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연대:1681 ~ 1767
◎ Telemann, Georg Philipp (텔레만)
텔레만의 삶과 음악
1829년 베를린에서 멘델스존이 바흐의 <마태수난곡>을 초연한 사건은 하나의 중요한 시작이었다. 세계의 무수한 음악학자들, 연주회를 준비하는 숱한 연주자들이, 한결같은 열정과 찬사를 담고 \'바흐\'를 외치게 되었고, 세계 음악사는 바흐를 커다란 산으로 세우고 그 이전과 이후는 작은 봉우리들로 묘사되기 시작했다. 바흐는 \'음악의 아버지\'이며 \'음악의 바다\'이며 \'음악의 신\'이어서 그를 표현하는데 언어는 언제나 무능하기만 했다. 한마디로 그는 비평의 대상이 되기엔 너무 위대한 거인이었다. \'바흐로 돌아가자\'고 주장했던 스트라빈스키의 캐치프레이즈가 강렬하게 사람들의 공감을 불러일으켰고, 그의 입김은 아직까지 그 힘을 잃지 않고 있다.
바흐는 위대한가? 물론이다. 그렇다면 바흐의 명성은 불멸의 것인가? 그건 알 수 없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그토록 당당한 바흐의 명성이 후세에도 영원히 유지되리라는 확신을 가질 수는 없다. 시간이라는 것, 시대라는 것은 너무나 큰 변화를 몰고 다니기에, 역사의 빛과 그늘이 사람들 시선의 각도에 따라 엄청나게 달라진 사례를 수없이 보아왔기에 하는 얘기다. 바흐와 텔레만은 그런 \'시대의 아이러니\'를 느끼게 하는 두 사람이다.
18세기 독일 음악계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이들은 그들 당대와 사후의 평가에 있어서도 서로 엇갈리는 대접을 받아왔다. 이를테면 1720년에서 1760년까지 이들이 왕성하게 활동했던 시기에, 텔레만은 바흐보다 작품의 양에 있어서나 권력에 있어서나 한발 앞서 있었다. 더구나 바흐가 세상을 뜬 직후에 바흐의 작품은 거의 사장된 실정이었다. 그러던 것이 19세기에 들어서서 잊혀지다시피 했던 바흐의 음악이 재발견되기 시작하면서, 점점 확대되어가는 바흐의 존재에 가려 이번엔 텔레만이 무시당하게 되었다. 화려하고 정교한 바흐에 비해 텔레만은 너무 쉽고 통속적이라는 비판이 그의 음악을 이류로 몰아부쳤던 것이다.
그리고 20세기. 바흐의 발꿈치에도 못 미칠듯 괄시를 받던 텔레만의 존재가 막스 쉬나이더(Max Schneider)와 로맹 롤랑(Romain Rolland)의 힘겨운 작업에 의해 조금씩 재인식되기에 이르렀다. 21세기를 바라다보는 이제, 텔레만의 이름은 바흐에 비길 바는 못되지만 음악사의 중대한 한 페이지를 당당히 장식하게 되었다. 보다 중요한 것은 그들에 대한 연구는 앞으로도 계속될거고 평가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누가 장담할 수 있을 것인가. 영원히 바흐의 명성이 텔레만위에 군림할 것이라고.
게오르크 필립 텔레만(Georg Philipp Telemann)은 바흐가 태어나기 4년 앞선 1681년 3월에 독일의 마그데 부르크에서 태어났다. 대대로 프로테스탄트 목사를 지낸 그의 가문은 대부분 대학교육을 받은 중상류 계층에 속해 있었지만, 수많은 음악가들을 배출한 바흐 가문과는 달리 선후대를 통해 음악가는 거의 찾을 수가 없다. 1767년에 세상을 뜰때까지 그 어떤 음악가보다도 많은 양의 작품을 출판했고, 바로크 후기의 독일 음악을 이끌었던 음악가 텔레만을 예고하는 그 어떤 징후도 그의 탄생과는 무관했다.
텔레만의 음악적 재능은 사실 수수께끼가 아닐 수 없다. 텔레만 자신은 그의 모친으로부터 음악적 재능을 물려받았다고 하지만, 페르덴의 칸토르를 지낸 그녀의 조카 할트마이어(J.F. Haltmeier)를 제외하곤 텔레만의 모친과 음악을 연결시킬 만한 이렇다 할 증거는 없다.
