 말했다.



“어차피 첫 탄창은 비어있었어.”


“그건 날 못 믿었다는 소린가?”


“너랑 자려고 준비 다 하고 왔다니까.”


“그거 쐈어도 잘 수 있는 거 아니야?”


“너는 니가 진짜 싫어하는 놈이랑 섹스해?”


“……아니.”






 

청명이 말했다. 나 예전부터 궁금했던 게 있었어. 아성이 답했다. 뭔데?


너 그 집에서는 무슨 위치야? 동생인데 집사고, 아성인데 명성이고. 나 예전부터 궁금했어. 아성은 누워있음에도 늘어지지 않는 청명의 잘생긴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나는 열 살 때 명가에 들어왔어. 명씨 집안에는 원래 딸 하나, 아들 하나로 두 남매만 살고 있었는데, 어느 날 명대를 데려오고, 또 어느 날 내가 들어갔지. 입양은 아니고, 음, 설명하려면 복잡하겠는데.


그냥 네가 살아온 얘기를 다 해주면 안될까.


……그래, 해줄게. 어디보자, 내가 어릴 때부터 얘기해보자면, 사실 아주 어릴 때는 기억이 잘 나지는 않아서 내가 해줄 말이 별로 없다. 내가 뚜렷이 기억하는 건 입양이 됐을 때부터야. 너도 본 적 있겠지만, 지금 집에 있는 사용인 중에 나이 많은 사람이 있잖아. 그 여자가 내 양모야. 고아원 구석에서 웅크려 있는데 원장이 날 데리러 왔어. 네 엄마가 돌아왔다고. 그 땐 얼마나 기뻤는지 몰라. 그 고아원은 고아를 한 명 돌볼 때 들어오는 지원금을 노리고 운영되는 거라서, 아이들한테는 신경을 별로 안 썼거든. 그 날도 먹으라고 준 음식에서 벌레가 나와서, 어린 마음에 비위가 상했지. 거기 있는 동안 내내 이런 곳은 싫다고, 부모님이 데리러 와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서, 그 날 원장이 내 손을 잡았을 때는 정말 행복했어. 무슨 일이 있어서 나랑 같이 살지 못하던 엄마가 날 데리러 왔다는거야. 나는 고아원에서 쓰던 몇 가지 개인 물품들만 가지고 그 여자를 따라 갔어. 한동안은 행복했어. 나한테 잘해줬거든. 나는 내가 진짜 그 여자 아들일 거라고 굴뚝같이 믿었어. 


그런데 어느 날부터 날 보는 눈빛이 다른 거야. 죽도록 맞고, 굶었어. 지금같으면 우스웠을텐데, 그 때는 나도 어렸고, 아는 것도 없었고, 왜 엄마가 갑자기 나를 미워할까, 내가 뭘 잘못한 걸까 그런 생각만 했었지. 어느 날은 며칠 째 아무 것도 못 먹고 하필 감기도 걸려서 정말 정신이 오락가락했어. 계속 잠만 쏟아지고, 뭣도 모르는 애가 이대로 잠들면 죽겠다고 생각했으니 정말 상태가 심각했을거야. 가만히 웅크려 있는데 갑자기 대문이 벌컥 열리는 거야. 나는 또 그 여자가 화가 나서 나한테 화풀이를 하려나 했는데, 누님이랑 형님이 계셨어. 나는 그 날부터 명가에 와서 명가의 밥을 먹고 물을 먹고 자랐어. 내 양모는, 계이는 내가 그 날부로 쫓겨났어. 원래도 지금 하는 일이랑 같은 일을 하고 있었는데, 명루 형님이 내 꼴을 보고서는 화가 머리 끝까지 나셨었지. 십년 넘게 볼 일이 없던 얼굴인데 얼마 전에 다시 돌아왔어. 덕분에 신년 분위기가 장난 아니었지. 내가 싫다고 깽판을 놨으니. 난 아직도 그 여자가 싫어. 너도 좋아하지 마. 좋은 사람 아니니까. 왜 웃어. 웃지마. 진지하다고. 뭐? 아, 입양이 된 건 아니야. 정식으로 입양이 된 건 명대고, 나는, 감사하게도 나를 키우지는 않았지만 내가 자라는 데 모든 도움을 다 주셨지. 친히 가르쳐주셨고, 학비도 다 대주시고. 내 삶을 가치있게 만들고 원하는 걸 할 수 있도록 이정표를 세워주셨어. 나한테 내가 어떤 위치냐 묻는다면, 나는…… 명대의 형이고, 명루형님과 명경누님의 동생이라고 대답할거야. 그러고 싶어.

