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27년 9월 프랑스 파리 오데옹 극장. 영국에서 온 극단이 셰익스피어 <햄릿>, <로미오와 줄리엣>을 공연 중이었다. 당시 프랑스는 지나치게 격식을 차리고 내용과 형식에 제약이 많은 고전주의 연극이 주류였는데, 영국 배우들의 사실적인 몸짓과 격렬한 감정이 실린 대사가 프랑스 관객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특히 오필리아 역을 맡은 아일랜드 출신 여배우 해리엇 스미스슨(1800-1853)은 빼어난 용모와 신들린 연기로 파리에서 신드롬이라 할 만한 인기를 끌었다. 런던에서는 아일랜드 억양 탓에 혹평을 듣기도 했지만, 영어를 모르는 파리 관객들에게는 전혀 문제 될 게 없었다. 스미스슨은 영국보다 프랑스에서 훨씬 더 인정받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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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 거리에서는 그녀의 석판화 초상이 불티나게 판매되었고, 빅토르 위고, 알렉상드르 뒤마, 외젠 들라크루아 등 프랑스를 대표하는 예술가들이 앞다투어 그녀를 칭송했다. 당시 파리음악원 학생이었던 엑토르 베를리오즈(1803-1869)는 <햄릿>, <로미오와 줄리엣>을 연이어 관람하고 큰 충격을 받았다. 그는 회고록에서 당시의 감정을 다음과 같이 적었다.


나는 몇 달 동안 절망적인 혼몽 상태에 빠져 지냈다. 앞서 그 성격과 이유를 간략히 말했듯, 늘 셰익스피어와 그 영감을 받은 여배우, 그리고 온 파리를 열광시킨 ‘아름다운 오필리아’를 떠올리며 지냈다. 그러면서도 나는 그녀의 찬란한 명성을 내 비참한 무명과 비교하며 끝없이 낙담했다. 그러나 마침내 몸을 추슬러, 마지막 힘을 다해 아직 그녀에게 알려지지 않은 내 이름을 그녀에게까지 빛나게 하고자 결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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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리오즈는 이름을 알리기 위해 파리음악원에서 자신의 곡만 연주하는 대규모 연주회를 열기로 마음먹었다. 연주용 악보 제작을 위해 하루에 16시간씩 필사하고, 합창단원에게 지급할 사례비를 모았다. 문제는 공연장이었다. 파리음악원 홀을 빌리려면 예술 담당 총감독 드 라로슈푸코의 허락과 음악원장 케루비니의 동의가 필요했다. 당대 최고의 오페라 작곡가인 이탈리아 출신 루이지 케루비니(1760-1842)는 당시 파리음악원 원장이었는데 학교생활과 작곡에서 모두 전통과 규칙을 중요시하는 보수적인 사람이었다. 자유분방하고 파격적인 음악을 추구하는 베를리오즈와는 관계가 좋지 못했다. 드 라로슈푸코는 베를리오즈의 요청을 흔쾌히 받아들였지만, 케루비니는 베를리오즈의 계획을 듣자마자 거부 의사를 밝혔다.


“자네, 연주회를 열겠다고?”


“네, 그렇습니다.”


“그런 일에는 예술 담당 총감독의 허락이 필요해.”


“이미 받았습니다.”


“드 라로슈푸코가 동의했다고?”


“그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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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하지만, 나는 동의하지 않아! 나는 반대야. 너에게 그 홀을 빌려줄 수 없어.”


“그러나 지금 음악원은 홀을 쓰고 있지 않고, 앞으로 보름 동안도 비어 있습니다. 그러니 거절할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하지만 내가 말했잖아! 나는 원치 않아! 사람들이 이미 휴가철이라 파리를 떠나 시골로 가 있는데, 넌 흥행도 못 할 거야.”


“흥행은 바라지 않습니다. 이번 연주회의 목적은 단지 저 자신을 알리는 데 있습니다.”


“굳이 알려질 필요가 있나? 게다가 비용은? 돈은 있고?”


“예, 있습니다.”


“아…아… 그래? 그런데 무슨 곡들을 연주하겠다는 거야?”


“두 개의 서곡, 오페라에서 발췌한 곡들, 그리고 제 칸타타 《오르페우스의 죽음》을…”


“그 콩쿠르(로마 대상) 칸타타 말이야? 그건 형편없어! 연주 불가능하다고!”


“선생님은 그렇게 판단하셨지만, 저 역시 제 방식대로 판단해 보고 싶습니다. 서투른 피아니스트가 반주를 못 했다고 해서, 숙련된 오케스트라에도 불가능하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넌 아카데미(로마 대상 심사단)를 모욕하려는 거군!”


(참고로 칸타타 《오르페우스의 죽음》은 1827년 로마 대상 과제곡인데 베를리오즈는 당시 심사에서 탈락했다. 베를리오즈는 오케스트라 곡을 피아노 반주로만 심사한 것에 불만이 많았다.)


