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갤에 올라온 번역



Klassiek centraal 은 벨기에 클래식 전문매체





정적 속의 응집된 집중력과 교향악적 서사 사이에서

임윤찬, 야쿠프 흐루샤, 

그리고 콘세르트헤바우 오케스트라가 선사한 잊지 못할 오후


by Werner De Smet




때로는 어떤 콘서트가 단순히 레퍼토리를 재현하는 수준을 넘어 하나의 '시험대'가 되기도 한다. 그것은 해석과 인격이 만나는 지점이자, 젊은 음악가와 결코 거리감을 허용하지 않는 작품이 정면으로 마주하는 순간이다.


아주 드문 경우이긴 하지만, 이러한 과정에서 의도치 않게 잠재적인 레퍼런스가 될 만한 연주가 탄생하기도 한다. 이는 스쳐 지나가는 일시적인 화제성이 아니라, 기억 속에 영원히 각인될 만한 해석이다. 즉, 단순히 실황을 기록하기 위한 음반이 아니라, 하나의 '척도'로서 CD 발매를 당연하게 상상하게 만드는 그런 연주 말이다.


1월 18일 일요일 오후, 한국인 피아니스트 임윤찬이 로열 콘세르트헤바우 오케스트라와 함께한 로베르트 슈만의 피아노 협주곡 가단조(Op. 54) 데뷔 무대는 바로 그러한(역사적인) 순간이었다. 


이는 임윤찬이 무언가를 더 증명해야 했기 때문이 아니다. 2022년 반 클라이번 콩쿠르 우승은 이미 세계 무대에서 그의 자리를 확고하게 각인시켰기 때문이다. 


그 보다는 슈만의 협주곡이 모든 형태의 가식을 벗겨내는 곡이기 때문이다. 이 작품은 냉소적인 기교나 외부에서 투영된 심미적인 꾸밈을 용납하지 않으며, 오직 (작곡가와의) 온전한 일체화만을 요구한다.



수많은 젊은 기교파 천재들 사이에서 임윤찬을 돋보이게 하는 점은, 그에게서 '효과를 노린 과시'를 전혀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이다. 그에게 테크닉이란 과시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당연하게 갖춰진 기본 출발점일 뿐이다. 


그의 터치는 놀라울 정도로 다채로운 색채를 지니고 있다. 거의 무게감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부드러운 시작부터, 명료하게 각인되는 강한 타건에 이르기까지, 그가 만들어내는 모든 소리는 음악적 의미로 완벽하게 가득 채워져 있다.


그의 연주에서는 상대를 압도하려는 욕구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오히려 음악적 과정 속에 기꺼이 자신을 녹여내려는 의지가 돋보인다. 마치 모든 음표를 단순히 연주하는 것이 아니라, 매 순간 의식적으로 '체험(beleefd)'하는 듯하다. 


이 과정에서 프레이징과 타이밍, 그리고 음색은 끊임없이 서로 반응하며 조화를 이룬다. 이러한 특징은 슈만 피아노 협주곡에서 독주자로서의 자기 과시보다는, 오케스트라와의 조화로운 울림과 호흡에 대한 놀라운 집중력으로 고스란히 나타났다.


그는 오케스트라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고, 공연장의 음향과 악보 내면에 흐르는 긴장감에 집중했다. 이러한 태도는 이제 막 스무 살을 넘긴 피아니스트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경이로운 음악적 성숙도를 증명해 보였다.





악보를 온몸으로 체험하는 피아니스트


슈만의 피아노 협주곡은 그보다 앞서 작곡된 '판타지'에서 기원했으며, 작곡가 슈만의 양가적인 심리에 깊게 뿌리 내리고 있다. 그렇기에 이 곡은 친밀함과 폭발적인 분출 사이에서 끊임없이 균형을 잡아야 한다. 임윤찬은 이러한 긴장의 장을 즉각적으로, 그리고 예리하게 포착해냈다. 


도입부의 화음은 드라마틱한 등장을 알리는 수단이 아니었다. 그것은 차라리 수사학적인 몸짓이었으며, 성격상 거의 질문을 던지는 듯했다. 마치 협주곡이 청중에게 즉각적으로 자신을 강요하는 대신, 조심스럽고 망설이듯 말을 건네는 것 같았다


그의 타건은 투명하고 가벼웠으며, 오케스트라와의 대화를 중심에 두는 실내악적인 태도를 견지했다. 그 무엇도 과시되지 않았으며, 모든 것이 내면의 필연성으로부터 흘러나오는 듯했다. 루바토는 섬세하고 기능적이었으며, 감상주의는 철저히 배제되었다. 특히 다이내믹의 조절 능력이 눈에 띄었는데, 포르테는 무겁지 않았고 피아노는 부서질 듯 연약하지 않았다. 가장 깨지기 쉬운 연약한 구절에서조차 소리는 결코 그 알맹이(핵심)를 잃지 않았다


이 협주곡의 구조적, 표현적 중심축이라 할 수 있는 '인터메초(Intermezzo)' 악장에서 임윤찬의 성숙함은 가장 명확하게 드러났다. 목관악기 및 현악기들과 주고받는 대화는 친밀하면서도 마치 비밀을 공유하는 듯한 은밀한 성격을 띠었다. 여기서 슈만은 낭만주의적인 과장된 고통(pathos)으로 들리지 않았으며, 세심하게 다듬어진 한 편의 '내면적 독백'처럼 울려 퍼졌다.


