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고려대학교 일어일문학과 교수 스기모토 쇼고 선생님의 논문을 긴빠이해서 불법번역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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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시작하며

 

 1989 3월부터 『평범 펀치』에 연재되어 이듬해 단행본화된 오카자키 쿄코의 『디오라마 보이 파노라마 걸』에는 「BOY MEETS GIRL IN SHU GO JYU TAKU(* 역자 주: 집합주택; 아파트 단지)」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이러한 부제가 시사하는 대로, 이 작품은 아파트 단지가 난립하던 도쿄 교외를 무대로 하여 '보이 미츠 걸'이라는, 즉 생판 모르던 사이의 두 소년 소녀의 만남과 연애라는 러브스토리를 그리는 작품이다. 오카자키 쿄코는 『해피 하우스(1990-91), 『리버스 엣지(1993-94), 『러시아의 산(1995)』등에서 볼 수 있듯 줄곧 도쿄 교외의 아파트 단지를 무대로 하여 작품을  그려내 왔다. 그 중에서도 『디오라마 보이 파노라마 걸』은, SHU GO JYU TAKU」라는 단어가 부제로써 붙어 있다는 사실에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듯이 아파트 단지가 위치하는 도쿄 교외라는 장소를 명시적으로 무대로써 선택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무대로써, 설정으로써, 언급 대상으로써, 아파트 단지는 단순 배경에 머무르지 않으며 의식적으로 전경화되고 있다. 바꾸어 말하자면, 이 작품 속에서는 교외라는 장소가 이야기가 발생하고 전개되는 장소로써 반복적으로 시사되고 있다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교외라는 시각에서 『디오라마 보이 파노라마 걸』을 바라본 선행연구는 아직까지 존재하지 않는다. 미술 평론가 사와라기 노이椹木野衣가 『평탄한 전장에서 살아남는다는 것』이라는 책에서 이 작품이 교외를 무대로 하고 있다고 단순 언급한 내용을 제외하면, 이 작품을 해석하는 데에 있어서 교외라는 공간을 문제시한 연구는 찾아볼 수 없다. 그러나, 오카자키 쿄코를 대표하는 키워드라고도 할 수 있는 교외와 아파트 단지라는 무대 장치가 이 작품의 텍스트 공간 속으로 편입되고 무대가 되며, 설정이 되며, 이야기의 기조를 이루고 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이 작품을 분석할 때 교외나 아파트 단지라는 개념을 도입해야 함에는 이견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본 논문에서는 전후 교외의 역사를 컨텍스트 분석에 도입, 『디오라마 보이 파노라마 걸』에 있어서 교외나 아파트 단지가 어떠한 장소로써 표상되고 있는지를 찾아보고자 한다. 추가적으로, 위와 같은 장소가 작품의 무대로써 선정됨으로써 어떠한 이야기가 가능해지고, 불가능해졌는지를, 바꾸어 말하자면 교외라는 특수한 역사, 문화적 공간이 이야기의 구조적 전제로써 어떠한 방식으로 텍스트 공간에 편입되었는지를 분석하여 본 작품의 텍스트적 특성을 탐구해볼 것이다.

 

2. 내폐화(閉化)하는 교외 가정 공간

 

 오카자키 쿄코는 '집 안에 무언가 있다'라는 제목의 에세이에서 신도시, 아파트 단지, 고층 아파트 등을 포함한 교외 주택단지 전반에 대하여 이러한 장소를 규격화된 생활이 이루어지는 장소라고 규정하며, 그 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가정 생활을 '홈 드라마'라는 측면에서 다음 인용문과 같이 바라보았다.

 

'minor-latin">집 안에 무언가가 있다. 집 안에서 일어나버린 참사. 이는 사람들의 눈길을 끈다. 왜인가 하면, 집 안에 있어야 할 것은 본디 사랑이나 신뢰, 친밀감과 같은 개념이기 때문이다. 집 안에서 일어나는 드라마는 상냥하고 따뜻한, 몽글몽글한 느낌을 자아내야 한다. 홈 드라마의 줄거리를 배신하는 이는 사람들의 심정을 거스르게 된다. 홈 드라마의 명제는 사람들을 옭아맨다. 사람들은 집 안에서 드라마의 배역을 연기한다. 엄마는 엄마, 아빠는 아빠, 나는 나, 여동생은 여동생, 남동생은 남동생, 멍멍이는 멍멍이의 역할을 연기한다. 드라마에 봉사하는 우리들의 생활은 영원히 지속될 것인가? 이 숙제는?'