“이건 단순한 실험일 뿐입니다, 선생님. 아카데미의 판단이 옳았다면 제 악보는 실제로 연주 불가능할 것이고, 그러면 그것대로 증명되는 셈입니다. 하지만 아카데미의 판단과 달리 연주가 가능하게 된다면, 사람들은 제가 그들의 충고를 받아들여 콩쿠르 이후 작품을 고쳤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넌 일요일에만 연주회를 열 수 있어.”


“좋습니다, 일요일에 열겠습니다.”


“그런데 홀 직원들, 검표원들, 객석 안내원들… 모두 음악원 소속인데, 그날 하루만 쉬는데, 자네는 그 불쌍한 사람들을 지치게 해서 죽게 할 작정인가? 그들을 죽게 말이야?”


“농담하시는군요, 선생님. 선생님이 그토록 동정하시는 그 불쌍한 사람들은 오히려 돈을 벌 기회를 얻는 걸 기뻐합니다. 그 기회를 빼앗는 게 오히려 그들에게 해가 될 겁니다.”


“나는 반대야, 단호히 반대! 당장 총감독에게 편지를 써서 허락을 취소시키겠어.”


“수고 많으시겠습니다, 선생님. 하지만 드 라로슈푸코 씨는 자신의 말을 번복하지 않을 겁니다. 게다가 저 역시 지금 나눈 이 대화를 있는 그대로 그에게 보내, 선생님과 제 주장을 비교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베를리오즈는 케루비니와의 대화를 기록해 총감독에게 편지를 보냈고, 편지를 읽은 총감독은 눈물이 날 정도로 웃었다. 결국 베를리오즈는 홀 사용을 허가받아 1828년 5월 26일에 연주회를 열었다. 입장료 수입이라고는 공연에 들어간 제반 비용을 충당하는 수준에 그쳤지만, 여러 신문에 연주회를 칭찬하는 글이 게재되며 베를리오즈라는 작곡가의 등장을 알리는 데 제법 도움이 되었다. 그해에 로마 대상 2등상도 받았지만 그게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여배우 스미스슨은 연기에 바쁜 나머지 여전히 베를리오즈의 존재조차 모르고 있었다. 베를리오즈는 당시 심경을 이렇게 술회했다.


나는 영국 극장 앞을 일부러 피해 다녔고, 서점마다 걸린 스미스슨 양의 초상화를 보지 않으려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그녀에게 편지를 썼다. 그녀로부터는 단 한 줄의 대답조차 오지 않았지만. 내 몇 통의 편지가 감동을 주기는커녕 오히려 그녀를 두렵게 했던 모양이다. 그녀는 하녀에게 더 이상 내 편지를 받지 말라고 단단히 지시했고, 그 결심을 바꿀 길은 전혀 없었다. 게다가 곧 영국 극장이 문을 닫을 예정이라 했고, 전 단원이 네덜란드로 순회공연을 떠난다는 소문이 돌았다. 이미 스미스슨 양의 마지막 공연 일정도 발표된 상태였다. 나는 거기에 모습을 드러낼 엄두도 내지 못했다. 앞서 말했듯, 무대 위에서 다시금 줄리엣이나 오필리아를 마주하는 것은 내 힘으로 감당할 수 없는 고통이었기 때문이다.


1829년 2월 25일에는 프랑스의 테너 가수이자 배우 루이 오귀스트 위에(1780-1832)를 위한 자선 공연이 오페라 코미크에서 예정되어 있었다. 그 공연에는 셰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 중 2막이 포함되어 있었고, 줄리엣 역에 스미스슨이 출연하기로 되어 있었다. 베를리오즈는 오페라 코미크 극장장을 설득해 공연 프로그램에 자신의 서곡 연주를 추가했다. 스미스슨과의 접촉면을 만들기 위해서였다.


베를리오즈가 리허설을 위해 극장에 갔을 때, 때마침 영국 배우들이 로미오와 줄리엣을 연습하고 있었다. 절망에 빠진 로미오가 줄리엣(스미스슨)을 팔에 안고 무대 위를 가로지르고 있었고, 그 장면을 목격한 베를리오즈는 비명을 지르며 도망쳤다. 스미스슨은 무대에 함께 있던 동료 배우들에게 베를리오즈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 신사는 눈빛이 불길하니 조심하세요.”


본 공연에서 베를리오즈의 서곡은 성공적으로 연주되었고 관객들도 아낌없는 박수를 보냈다. 하지만 이번 시도 또한 허사였다. 스미스슨은 분장실에서 배역을 준비하느라 연주를 듣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튿날인 1829년 2월 26일 스미스슨은 네덜란드 순회공연을 떠났다. 그녀가 머물던 숙소 맞은 편(리슐리외 거리 96번지)에서 하숙하던 베를리오즈는 스미스슨이 마차에 올라 암스테르담으로 떠나는 장면을 두 눈으로 직접 목격했다. 회고록에서 베를리오즈는 ‘우연히’ 그곳에서 하숙하게 됐다고 말하지만, 과연 진정한 우연일지는 의문이다. 그는 당시 심경을 이렇게 토로한다.


