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드워드 사바-세갈, 2026년 4월 26일, 바흐트랙



카네기홀 만석의 객석 앞에서 임윤찬은 슈베르트와 스크랴빈을 한 프로그램에 배치했다. 서류상으로는 단지 대비 이상의 의미를 찾기 어려운 구성이었지만, 실제 연주는 그 자체의 논리를 만들어냈다. 그것은 양식적 연결이라기보다, 팽창과 정지 사이를 오가며 음악적 시간을 늘리고 풀어놓는 공통된 기반 위에 놓여 있었다.


슈베르트의 ‘가슈타인’ 소나타 D.850에서, 이 작품이 후기 슈베르트 특유의 내면적이고 노래 같은 세계보다 추진력과 구조적 전개를 더 중시하는 만큼, 임윤찬은 알프스 풍경을 연상시키는 묘사적 해석을 완전히 배제했다. 대신 그의 초점은 아티큘레이션과 비례감으로 정의되는 추상적 성격에 머물렀다. 다만 그 명료함에도 불구하고, 작품의 보다 사색적인 순간들에서는 다소 불안하게 느껴지기도 했는데, 그때는 보다 포착하기 어려운 내면적 성격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1악장에서 그의 터치는 확고하면서도 유연했고, 내성부는 이례적으로 선명하게 드러나 질감 안에서 능동적인 대위법적 층을 형성했다. 때로는 다소 빠른 템포가 구조감을 압축하는 듯했지만, 음악의 전진하는 힘이 틀을 밀어붙이는 와중에도 모든 세부는 분명히 살아 있었다. 그 표면 아래에는 모호한 흐름이 남아 있었고, 음악적 논리 속에 숨은 갑작스러운 화성 변화는 조용히 불안감을 자아냈다. 느린 악장은 절제를 통해 형성되었고, 표현의 폭은 때로 의도적으로 억제되어 있었다. 그러나 정교하게 계산된 방향감 덕분에 방황하는 듯한 흐름도 결코 늘어지지 않았다.


스케르초는 무게감 없이 선명하게 새겨진 악센트와 함께 단단한 리듬 윤곽을 유지했고, 에너지는 긴장된 채 유지되었다. 피날레에서 임윤찬은 다시 화려함보다 구조를 우선시했다. 질감이 두터워지고 에너지가 축적되는 가운데서도 통제력을 유지했고, 섬세한 순간들은 표면을 가볍게 밝혔다. 1악장에서처럼 전환 역시 조용한 확신 속에 처리되며 흐름의 연속성이 유지되었다.


스크랴빈 소나타들에서는 전환의 처리 자체가 음악적 논지의 중심이 되었다. 2번 소나타에서부터 이미 섬세하게 층을 이룬 음색의 팔레트가 존재했고, 선율을 희생하지 않은 채 각 전환은 개별 사건이 아니라 연속적인 변형처럼 펼쳐졌다. 1악장에서 음악은 동시에 정지된 듯하면서도 방향성을 유지했고, 짧고 파편적인 몸짓들이 흐름을 깨지 않으면서도 흔들어 놓았다. 질감은 점점 더 유동적으로 바뀌었고, 음형은 앞선 재료에서 자연스럽게 자라났는데, 때로는 슈베르트 종결부를 움직였던 빠르고 소용돌이치는 패턴을 떠올리게 했다. 프레스토로 넘어가는 전환에서는 음악이 끊임없는 운동 속으로 빨려 들어갔고, 밀도가 커지는 가운데에서도 명확한 성부 분리가 유지되었다.


3번 소나타는 보다 노골적으로 극적인 언어를 드러냈지만, 임윤찬은 과장을 거부했다. 긴장이 최고조에 이르는 순간에도 연주는 중심을 잃지 않았고, 힘이 아니라 성부의 균형이 음악을 이끌었다. 음악은 압력을 품은 채 팽창하고 수축했지만, 개별 선율은 끝까지 분명했다. 이러한 접근은 구조를 더욱 선명하게 하면서도 그 밑바닥의 긴장을 그대로 살렸다.


4번 소나타에서는 끊임없는 변형의 과정이 가장 분명하게 드러났다. 안단테는 멈춰 선 듯한 움직임의 상태를 만들며 서서히 해체를 향해 나아갔다. 이어지는 프레스티시모 볼란도는 과시를 목표로 하지 않았다. 대신 그것은 음악적 과정의 응축된 연속처럼 진행되었고, 마지막에는 종결이라기보다 소리가 흩어지는 듯한 울림 속에서 해결을 유예했다.


앙코르로 임윤찬은 스크랴빈의 동문이었던 라흐마니노프의 **‘보칼리제’**를 선택했다. 이는 선율의 우위로 돌아가는 듯 보였지만, 지나치게 낭만적인 몸짓을 피함으로써 그는 이 곡을 보다 절제된 것으로 바꾸어 놓았다. 선율은 절제된 음색 변화 속에서 펼쳐졌고, 앞선 작품들을 지배했던 명료함과 비례감 속에서 다듬어졌으며, 마치 시간 자체가 다시 느슨해지는 듯했다.


평론가는 이 연주를 한 문장으로 요약했다.


“선율을 희생하지 않으면서도 섬세하게 단계 지어진 음색의 팔레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