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1 예당공연 플북 일부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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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icle 2
이 시대의 '지적인 비르투오소'
많은 예상이 빗나간다. 임윤찬의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들으면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
바흐가 1741년 내놓은 골드베르크 변주곡에서는 주제인 아리아도, 다른 변주도 중요하지만
언제나 세 번째 변주가 가장 먼저 주의를 끈다. 앞으로 계속해서 나오게 될 돌림노래의 첫 번째 모델이다.
3번 변주의 주제를 길게 늘여 연주하면 한가로운 돌림노래가 되고, 박진감으로 끌고 가며 왼손을 끊어가면 위트 있는 음악이 된다.
임윤찬은 2025년 초부터 잇달아 연주하고 있는 골드베르크 변주곡의 3번 변주에서 마치 여유로운 하품같은 해석을 선택했다.
많은 작곡가의 작품에서 목숨걸 듯 달려 나갔던 임윤찬의 느긋함이 충격적이었다.
청중이 짧은 숨을 들이 마시게 되는 충격은 연주 내내 이어졌다.
도돌이표를 지날 때마다 극도로 자유롭게 더해지는 꾸밈음들, 바흐가 두 단 건반을 위해 쓴 기교적인 부분에서
끝장을 보고야 마는 극한의 움직임, 옛 악기인 하프시코드에 대한 재치있는 묘사. 그리고 마지막으로 치닫는 26-29번 변주에 이르러
임윤찬이 왜 이 곡을 준비하며 "인생 전체를 보게 될 것 같다"고 이야기했는지 알 수 있었다.
마지막인 30번 변주의 유쾌한 노래를 페달로 꾹 밟아 모든 소리를 합친 뒤 일부러 지저분하게 남겨둔 뒤 이어지는 주제의 반복까지.
임윤찬이 이 작품에서 하나의 우주를 발견하고 표현하고 싶어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임윤찬의 피아노는 이처럼 하나의 새로운 세계다. 우리는 어쩔 수 없이 글렌 굴드를 떠올리게 된다.
문화 연구자인 고(故) 에드워드 사이드는 글렌 굴드의 특히 골드 베르크 변주곡으로 전세계에 충격을 안겼던 기교에 대해
"청중을 소외시키지 않는다"라고 했다. 예술가들의 예상을 뛰어 넘는 기교는 보통 보는 이들을 주눅들게 한다.
하지만 굴드의 새로운 스타일은 그렇지 않았다. 사이드는 굴드의 새로운 기법에 대해 "청중을 도발하고,
기대감을 전치시키고 바흐 음악 연구를 통해 얻은 새로운 종류의 사고를 펼쳐 연주 속에 끌어 들이기 위한 것"이라고 했다.
수동적으로 음악의 연주를 기다리는 청중의 허를 찌르고 생각하며 듣도록,
또 지적이고 감정적인 자극의 향연에 푹 젖도록 하는 것이 글렌 굴드의 영향이었다.
새로운 해석
임윤찬 역시 해석하는 곡마다 '새로운 종류의 사고'를 펼쳐낸다. 2022년 세계에 이름을 알리면서부터였다.
리스트 초절기교 연습곡에서는 프란츠 리스트라는 초절정의 기교적 작곡가가 어떤 인생을 겪고 있었는지 그 굴곡을 모두 펼쳐냈다.
결정적으로는 2024년 임윤찬의 화두였던 쇼팽 에튀드에서 임윤찬의 새로운 사고가 빛을 발했다.
쇼팽의 에튀드 27곡을 모두 연주하고 24곡을 녹음하는 과정에서 첫 음부터 끝 음까지 단 하나도 예사롭지 않았다.
그동안 오른쪽의 넷째, 다섯째 손가락에 대한 연습이라고 여겨졌던 음악(Op. 10, No. 2)은 임윤찬을 통해
'지상에서 가장 작은 나방의 움직임'을 연상하게 하는 독특한 작품이 됐다.
많은 사람이 '혁명'이라 불렀던 음악(Op. 10, No. 12)에서 임윤찬은 '트로이의 왕자 파리스가 스파르타의 여왕 헬레네를 납치한 것에 대한
그리스인들의 분노를 떠올린다는 새로운 사고를 제시했다.