내가 그때 느낀 고통을 묘사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심장이 도려지는 듯한 아픔, 끔찍한 고립, 텅 빈 세계, 얼어붙은 피와 함께 온몸을 흐르는 천 가지 고문, 삶에 대한 혐오와 죽을 수조차 없는 절망… 셰익스피어조차 그 고통의 모습을 묘사하려 한 적이 없다. 그는 단지 햄릿에서 그것을 인생에서 가장 가혹한 고통 중 하나로 꼽았을 뿐이다. 나는 더 이상 작곡하지 않았다. 내 지성은 쇠퇴해 갔고, 감수성은 날카롭게 곤두섰다. 나는 오직 한 가지 일만 했다… 고통받는 일만.


베를리오즈는 현대적 의미에서 그야말로 스토커의 전형으로 보인다. 어쩌면 나 또한 베를리오즈를 스토킹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오페라 코미크 공연 날짜, 베를리오즈가 암스테르담으로 떠나는 스미스슨을 훔쳐본 날짜를 특정하려고 프랑스 국립도서관의 디지털 도서관 서비스 Gallica에 접속해 <르 피가로Le Figaro> 1829년 2월 21일자에 실린 글까지 직접 확인했으니 말이다. 해당 지면에는 스미스슨이 공연 참가를 위해 암스테르담으로 출발하는 날짜를 하루 늦추는 데 동의했다고 적혀 있었다(그곳을 거쳐 영국으로 간다는 추가 내용까지 포함해서). 베를리오즈 회고록 증언과 정확히 일치한다. 스토킹 성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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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열병은 또 다른 사랑만으로 치료가 가능하다고 했던가. 고통 속에 몸부림치던 베를리오즈에게 새로운 여성이 등장했다. 1830년 봄의 어느 날 빼어난 미모의 열여덟 살의 피아니스트 카미유 모크는 베를리오즈라는 젊은 작곡가에게 큰 호기심을 갖고 있었다. 자기를 짝사랑하는 게 확연한 동갑내기 독일인 음악가 페르디난트 힐러(1811-1885)가 친구(베를리오즈)에 대해 주저리주저리 말을 늘어놓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격정이 넘치는 사람은 본 적 없다는 둥, 베를리오즈가 당신과 친해져도 질투하지 않겠다는 둥, 왜냐하면 베를리오즈는 배우 스미스슨에 대한 열정으로 당신에게 관심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라는 둥.


유럽 최고의 피아노 재능에 누구나 사랑에 빠질 미모를 소유한 카미유는 어느새 힐러의 말이 틀렸음을 입증하는 일만을 꿈꾸게 되었다. 무슨 운명의 장난인지 베를리오즈와 카미유는 한 여학교 기숙사에서 각각 기타와 피아노를 가르치게 되었다. 카미유는 베를리오즈에게 왜 그렇게 침울해하냐고 말을 건네며 세상 어딘가에 당신에게 깊은 관심을 쏟는 사람이 있다고 접근했다. 힐러가 자신을 사랑하는 것 같다며 베를리오즈에게 상담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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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카미유는 베를리오즈에게 편지 한 통을 줬는데, 거기에는 힐러 문제로 상의할 게 있어 모처에서 만나자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그 시절의 여성으로서는 보기 드문 대담한 행동이었지만 베를리오즈는 그 장소에 가지 않았다. 약속 사실을 까맣게 잊어버렸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카미유는 베를리오즈를 함락시키겠다는 마음이 더욱 불타게 되었다. 그녀는 베를리오즈에게 찾아가 사랑 고백을 하고서는 스미스슨이 극장 관계자와 그렇고 그런 사이라는 세간의 추문을 전했다.


베를리오즈는 큰 충격에 휩싸여 이틀 동안 자취를 감추고 파리 남동쪽 시골길을 맹목적으로 걸으며 눈물을 주체하지 못했다. 먹지도 마시지도 못한 채 근처 밭둑에 쓰러져 죽은 듯 깊은 잠에 빠져 다음 날 아침 그곳에서 깨어났다. 이후 둘은 급속도로 가까워졌는데 베를리오즈는 당시의 심경을 이렇게 회고한다.


그리고 나는 며칠 동안은 다소 거칠게 ‘요셉’ 노릇을 하다가, 끝내는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에 스스로 몸을 맡겨 내 마음 깊은 근심을 위로받았다. 내 나이와, 열여덟 살에다 도발적일 만큼 아름다웠던 M양(카미유 모크)을 생각한다면 지극히 이해할 만한 열정으로 말이다.


스미스슨은 이데아의 세계에서나 존재하지만 카미유는 손을 뻗으면 닿는 곳에 있었다. 어느새 둘은 결혼하기로 맘먹고 양가 부모에게 허락을 구하게 되었다. 하지만 모크 부인(카미유 모친)의 반대가 완강했다. 카미유는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레슨과 연주회로 한 해에 12,000프랑(지금 가치로 수억 원)을 벌어들이는 데다가 좋은 혼처에서 연락이 끊이지 않았다. 심지어 당대 최고의 피아노 제작사로 명망 높은 플레옐 가문도 끼어있었다. 아무리 전도유망하다지만 베를리오즈는 제대로 된 수입이 없는 풋내기 작곡가였다. 베를리오즈는 의사인 아버지로부터 생활 지원금을 넉넉하게 받아낼 수 있다며 설득하려 했지만, 다니던 의대를 그만두고 음악가의 길을 걷은 베를리오즈에게 불만이 가득했던 아버지는 연간 1,000프랑만 지원이 가능하다며 선을 그었다. 플레옐 가문 쪽으로 마음이 기운 모크 부인은 이렇게 말했다.