 

 ‘홈 드라마를 연기하는 주택에서의 가정 생활, 혹은 가족의 이미지를 모방하는 시뮬라크르로써의 교외 가정생활이라는 이 개념을 오카자키 쿄코가 교외 아파트 단지의 가정생활을 바라보기 위해 도입한 개념이라 가정해 보자. 이와 같은 시점에서 보자면 그녀가 『디오라마 보이 파노라마 걸』의 시작 부분에서 그야말로 규격화되고 표준화된, 홈 드라마의 재연과도 같은 교외 가정 생활에 대하여 조소를 살짝 섞어 이를 묘사해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작품은 주인공 츠다누마 하루코가 사는 아파트 단지의 한 방으로부터 시작한다. 가족 구성원은 아빠, 엄마, 여동생과 하루코 4명으로, 할머니가 삼촌의 집에 살며 하루코의 집으로 자주 묵으러 오고 있다. 거실에는 샐러리맨을 연상케 하는 아버지가 TV를 보며 골프채를 손질하고 있고, 엄마는 고급 주택 전단지를 바라보며 한숨을 쉬며, 할머니는 하여튼 요즘 애들은이라 짜증내며 푸념을 내뱉는다. 골프에 집착하는 아빠, 남편의 월급에 한탄하는 엄마, 짜증이 많은 할머니라는 스테레오타입과도 같은 인물 조형이 시사하는 바와 같이, 시작 부분의 이 장면은 마치 반복되는 홈 드라마와도 같은, 휴일을 보내는 홈 드라마적 가족의 스테레오타입을 충실히 그려내고 있다.


 또한, 집안을 장식하고 있는 ‘TV 위에 놓인 인형이라던가 프릴 달린 전화기 커버라던가 은행에서 받은 달력’, 혹은 꽃무늬 전기주전자, 유리 케이스 안에 담긴 인형은 하루코에게 있어 촌스러운 고도 경제 성장기 센스가 느껴지는 물건이며, 하루코는 특히 꽃무늬 전기 주전자에 대해 이 집을 상징하고 있다거나 절망적’, ‘죽고 싶어라며 푸념섞인 독백을 말한다.

 하루코는 이 전기 주전자를 교체한다면 이 집도 좀 더 현대적인 모습을 갖게 되지 않을까, 엄마에게 제안해보지만 단칼에 거절당한다. 도저히 이를 납득할 수 없었던 하루코는 자신이 모은 용돈을 털어 새로운 전기 주전자를 사게 되지만 엄마는 네가 시집갈 때 들고 가렴이라 말하며 주전자는 장롱 속에 봉인되게 된다. 하루코는 마지 못해 이를 승낙하는데, 저녁을 먹으면서 시집가는 나 자신을 상상한다.


 이러한 묘사에서 알 수 있듯이 오카자키는 전후 일본 가정을 희화화한듯 한, 전형적인 인물상이나 오브제를 가정 내에 배치하고 하루코라는 화자를 그 장소에 투입, ‘시시하다’, ‘절망적’, ‘죽고 싶다라는 부정적 언사를 내뱉게 한다. 이와 같은 장치를 통하여 그녀는 서두에서 가정과 이에 위화감을 느끼는 소녀를 효과적으로 묘사할 수 있게 된다. ‘가정은 꽃무늬 전기 주전자가 비유하는 바와 같이 고도 경제 성장기의 유물로써 위치매김하며, 대립은 舊-新이라는 시간축에 의해 강화된다. 더욱이 엄마가 하루코에게 시집갈 때 새 전기 주전자를 들고 가라고 명령하고, 하루코가 꽃무늬 전기 주전자를 보며 시집가는 자신을 상상하는 장면에서 볼 수 있듯이, 주전자는 엄마-아내(신부)의 소유물이며, 미래에도 하루코에게 있어 꽃무늬 전기 주전자가 가정이라는 가족 이데올로기의 비유로써 기능할 것임을 시사하고 있다.