 




슬금슬글 어둠에 흰 물감이 똑 떨어져 퍼져나가듯 빛이 섞여갔다. 청명은 시트를 걷어낸 매트리스 위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창 밖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시선을 멀리 두면 둘수록 지난 밤 격렬한 운동으로 인해 다시 터진 상처의 고통이 덜해지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청명의 등 뒤에서는 아성이 같은 방향을 보고 앉아서 붕대를 두르느라 바빴다. 기실 아성은 두 사람의 짧은 숙면이 끝난 뒤부터 정신없이 움직였다. 청명은 상처가 군데군데 다시 터져 열이 올라 힘들어했기 때문에 간만의 정사로 허리 아래 감각이 이상하다고 투덜거리는 아성이 필요한 일들을 했다. 청명이 깨기 전에 먼저 일어나 식은 땀을 흘리는 것을 확인하고 열을 재본 것도 아성이었고 청명이 자도록 내버려두고 먼저 씻고 뒤처리를 하고 청명을 깨워 화장실로 들여보낸 것도 아성이었다. 명가 집사의 눈으로는 영 다시 쓰기 힘들 것 같은 침대시트에서 핏자국을 발견한 것도 그였고 집안을 뒤지며 구급상자를 찾아온 것도 그였다. 하얀 침대시트는 땀과, 그리고 명백한 피를 포함한 몇 가지 체액으로 군데군데가 젖어있었기 때문에 아성은 일단 그것을 걷고 대충 구겨 침대 아래에 처박아두었다.



“이제 어떻게 된 건지 좀 얘기해줄래.”


“뭘.”


“나쁜 사람이 아니라며.”



비오는 차 안에서 했던 얘기였다. 아성은 그 말을 할 때부터 해명을 해야 할 순간이 오리라는 것을 짐작하고 있었으므로, 청명이 깨기 전까지 분주히 몸을 움직이며 내내 머리로는 그 생각을 했었다. 어디까지 얘기할 수 있는가? 어디까지 얘기할 것인가? 안타깝게도 개중 대부분은 아성이 혼자 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청명은 친절하게도 아성이 답해야 할 방대한 내용 중 일부분을 잘라 물어왔다.



“신정부에서 일하는 건 어떻게 된 거야.”


“일만 하는 거야. 직함만 달고 있는 거고. 그래야 필요한 걸 얻을 수 있으니까.”


“누구에게 필요한 걸 얻으려고 하는 건데.”


“좋은 사람.”


“좋고 나쁜 건 사람마다 다른 거라며.”


“너한테도 좋은 사람.”


“말 못하는 문제다 이거야?”



청명이 취조하듯 묻는 것이 얄미워 아성은 일부러 붕대를 세게 조여맸다. 청명은 순간 상처를 후벼파는 듯한 고통에 이를 악물고 말했다.



“그런다고 내가 안 물어보는 거 아니야.”


“어차피 내가 대답 못해주는 거 알면서 왜 자꾸 물어.”


“나한테 확신을 줘.”


“나는 어쨌든 널 구할 수 있었잖아. 이걸로는 안되나?”



청명은 고개를 저었다.



“니가 그냥 날 좋아하는 일본놈 앞잡이라도 그럴 수 있지. 그리고 넌 날 구하다 말았어. 더 하면 니가 의심받으니 그런 건 알고 있지만.”


“너한테 나를 증명할 수단이 있었으면 76호가 먼저 알아챘을 거야. 그런 위험을 감수할 수는 없어. 나한테는 너한테 확신을 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어.”



대강 그랬다. 아성은 이 상해에서 대외적으로는 신정부의 한 비서이고, 대내적으로는 특무위원회 사람이었으며, 청명이 요구하는 신분은 그 둘 다에 속하지 않는 것이므로 아성이 상해 내에서 청명에게 내놓을 만한 것은 없었다. 아성은 신중하게 생각했다.