“자, 연간 1,000프랑으로 당신은 무엇을 할 셈이죠? 당신이 뭔가 벌어들인다 해도 충분치 않을 겁니다. 딸(카미유)이 지금의 생활 방식을 바꾸고 익숙한 안락함을 포기해야 하거나, 아니면 둘 몫을 일해야만 할 텐데, 그걸 당신이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딸은 일한 지 고작 2년 되었고, 아버지는 딸이 파리에서 공부를 이어가도록 남은 재산을 죄다 바쳤습니다. 딸 역시 아버지를 돕고자 했지요.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만, 그 탓에 지금껏 모아 둔 것이 없습니다. 딸이 어느 날 아프거나 손을 다쳐 솜씨를 완전히, 아니 부분적으로라도 잃기라도 하면, 그녀를 부양할 방도가 없는 당신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안 됩니다, 지금으로서는 제가 동의할 수 없습니다.”


베를리오즈는 자신의 능력과 가능성을 화폐 수치로 입증해야 하는 상황에 내몰렸다. 그래! 로마 대상 1등상을 타서 5년간 장학금을 수령하고 여기에 아버지의 지원금 1,000프랑을 합쳐 생활비로 사용하자. 그 사이 오페라를 작곡해 경제적인 성공을 이루자. 그러면 날 인정할 거야. 당시 작곡가가 부와 인기를 거머쥘 수 있는 현실적인 방법은 오페라의 성공이었다. 1830년 로마 대상 경연에서 베를리오즈는 특유의 반항적 혁신적 기풍을 내려놓고 자신과 사이가 좋지 않은 고루한 심사위원조차 만족시킬 보수적인 스타일로 작곡했다. 그 깐깐한 음악원장 케루비니조차 “작년에 비해 악착같이 열심히 작업한 게 틀림없다”고 말할 정도였으니. 결과는 1등상이었다.


1830년 12월 5일 파리음악원 홀에서 열린 <환상교향곡> 초연 또한 대성공을 거두었다. 알다시피 전체 5악장으로 이루어진 이 대곡은 배우 스미스슨에 대한 격정을 예술로 승화한 베를리오즈의 대표작이다(적절한 시점에 자세히 다루겠다). 특히 4악장 ‘형장의 행진Marche au supplice’은 관객의 열화와 같은 요청으로 다시 연주되었다. 청중은 함성을 지르고 발을 굴러댔다. 수십 명이 줄을 지어 베를리오즈를 끌어안거나 악수하려 했다. 고무적인 건 박스석에 모크 부인이 딸 카미유와 함께 앉아 있었다는 점이다. 베를리오즈는 모크 부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호감을 표시하는 것을 보았고, 카미유가 “훌륭해요, 훌륭해요, 경이로워요!”라고 외치는 것을 들었다.


우연히도 같은 날 배우 스미스슨의 공연이 파리에서 있었으나 그녀의 인기는 예전 같지 않았으며 베를리오즈는 별다른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그에게는 사랑하는 카미유가 있었으며 스미스슨에 대한 미련은 <환상교향곡> 창작 과정에서 어느 정도 털어냈기 때문이었다. 공연 후 피아니스트 프란츠 리스트와 저녁 식사를 마친 베를리오즈는 카미유의 집으로 향했고, 모크 부인은 전에 없던 따뜻함으로 그를 맞이했다. 카미유의 집요한 설득 때문에 억지로 공연에 참석했다가 크게 감동한 모크 부인은 베를리오즈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동안 당신 음악을 듣기도 전에 했던 모든 불쾌한 말들에 대해 진심으로 미안합니다. 당신의 재능이 이토록 큰 줄은 몰랐습니다. 정말이지, 저항할 수 없을 만큼 압도적이었고, 내 생애에서 음악 때문에 그런 감정을 느껴본 적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양가 부모의 동의하에 두 사람은 약혼반지를 교환했다. 하지만 곧 헤어져야 할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로마 대상 1등상 수상자는 의무적으로 로마 유학을 떠나야 했기 때문이었다. 베를리오즈는 로마 유학 의무를 면제받고 파리에 남기 위해 정부에 탄원서를 넣었으나 불가능하다는 답변을 받고서는 실망했다. 약혼자를 홀로 두고 이탈리아로 떠나야 한다니. 마음 한구석에 불안을 지울 수가 없었다. 카미유를 믿었으나 여전히 모크 부인을 불신했기 때문이었다.


불안과 불신은 적중했다. 로마에서 일과를 보내며 카미유의 안부 편지를 초조하게 기다리던 베를리오즈는 어느 날 한 통의 충격적인 편지를 받는다. 모크 부인에게서 온 편지였는데 카미유가 플레옐 가문 사람과 결혼한다는 통보였다. 자신은 딸과 베를리오즈의 결혼에 동의한 적이 없으며 혹시나 자살 따위는 하지 말라는 모진 충고까지 곁들였다. 베를리오즈는 배신감과 모욕감에 문자 그대로 눈이 뒤집혔다. 그의 회고록을 통해 당시 심경이 어땠는지 확인할 수 있다.