 이러한 사소한 다툼도 일어나지 않는 내폐화된 가정 공간은, 마치 전후 홈 드라마가 반복적으로 보여주는 무대와도 같은 것이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하루코가 오카자키 쿄코의 인식에서 유추할 수 있듯이 교외 아파트 단지라는 공간을 위와 같은 홈 드라마와도 같은, 가정 생활이 스테레오타입화된 공간으로 파악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0층에서 아파트 단지가 뻗어나가는 교외 지역을 바라보며 하루코는 이런 곳에서 일요일 낮에 일어나는 일은 이런 거 뿐이지’, ‘10층에서 바라보는 풍경은 그야말로 파노라마라고 독백한다. ‘이런 곳=교외/아파트 단지에서 일어나는 일은 이런 것밖에 없다는 하루코의 대사는, 그녀의 평범한 집이 교외/아파트 단지라는 공간에 의해 이미, 그리고 일상적으로 이미 규정되어 있다는 인상을 나타내고 있다.


 또한 파노라마라는 비유는 하루코가 교외/아파트 단지를 인공적 공간으로써 바라보고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 19세기 유럽에서 부감(俯瞰)과 바라보기에 특화된 오락장치로서 고안된 파노라마는, 밀폐된 공간 속 벽면에 타국의 풍경이나 도시 전경을 박진감 넘치게 그려낸 시각적 미디어로써 인기를 얻었다. 그러나 하루코의 공허한 시선은 교외의 풍경에서 기존 파노라마가 보여준 바와 같이 박진감 넘치는 풍경보다는 그 모방성, 인공성을 잡아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조잡한 선으로 거칠게 그려진 아파트 단지는 마치 그 곳에서 살아가는 생활자들을 미니어처 같은 존재, 인공적 존재로 그려내고 있음을 찾아볼 수 있다.


 교외, 특히 일본주택공단이 조성한 교외 아파트 단지는 전후 일본의 가족 형태를 연구하는 데에 무시할 수 없는 요소로써 자리매김하고 있다. 1955년 설립된 일본 도시공단은 도시의 스프롤 현상(* 역자 주: 도시가 성장하면서 교외 지역으로 무분별하게 도시가 확장되는 현상)과 심각한 주택 부족에 대처하기 위해 발족 직후부터 신속히 교외에 주택 단지를 개발, 제공하는 것을 최우선시하였다. 이러한 맥락 속에서 공단은 2DK, 후엔 3DK(* 역자 주: 2, 주방 1/ 3, 주방 1개를 가진 집) 타입의 주거 형태를 채택, 이를 확산시켰다. 이와 같은 주거 형태는 증가 일로를 걷던 핵가족화에 박차를 가함과 동시에, ‘공적 공간과 사적 공간’, 즉 가족과 타인의 철저한 구별을 조성하였다. 사회학자 미야다이 신지宮台司는 주택공단에 의해 만들어진 단지가 교외의 지역 공동체 붕괴와 가족의 내폐화로 대변되는 공적 공간과 사적 공간의 단절을 촉진했다고 말하며, 동시에 미디어가 가족의 규범이 되는 가족 관계의 미디어화를 촉진했다고 지적했다. 영화나 TV에서 가족을 중심 소재로 다루는 홈 드라마가 인기를 얻은 고도 경제 성장기엔 3신기(흑백TV, 세탁기, 냉장고) 3C(컬러 TV, 자동차, 에어컨), 가정용 전자 제품이 가정 속으로 침투하고 있었다. 또한 가족이 소비의 단위로써 TV, 광고, 잡지 등에서 활발하게 다루어지고 있던 시기이기도 하였다.


 사회학자 미우라 아츠시三浦展는 이러한 고도 경제 성장기에 크게 성장한 교외 지역과 새로운 가족(의 이미지)이 고도 경제 성장의 부산물에 지나지 않음을 다음과 같이 논하고 있다.

 

가족과 교외라는 개념은 고도 경제 성장기 일본에 의해 의도적으로 만들어진 일종의 장치이다. 이러한 가족 형태는 결코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며, 전통적인 것도 아니다. 적어도 지금 우리가 가족이라고 할 때 자연스레 떠올리게 되는 가족의 이미지는 전후 고도 경제 성장기에 만들어진, 말하자면 특수한 이미지이다. (중략) 전후 대중소비사회의 발달 속에서 경제적 풍요와 물질적 욕망을 실현하기 위한 단위로써의 새로운 가족의 이미지(단지족 혹은 뉴 패밀리)가 단숨에 사회에 보급되었다. (중략) 전후 핵가족이란 대량 생산된 가족이다. 그리고 가족은 대중매체를 통해 대량으로 광고되며, 대중에 의해 대량으로 소비되게 된다.