“…네가 전해받기로 했던 물건은 제대로 받았나?”



명가 주치의 손으로 건네받은 팔찌 얘기였다.



“너도 관여했어?”


“내가 돕지 않았다면 힘들었을 거야.”



청명은 그가 관여할 수 있는 곳들에 대해 생각했다. 정보의 거래는 그 양에 따라 직접 만나지 않아도 상관 없곤 했지만 물건의 거래는, 어쨌든, 두 사람 이상의 이동 경로가 겹쳐야 했다. 아성은 상해에 있다. 중경의 자택에서 상해 직전까지는 들어오는 경로에 문제가 없으나 상해로 반입할 때는 최대한 그 경로를 숨기는 것이 옳았다. 숨기지 않는다면 중경의 고 씨와 상해의 누군가의 연관성을 입증하는 꼴이 되어버리는 탓이었다. 아성은 어느 새 붕대를 다 감고 가만히 청명의 사고가 진행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청명은 그것도 모르고 계속 생각했다. 아성은 어디부터 어디까지 관여했을까? 상식적으로 생각해보면 최종 전달자가 명가의 주치의였으니 그 전이 아성일 것이다. 아성이 상해 밖에서 안으로 물건을 들여오는 방법이 있을까? 있을 수도 있겠지. 그렇다면 상해 밖의 사람들은, 아버지로부터 연결된 국민당 쪽 사람들은 뭘 믿고 상해 괴뢰정부의 인사에게 물건을 넘겨줬단 말인가?



어쨌든 그들은 아성은 신뢰하기로 했고 자신은 아성 덕분에 살아났으며 물건은 제대로 전달되었다. 아성의 신분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것은 그것 뿐이었다.



“…이해했어.”


“느리다.”


“놀리지 마. 데려다줄까?”


“차가 내 찬데 무슨 수로.”



갔다가 걸어오면 되는 것 아닌가. 청명은 잠시 멍청하게 생각했다가 제 몸 상태를 되새겼다. 아성이 옳았다. 하지만 아성의 몸상태는?



“너 아프지 않아? 브레이크 제대로 밟을 수 있겠어?”


“날 신경쓸 시간에 네 몸을 신경쓰시죠. 안 아프니까. 좀 자고 있어. 나중에 연락할게.”


“언제?”



아성은 집 문 근처에 패대기쳐져 버려져있는 제 코트를 들고 탁탁 털었다. 저거저거 아픈 거 맞는데. 아성의 걸음걸이가 고장난 장난감처럼 묘하게 뒤틀려 있는 것이 보였지만 청명은 아무 말 안하기로 했다. 빨리 해달란 건 아성이었다. 매달린 것도 아성이었고 부추긴 것도 아성이었으니 해달란 대로 해준 청명은 죄가 없었다…….



“조만간? 누님이 널 보고싶어 하셔. 네가 하는 그 실종아동 찾기에 관심 많으신 거 알잖아. 언제 와서 저녁이라도 먹어.”


“손 놓은지 꽤 됐는데.”


“다시 시작해.”


“응.”



아성은 다 젖었다가 대강 척척하게 마르다가 만 옷들을 집어들어 청명의 것이 분명한 바싹 마른 셔츠 위에 대충 얹어 입었다. 그 선득한 느낌에 아성이 절로 움츠러들었다. 그는 코트 주머니를 살피면서 차 열쇠가 있는지를 살피더니 청명을 보고 착한 척 웃었다. 청명은 그것을 준비가 다 되었으니 날 배웅해줘봐, 라는 의미로 받아들였다.



“좀 더 늦게 가면 안돼?”


“형님은 아침잠이 적으셔서. 깼는데 내가 없으면 밤새 안 들어온 게 너무 티나잖아.”


“그래. 나중에 보자.”



청명이 아성을 끌어당겨 가볍게 키스했다. 둘은 오래 같이 산 부부처럼 그 짧은 모닝키스에 만족하고는 헤어졌다. 청명은 방 안에 머물렀고 아성은 어색한 걸음걸이를 숨기려 애쓰며 계단을 걸어 내려와 차 안으로 사라졌다. 건물에 가려 보이지 않는 동쪽에서는 해가 뜨고 있었다.







12.




