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츠키 단편 '안녕 에리'가 올라왔다. 재밌다.
영화광으로 유명한 작가 답게 이번 단편 역시 영화를 중심 주제로 하고 있는데...
이번 작품이 특히 그렇지만 타츠키는 전부터 영화적인 비유를 즐겨 사용해 왔다.
파이어펀치를 관통하는 영화적 키워드는 '연기'.
작중 인물들은 어떤 목적을 위해 알면서도 모르는 척 본심을 숨기거나, 자신의 자아를 억누르고 페르소나를 내세워 행동한다.
신을 연기하는 아그니, 루나를 연기하는 유다, 위선을 연기하는 도마 등등등...
작품의 처음부터 끝까지 연기로 상징되는 인간의 피상적인 면모와 본질 사이의 괴리를 조명하고 있다.
체인소맨에서 등장하는 영화의 키워드. 좋은 영화와 쓰레기 영화.
쓰레기 영화가 있기에 좋은 영화의 가치가 존재할 수 있다 믿으며 마키마에게 맞서는 덴지의 신념은 마치 그가 살아온 삶의 궤적을 대변하는 듯하다.
그렇다면 이번 단편에서 영화가 상징하는 키워드는 뭘까?
기억의 미화. 아련한 추억으로부터 느끼는 막연한 그리움.
타츠키는 사람의 기억이 풍화되며 미화되는 과정을 '영화 편집'에 빗대어 보여주고 있다.
영화 속에서 아련하고 다정하게 묘사된 엄마는 사실 자신의 욕심을 위해 아들을 몰아붙이고 폭력을 휘두르는 사람이었다.
주인공은 그런 어머니의 모습을 편집하여 아름다운 모습으로 영화 속에 남긴다.
영화로 미화되는 것은 에리도 마찬가지다.
에리는 착용하고 다녔던 안경과 교정기도 빼고 아름다운 외모로 필름에 남겨졌다. (이를 통해 만화에서 묘사된 에리와 주인공의 상황은 전부 주인공의 영화 속 장면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영화 속에서 아름답게 묘사된 주인공과 에리의 관계 또한 영화 속 허구로, 실제로는 주인공의 고백을 에리가 차버린 상태였다.
하지만 현실이 어떻든, 편집을 통해 미화된 주인공과 에리의 추억은 영화를 본 모두의 눈물을 터뜨릴 만큼 아름다운 이야기였다.
이 작품에서 영화는 '기억'을 상징한다.
시간이 지나면 기억은 왜곡된다.
있던 사실이 사라지기도, 없던 사실이 첨가되기도 하며 기억은 사실상 현실보단 '판타지'에 가깝게 변모해간다.
그리고 그 일련의 현상은 보통 추억을 미화하는 방향으로 흘러가기 마련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런 미화된 기억을 실제 우리가 겪은 과거라 믿으며 살아간다.
어째서일까?
이 질문에 대한 만화의 답은 '미화되지 않은 세상은 버틸 수 없을 정도로 비참해서' 이다.
어머니는 다정하지 않았다.
에리는 그다지 예쁘지도, 주인공과 맺어지지도 않았다.
마지막에 이르러서는 주인공이 사랑하는 사람들이 사고로 모두 죽어버렸다.
상심한 주인공은 자살을 결심하고 에리와 영화를 봤던 폐건물로 들어선다.
그리고 분명 죽었을 에리를 만난다.
혼란스러워 할 필요 없다. 실제 에리가 아니다. 외모는 고등학생 시절 그대로이며 안경도 교정기도 끼지 않았고, 주인공에게 애정까지 품고 있다. 심지어 지가 사실 흡혈귀였단다.
주인공이 편집한 영화 속 설정대로의 에리. 주인공에 의해 미화된 과거의 추억이다.
에리(의 환영)는 말한다. 주인공이 만든 영화를 보고 자신의 생을 기억해내고 있다고.
이 작품의 주제를 직접적으로 상기시켜주고 있다.
에리와 이야기를 나눈 주인공은 자살을 포기하고 발걸음을 돌린다.
아픈 과거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수없이 에리와의 추억을 편집했던 주인공.