임윤찬이 화성의 변화와 섬세한 대위법적 선율들을 강조하는 그 세밀함은, 인터메초 악장에 낭만주의 전통에서는 보기 드문 일종의 '서사적 층위(narrative gelaagdheid)'를 부여했다. 마치 모든 프레이즈가 단순히 앞으로 나아갈 뿐만 아니라, 이전에 지나온 음악적 흐름을 되새기며 성찰하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임윤찬은 음악 위에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 음악의 한복판에 존재했으며, 매 순간의 숨결을 오케스트라의 선율과 세심하게 융합시켰다. 마지막 악장(3악장)에서도 그는 어떠한 형태의 이유 없는 과시(gratuite bravoure)를 경계했다. 


리드미컬한 정교함과 서정적인 호흡이 완벽한 균형을 이루었고, 그 결과 피날레는 기교적인 승리감에 도취하기보다는 천진난만한 명료함을 띠게 되었다. 여기서 뿜어져 나온 에너지는 외향적인 폭발이 아니라, 내면에서부터 차곡차곡 쌓아 올린 긴장감의 구축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이러한 균형의 중심에는 지휘자 야쿠프 흐루샤의 결정적인 역할이 있었다. 그는 단순히 임윤찬을 보조(반주)하는 데 그치지 않고, 첫 음부터 마지막 음까지 그와 함께 숨을 쉬었다. 흐루샤의 지휘는 협주곡이 가진 드라마투르기(구성적 극치)를 완벽하게 살려냈으며, 즉흥적인 상호작용이 일어날 공간을 열어두면서도 교향악적 긴장의 끈을 결코 놓지 않았다. 덕분에 오케스트라와의 대화는 한층 더 강렬하고 선명한 의미를 갖게 되었다.


독주자와 지휘자는 상하 관계나 그 어떤 마찰도 없이, 들리는 그대로 '하나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콘세르트헤바우 오케스트라의 연주는 기민하고 몰입도가 높았으며, 때로는 기분 좋은 반항기(tegendraads)마저 느껴졌다. 이러한 기질은 이 협주곡이 단순한 반주용 수단에 머물지 않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요소이며, 덕분에 슈만의 정교하고 치밀한 오케스트레이션은 한층 더 입체적인 질감(reliëf)을 얻게 되었다.



앙코르 곡으로 연주된 프레데리크 쇼팽의 '왈츠 Op. 34, 2번'은 (본 공연에서 보여준) 그 특별한 집중력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 주었다. 관객뿐만 아니라 오케스트라 단원들과 지휘자조차 임윤찬의 손가락 끝에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는 듯 보였다. 


그곳에 울려 퍼진 소리는 거의 비현실적일 정도의 정적을 머금고 있었으며, 그 순간만큼은 시간도 맥박도 일시적으로 멈춘 듯했다. 연주가 끝나고 쏟아지는 박수에 임윤찬은 눈에 띄게 어색해하며 반응했는데, 마치 '단지 음악을 만들었을 뿐인데 왜 이토록 큰 소란이 일어나는가'라고 자문하는 듯 보였다. 이러한 그의 모습은 연주 내내 보여준 겸허하고 진지한 태도와 완벽하게 궤를 같이했다.


중략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날 오후의 무게중심은 단연 임윤찬에게 있었다. 이는 그가 동세대에서 가장 화려한 피아니스트이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그는 결코 과시적인 연주자가 아니다. 그보다는 연주에 임하는 보기 드문 진지함을 지극히 자연스러운 당연함과 결합했기 때문인데, 이러한 조합은 오늘날 단순히 기술이 뛰어난 기교보다 훨씬 희귀한 것이다. 


이것은 단지 소리로 듣는 공연이 아니라 온몸으로 완전히 경험해야 하는 무대였다. 그의 집중력과 음색, 프레이징은 오직 공연장에서만 온전히 펼쳐지며, 그 충격은 즉각적인 분석을 거부한 채 서서히, 그리고 깊이 청중의 마음에 남는다



슈만이라는 작곡가에게서 임윤찬은 자신을 뽐낼 무대를 찾은 것이 아니라 대화의 상대를 찾아냈다. 그는 이 곡을 단순히 연주해야 할 레퍼토리 중 하나가 아니라, 자신의 존재적 본질을 담은 재료(existentieel materiaal)로 대했다.


 그의 연주는 외부의 인정을 갈구하지 않았으며, 오로지 음악 그 자체의 내적 논리에만 온전히 집중하는 듯 보였다. 이러한 점은 그가 단순히 대중의 눈에 띄고 자신을 각인시켜 빠르게 커리어를 쌓으려는 연주자가 아니라, 겉으로 드러나는 효과보다 내면의 심화를 더 중요하게 여기며 지속 가능한 예술가로서의 길을 걷고 있음을 시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