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고등학교 2학년 여학생, 채린의 이야기다.
채린은 반에서 눈에 잘 띄지 않는 학생이었다. 공부를 엄청 잘하는 것도 아니고, 친구가 많은 것도 아니었다. 그래도 나름대로 소중한 것들이 있었다. 몇 안 되는 친구들, 그리고 언젠가 대학에 가서 지금보다 나은 삶을 살 수 있을 거라는 희망.
그러던 어느 날, 채린은 전교생 앞에서 발표를 하게 되었다.
몇 주 동안 준비한 발표였다. 밤늦게까지 자료를 만들고 연습도 수십 번 했다. 발표만 잘 끝나면 수행평가 점수도 오르고, 선생님께 좋은 인상도 남길 수 있었다.
하지만 발표 당일 아침, USB에 저장해 둔 파일이 열리지 않았다.
식은땀이 흘렀다.
수업 시간은 다가오는데 파일은 복구되지 않았다. 급하게 다른 컴퓨터를 찾아봤지만 소용없었다.
결국 채린은 아무 준비도 없는 상태로 강당 무대에 올라갔다.
수백 명의 시선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파일이…”
말을 잇지 못했다.
뒤쪽에서 누군가 웃었다.
한 명의 웃음은 금세 여러 명의 웃음이 되었다.
채린은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준비했던 내용도 전부 사라졌다. 떨리는 목소리로 몇 마디를 더 하려 했지만 말이 꼬였고, 결국 울음을 참지 못한 채 무대에서 내려왔다.
그날 이후로 더 힘든 일이 이어졌다.
누군가가 발표 장면을 몰래 찍어 인터넷에 올렸다.
영상 밑에는 조롱 댓글이 달렸다.
“저 정도면 왜 나왔냐.”
“준비도 안 하고 발표하네.”
“울보네.”
학교에 가면 사람들이 대놓고 말하지는 않았지만 수군거리는 것 같았다. 복도를 걸을 때마다 시선이 느껴졌다.
가장 괴로운 건 친구들의 반응이었다.
평소 친하다고 생각했던 아이들조차 그 이야기를 꺼내며 웃었다.
“야, 그때 진짜 레전드였어.”
장난처럼 말했지만 채린에게는 칼처럼 박혔다.
며칠 뒤, 채린은 점심시간에도 혼자 있게 되었다.
친구들이 일부러 따돌린 것은 아니었다. 그냥 자연스럽게 멀어졌다.
누구도 악의를 갖고 있지 않았지만, 아무도 곁에 남지 않았다.
집에 돌아와 방문을 닫으면 채린은 침대에 누워 천장만 바라봤다.
그동안 믿고 있었던 것들이 하나씩 무너지는 느낌이었다.
“나는 왜 저렇게 못났을까.”
“왜 나만 이런 일을 겪을까.”
그런 생각이 매일 반복됐다.
몇 달 후 영상은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혀졌다.
새로운 사건이 생기고, 새로운 화제가 생겼기 때문이다.
하지만 채린은 여전히 잊지 못했다.
강당에서 웃음소리가 퍼지던 순간.
친구들이 웃으며 그 이야기를 하던 순간.
혼자 급식실에 앉아 있던 순간.
세상은 이미 지나간 일이라고 생각했지만, 채린에게는 아직 끝나지 않은 일이었다.
가장 절망스러운 건 그 사건 자체가 아니라, 자신이 아무리 힘들어도 세상은 멈추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다들 아무 일 없다는 듯 살아가는데, 자기만 그날에 남겨진 것 같았다.
그래서 어느 비 오는 날, 하교길 버스 창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며 채린은 생각했다.
“언젠가 이 기억도 사라질까?”
답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버스는 계속 앞으로 갔고, 창밖의 풍경도 조금씩 바뀌고 있었다.
채린은 여전히 힘들었지만, 적어도 버스는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어쩌면, 자신도 아주 천천히 앞으로 가고 있는 건지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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