 

 메이지, 다이쇼 시기부터 대도시와 그 권역으로 확산된 핵가족교외의 역사를 되짚어 볼 때, 여기서 미우라 아츠시가 서술하고 있는 내용과 같이 고도 경제 성장으로만 핵가족과 교외를 전부 설명하려는 시도는 조심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전후 일본주택공단의 설립을 기점으로 하여 폭발적으로 보급된 교외 주택단지나, 홈 드라마의 침투, 미디어의 선전에 의해 이상화된, 새로운 가족형태(핵가족)이 이전과는 다른 속도로 일본 사회에 보급되었음을 감안할 때, 적어도 전후 일본 가정의 전형적 형태가 이 시기에 만들어졌음은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이러한 교외와 가족의 전후사를 살펴보면, 『디오라마 보이 파노라마 걸』의 서두 부분에서 묘사되는 하루코의 가족과 교외 아파트 단지라는 설정은 고도경제성장시기에 나타나던, 홈 드라마와 같은 미디어에 영향을 받은 교외 주택 지역의 핵가족의 전형적 모습을 나타낸다고 할 수 있다. 소녀()인 하루코에게 있어 이러한 전형적 교외 가정 생활은 시대에 뒤쳐진 것으로 아무 의미도 없는것이며 하루하루 여기서 자신을 탈출할 수 있게 해주는 기적만을 바라게 되는 지루한 생활이며, 교외의 가정은 소녀를 옭아매는 낡아빠진 질서 공간으로써 제시되고 있다.

 

 

3. 보이 미츠 걸≠보이 러브 걸

 

 소녀 하루코를 교외 가정 공간으로부터 구출해내는(것과 같이 보이는) , 그것이 바로 부제이기도 한 보이 미츠 걸이며, 카나자와 켄이치라는 소년이다. 다만, 여기서 보이 미츠 걸이라는 단어는 단순히 소년과 소녀의 만남이라는 뜻으로만 받아들여선 안 된다. 이 단어는 주로 서로 생판 모르던 소년과 소녀가 만나, 다양한 사건을 겪으며 서로를 인식하고, 결국 교제에 이르게 되는, 연애의 발단부터 성취까지 전 과정을 아우르는 하나의 이야기 패턴을 호칭하는 단어로써 사용되고 있다.


 오카자키 쿄코는 「나 자신에 의한 전 작품 해설」이라 이름붙혀진 한 잡지의 기획 코너에서 자신의 작품을 돌아보며 『평범 펀치』가 남성지임에도 불구하고 저에게 이건(『디오라마 보이 파노라마 걸』), 아마 소녀 만화라고 생각해요.”라고 말하고 있다. 소녀 만화는 보이 미츠 걸이라는 이야기 패턴이 가장 일반적으로 나타나는 장르라고 할 수 있다. 소녀 만화에서의 보이 미츠 걸의 수용과 발전의 역사를 되짚어보면, 이 이야기 형식은 『별책 소녀 프렌드』나 『별책 마가렛』등의 단편 중심 잡지를 시작으로 하여, 러브코미디 만화의 간략한 포맷으로써 1970년대 초부터 소녀 만화에 융성히 도입되었다. 이러한 이야기 구조는 연애의 성취라는 소녀 만화의 약속을 강화함과 동시에 연애 이데올로기를 선전하는 하나의 손쉬운 이야기 형식으로써 일반적으로 자리매김하였다.


 이러한 소녀 만화에 있어서의 보이 미츠 걸의 일반화를 보여주는 흥미로운 사례로써 마츠나에 아케미(* 역자 주: 1956년 태생 소녀 만화가, 대표작 『순정 크레이지 푸르츠』.)의 「야마다와 사토(1983-84)」라는 작품을 들 수 있다. 사토()가 야마다(보이)의 실수에 의해 양동이에 든 물을 뒤엎어 쓰게 된다는 형식을 발단으로 보이 미츠 걸의 만남이 연출되고 있다. 주목할만한 점은, 이 두 사람의 만남을 옆에서 지켜보던 친구는 완전히 보이 미츠 걸의 세상이구만.’이라며 중얼거리며, 이 단어를 모르는 또 다른 친구에게 그러니까 만남이라는 거지. 남자와 여자의 뻔뻔하고도 극적인 만남, 둘은 얼마 지나지 않아 사랑의 세계로 돌입-’이라며 설명하는 장면이다. 즉 이 대목에서는 보이 미츠 걸의 전형적 에피소드가 연출됨과 동시에 친구의 시선을 밀려 메타적 시점으로부터 이 사건이 의심할 바 없이 전형적인 보이 미츠 걸의 이야기라는 사실이 지적되고 있으며, 텍스트에 의거한 장르적 약속이 명시적으로 드러나고 있다. 다만, 이러한 메타적 시점의 도입은 장르에 대한 비평적 주석이라기보단, 앞으로 펼쳐질 이야기가 보이 미츠 걸의 문법에 의거하여 쓰여질 것이라는, 일종의 예고 역할에 머무르고 있다. 이야기는 이후 두 인물이 서서히 마음을 여는 모습이나, 연적이 걸어오는 시비 등을 그리며 당연히도 두 사람의 연애의 성취라는 피날레로 나아가게 된다.