청명은 몇 달 전의 어느 날처럼 양복을 말끔하게 차려입고 손에는 서류가방을 들고 있었다. 명공관의 대문은 쉽게 열렸고 청명은 아직 땅에 군데군데 고인 빗물을 거울삼아 제 얼굴을 들여다보며 저택으로 걸어갔다. 안색이 약간 창백한 것을 제외한다면 76호에 끌려간 이후 그 어느때보다 나았다. 


예전에 이 문간에 섰을 때 약간 두려운 마음이 있었던 것과 달리 오늘의 청명은 오히려 들떠 있었다. 맘이 뜨거워진 탓에 수증기만 풀풀 날렸다. 청명은 미소를 감추기가 이토록 힘들다는 것을 오늘 처음 알았다. 초인종이 눌렸다. 소리가 끝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문이 열렸고 문틈으로 비치는 얼굴은 당연히 아성이었다. 아성은 활짝 웃고 있었다. 


보는 눈이 없다면 문간에서 끌어안고 난리를 쳤을 것이다. 둘은 그 정도의 이성은 있었기 때문에 한껏 점잖은 척 하며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명경이 소파에 앉아 신문을 읽고 있었다. 청명은 제 늘어진 입매가 평소보다도 길어보일 것을 알았지만 미처 숨기지 못하고 그대로 인사했다. 그간 잘 계셨어요? 그간이래봤자 일 주일도 채 되지 않았다. 



"잘 왔어요. 걱정돼서 불렀어요. 몸은 좀 괜찮나요? 밥은 잘 먹고 다니고?" 


"몸은 아직 덜 나았습니다. 밥은 잘 먹고 다닙니다. 걱정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에그, 다친 건 언제 다 나으려나. 그래도 안색이 많이 좋아졌네요. 식사하려면 아직 좀 있어야 하는데. 무료하겠지만 좀 기다려요. 명대 얘는 일찍 온다더니." 



청명이 집에 머무는 동안 아성과 썩 사이가 좋지 않았다는 것과 명대가 그를 썩 따랐다는 것은 명경도 알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청명은 명경이 부엌으로 아향을 닦달하러 간 사이 아성에게 한 쪽 눈썹을 움직여가며 눈짓을 했다. 올라가자. 올라가자는 것은 곧 네 방으로 올라가자는 의미였다. 아성은 용케도 그 눈짓을 이해하고는 눈을 크게 떴다. 지금요? 청명은 아마 그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청명은 뚱한 얼굴로 아성을 한동안 쳐다보더니 먼저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아성은 기겁해 뛰듯이 청명을 앞질렀다. 



“문 잠겼어.”


“열어.”



아성이 주머니에서 열쇠를 끄집어 내 방문을 열고 두 발 정도 몸을 들여놓자마자 문이 쿵 닫히면서 청명도 쿵 와닿았다. 팔 두 쪽이 아성의 겨드랑이 아래로 슬며시 들어와 아성의 마른 배 위에서 저들끼리 단단히 깍지를 꼈다. 귀를 울리는 심장소리의 출처가 제 흉통 안인지 청명의 것에선지 알 수 없었다. 아성은 곧 그 소리는 청명의 것이고, 자신의 것은 점차 커지고 있음을 알았다. 약간 어긋나 서로 다른 박자로, 서로 다른 속도로 뛰던 두 심장이 점차 하나가 된 것처럼 동시에 움직였다. 


청명이 제 입술을 아성의 셔츠 목깃 위 바로 드러난 살갗에 부볐다. 



“네 키가 좀 더 작았으면 좋았을걸.”



숨결과 함께 성대로부터 흘러나온 지릿한 진동이 뒷목에 닿는 것에 아성이 몸을 움찔 떨었다. 



“다리를 자르게?” 


“아니. 내가 커야지. 신발 밑창에 신문지라도 넣어볼까.”


“내가 선 바닥이 낮아지면 돼. 그럼 얼마든지 네가 더 커지잖아.”


“계단으로 갈까.”


“누우면 발 위치는 마음대로 할 수 있잖아.”


“여기서는 안돼.”



아성이 넌지시 침대로 가자고 얘기한 것에 청명은 단호했다.“



“명대 아직 안 왔대.”


“그거는 내 집에서 우리 둘이 하면 돼.”


“고청명, 너네 집에는,”



똑똑. 