첫 외출 날 우체국에 가서 내 편지를 찾아보았다. 그런데 그 속에서 받은 한 통의 편지는, 당시 내 나이와 성격을 지닌 사람에게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무례하고 모욕적인 것이었다. 순간 내 안에서 끔찍한 무언가가 일어났다. 분노의 눈물이 두 방울 튀어나왔고, 나는 즉시 결심을 굳혔다. 파리로 달려가, 어떤 경우에도 반드시 두 명의 죄 많은 여자와 한 명의 무고한 남자를 죽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 후에 나 자신을 죽이는 것 또한 당연한 수순이라고, 누구라도 짐작할 수 있겠지. 이 원정의 계획은 단 몇 분 만에 세워졌다. 파리에서는 내 귀환을 두려워했을 것이다. 그들은 나를 알고 있었으니까… 나는 큰 주의를 기울이고 변장을 한 채로만 파리에 모습을 드러내기로 했다.


친구의 도움으로 급하게 여권과 마차를 구한 후 베를리오즈는 변장에 필요한 여성복, 권총 두 자루, 자살용 극약을 챙겨 마차에 올랐다. 중간에 여성복을 마차에 두고 내리는 바람에 급하게 새로 옷을 사서 마차를 갈아타는 우여곡절을 겪었다. 프랑스 국경 코앞인 니스(당시 사르데냐 왕국령)에서 베를리오즈는 심경의 변화가 일어나 복수 계획을 포기했다. 만약 실행했다면 후세에 다른 방식으로 이름을 남겼으리라. 때는 1831년 봄이었다.


로마 대상 1등상 수상자의 의무라 억지로 이탈리아에 체류하던 베를리오즈는 기회만 생기면 파리로 복귀해 작곡가로서 능력을 한껏 펼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이탈리아 음악에서는 배울 게 없다는 생각이 들면서 이런 조바심은 더욱 강해졌다. 하지만 장학금을 계속 받으려면 이탈리아 유학 요건을 갖춰야 했는데, 다행스럽게도 6개월 일찍 이탈리아에서 떠나는 걸 허락받아 1832년 5월 31일에 프랑스로 돌아왔다. 가족과 만난 베를리오즈는 아버지와도 오래 대화를 나눴다. 그동안 비밀로 해 왔던 해리엇 스미스슨에 대한 불행한 사랑을 포함해, 많은 일을 솔직히 털어놓았다. 당시 베를리오즈의 상태는 여동생 아델이 언니 낭시에게 보낸 편지에 잘 드러나 있다.


우리 멋진 오라버니가 이렇게 쾌활하다니, 지난번에 왔을 때와는 정말 딴사람이에요. 저는 그 배신자 카미유에 대해 그가 어떻게 느끼는지 무척 궁금했답니다. 꺼내기 겁이 났는데, 기우였어요. 오라버니가 먼저 화제를 꺼내 길게 이야기해 주었으니까요. 그는 그녀를 경멸해요—미워할 가치조차 없다고 여길 만큼요. 그 말을 듣고 나니 숨이 트였답니다. 우리는 그 일뿐 아니라 여러 가지를 두고 자주 농담을 주고받아요. 어제는 로마에 있을 때 보고 겪은 장난스런 소동들을 들려줬는데, 우리 모두 웃다 죽는 줄 알았답니다. 보고 듣는 게 얼마나 많은지, 우리는 날마다 새로운 이야기를 듣고 있어요. 오라버니가 여기 온 뒤로 저는 정말 즐겁게 지내고 있어요. 오라버니는 열심히 일하고, 그가 일하는 동안 저는 곁에서 셔츠를 기워 주고 있답니다—언니는 놀라겠지만, 더 놀라운 건 이게 전혀 지루하지 않다는 거예요. 오라버니를 위해 일하는 게 기쁘거든요. 웃고 있죠, 이 심술쟁이—하지만 제가 순진하게 굴어서 스스로 청한 일이에요.


베를리오즈는 고향에서 다섯 달 정도 체류하는 동안 환상교향곡 개정판과 새로운 곡의 악보를 만들며 파리에서 개최할 연주회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런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버지는 “젊은 여자가 삼십만 프랑의 현금에, 누구든 탐낼 만한 상속 재산을 곧 손에 넣게 된다면, 그와 결혼할 기회를 어찌 놓치겠느냐?”며 뜬금없이 한 상속녀와의 결혼을 강권했다. 기분이 불쾌해진 베를리오즈는 단칼에 거절했다. 고향에서 보내는 시간이 따분하고 답답해질수록 파리의 연주회에 대한 열망은 커져만 갔다.