 『디오라마 보이 파노라마 걸』에서도 보이와 걸의 부자연스러운 운명의 만남, 「야마다와 사토」와 비슷한 형태로 그려지고 있다. 두 사람의 만남은 ‘BOY MEETS GIRL IN SHU GO JU TAKU’라는 부제가 시사하듯 하루코가 살고 있는 아파트 단지 마당에서 일어난다. 아빠의 담배 심부름을 위해 집을 나선 하루코는 아파트 정원에 부상을 입고 쓰러져 있는 카나가와 켄이치라는 소년을 우연히 발견한다. 일절의 내면 묘사 없이 너무나도 간단하게 한눈에 반한다. 하루코는 운명이야!!’라고 외치며, 켄이치를 부축한다. 이 장면에서 볼 수 있듯이, 이 작품은 두 사람이 만난 순간부터 하루코가 켄이치에게 연애감정을 느끼게 함으로써 전개를 용이하게 하는, 보이 미츠 걸의 상투적인 스테레오타입을 답습하고 있다. 또한 하루코의 바라컨대 기적을이라는 대사가 상징하듯이, 이 켄이치와의 운명적 만남은 하루코를 교외라는 공간에서 해방시켜줄 외부로의 돌파구로써 의미를 가지게 된다. 시점을 바꿔보자면 홈 드라마에서 보이 미츠 걸 러브스토리로 이야기가 변화하는 변곡점으로써 두 사람의 만남이 제시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디오라마 보이 파노라마 걸』의 특징은, 이러한 연애의 성취와 결부되는, 스테레오타입화한 보이 미츠 걸을 그저 소녀 만화의 문법을 따라 답습하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이 만화의 가장 큰 특징은 주인공 하루코가 자신을 보이 미츠 걸 소녀만화의 주인공과도 같이 인식하고 있다는 점이다.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하루코는 켄이치와의 우연한 만남을 운명으로써 받아들이고 마치 자신의 순서가 돌아왔다는 듯이 운명이라는 단어를 계속 되뇌임과 동시에, ‘둘은 사랑에 빠지는 거야라고 말하며 마치 두번째 만남부터 연애 감정이 싹틀 것이라고 정해져 있다는 듯이 말하고 있다.


 이러한 하루코의 단편적 사고는 마치 하루코가 소녀 만화의 틀로 세상 만사를 재단하고 이해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한다. , 하루코는 켄이치와의 만남을 소녀 만화의 주인공 남녀의 만남으로 받아들이고, 켄이치와의 연애가 성취될 것임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소녀의 표상으로써 나타난다. ‘빠지는 거야라는, 미래의 사건을 강하게 단정함으로써 하루코는 소녀 만화와 동일하게 사랑의 진전이 현실에도 나타날 것이라고 기대하며, 소녀 만화를 흉내내며, 소녀 만화를 행동 지침으로써 삼으려 하고 있다.


 예를 들어, 하루코가 처음 켄이치의 집에 방문했을 때, 하루코는 마음대로 켄이치의 이불 속으로 들어가 냄새를 맡으며 벌써부터 이러면 변태같은데라며 중얼거린다. 이 장면은 오오시마 유미코(* 역자 주: 1947년생 소녀 만화가. 하기오 모토 등과 함께 ‘24년조의 일원, 대표작 『구구는 고양이다』)의 작품의 영향이 짙게 나타난다. 우선, ‘짝사랑 상대의 이불 속에 멋대로 들어간다라는 행위는 오오시마 유미코의 『바나나 브레드 푸딩(1977-78)』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이와 같은 장면은 주인공의 친구인 찻집 사에코가 짝사랑하는 상대의 침대에 몰래 숨어들어가는 장면을 강하게 연상시킨다고 할 수 있다. 더욱이 침대에 들어간 하루코가 내뱉는 벌써부터 이러면 변태같은데라는 대사는 오오시마 유미코의 『금발의 초원(1983)』에서 주인공 코다이 나리스가 짝사랑 상대인 사부리에 대한 자신의 짝사랑을 평가하면서 내뱉는 독백인 이런 짝사랑은 이미 변태의 영역이군이라는 대사를 따라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요소들은 작중 하루코가 오오시마 유미코의 『바나나 브레드 푸딩』의 애독자라는 사실이 동생에 의해 밝혀지면서 뒷받침된다.