둘 다 숨을 짧게 들이쉬었다. 동기화되었던 맥박이 잠시 멈추는가 했더니 금세 엉망으로 어그러졌다. 청명이 아성을 안았던 팔을 빼내기가 무섭게 문이 열렸다. 계이였다. 아성은 활짝 열려 청명을 밖에 노출해버리려는 문을 억지로 잡아 멈추게 했다. 문이 반틈만 열렸고 아성은 작전에 임할때나 내보이던 살벌한 얼굴만 열린 문 사이로 내밀었다. 



“누가 내 방 문을 함부로 열라고 했습니까.”


“아, 아니, 그냥 청소하려고…….”


“내 방 청소는 내가 알아서 합니다. 남의 손 탈 필요 없어요.”



아성은 계이의 면전에서 문을 쾅 닫았다. 온천 속에 잠긴 것처럼 나른함과 따뜻함에 젖어있다가 갑자기 끌려나가 얼음 땅 위에 던져진 것 같았다. 아성은 청명의 호흡이 거칠다는 것을 눈치챘다. 벽에 등을 기대고 선 그는 가슴께를 손바닥으로 지긋이 누르면서 긴장을 풀려고 애쓰고 있었다. 둘의 머릿 속을 지나가는 생각은 서로 달랐으나 순간 극도의 긴장에 놓인 것은 매한가지였다. 청명은 계이가 자신의 본명을 들은 것이 아닌가 겁을 집어먹었고 아성은 계이가 이런 식으로 방에 얼마나 익숙하게 드나들었을지를 생각했다. 아성은 큰 걸음으로 책상 앞에 다가가 닥치는 대로 서랍을 열고 서류를 꺼냈다. 청명은 조금 진정되자 아성의 곁으로 걸어왔다. 



“거긴 별 거 없었어.”


“그건 두 달 전이잖아.”



청명은 아성의 서랍을 뒤져 본 경력이 있기 때문에 그 안에 든 서류들이 하나같이 아성이 신정부에서 일한다는 것을 증명해준단 것을 알고 있었다. 아성이 서류들을 하나하나 살펴보면서 문제가 될 만한 것이 있는지, 순서는 자신이 넣어뒀던 그대로인지를 살필 때 청명은 두 번째 서랍 안을 보고 있었다. 아성과 어울리지 않는 잡기의 창고였다. 반쯤은 만년필이나 봉투를 봉할 때 쓰는 풀 따위로 반듯하게 차 있었고 나머지 반틈에는 부서진 커프스, 약간 색이 바랜 가죽장갑, 푸른 돌 같은 잡동사니가 보물처럼 모셔져 있었다. 청명은 그 서랍을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그것들은 뭐야?" 



아성은 친절하게 하나하나 가리키며 설명을 해주었다. 



"만년필은 내가 형님 일을 돕기 시작했을 때 선물로 주신 거고, 저 커프스는 명대 첫 선물이었어. 삼 일만에 명대랑 싸우다가 부서져서 더 이상 쓰진 못하고 있지만. 장갑은 누님이 주신 거야. 약간씩 닳기 시작했을 때부터 넣어놨어. 아까워서. 이건……" 



부서진 구 형태를 한 푸른 돌이 아성의 손바닥 위에서 데구르르 굴렀다. 



"내가 어릴 때부터 갖고 있던 거야. 내 첫 보물이라. 아직도 갖고 있어." 



청명은 그가 말하는 어릴 때가 얼마나 어릴 때일지를 가늠했다. 청명이 아성을 낯선 눈빛으로 바라보자 아성이 어색하게 웃었다. 왜 그래? 청명은 고개만 절레절레 저었다. 그것은 아성에게 하는 대답인 동시에 자신의 마음 속에 피어오른 의문 한 가닥에 대한 응답이기도 했다. 그러나 현재의 청명으로서는 궁극적인 답을 구할 수는 없었다. 





청명은 그 날부터 그의 임무에 매달렸다. 그가 정리해 둔 열 두 명의 이름이 고아원을 나와서 어떤 삶을 살았는지를 조사하고 파악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문제는 그가 그들의 행적을 파악한다 하더라도 고씨 집안이 잃어버린 아이가 그들이 맞는지를 확인할 방법은 없다는 것이었다. 청명은 이미 마음 속에 희미하게 싹트기 시작한 심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 문제는 무시해버렸다. 청명은 한 가지 결론을 상정해놓고 그것을 부정하거나 긍정할 증거를 찾고 있었다. 


