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악산 증산교를 만든 강증산은 음란한 삶을 살았다
결혼은 세번이나 했다
강증산 21세 정치순 18세 1904년 이혼
강증산 37세 김말순 15세
강증산 37세 고판례 28세
강증산(강일순): 언행불일치와 가정 방치
첫 부인 정치순이 가정에 충실해달라고 애원했음에도
이를 무시하고 밖으로만 돌며 집안을 방치했다.
후천에는 일부일처'를 주장하고 '나이에 맞는 혼인'을
강조했으나, 실제로는 처를 셋이나 두었으며
30대 중반에 15세인 김말순을 아내로 맞이했다.
죽기 직전까지도 김말순에게 재혼를 금지하며
지배적인 모습을 보였습니다.
정치순(첫 번째 부인)성격 및 불효 논란 증산계 종교에서는 그녀의 성격이 나쁘고 시부모에게 불효했다고 기록하지만, 이는 종교적 정당성을 위해 의도적으로 폄하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강증산이 도통을 핑계로 가정을 버리면서 결과적으로 비참한 처지에 놓였으며, 강증산 사후에도 교단 내에서 주류로 인정받지 못했다.
김말순 15세라는 어린 나이에 강증산의 사실상 아내가 되었으나, 강증산 사후 재가했다는 이유로 종교계로부터
신벌을 받아 죽었다'는 식의 비난을 받았다
고판례 고문으로 몸이 상한 강증산을 보살피지 않았으며, 그가 죽어갈 때도 곁을 지키지 않았다.
시부모 외면: 며느리로서 시부모를 봉양하는 일에 전혀
나서지 않았다.
남편 사후에는 자신이 강증산의 영적 계승자임을 주장하며 세력을 모았으나, 제자들과 끊임없이 갈등하며 분열의 단초를 제공했다
결론적으로, 강증산은 '여성 해원'이라는 종교적 미화 뒤에 가정 방치, 언행불일치가 깊게 자리 잡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주변 여성들 역시 윤리나 종교적 가르침과는
먼 모습을 보인다
이 기록들은 강증산이 주장했던 '일부일처제'나
여성 인권 존중' 등의 교리와 실제 그의 복잡한 여성 관계 및 가부장적 행보 사이에 상당한 괴리가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처럼 강증산이 강조했던 사상과 그의 실제 삶 사이에 작지 않은 간극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특히 가족이나 친척들로부터 "집안을 망친 놈"이라는 소리를 들으며 대접받지 못했다는
대목은 그의 면모와 당시의 객관적인 평판을 짐작하게 한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