혈통은 그렇다치고, 교육에 있어서도 텔레만은 특별한 음악적 혜택을 받은 바가 없다. 그의 자서전에서 텔레만은 2주간의 쳄발로 레슨이 그가 받은 음악교육의 전부라고 밝히고 있다. 10살때 바이올린등의 악기 연주와 작곡법을 공부한 이력을 합친다해도 다른 작곡가들의 강도 높은 교육에 비할 바가 못된다.
텔레만이 최초로 쓴 오페라는 놀랍게도 그의 나이 12살때의 것이다. 그 이전에도 그는 수시로 아리아나 모테트, 기악곡 등을 습작하곤 했었는데, 그의 오페라를 본 그의 모친과 친지들은 범상치 않은 텔레만의 재능에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다른 음악가들의 경우였다면 이는 그에게 본격적인 음악교육의 길을 열어주었을 것이 틀림없다. 그러나 텔레만에게 이것은 반대의 효과로 작용했으니 그는 일체의 악기연주와 음악공부를 금지당했던 것이다.
첼러펠트, 헬름쉬테트, 힐데샤임 등지에서 텔레만은 음악이 아닌 일반 교육을 받았다. 그래도 그의 음악가로서의 타고난 재능은 감출 수 없었고 그걸 간파한 몇몇 교사들은 비공식적이나마 그에게 음악을 가르치고 더 공부하도록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이를 테면 헬름쉬테트의 카스파르 칼보에르는 그에게 수학과 음악의 상관관계를 가르쳐 줌으로서 텔레만의 음악이론을 탄탄하게 해주었다. 힐데샤임의 J.C 로지우스(Losius)는 수많은 라틴어 드라마를 위한 극음악을 쓰도록 텔레만을 부추겼다.
텔레만이 그의 가계 전통을 따랐거나 모친의 희망대로 되었다면 성직자나 법률가가 되었을 것이다. 어쨌든 그는 라이프치히의 대학에서 법률을 공부했다. 홀어머니의 뜻에 충실하려 했던 것일까. 대학시절 텔레만은 자신이 음악에 대해 갖고 있던 모든 인연, 모든 열정을 비밀로 묻어버렸다. 그러나 비밀은 폭로되기 마련이다. 어느날 텔레만의 작품 하나가 그의 룸 메이트의 눈에 띄면서 사태는 일변하고 말았던 것이다. 친구의 작품을 그는 토마스 교회에서 연주하도록 주선했고, 이 연주는 다시 라이프치히 시장을 감동시켰다. 결국 텔레만은 격주에 한 곡씩 교회에서 연주될 칸타타를 쓰는 임무를 맡게 되었다. 작품을 발표할 확실한 근거가 지극히 우연한 사건이 계기가 되어 마련되었으나 행운이라면 행운이었다.
자신의 재능이 알려지면서 텔레만의 음악활동은 보다 활발하고 열정적으로 펼쳐지기 시작했다.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으로 라이프치히의 학생들로 구성된 콜레기움 무지쿰(Collegium musicum)을 창설(1702), 정기적으로 연주회를 연 일을 꼽을 수 있다. 17세기에 학생들의 음악활동은 여가를 이용한 취미생활에 불과했는데, 텔레만의 콜레기움 무지쿰은 공개 연주회를 비롯한 보다 적극적인 활동의 포문을 열었다는 의미에서 가히 획기적인 일이었다.
같은 해에 텔레만은 라이프치히 오페라단의 음악감독이 되었다. 여기서 그는 유능한 학생들을 솔로이스트로 기용하였고, 레퍼토리에 자신이 쓴 오페라를 포함시키기도 했다. 당시 음악에 뜻을 둔 학생들에게 자극과 영감을 불어넣어 주고, 재능있는 학생들에겐 그걸 발휘할 기회를 제공했던 만큼, 텔레만이 그들에게 찬탄과 존경을 받았다는 사실은 쉽게 미루어 짐작할 수가 있다.
1704년에 그는 새 교회의 오르가니스트로 일하기 시작했고 프롬니츠 백작의 궁정악장이 되어 프랑스풍의 관현악 모음곡등을 작곡하였다. 텔레만이 관현악 서곡, 협주곡, 실내악곡 등의 기악음악을 집중적으로 쓴 것은 그가 아이케나흐의 궁정악장으로 취임하고의 일이다. 이는 그곳 궁정 오케스트라의 수준이 그에게 흡족하게 여겨질만한 것이었던 때문이다. 그러나 이때에도 교회 칸타타와 각종 행사를 위한 음악은 여전히 작곡되었다.