입춘이 지나며 날은 점점 길어지고 기온은 점차 올라가기 시작했다. 갑자기 남쪽에서 더운 바람이 올라오기라도 했는지 그 날은 평년보다 훨씬 따뜻했고 습했다. 청명은 오늘도 어김없이 상해 구석의 한 고아원에 들렀다가 아성을 만나러 시청으로 향했다. 아성은 바빴고 명루와 항상 붙어있어야 했기에 만날 시간이 별로 없었다. 명루는 감사하게도 아성이 청명과 지속적인 친분을 쌓는 것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성은 자연히 그것을 암묵적인 허락으로 받아들였다. 점심 즈음 한 연락은 대담하게도 신정부의 명루를 향한 것이었고 명루의 수행비서인 아성은 자연스럽게 그 연락을 받고는 곧이어 나오겠다고 답신을 했다. 청명은 자신의 뻔뻔한 태도가 명루의 마음에 꽤 들었겠거니 싶었다. 적어도 이런 식으로 나온다면 아성과 그의 친분은 신정부에 숨기지 않아도 될 떳떳한(신정부의 입장에서 말이다) 관계라는 것을 신정부와 76호와 특고과에 알리는 것이었다. 


아성은 허름한 식당으로 찾아들어와 청명의 앞자리에 앉았다. 



"앞으로는 점심에 오지 마." 


"신정부는 비서직한테 점심시간도 허락하지 않나보다." 


"그런 거 아니야. 형님이 혼자 드시게 할 수는 없어서 그래." 



청명은 일하지 않았고 아성의 월급은 많은 편이 아니어서 둘이 식사할 때는 자연스럽게 메뉴가 간소해졌다. 그러나 청명이 상해에서 밥을 매번 사먹으면서 돌아다닌 식당의 수가 꽤 많았기 때문에 그가 추천하는 곳은 맛이 좋은 편이었고 매번 아성의 입맛을 감동시켰다. 아성은 뭐든 잘 먹는 편이었는데도 그랬다. 이 곳의 국수는 정말로 맛있었다. 아성은 한 입 먹더니 경탄의 빛을 담고는 처음 국수라는 음식을 접한 것처럼 신중하게 맛과 향을 음미했다. 청명은 그렇게 다채롭게 변하는 아성의 표정을 바라보는 것을 좋아했기 때문에 그의 젓가락은 아직 침도 묻지 않은 채로 그릇 위에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안 먹어? 불어." 



국수가 불어터지면 맛이 없을 것이라는 의미였다. 청명은 부드럽게 웃고는 젓가락을 들어 국수를 먹기 시작했다. 아성은 다음에 명대도 이곳에 데려와야겠다고 말했다. 



"그 녀석의 국수는 정말 형편없어." 



그렇게 말하는 아성의 눈썹은 정말로 진지하고 우울해보여서 청명은 웃지 않을 수 없었다. 



"일은 잘 돼가고 있어?" 



청명은 직접적인 대답을 피하고 어깨만 으쓱였다. 이것을 잘 되어가고 있지 않다는 의미로 받아들인 아성은 제 일처럼 한숨만 내쉬었다. 



"잘 되어도 안 되어도 걱정이다." 



청명은 진심으로 그 의미가 궁금해졌다. 청명 가족의 일은 사실 아성과는 크게 상관이 없었다……. 그러니까, 현재의 아성과는 크게 상관이 없었다. 



"뭐가? 왜?" 


"잘 되든 아니든 일이 끝나면 너는 여기……." 



