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츠미 요시히로와의 인터뷰 - 푸시맨

타츠미 요시히로와의 인터뷰 - 도쿄고려장








1971~72년 단편을 모은 "굿바이" 단편집에 실린 인터뷰임


스캔본이 따로 없어서 불법번역은 안했고 걍 원서사서 본 다음 뒤에 실린 인터뷰만 번역했음


여기 실린 단편들중 몇몇은 영화 '동경표류일기'에 있고


북스토리에서 올해 상반기중 출판하는 선집 "타츠미 증보판"에 실릴 예정이니 관심 있으시면 그걸로 보시길




아래는 텍스트 전문



타츠미 요시히로와의 인터뷰

본 서면인터뷰는 Mitsuhiro Asakawa, Beatrice Marechal, 그리고 Yuji Oniki의
도움을 받아 2007년 12월, 편집자 에이드리언 토미네에 의해 진행되었다.


에이드리언 토미네 : 이번 작품집에서는 1971년과 1972년 사이에 발표하신 작품들을 모았습니다. 이맘때쯤에는 어떻게 지내셨나요?

타츠미 요시히로 : 15년에 걸친 만화 대본소 운영도 끝을 바라보고 있었고 마침내 내 작품을 여러 잡지에 싣기 시작했습니다. 일본에는 “배는 모든 여행마다 찾아온다.” 라는 말이 있습니다. 곤경이나 권태에 빠져있을 때 행운이 온다는 뜻이지요. 내가 대본소에서 잡지 연재로 넘어갈 당시 아주 일이 잘 풀렸습니다. 무엇보다도 벌이가 좋아졌습니다. 대본소에서 자가 출판할 때보다 10배가량 고료를 받았지요. 하지만 은행에서 내 수입을 관리했기 때문에 어차피 일정수준의 급여만 받았습니다. 알고 있겠지만 난 60년대에 정말 안 팔리던 대본소 만화를 계속 냈었는데, 결국에는 은행에 많은 대출을 받아야만 했어요. 그래서 잡지 연재를 시작했어도 가난하기는 전과 같았습니다.

: 당시 작업환경과 사용했던 화구들을 설명해주시겠습니까? 요즘은 어떠신지요?

: 이 당시에 어시는 없었습니다. 각종 선을 긋는 것부터 먹칠을 하는 것까지 전부 혼자 했죠. 어떤 것들은 이틀이 걸렸지만, 어떤 것들은 한 달이 넘게 걸리기도 했습니다. 종이는 가리지 않았습니다. 다양한 원고지를 썼지요. 원고는 B5지에 그렸는데, 일반적인 만화보다 약간 작은 크기입니다. 또 뻑뻑한 스타인 펜과 서예에 주로 쓰이는 카본 잉크를 썼습니다. 요즘은 만화 그리기와 더불어서 취미로 중고만화 판매 카탈로그를 내고 있습니다. 작업 책상위에는 항상 중고만화 무더기가 쌓여있지요.

: 이 원고들의 행방이 궁금합니다. 다시 돌려받으셨나요, 아니면 출판사에서 보관하나요? 만약 돌려받으신다면 수천페이지의 원고들을 계속 보관하시나요?

: 대본소에 있을 때 그렸던 원고는 한 번도 돌려받지 못했습니다. 책을 재판하는 것이 작가든 출판사든 매우 불편하던 때였기 때문에 원고를 다시 받지 못하는 게 당연하게 여겨졌습니다. 대본소용 원고는 그냥 그리고 내보내고 끝이었습니다. 그래서 내겐 대본소용 만화를 그릴 때의 원고는 한 장도 없습니다. 그리고 이후에 잡지로 넘어갔을 때도 내 원고에 그렇게 소중하게 여기진 않았습니다. 내 원고를 돌려받는 게 그리 중요한 것은 아니라 생각했는데, 어쩌다보니 3분의 2 넘게 잃어버렸습니다. 참 믿을 수 없는 출판사죠. 그렇긴 해도 대략 6,000장 정도는 아직 가지고 있습니다.

: 여기서 몇몇 단편들은 “가로” 잡지에 발표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가로”가 어떤 잡지였는지, 일본 만화사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설명해주실 수 있을까요?

: 1964년에 만화가 시라토 산페이(白土三平, 1932~, 일본 닌자 만화의 선구자-역주)가 그의 시대극 ‘카무이전’을 내기 위해 월간지 “가로”를 창간했습니다. 시라토 산페이가 돈을 대고 나가이 카츠이치를 편집장으로 세웠죠. ‘카무이전’의 연재가 완결된 후에 나가이는 야심차고 유망한 만화가들의 배출구로서 잡지방향을 잡았습니다. 판매량은 매우 저조했기 때문에 고료는 대본소용 만화 때와 같았지만, 만화가들은 “시라토 산페이의 잡지”에 매료되어 많은 걸작들을 그렸습니다. 타키다 유우(滝田ゆう, 1931~1990), 쓰게 요시하루(つげ義春, 1937~), 미즈키 시게루(水木しげる, 1922~2015), 아베 신이치(安部慎一, 1950~), 하야시 세이이치(林静一, 1945~)를 비롯한 많은 만화가들이 가로에 기여했습니다. (각각 “가로”에 “테라지마쵸 기담寺島町奇譚”, “나사식ねじ式”, “키타로 야화鬼太郎夜話”, “아사가야 심중阿佐ヶ谷心中”, “적색비가赤色エレジー”를 대표적으로 게재-역주)