아이제나흐는 잘 알려진대로 바흐의 출생지이다. 텔레만과 바흐의 관계를 자세히는 확인할 수 없지만 1714년 텔레만이 바흐의 둘째 아들인 C.P.E. 바흐의 대부가 된 것으로 보아 두 사람이 그리 소원하게 지내지는 않았을 것이라 추측된다. 아이제나흐에서 텔레만은 그의 첫 딸을 낳았다.
1712년에 텔레만은 프랑크푸르트 암마인으로 옮겨 바르퓌서 교회의 악장이 되었고, 1721년엔 함부르크의 시 음악감독으로 초빙되었다. 텔레만의 나이 40살, 그는 이미 국제적으로 이름난 음악가였다. 아이제나흐와 바이로이트의 궁정 부재악장을 겸하는 한편, 시의 음악감독으로서 오페라 극장과 시 음악회의 조직 등의 일로 그는 너무도 바쁜 나날을 보냈다. 1723 년에, 라이프치히 성 토마스 교회의 칸토르로 추천되었다가 기각되고 바흐가 임명된 사건은 그에게 그다지 중요하달 것도 없었을 것이다.
게다가 텔레만은 주어진 임무에만 충실한 그런 음악가는 아니었다. 라이프치히의 대학시절 학생 연주단체를 조직했던 경력에서 엿볼 수 있듯이, 그는 언제나 자신의 뜻과 사상을 이루기 위해 스스로 일을 만들어가는 적극적인 사람이었다.
텔레만의 적극성에서 비롯된 가장 큰 변화라면,독일의 음악계에 새로운 바람, 즉 소수의 선택된 사람들만이 아닌 다수의 대중들이 함께 참여하는 음악이 무시되지 않게 된 것을 들 수 있다. 종교인이거나 아니거나, 부유한 귀족이거나 평범한 시민이거나, 음악적으로 통달한 비르투오조이거나 단순한 아마츄어 연주가이거나, 텔레만에게는 모두 음악의 즐거움을 함께 누려야 할 사람들로 여겨졌다. 그 무렵 풍토는 특정인을 위한 음악회나 교회음악만이 중시되고 있었지만, 자신의 사상과 어긋나는 사회통념에 그대로 굴복할 텔레만은 아니었다. 결국 텔레만은 잦은 음악회와 적극적인 음악출판을 통해 독일의 음악풍토를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는데 성공했다.
음악출판은 텔레만의 업적가운데 실제적인 그의 작품 못지 않은 중요성을 띤다. 그는 곡을 써서 연주하는데 그치지 않고 그것을 다량의 악보로 출판하여 누구라도 원하는 사람이 구해 연주할 수 있게 하였다. 흔히 악보를 구할 수 없었던 당시에 악보출판에 기울인 그의 정열, 그리고 출판 외에 작품의 공연에 있어서까지 작곡자의 작품권을 주장했던 그의 논리는 지금에 와서 생각해도 선구적인 것이라 할 수 있겠다 (자신의 허락없이 작품이 출판될 경우엔 이를 바로잡기 위해 독일 지역은 물론, 멀리라 할지라도 주저없이 쫓아갈 만큼 그는 철저했다.) 이것은 단순히 그의 작품을 보급한다는 의미에 더해, 일반 가정에서 쉽게 음악을 연주할 수 있게 함으로써 음악의 층을 넓히는 계기로 작용했다는 의미를 갖는다.
텔레만은 비교적 서민적인 음악가였다. 그는 자신의 것을 포함하여 모든 음악의 아마츄어리즘을 존중했다. 애초에 출발부터 독학에 기반을 두었던 탓인지도 모른다. 어쨌든 텔레만은 음악을 쉽게 했다. 전문가가 아니더라도 연주할 수 있어야 했기 때문이다. 비르투오조 콘체르토 양식보다는 오케스트라의 앙상블 효과를 중시했던 것도 같은 이유에서 비롯된 결과다. 복잡한 화성이나 기교에 얽매이지 않고 애호가나 가족들 사이에서 자유롭게 연주되는 음악이야말로 음악 본래의 존재 가치와 가장 잘 부합되는 것이 아닌가.
