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이상은 일찍이 물었다. "박제가 된 천재를 아시오?" 그의 절규는 생명력을 잃고 표본이 되어버린 예술의 운명을 예견한 것이었을까. 라벨 탄생 150주년을 맞아 발표된 조성진의 전곡집을 들으며, 나는 이 오래된 질문이 여전히 유효함을 확인한다. 여기 또 하나의 박제가 있다. 기술적으로는 흠잡을 데 없이 완벽하지만, 그 완벽함이 오히려 음악의 숨통을 조여 버린 역설.

과잉 친절의 미학, 혹은 해석의 과보호

조성진의 라벨은 지나치게 정중하다. 《거울》의 '바다 위의 작은 배'를 들어보라. 파도의 미세한 떨림까지 정밀하게 재현하지만, 정작 대양의 불가측한 심연은 어디에도 없다. 마치 고해상도 디지털 사진이 실제 풍경의 공기와 냄새를 담아내지 못하듯, 그의 연주는 모든 음표를 제자리에 배치하면서도 라벨 특유의 통제된 무질서를 놓쳐버린다.

이러한 한계는 '스카르보'에서 절정에 달한다. 라벨이 그려낸 이 악마적 존재는 본래 예측 불가능하고 변덕스러워야 한다. 하지만 조성진의 손끝에서 스카르보는 이미 길들여진, 관람객에게 위해를 가하지 않도록 박제된 전시용 맹수다. 기술적 난관은 모두 해결되었으나, 음악이 지녀야 할 위험의 향기는 소독약 냄새에 묻혀버렸다.

재즈를 모방하는 클래식의 어색함

협주곡에서 문제는 더욱 심화된다. G장조 협주곡 1악장의 재즈적 요소들은 마치 외국어 회화 교재를 암기한 듯 부자연스럽다. 진정한 스윙은 계산이 아닌 본능에서 나오는 것인데, 조성진의 연주에서는 싱코페이션마저도 메트로놈적 정확성에 갇혀 있다. 라벨이 미국 여행에서 받은 충격과 영감, 할렘의 재즈 클럽에서 느꼈을 해방감은 온데간데없고, 남은 것은 학구적으로 분석된 리듬의 도식뿐이다.

더 안타까운 것은 2악장이다. 모차르트 이후 가장 순수한 서정성을 담았다고 평가받는 이 악장에서, 피아노와 오케스트라는 대화가 아닌 각자의 독백을 이어간다. 특히 잉글리시 호른의 애절한 호소에 무심하게 응답하는 피아노는, 마치 상대의 말을 듣지 않고 준비된 답변만 읊는 토론자를 연상시킨다.


시스템이 만들어낸 우등생의 비극

왼손을 위한 협주곡에서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다. 전쟁의 상흔과 인간 의지의 승리를 담은 이 작품이 단순한 기교의 전시장으로 전락한다. 파울 비트겐슈타인이 잃어버린 오른팔의 무게, 그 부재가 역설적으로 만들어낸 음악적 충만함은 조성진이 손에서는 드러나지 않았다.


총평: 살아있는 라벨을 위한 레퀴엠

"날개야 다시 돋아라. 날자. 날자. 날자. 한 번만 더 날자꾸나." 이상의 절규가 조성진의 라벨을 들으며 내내 귓가에 맴돈다. 이 앨범은 현대 클래식 음반 산업이 요구하는 무균실적 완벽함과, 예술이 본질적으로 지녀야 할 생명력 사이의 간극을 여실히 보여준다.

조성진이라는 의심할 여지 없는 재능이 시스템의 요구에 순응하며 스스로를 박제하는 과정을 목격하는 것은 고통스럽다. 라벨의 음악은 본래 살롱의 우아함 속에 거리의 야만성을, 정제된 형식 안에 원초적 충동을 숨겨둔 이중적 존재였다. 하지만 이 음반에서 우리가 만나는 것은 방부제 처리된 아름다움, 영원히 시들지 않는 대신 향기도 잃어버린 조화(造花)다.

여전히 우리에게는 아르헤리치의 화산 같은 에너지가, 프랑수아의 몽환적 시정이, 바부제의 색채적 마법이 있다. 그들의 라벨은 완벽하지 않을지 몰라도 살아 숨 쉰다. 조성진의 라벨은 아름답다. 하지만 박물관의 유리관 너머로 바라보는 아름다움일 뿐이다. 우리가 진정 갈망하는 것은 손에 닿으면 가시에 찔릴지도 모르는, 그러나 생생하게 피어있는 그 장미가 아니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