: 민감한 질문일수도 있겠습니다만, 1971년 전의 작품들은 터놓고 정치적인 주제를 다루는 대신, 일상적인 부분에 집중한다는 느낌을 받았는데요. 그런데 이번 작품들은 노선의 변화가 느껴집니다. 미국의 핵폭탄 투하와 전쟁에 관한 직접적인 주장을 의식적으로 담은 것인가요? 만약 그렇다면, 무엇이 이런 태도 변화를 만들었나요?

: 1970년 언저리에 나는 아직도 대본소용 만화에서 완전히 벗어나질 못했습니다. 내 작품이 차츰 잡지에 실리게 됨에 따라 사회적 문제들에 대해 그리기 시작했지요. 내 기존의 많은 대본 출판 경력 때문인지 몰라도, 잡지 편집부는 내게 완전한 창작의 자유를 보장해주었습니다. 때는 닉슨 대통령 재임 시기였고, 베트남 전쟁이 점점 진흙탕 싸움이 되어가고 있었으며, 미국, 프랑스, 소련이 인공위성을 우주에 연달아 쏘아 올렸고 미래는 불안했습니다. 케네디 대통령 시절에는 핵전쟁이 코앞으로 다가온 것만 같았죠. 하지만 당시 일본인들은 미친듯한 경제성장 속에서 마치 새로운 시대의 주역이 된 기분을 만끽하고 있었습니다. 세상의 좁디좁은 한 귀퉁이에서 만화를 그리는 일개 만화가로서 저는 상황이 안타까웠습니다. 아마 이런 마음이 당시 나의 작품에 스며든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 단편 “지옥”에서 나타난 사토 전 총리(사토 에이사쿠(佐藤 栄作, 1901~1975) 일본의 61, 62, 63대 총리. -역주)의 초상은 몇몇 이야기들은 실제 사건에 기반을 두고 있다고 말하는 듯합니다. 작품의 중심 이미지(핵폭발이 남긴 실루엣)와 감정적인 묘사는 실화에 기반을 둔 것인가요? 이 단편을 어떻게 쓰게 되셨는지 설명 부탁드립니다.

: “지옥”은 일본판 “플레이보이”에 게재한 단편입니다. 앞서 말했듯이 나는 창작의 자유를 보장받고 있었기 때문에 히로시마에 관해 그리기로 했습니다. 내가 꼬집어보고 싶었던 주제였지요. 핵폭탄의 어마어마한 방사선 열 때문에 벽에 그림자가 타들어 가듯 찍힌 유명한 사진에서 영감을 받았습니다. “노 모어 히로시마”라는 반핵 시위는 당시에 매우 유명했습니다. 문제는 그들은 오로지 타버린 시체나 녹아서 벗겨지는 피부, 숯이 된 물병 등등의 끔찍한 사진을 출판해내는 것 자체에만 혈안이 되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이야기로서의 역할을 할 수 있는 반핵 만화를 그리고자 했던 겁니다. 하지만 내가 간과했던 것은 “플레이보이”의 독자들은 젊은 여성의 누드에 더 관심이 있었다는 것이었고, 결국 별다른 반향은 없었습니다. “지옥”이 프랑스에 소개되었을 때 쯤, 내가 어떤 반핵단체를 방문했던 얘기도 들려드리지요. 피폭 후의 히로시마에 관한 특정 사진 자료를 물색하고 있었는데, 당시 담당자 분은 이야기가 너무 공격적이라며, 피폭 당시 부모님을 목 졸라 죽이는 일은 있을 수 없다고 주장하며 내게 사진자료를 대여해주는 것을 거부했었습니다. 결국엔 AP 연합통신사와 UPI를 통해 사진을 구매했습니다.

: “굿바이”는 전후의 여러 인간군의 생각과 태도를 다루었다는 점에서 작가님의 가장 정치적인 작품이라고 생각되는데요. 처음으로 사건과 인물들에 대한 명확한 상관관계를 주려 하신 것 같았습니다. 이전의 자전적 이야기에 관한 인터뷰를 하실 때도 언급하셨던 작품인데, 어떻게 떠올리게 된 이야기인지 말씀해주실 수 있을까요?