1832년 11월 초 파리에 복귀한 베를리오즈는 우선 머물 곳을 구했다. 예전에 살던 리슐리외 거리 96번지 방은 이미 차 있었다. 무심한 것인지 미련이 남은 것인지, 그는 바로 맞은편 스미스슨이 머물던 숙소의 방을 빌렸다. 이 무슨 운명의 얄궂은 장난인지, 해리엇 스미스슨은 베를리오즈보다 조금 앞서 파리에 와 있었다. 런던 공연 성과가 부진했던 스미스슨은 화려한 재기를 꿈꾸며 10월 말 다시 파리로 건너온 것이다. 베를리오즈는 회고록에서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술회한다.


로마로 떠나기 전 내가 거주했던 그 아파트는 이미 다른 사람이 들어와 있었다. 그래서 이상한 내적 충동에 이끌려 바로 맞은편 집을 알아보았다. 그곳은 예전에 스미스슨 양이 살았던 건물이었다. 나는 그곳에 입주했다. 다음 날, 오랫동안 그 건물의 집사 역할을 해오던 늙은 여자를 만났을 때 나는 물었다.

“스미스슨 양은 어떻게 지내나요? 소식이 있습니까?”

그 여자는 이렇게 대답했다.

“어머나, 선생님! 스미스슨 양은 지금 파리에 계세요. 바로 이 집에서 며칠 전까지 살다가, 그저께 이 아파트에서 나와서 리볼리 거리에 새로 들어가셨습니다. 곧 영국 극장을 열고, 다음 주부터 공연을 시작하신답니다.”

나는 그 놀라운 우연과 잔혹한 운명의 장난 앞에서 말문이 막히고 숨이 멎는 듯했다. 더 이상 저항할 수 없음을 직감했다.


당시 베를리오즈는 떠오르는 별이었고, 연주회 준비는 순조로웠다. 하지만 스미스슨이 이끄는 영국 극단의 파리 공연은 흥행 부진으로 제작비조차 회수하지 못했다. 빚은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었다. 베를리오즈는 일부러 스미스슨의 공연을 외면했다. 그녀의 공연을 본다면 정신적 동요로 연주회 준비에 차질이 생길지도 모른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하지만 운명의 여신은 두 사람을 이어주기로 작정한 모양이었다. 연주회 이틀 전 악보 가게에 있던 베를리오즈는 한 영국인을 보고 호기심이 나 가게 주인(슐레징어)에게 물었다.


“저 사람은 누군가요?”

“저분은 슈터 씨예요. <Galignani’s Messenger>(파리에서 발행되던 영문 신문)의 기자입니다. 아! 좋은 생각이 났어요!” 슐레징어가 이마를 치며 말했다. “저에게 연주회 입장권을 주십시오. 슈터 씨는 스미스슨 양을 잘 알고 있으니, 제가 그에게 부탁해서 표를 전해드리게 하면, 그녀를 당신의 연주회에 오도록 권유할 수 있을 겁니다.”


당시 파리의 호사가들은 베를리오즈의 열병과도 같은 짝사랑을 익히 알고 있었다. 스미스슨 또한 베를리오즈라는 작곡가가 자신을 연모한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눈치채고 있었다. 슈터가 입장권을 들고 스미스슨을 찾았을 때, 그녀는 흥행 부진에 낙담해 연주회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하지만 스미스슨의 여동생이 슈터를 거들며 권유했고, 그 자리에 있던 한 영국 배우도 참석하고 싶은 기색을 보이자, 결국 마차를 불러 연주회가 열리는 파리음악원으로 향했다. 공연 안내서를 읽고서야 뒤늦게 작곡가가 베를리오즈라는 사실을 깨달은 스미스슨은 교향곡에 붙어있는 제목과 각 악장의 설명에 놀랐지만. 이 기묘하고 고통스러운 드라마의 여주인공이 자신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아래에 스미스슨이 읽었던 공연 안내서를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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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가의 생애의 한 에피소드

5부로 된 환상교향곡

엑토르 베를리오즈 작곡

1830년 12월 5일 파리 음악원에서 초연


프로그램

작곡가는 예술가의 삶의 여러 국면을 음악적으로 풀어내는 것을 목적으로 삼았다. 말의 도움을 받을 수 없는 기악극의 구상은 미리 설명될 필요가 있다. 따라서 다음의 프로그램은 오페라의 대본처럼, 음악의 각 부분이 지닌 성격과 표현을 정당화하는 글로 이해되어야 한다.


몽상 — 열정

(제1부)

작자는 한 젊은 음악가를 가정한다. 그는 한 저명한 작가가 “정념의 공허함”이라 부른 마음의 병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러던 중 상상 속에서 오랫동안 그려왔던 이상적 존재의 모든 매력을 지닌 여인을 처음으로 만나고, 그에게 미친 듯이 사로잡힌다. 이상하게도, 그 사랑하는 모습은 언제나 음악적 영감과 결부되어 떠오르며, 열정적이면서도 고결하고 수줍은 성격을 띠고 있었다.

이 선율적 반영과 이상은 끊임없이 그를 따라다니며, “고정관념(고정악상)”(idée fixe)처럼 집요하게 되살아난다. 그래서 교향곡 전체에서 이 선율은 반복해서 나타나며, 제1부의 알레그로를 시작하는 주제가 된다. 우울한 몽상에서 이유 없는 기쁨의 발작으로, 다시 광기 어린 열정으로—질투, 분노, 애정과 눈물의 반복으로—흘러가는 이 여정이 제1부의 내용이다.