판타지가 충분해질 때까지, 자신이 받아들일 수 있을 정도로 충분히 아름다워질 때까지 과거를 미화하려는 노력이었다.
자살을 결심했던 주인공은 이제 폐건물을 나서며 웃고 있다.
이 슬픔 또한 살아가다 보면 시간에 휩쓸려 풍화될 것임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우리는 견딜 수 없는 현실 속에서도 계속 살아간다.
쉼없이 과거라는 필름을 편집하면서.
해애
님 뭔데 일케 글을 잘씀 - dc App
중간까진 그럴듯했는데 결말은 다른 애들이랑 해석이 정반대 수준이네 ㅋㅋ
와 타츠키에 대한 통찰력이 대단하십니다. 에리 해석도 완벽하십니다. 머리속에서 떠도는 생각들이 정리된 기분이네요
갠적으로는 이 리뷰 첫 문장이 되게 좋음. 재밌다.라고 바로 연결해서 나오는게 넘 귀여움 ㅋㅋ - dc Ap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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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심이겠니?
진심이겠니? ㅋㄱㅋㄱㅋㄱㅋㄱㅋ ㄹㅇ 이악물고 부정하고 해석해야지 톱스퍼거수준 - dc App
작가가 그 말을 한 것도 사실 지금 알았지만 그 말의 본뜻은 해석을 정해두지 않고 독자들만의 다면적인 해석의 여지를 열어두겠다는 뜻이야. 작품이나 장면에 의미를 정해두지 않았다는 말은 해석을 수용자에게 맡기겠다는 작가들의 상투적인 관용구임.
영화 감독이나 소설 작가 작품후기 읽다보면 심심찮게 나오는 말이거든.
그리고 이 해석글을 내가 무슨 안간힘을 써서 어거지로 의미부여 한 걸로 받아들인 것 같은데 이건 내가 만화 읽으면서 직관적으로 느낀 개인적인 해석일 뿐이고 사람에 따라 얼마든지 다르게 받아들일 수 있다고 본다. 작가도 그러기를 바라면서 그렸을 거고.
발전은 혐오가 아니라 수용에서 온다 친구야. 덮어놓고 싫어하지 말고 같이 재미있게 만화 읽자.
어그로대응 존나 품위있네ㅋㅋㅋㅋㅋㅋㅋㅋㅋ 글빨있노
댓글부터 필력이 지리노 ㅋㅋㅋㅋ
혼자 중2병걸려서 병신소리잘하네ㅋㄱㅋㄱㅋ 이게 톱스퍼거 수준이구나 - dc App
어그로 댓 아무것도 못하고 벙쪘노 ㅋㅋㅋㅋ
다 알겠는데 폭발엔딩은 먼뜻임?
일단 작품 내적으로 폭발은 현실과 판타지의 경계를 긋는 도구라고 봄. 만화가 전체적으로 현실과 공상의 경계가 희미하지만 유일하게 폭발만이 대놓고 판타지거든. 어머니의 다정함도 흡혈귀 에리도 편집을 통해 탄생한 공상의 요소니까... 폭발엔딩은 흡혈귀 에리가 주인공의 상상이라고 선을 긋는 엔딩인 것 같음.
님 혹시 룩백도 이런 글 쓴 적 있음? 보고싶은데
룩백 아직 안봄ㅋㅋㅋㅋㅋㅋ 존재 자체도 오늘 알아서... 재밌어?
룩백 띵작임 재밌음
와 진짜 멋지다 글 잘쓴다 잘읽었어 진짜로
무엇보다 주인공을 타츠키로 영화를 만화로 대입해서 읽었다는 글 보고 바로 이해해버림 ㅋㅋㅋㅋ
와 이게 맞는거 같네 - dc App
멋지다 글 잘쓰네
난 체인쏘맨 2기가 파이어펀치 엔딩만큼 지랄맞을테니 각오하라는 <영화의 악마, 1화의 악마>의 경고로 느껴졌다.
나도 이새끼 엔딩에 폭발 다시 꺼내는거 보고 이거 느꼈다... 두렵다
글 존나잘쓰네
최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