텔레만 동시대의 유명한 평론가 샤이베(Scheibe)는 텔레만의 그런 서민성을 높이 평가했다. 텔레만에게서 발견되는 가식없고 자연스런 편안함을 바흐의 복잡하고 엄격한 대위법보다 우위에 두었던 것이다. 헨델, 핫세 등과 더불어 독일 음악 수준을 높인 가장 진보적인 작곡가로 샤이베는 텔레만을 꼽았었다. 바흐와 친했던 시인 고트셰드(Gottsched)조차도 그의 싯귀에서 헨델과 텔레만을 가장 뛰어난 작곡가로 찬양할 정도였으니 텔레만이 살아서 받았던 대우는 오늘날과 비할 바가 못되었던 셈이다.
텔레만이 폭넓은 인기를 누릴 수 있었던 까닭은 그의 작품에 깃든 다양한 요소에서도 찾을 수 있다. 이탈리아의 선율성, 프랑스의 다양한 리듬과 묘사성, 독일의 치밀한 성부 서법, 폴란드의 야성적 취향등이 그의 방대한 작품 곳곳에 나타나 듣는 이의 다채로운 입맛을 고루 만족시켜 주었던 것이다.
그런 까닭에 여러 나라에서 텔레만의 작품 주문이 쇄도했다는 기록은 당연하게 보인다. 그의 대표작 중의 하나인 <식탁음악>(1733)은 출판된 206부 중 52부가 프랑스등의 외국에서 요청된 것이었다. <식탁음악>의 인기를 반증하는 또 하나의 예는 런던의 헨델이 그의 오르간 협주곡 Op. 7의 4에 <식탁음악>의 여러 부분을 인용하였던 경우이다.
19세기 이후의 평론가들이 텔레만을 무시한 가장 큰 이유는 그의 작품이 진지하지 않고 갤런트(galant) 스타일에 치중되어 있다는 점이다. 학구적이고 형식에 엄격한 바흐의 음악을 기준으로 할 때 텔레만의 음악은 확실히 열세임에 틀림없다. 헨델의 장중함이나 우아함도 그에게선 쉽게 발견되지 않는다. 또, 당시 칸토르가 오페라를 쓰지 않던 관습에 비추어 볼 때 텔레만은 지나치게 대중의 유행에 영합했다는 설도 있다. 텔레만의 옹호자인 로맹 를랑은 텔레만이 살아서 바흐보다 큰 영예를 누렸다는 한 가지 이유 때문에 텔레만이 사후에 고의적으로 부당한 대접을 받고 있다고도 했다.
그 모든 논리는 옳은 동시에 옳지 않다. 텔레만이 바흐나 헨델보다 가벼운 곡을 쓴 것은 사실이지만 그 때문에 저급한 음악가로 평가될 수는 없을 것이다. 모든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줄 수 있는 갤런트 스타일이야말로 그가 추구한 목적에 맞아 떨어지는 음악이었다는 점을 생각할 때 그같은 평가는 오히려 우스워진다. 더구나 20세기에 그에 대한 새로운 평가가 이뤄지면서 그의 작품에 나타나는 고전주의 스타일을 예고하는 음악사적인 발전과정도 정당한 인정을 받기에 이르렀다. 텔레만의 건반음악은 소나타 양식의 초기 특징을 보이는 것이고, 그의 푸가집 (Fugues legeres & Galanterie Fugen)은 바흐의 프렐류드와 푸가의 패턴을 앞서고 있다는 점도 그의 가치를 높이는 근거가 되었다.
텔레만은 오페라와 종교음악, 기악곡 등 실로 다양한 장르에 걸쳐 막대한 작품을 남겼다. 그 모든 작품이 한결 같이 높은 수준을 유지하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음악을 소수의 계층이 아닌 대중의 생활 깊숙한 곳으로 끌어들였다는 공로 하나만으로도 텔레만의 위대함은 기억돼도 좋을 것이다.
[주요 작품목록]
식탁 음악
오보에 협주곡 G장조
트럼펫 협주곡 C장조
리코더 협주곡 C장조
합주 협주곡 B장조
오보에 소나타 Bb장조
무반주 플루트 환타지아
출처: 누가쓴지 모름,,
텔레만이 앞으로 잠깐이나마 대세를 탈 날이 올지도 모르지만..그래도 다시 버러우 할 수밖에 없을 거라고 생각..한 음악을 영속케 하는 힘은 형식의 완성도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텔레만은 일단 너무 많이 쓰고 그 많이 쓴 것에 비해 어떤 형식의 상승을 이뤄낸 것 같지는 않음..
동감. 하지만 바흐베토벤이라고 해서 영원을 구가할 수는 없는거다. 뭐 나 죽기전까지는 흔들리지 않을 위상들이다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