무도회

(제2부)

예술가는 인생의 다양한 상황 속에 있다. 축제의 소란 가운데서도, 자연의 아름다움을 관조하는 평화로운 순간에도, 도심이든 시골이든, 사랑하는 여인의 모습은 끊임없이 그 앞에 나타나 영혼을 뒤흔든다.


들판의 정경

(제3부)

어느 저녁 시골에 있던 그는 멀리서 두 목동이 ‘랑 드 바슈(스위스 목동들이 소를 몰며 부르던 전통 선율)’를 주고받는 것을 듣는다. 이 목가적인 이중창, 주변 풍경, 바람에 살짝 흔들려 나뭇잎이 내는 잔잔한 소리, 최근에 품게 된 몇 가지 희망의 동기들, 모든 것이 그의 마음에 이례적인 평온을 가져다주고 그의 생각에 더 밝은 색조를 입힌다. 그는 자신의 고립을 곰곰이 생각한다. 그는 곧 더 이상 혼자가 아니게 되리라 희망한다… 하지만, 그녀가 자신을 속인다면!… 이 희망과 두려움의 뒤섞임, 행복에 대한 이러한 생각들이 몇 가지 어두운 불길한 예감으로 어지럽혀지는 것, 그것이 아다지오의 주제가 된다. 마지막에, 목동 가운데 한 사람이 다시 랑 드 바슈를 부르지만, 다른 이는 더 이상 응답하지 않는다… 멀리서 들려오는 천둥소리… 고독… 침묵…


형장의 행진

(제4부)

사랑받지 못한다는 확신에 사로잡힌 예술가는 아편으로 자살을 시도한다. 그러나 치명적이지 못한 약의 양은 그를 죽이지 않고 끔찍한 환각 속으로 빠뜨린다. 그는 사랑하는 이를 죽이고, 사형을 선고받아 형장으로 끌려가며, 자신이 처형되는 장면을 꿈꾼다. 때로 음울하고 사납고, 때로는 화려하고 장엄한 행진이 이어진다. 무겁게 울리는 발걸음 소리와 요란한 폭발음이 교차하며, 마침내 단두대 앞에서 ‘고정관념’ 선율의 첫 네 마디가 마지막 사랑의 기억처럼 다시 나타나지만, 곧 단칼에 끊긴다.


마녀들의 안식일의 꿈

(제5부)


그는 자신이 마녀들의 안식일에, 온갖 망령들, 마녀와 마법사들, 각종 괴물들로 이루어진 섬뜩한 무리 한가운데 서 있음을 본다. 그들은 그의 장례를 치르기 위해 모여 있다. 기이한 소리들, 신음, 폭소, 멀리서 들려오는 비명—그리고 거기에 응답하는 듯한 다른 비명들. 사랑하던 선율이 다시 모습을 드러내나, 이제는 그 고결함과 수줍음의 성격을 잃었다. 이제 그것은 추잡하고, 천박하며, 그로테스크한 춤가락에 지나지 않는다: 바로 그녀가 안식일에 나타난 것이다… 그녀의 도착을 환호하는 포효… 그녀는 악마적인 향연 속으로 스며든다… 장례의 종소리, ‘진노의 날(Dies irae)’의 희화적 패러디, 마녀들의 원무. 마녀들의 원무와 ‘진노의 날(Dies irae)’이 함께 울린다.

(주: Dies irae — 가톨릭 장례 의식에서 불리는 성가)


그녀가 파리음악원 홀 객석에 들어서자 고정악상(idée fixe)의 주인공을 목격한 청중은 술렁였다. 객석의 시선이 자신을 향한다는 느낌, 자신이 화제가 되는 듯한 이상한 웅성거림은 그녀에게 뜨거운 감정과 설명하기 힘든 본능적 두려움을 불러일으켰다. 스미스슨은 공연장 한쪽에서 베를리오즈를 목격했다. 정말 그 사람이구나! 교향곡이 시작되고 거대한 오케스트라의 강렬한 울림은 그녀의 예술가적 예민함과 시적인 상상력에 깊은 인상을 남기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는 마음속으로 이렇게 중얼거렸다.


“그가 아직도 나를 사랑한다면…!”


환상교향곡 연주가 끝나고 속편 격인 〈렐리오, 또는 삶으로의 귀환〉(Lélio, ou Le retour à la vie, 1832)이 연주되었다. 환상교향곡의 예술가는 죽지 않았고, 마약에서 깨어나 다시 삶과 예술로 돌아온다는 설정의 곡이다. ‘말과 음악이 결합한 멜로로그(멜로드라마 + 모놀로그)’ 형식인데, 독백을 담당한 배우가 다음 대사를 내뱉었다.


“아, 어찌 내가 찾지 못하랴, 내 마음이 부르는 그 줄리엣, 그 오필리어를!

어찌 내가 맛보지 못하랴, 참된 사랑이 주는, 슬픔과 기쁨이 뒤섞인 그 도취를!