를 떠나야 하잖아. 아성은 갑자기 자신이 명대가 만 국수를 먹고 있는 것 같았다. 청명의 얼굴에 미묘하게 머금어져 있던 웃음기가 싹 사라졌다. 갑자기 모든 상황과 세속의 일이 둘과는 상관 없는 일처럼 느껴졌다. 아성이고 청명이고 둘은 서로에게 달리는 마음을 주체하기 어려웠고 주변의 일은 잠깐 잊고 있었던 것이다. 그랬다. 청명은 중경에서 장사로 갔다가 상해로 들어온 군인이었고 아성은 상해를 떠날 수 없는 삼중첩자이니 둘의 인연이 교차된 것이 더 희귀한 일이었다. 청명은 잠시 현장에서 빠져 있을 뿐 여전히 군적에 이름이 올라있었다. 일만 마무리된다면 장사로 돌아가야 했고 전쟁이 마무리되기 전까지 다시는 상해에 올 일이 없을 것이다. 아성은 반대로 전쟁이 끝나기 전까진 일본이 상해에서 철수하기 힘들 것이니 그는 상해에 계속 머물러야 했다. 둘은 갑자기 퍽 침울해졌다. 



"느리게 하지 뭐." 



청명이 말했다. 그것이 문제의 답이 되는 건 아니라는 것은 둘 다 알았다. 



"일은 어떻게 되고 있어?" 


"두 명이 어떻게 살아왔고 지금 어디서 살고 있는지 알아냈어. 만났고. 둘 다 맞다는 증거를 찾지 못했으니 아니겠지." 


“하나하나 찾고 있는 거야?”



청명은 고개를 끄덕였다.



“앞으로도 그렇게 찾을 거야?”



청명은 머뭇거리다가 고개를 또 끄덕였다. 본심과 다르니 거짓을 말하는 데 시간차가 생길 수밖에 없었다. 어차피 염두에 두고 있는 결론이 있는데 그렇게 느리고 꿋꿋하게 단서가 걸려들기만 바랄 필요가 무엇이 있겠는가. 청명은 남은 열 명 모두를 함께 조사하는 느리게 돌아가지만 어쩌면 좀 더 빠를 수도 있는 방법을 고려하고 있었다.



“내가 도울 건 없을까?”


“도울 수 있대도 부탁하고 싶지 않아.”



그것은 사실이었다. 청명은 그 단호한 거절에 아성이 상처를 받았다는 것은 미처 고려하지 못하고 묵묵히 국수를 삼켰다. 청명은 혹여나 자신의 추측이 옳을 경우 아성을 조금 더 보호하기 위해 그런 것이었지만 아무 것도 모르는 아성에게는 그것이 청명이 가진 거리감의 지표로 보였던 것이다. 아성은 이것이 오해가 되던 말던 그저 묻어버리고 넘어갈까 하였으나 생각을 고쳤다. 청명과 말을 안하고 감정을 미루기만 하는 데는 이미 이골이 났다.



“내가 너의 일을 돕는 게 싫은 거야? 내가 네 일들을 자세히 아는 게 거북해? 아니면,”



아성이 자신의 의문을 푸는 데 굉장히 직설적으로 덤볐기 때문에 아성이 그렇게 느끼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던 청명은 천장에 닿을 것처럼 펄쩍 뛰었다.



“그런 거 아니야. 네가 나를 도우면 문제가 생겼어도 나랑 같이 얽혀 들어가버리잖아. 내 가족을 찾는 거고, 내가 책임져야 해. 널 위험에 빠뜨리고 싶지 않은 거야. 넌 해야 할 일이 많잖아.”



점심시간 식당에는 사람들이 바글바글했고 따라서 직접적으로 그들의 상황이나 신분을 말할 수는 없었다. 하는 말들이 죄다 추상적이기만 하여 청명은 답답한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뜻밖에서 아성은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정확히 이해하고 있었다. 아성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래, 됐어. 나도 내 일얘기를 안하는데 너한테 뭘 기대하겠어. 그건 그거고, 우리는 우리지.”


“말에 돌이 있는 거 같은데.”


“돌은 무슨 돌.”



두 사람은 얼마 지나지 않아 국수를 모두 먹었다. 아성은 식당 안에 빈 자리가 있는지 살피더니 빈 자리가 있자 바로 일어서지 않고 좀 더 앉아 대화를 할 마음을 먹었다. 아성은 항상 바빴고 청명은 갈수록 바빠지고 있었기 때문에 지금 묻지 않으면 안될 것 같았다.



“명대가 보고싶어 해. 언제 집에 와서 저녁 먹어.”



청명은 준비해놨던 듯 고심하는 기색도 없이 말했다.



“한동안 네 얼굴 볼 시간도 없을지도 몰라. 저택에도 들르기 힘들어.”


“그렇게 바빠?”


