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념글에 쿠스노기 쇼헤이 글 보고 생각난 건데


내가 가로계 만화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던 시기에 있었던 일임

한국인 중에 가로계 만화에 흥미를 붙인 많은 사람들이 그렇듯이 나도 대산초어 선생님이 가내수공업으로 스캔과 번역을 해서 배포한 것들을 보며 가로계 만화에 대한 견문을 넓혀갔었음

그 중에서 인상적이었던 게 개념글에 올라온 단편 색색눈에 흩날리는이었지

그런데 이 시기가 또한 나의 허세힙스터 정신이 절정에 다다른 구간이었는데

만화가의 범상치 않은 배경과 기행을 알게 되면 단순히 수집을 위해 그 작가의 책을 수집하곤 했었음

솔직히 만화 자체를 너무 읽고 싶었기에 구하는 건 아니었던 거지

그러다가 얼마 뒤에 쿠스노기 쇼헤이의 책을 구매하기로 다짐했음

근데 그때 기준으로 쿠스노기 쇼헤이의 단행본은 딱 세 권만 출판된 상태였음

세이린도에서 70년대에 간행한 두 선집과 세이린코게샤에서 2000년 초에 낸 두꺼운 선집

(세이린도는 잡지 가로를 만들었던 회사이고 세이린코게샤는 세이린도 내부 분열로 인해 당시 두 명의 부편집장 중 한 명이 나와서 만든 회사임. 세이린코게샤에서 내는 액스라는 잡지가 자타공인 가로의 적통으로 여겨짐)

최근에 치쿠마문고에서 나온 2021년 선집은 액스가 2019년에 쿠스노기 쇼헤이 특집을 다루고 작가가 세간의 재조명을 받게되면서 나왔고 그 전에는 위에 언급한 세 권을 구해서 보는 수밖에 없었음

그런데 세이린코게샤의 2000년 선집은 매물은 꽤 있지만 중고프리미엄이 조금 붙었었고 세이린도 에서 나온 두 선집은 매물 자체가 없었었음

여기서 세이린도의 두 판본에도 차이가 있었는데 작가 사후에 바로 나온 판본은 갈색 종이케이스로 감싸져있었고 한정 500부였던 일종의 호화판이고 몇 년 뒤에 나온 건 그냥 일반적인 판본이었음

질풍노도의 힙스터였던 나는 당연히 사후에 바로 나온 판본을 구하고 싶었지

그 후 어느 날 별 생각없이 일옥을 보다가 내가 원하던 판본을 발견했음

심지어 50년은 족히 된 책이 상태가 말도 안 되게 좋아보였는데
판매자의 글을 읽어보니 몇 십년 동안 사실상 미개봉으로 장롱에 보관했다고 하더라고

진짜 책 상세 사진을 보자마자 약간은 심장이 멎는 느낌이었고 증말 맛탱이가 가겠더라

아마 경매 시작가는 5천엔 즈음이었던 걸로 기억함

경매 마감이 4일 남았을 때 발견했는데 1일 전까지 저녁마다 일옥 상품 페이지를 방문해서 정찰하곤 했음

그리고 하루 전에 구매대행업체에 문의글을 올리고 10만원 선에서 입찰해달라고 부탁함

업체측은 당연히 "고객님 '''최소한의''' 금액으로 구해보겠습니다 ^^"라고 답변을 줬음

이게 시발 실수였지

나는 하루 전까지 입찰하는 사람도 없고 페이지도 조용하길래 노리는 사람이 거의 없구나 싶었음

그런데 이러한 생각은 일옥 매커니즘을 모를뿐더러 대단한 물건을 보고 흥분한 놈의 큰 실수였다

결국 가격을 나보다 더 높게 부른 다른사람이 8천엔인가에 책을 건져가고 나는 손가락만 빠는 수밖에 없었지

가끔씩 하얀색 종이에 감싸져있던 일옥 상세사진 속의 그 책이 희미하게 떠올라 슬퍼짐

그때 느꼈던 아쉬움과 분함이 작가의 단편보다 더 내 가슴을 미어지게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