어찌 내가 맞이하지 못하랴, 어느 가을 저녁, 북풍에 흔들리는 황량한 황야의 꽃밭에서 그녀와 함께, 마침내 그녀의 품에 안겨, 우수 어린 마지막 잠에 들 수 있기를…”


대사를 듣자마자 스미스슨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주여!… 줄리엣… 오필리어… 이제 더는 의심할 수 없어. 그는 바로 나를 말하고 있는 거야… 그는 여전히 나를 사랑하고 있어!…”


마치 홀 안이 빙글빙글 도는 듯했고, 그 이후로 더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으며, 현실에 대한 분명한 의식 없이, 스미스슨은 마치 몽유병자처럼 집으로 돌아갔다. 그럴 만하지 않은가. 대규모 오케스트라와 독창, 합창이 동원된 구애 행위라니! 그날은 1832년 12월 9일이었다.


이후 둘은 급속도로 가까워졌다. 연주회로부터 9일 후인 1832년 12월 18일, 스미스슨은 베를리오즈에게 사랑을 고백했다. 설사 그것이 베를리오즈만큼 격렬한 건 아닐지라도 진실한 감정임은 분명했다. 하지만 양가 가족의 반대는 완강했다. (한낱 편견일 뿐이지만) 방탕하고 문란한 배우 직업이고, 개신교도이며(당시 프랑스는 가톨릭이 대세), 무일푼으로 빚더미에 앉은 여성을 반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베를리오즈도 환영받지 못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스미스슨의 매니저 역할을 하던 여동생 앤은 전망이 불투명하고 성격이 불안정한 프랑스 남자와 언니가 결혼하는 걸 집요하게 반대했다. 무엇보다도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던 배우 언니의 결혼은 영국에 있는 스미스슨 일가의 삶을 뒤흔드는 사건이었다.


1833년 3월 1일 오후 스미스슨에게 불행한 일이 닥쳤다. 마차에서 내리다가 발을 헛딛어 오른쪽 발목 위 두 뼈가 부러진 것이다. 내내 집에 누워 극심한 고통을 참아야 했으며 7월이 되어서야 주변인의 부축을 받아 간신히 걸을 수 있었다. 극단 상황이 좋지 않은 데다가 이런 일까지 벌어지니 그녀는 심리적으로 크게 위축되었다. 누워있는 내내 베를리오즈와의 관계를 정리하라는 동생의 집요한 닦달에 시달렸다. 베를리오즈가 간신히 결혼 직전까지 설득해도 그녀는 이내 물러서곤 했다. 1827년 9월에 사랑에 빠져 어느덧 6년이 되어가는 베를리오즈로서는 더 이상 기다릴 수가 없었다. 스미스슨이 ‘당신은 나를 사랑하지 않는 것 같다’고 책망하자 베를리오즈는 그녀 앞에서 치사량의 아편을 복용했고, 그녀의 울부짖음과 사랑 고백을 듣고서야 구토제를 먹었다. 두 시간의 구토, 그리고 사흘을 끙끙 앓은 후에야 베를리오즈는 간신히 회복할 수 있었다.


배우에 대한 세간의 편견과 달리 스미스슨은 방탕함이나 문란함과는 거리가 먼 고결한 영혼의 소유자였다. 그녀가 이 시기에 여러 차례 머뭇거리며 결단을 미뤘던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녀는 가장으로서 가족을 지탱해야 했으며 빚더미에 앉아 있는 데다가 당장 재정적 전망이 전혀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니 보장된 수입도 없는 가난한 외국 예술가와 결혼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자살 행위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스미스슨은 베를리오즈를 진심으로 사랑했다.


“그(베를리오즈)가 아무것도 갖지 않은 것이 오히려 기뻤다. 최소한 내가 그를 사랑한 것이 오직 그 자신 때문이라는 점을 그가 의심할 수는 없었으니까.”


심지어 베를리오즈가 자신의 동생 앤에게 수백 프랑을 준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는 앞으로 다시는 만나지 않겠다고 위협하며 돌려주게 하기도 했다. 베를리오즈가 자신을 셰익스피어 비극의 여주인공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보기 원해 연기하는 모습을 보러 오는 것조차 금했다. 베를리오즈와 스미스슨은 서로에게 그 누구보다도 진심이었다.


둘은 우여곡절 끝에 1833년 10월 3일 목요일 파리 포부르 생토노레 거리 39번지 영국 대사관의 예배당에서 결혼식을 올린다. 부모의 뜻을 거슬러 결혼하더라도 상속권을 잃지 않기 위해 ‘정중한 3회의 공식 요구(sommations respectueuses)’ 절차까지 밟으며, 베를리오즈는 끝내 자신의 사랑을 관철했다. 베를리오즈는 당시 심경을 이렇게 털어놓았다.


결혼하던 그날, 그녀에게 남아 있던 것은 빚뿐이었고, 사고 후유증으로 무대에 예전처럼 설 수 없을지 모른다는 두려움뿐이었다. 내 쪽은, 친구 구네가 빌려준 300프랑이 전 재산이었고, 나는 다시 부모와 불화 중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내 사람이었고, 나는 무엇에도 굴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