오른손의 끝없는 노래에 관한 연습곡 (Op. 10, No. 8)에 대해서
임윤찬은 '언덕 위에서 작은 마을을 바라보는 풍경'이라는 새로운 관점을 던졌다.
임윤찬은 쇼팽의 모든 에튀드에 대해 이런 충격적이고도 구체적인 환상의 사유를 앨범의 내지에 하나하나 공개했다.
글렌 굴드가 바흐의 골드베르크를 해석하며 악보의 도돌이표를 무시하고, 지나칠 정도로 느리게 혹은 빠르게 연주했을 뿐 아니라
리듬, 색채, 프레이징을 새롭게 창조해 연주했던 것을 떠 올리게 한다.
에드워드 사이드는 연구와 창조의 세계를 지 났던 굴드에 대해 '지적인 비르투오소'라 불렀고,
21세기의 리듬, 색채, 프레이징을 새롭게 창조해 연주했던 것을 떠 올리게 한다.
에드워드 사이드는 연구와 창조의 세계를 지났던 굴드에 대해 '지적인 비르투오소'라 불렀고,
21세기의 청중은 임윤찬에 대해 같은 명칭을 합당하게 여기게 됐다. 그 결과는 엄청난 소식으로 돌아왔다.
2024년 임윤 찬은 <쇼팽: 에튀드> 음반으로 영국 그라모폰 어워즈에서 피아노 음반상, 올해의 젊은 음악가상을 받았다.
10월의 이 수상은 전주곡에 불과했다. 12월이 되니 각종 매체가 이 음반을 올해의 음반으로 꼽았다.
미국의 뉴욕타임스, 더 뉴요커, 영국의 가디언, 더 타임스, 데일리 메일, 스트리밍 사이트인 애플 뮤직
클래시컬 음악 DB 사이트인 올뮤직, 빌보드의 연말 결산에도 임윤찬의 쇼팽 앨범이 순위에 들었다.
이제껏 들었던 해석과 다른, 임윤찬의 탐구 결과에 청중과 평단이 반응하고 있는 것이다.
수동적 청중의 실종
그렇게 임윤찬의 행보는 하나의 현상이 됐다.
그의 리스트 연습곡이,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3번이 이 작품의 해석에 대한 하나의 도전이 됐다.
그 도전의 강도는 점점 거세 지고 있다. 2024년을 휩 쓸었던 쇼팽의 에튀드에 비하더라도
골드베르크의 해석은 더욱 분명한 돌풍이 될 것이다.
이 해석이 음반으로 나온다면 굴드의 22세 시절 녹음만큼이나 논쟁적일 것이다.
청중이 그의 해석에 적극적으로 동참하고 있는 것은 분명 새로운 현상이다.
임윤찬의 연주로 리스트, 쇼팽, 바흐의 파격에 대해 알게 된 청중은 그의 해석에서 무엇이 다른지 알고 싶어한다.
이 피아니스트가 관행 대신 선택한 독자적 환상의 세계에 청중은 관심이 많다.
이들은 연습곡 하나하나를 해체해 듣고, 모든 변주곡을 반복해 해석하며 임윤찬의 지적이고 본능적인 여정에 동참하려 한다.
고요한 저녁 시간에 잠잠히 모여있는 수동적 청중은 임윤찬의 공연에 더이상 없다.
이 모든 현상의 원인을 가장 짧게 표현하자면 한 단어, '자유'다. 임윤찬의 음악은 많은 경우 자유를 향하고 있다.
그의 연주는 이유 없는 관행을 거부하고 음악가가 자유롭게 뻗어나가는 길을 그린다. 정제되고 수동적인 음악이 아니라
개인적이며 상상이 가득한 음악을 갈구하는 모습을 무대에서 뿜어낸다.
이는 임윤찬이 늘 동경한다 언급하는 20세기 초반의 피아니스트들의 특징이기도 하다.
임윤찬이 10대 시절 주목을 받기 시작하면서부터 꼽아 왔던 좋아하는 피아니스트는 상업 레이블의 스타들이 아니었다.
대신 이그나츠 프리드만(1882-1948), 블라디미르 소프로니츠키(1901- 1961),
유리 에고로프(1954-1988)처럼 보다 자유로운 피아니스트들이었다.