: “굿바이”는 주류 잡지인 “빅 코믹”에 실었던 단편입니다. 나는 어린 시절 오사카 이타미 비행장이라는 공군기지 근처에서 자랐습니다. 전쟁 중에는 미국의 B-29 폭격기가 매일 밤 쉬지 않고 일대를 공격했고 많은 시민들이 죽었습니다. 전쟁은 내가 4학년 때 끝났습니다. 갑자기 폭격이 뚝 그친 것은 평생 잊지 못할 겁니다. 선명한 햇볕 아래의 폐허와 푸른 하늘도요. 사방이 고요했고 매미들만이 시끄럽게 울어댔지요. 그 후 바로 미군들이 마을에 들어왔습니다. 전쟁 중에 정부는 미군들은 전부 악마라고 세뇌했었지만 실제로 마주친 우리의 “적”은 멋지고 친절했습니다. 그게 4학년이었던 나와 미군의 첫 만남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늠름한 신사들이 거리에서 공공연하게 젊은 일본인 여성들을 껴안고 뽀뽀하는 모습은 꽤나 충격적이었습니다. 어떻게 저리도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이 거칠게 여자를 대할 수 있단 말인가?! 또 어른들이 그 광경을 마치 안 보이는 듯 애써 무시하려는 모습에 매우 화가 나기도 했습니다. 학교 전후로 나와 내 친구들은 종종 미군과 일본 여성이 덤불속에서 관계를 하고 있는 것을 보며 컸습니다. 이런 경험들이 “굿바이”를 만드는 데 영향을 줬습니다. “굿바이” 4쪽에서 마리의 아버지와 부딪히는 꼬마가 바로 어린 시절의 나입니다. 만약 작가가 되었다면 계속해서 이런 이야기를 쓰고 있었을 겁니다. 본 단편은 그렇게 유명하진 않았습니다. 후에 술집에서 만났을 때 편집자는 매우 마음에 들었다고 했지만 말입니다.

: 이 단편집의 작품들을 발표했을 때, 특히 전쟁을 다룬 “지옥”이나 “굿바이”의 경우 어떤 반응들이 있었나요? 다른 나라에 번역되고 재판되면서 평가가 바뀌었나요?

: 앞서도 말했지만 별다른 큰 반향은 없었습니다. 발표하고 12년이 지난 1983년에 프랑스에서 소개가 되었지요. 그것이 내가 처음으로 느낀 어떤 반응이라고 할 만한 것이었습니다. 한 번은 할리우드의 젊은 제작자가 “지옥”에 대한 제작권을 사기 위해 방문한 적도 있었습니다. 히로시마의 그림자에 대한 이 콘셉트는 종종 문학에서 아직까지 쓰이고 있지만 “지옥”의 영상화는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지옥”을 영상화한 애니메이션 “동경표류일기”는 이 인터뷰 4년 후에 개봉되었다. -역주)

: 2006년 여름에 “도쿄 고려장”의 출판 관련하여 미국을 방문하셨습니다. 그때 일을 말씀해 주실 수 있을까요?

: 아내와 함께 갔었죠. 로스앤젤레스와 샌 디에고에서 보낸 6일은 정말 잊지 못할 정도로 즐거웠습니다. 내 작품에 그렇게 큰 관심을 가져주다니 놀라웠습니다. D+Q 출판사 홍보담당자 Peggy Burns 씨와 다른 모든 직원 분들도 지극히 맞아주셨고요. TV와 신문 인터뷰, 토크쇼 일정 등등 일정은 매우 정신없었습니다. 각 인터뷰 당 10분을 썼습니다. 가끔 카메라 감독분이 조명 확인 차 왔을 때 인터뷰가 끝나기도 했었죠. D+Q 부스에서 에이드리언 씨와 함께 했던 사인회도 잊을 수 없을 겁니다. 솔직히 말하면, 에이드리언 씨의 프로젝트였던 이 책이 거의 팔리지 않을 것 같아 걱정했었습니다. 그래서 초판이 완판 되었을 때 매우 안도했습니다. 첫 미국방문이 이보다 좋을 순 없었을 거라고 장담합니다.

: Drawn & Quarterly 출판사에서 다음에 출판을 준비하고 있는 것은 “극화표류”입니다. 이 작품에 대해 말씀해주세요.

: “극화표류”는 격동의 전후 시대를 배경으로 그린 820페이지 분량의 자전적 작품입니다. 별 재능 없는 한 소년이 만화라는 예술을 발견하고 추구하는 이야기입니다. 범람하듯 밀려오는 미국문화의 홍수 속에서 대본 출판의 길에 들어서고 이를 예술가로서 발전시키려고 합니다. 1958년에 시작된 “극화”라고 불리는 만화 장르에의 모험이기도 합니다. 이 작품이 많은 독자들에게 닿았으면 좋겠습니다.

이 사전 인터뷰 이후에 Drawn & Quarterly는 북미에서의 호평과 함께 “극화표류 A Drifting Life”를 출간했다. 이 작품으로 북미에서 2010년에 아이스너 상(Eisner Award, 전설적인 만화가 윌 아이스너의 이름을 따 만들어진 미국의 가장 권위 있는 만화 상)에서 두 개 부문(최고의 실화 기반 작품, 최고의 미국 출판 작품-아시아)을 수상했으며 앞서 일본에서는 데즈카 오사무 문화상을 수상했다.


타츠미 요시히로와의 인터뷰 - 푸시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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