“당연하지. 생각해봐. 음, 아성이란 이름만 가지고 네가 어떤 삶을 살았고 지금 어디 살고 있는지 조사해야 한다고 쳐.”


“……응.”


“그럼 쉽겠어, 어렵겠어? 조사해야 할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닐 거 같지 않아?”


“조사해야 하는 게 나라면 어려울거야. 고아원에 있을 때랑은 이름도 바뀌었고. 입양 서류같은 게 있어도 예전 이름은 아마 없을테니. 그리고 그 다음도 그래. 호적상 아성이 계이의 아들이긴 하지만 십년 넘게 같이 살지도 않았는걸. 그 여자는 동북으로 가서 한동안 소식도 끊겼었고.”



청명의 귀를 잡아끈 건 한 대목이었다.



“이름이 바뀌었어?”


“계이는 내가 자기 아들인 줄 알았대. 친아들. 얼마 전에 들었어. 자기 아들은 고아원에서 데려가면서 고아원이 멋대로 붙인 이름을 그대로 가져다 쓸 엄마가 얼마나 되겠어.”



이것은 청명이 미처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었다.



“예전 이름이 뭐였어?”


“그건 왜 물어?”


“뭐였어?”



청명이 집요하게 굴자 아성은 인상을 찌푸렸지만 순순히 대답했다.



“몰라. 기억도 안 나. 진짜야. 거짓말 아니다. 내가 어릴 때 일은 잘 기억 못한다고 얘기 했었잖아.”



청명은 아성의 어깨 너머로 한 무리의 사람들이 문을 열고 들어오는 것을 보았다. 아무래도 일어서야 할 때가 된 것 같았다. 나가야겠다. 청명이 중얼거리자 아성도 몸을 틀어 뒤를 돌아봤다. 둘은 아쉬움을 뒤로 하고 일어서 돈을 내고 나왔다. 두꺼운 코트까지 걸친 그들에게 오늘의 한낮은 약간 더웠다.



“누님한테는 네가 바쁘다고 말씀드릴게. 대신에 나중에 시간이 나면 네가 먼저 전화해.”


“그래.”


“얼마나 오래 잠수를 탈 생각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자주 연락할거지?”


“응. 약속할게.”


“기왕이면 좀 천천히 쉬엄쉬엄 했으면 좋겠는데……. 네가 알아서 하겠지.”



청명은 씁쓸하게 미소짓는 아성에게 가능한 오래 있겠다는, 아니면 계속 네 곁에 있겠다는 말을 해주고 싶었으나 장담하지 못하는 약속은 그의 성격에 맞지 않았다. 청명은 이 순간을 오래 지속하겠다는 약속이 이루어지기 힘든 것을 알고 있었다. 아성은 손을 흔들며 긴 다리로 땅을 꾹꾹 밟듯이 걸어 시청 건물로 들어갔고 청명은 그 뒷 모습만 내내 쳐다보고 있었다.


청명의 머릿 속에는 답없는 두 가지 물음이 떠올랐다. 한 가지는 청명이 답을 찾으려 노력하고 있는 것이고 다른 한 가지는 때가 오지 않는 한 그 답을 알 수 없는 것이었다. 미래를 예측하는 자가 얼마나 되겠는가. 지금, 오늘은 청명 곁에 아성이 있고 아성 곁에 청명이 있었으나 청명은 내일을 보장할 수가 없었다. 아성도 마찬가지로 생각할 것이다. 그래서 둘은 동시에 침울해졌고 순순히 연락이 끊기는 것을 지켜보았다. 지금 내일을 장담할 수 없는 것은 전쟁 탓이지만 여름이 끝난다고 바로 겨울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전쟁의 여파는 한동안 기승을 부리다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야 서서히 가라앉을 것이다. 전쟁, 근대화, 이런 것들은 모두 인간들의 평이한 삶을 뒤흔드는 대격변이었다. 청명은 현재를 살고 있어 자신이 나라에 도움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했고 그것을 감사하며 살았었지만 오늘만은 아니었다.


일은 일이고 우리는 우리다.


청명은 아성이 지나가듯 했던 말을 문득 떠올렸다. 아성이나 저나 서로에게 매달린다고 자신의 일과 신념을 헌신짝 버리듯 버릴 사람이었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