이들은 쇼팽 에튀드에서 시간을 휘어 지게 하고, 출판되지 않은 연습곡에 생명을 불어 넣었던 예술가들이었다.
임윤찬은 이러한 영향을 받아 강력한 자유를 동경하는 음악가로 자라난 것으로 보인다.
"모두가 정숙하게 앉아있는 음악회장에 등장해 고요한 상태에서 연주를 시작하길 원하지 않는다"는 임윤찬의 말을 떠올려보라.
그는 20세기 초반의 피아니스트들처럼 무대에 등장해 건반을 아무렇게나 뚱땅거려 보고,
특정한 음계를 주루룩 쳐 본 다음 음악을 시작하는 상태를 동경한다 했다.
고도로 발전한 녹음 기술이 매끈하게 다듬어 준 음반 대신,
이 녹음이 영원히 남으리라는 믿음이 없이 녹음했던 시절의 음반을 더 동경한다 했다.
청중이 임윤찬의 세계에서 느끼는 독특함은 자유에 대한 강력한 동경의 그림자다.
자유와 자연으로
그리고 이 자유는 결국 자연으로 가서 닿는다. 직선 대신 곡선인 것. 예측 불가하지만 이해 가능한 것이 자연이다.
임윤찬의 새로운 연주는 그 자연을 향하고 있다.
그가 새로운 곡을 마주할 때마다 '산을 넘는다'는 표현을 쓰는 이유도 아마 자연에 대한 동경에서 온 것이리라.
또 '바람이 불 때 나뭇잎이 흔들려도 나무는 그대로다.
루바토 또한 그렇다'며 프란츠 리스트의 말을 인용하는 데에서도 볼 수 있듯 임윤찬의 음악이 향하는 지점은 많은 부분 자연에 빚지고 있다.
우리가 임윤찬의 연주에서 늘 새로움을 느끼고 때로는 충격을 받지만, 결국에는 수긍하게 되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그것이 자연에 대해 느끼는 감정이기 때문이다.
새로운 해석에 대해 까다롭게 굴고 '선을 넘지 않는지' 감시하는 평단이
임윤찬의 새로움에 대해서는 고개를 끄덕여주는 이유도 어쩌면 임윤찬이 자연을 추구하는 연주자이기 때문일 것이다.
클래식 연주자들은 가느다란 선 위에서 균형을 잡는다.
한쪽으로 기울어지면 지나치게 실험적이 되고, 또 다른 한쪽으로 쏠리면 지루해진다.
또 어느 쪽으로 치우치면 자의식 과잉이, 반대쪽으로 가면 악보만 반복하는 수동형이 되어버린다.
충격적일 정도로 독특한 자기 주장, 작곡가에 대한 충실한 탐구, 이 둘이 모두 충분해야만 알뜰히 살아 남는다.
임윤찬이 반복해서 말했듯, '똑같으려면 또 연주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금 보이고 있는 임윤찬의 행보는 놀라운 궤적이다.
그 가느다란 선 위에서 그리고 있는, 누구도 예측하지 못했지만 수긍하게 되는 청중을 적극적으로 가담시키는 자유의 해석가가 나타났다.
개추
음악적 해석능력까지 제대로 갖추어야 비로소 '비르투오소' 라 불리울 수 있다 -- 글쿤
뭣도 모르면서 나이들고 완성된 연주(지들이 말하는 완성본이라고 생각하는 딱 하나로 고정된 연주) 듣고 싶다느니 하는 이들보다 제대로 이해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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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쓴 글이야
챗지피티 아니겠냐
@클갤러3(180.66) 헐 책자에 넣는 글인데 저자가 없다 했다 ㅋㅋㅋㅋ
@ㅇㅇ(61.97) 글 쓰신 분 계시면 미안합니다 다음부터는 출처를 좀 밝혀주세요
https://gall.dcinside.com/mgallery/board/view/?id=yunchan&no=47908 제일 위에 적혀 있음 - 플북에서 발췌한 것이라고 누가 플북 올린 것을 문서화한 것
ㄱㅎㅈ 기자
@ㅇㅇ(112.186) 오 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