 이와 같이 자신의 행동 지침, 혹은 눈 앞의 사건이나 인물을 이해하는 틀로써 기존의 이야기를 참조하려는 태도는 오오시마 유미코로 대표되는 소녀 만화만을 그 대상으로 하고 있으나, 하루코만이 지니는 태도는 아니다. 이 작품에선 예를 들어 사자에상이나 이시이 히사이치(* 역자 주: 1951년생 만화가. 영화 『이웃집 야마다군』의 원작자이기도 하다.)와 같은 만화(가의 작품), 또는 고다르(* 역자 주: 프랑스의 영화 감독으로 누벨바그 운동을 주도했다고 알려짐)와 같은 영화 감독을, 또는 PIL(* 역자 주: 영국의 4인조 밴드로 섹스 피스톨즈의 전 멤버가 주축이 되어 결성)과 같은 밴드를 눈 앞의 상황을 이해하는, 자신의 행동을 결정하는 틀로써 사용하는 인물들이 지속적으로 등장한다. 이 뿐만이 아니라, 때로는 의도치 않게 대사나 가사가 등장인물의 입에서 흘러나오며, 의도치 않게 선행하는 이야기를 따라하게 되는 상황도 등장한다. 예를 들어, 하루코는 켄이치와 만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위독한 할머니에게 갑자기 빙의되어, 할머니의 청춘을 되찾아주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협력하게 된다. 이는 명백히 오오시마 유미코의 『아키히코 이야기』의 모방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하루코는 하카리라는 초등학생과 함께 빵집을 털게 되는데, 이는 명백히 무라카미 하루키의 『빵집 재습격(1981)』의 모방이다.


 전술한 대로 『디오라마 보이 파노라마 걸』에서는 수많은 선대 만화, 소설, 영화, 음악이 직접적으로 언급되기도 하며, 이를 넘어 등장인물의 인식이나 행동의 가이드라인으로써 의도하던/의도하지 않던 텍스트 속으로 편입된다. 이를 다른 관점에서 바라보자면 등장인물들이 이러한 팝 컬처를 내면화하고 이를 모방하여 행동하고 연기하는/당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창작 기법이란 관점에서 생각해보면, 이 작품은 수많은 텍스트로부터 텍스트를 인용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 이 작품의 텍스트는 수많은 원전으로부터 모티브와 에피소드, 대사와 제목을 맥락없이 인용하여 이어붙임으로써 구성되고 있다. 정의내리자면, 『디오라마 보이 파노라마 걸』은 샘플링이나 패스티쉬(* 역자 주: 모방 작품)’라 불리는, 포스트모던한 색채가 짙으며 문백과 맥락이 결여된 인용기법에 의거하여 성립된 텍스트라고 정의내릴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 다양한 팝 컬처로부터 인용된 다양한 요소는, 결코 이 작품을 정합성 있는 이야기로 만들어내는 편리한 장치로써 기능하지 않는다. ‘이야기는 옆으로 새고, 당돌하게 끝나버린다라는 사회학자 츠루미 슌스케의 평이나, ‘스토리는 적당하지만 의식적이고 노골적으로 다른 작가의 작품을 베끼며 될 대로 되라 식의 전개, 결국 당돌하게 끝난다는 학자들의 평가에서 찾아볼 수 있듯, 이 이야기의 구조에는 정합성이 결여되어 있다.


 또한, 이는 보이 미츠 걸이라는 테마=약속된 연애의 성취라는 결말을 배신하는 결과를 낳는다. 이를 가장 단적으로 보여주는 부분이 결말 근처 켄이치와 하루코가 재회하는 장면이다. 앞에서 본 바와 같이 운명과도 같은 만남 후, 하루코는 마치 소녀만화를 재연하기라도 하는 듯이 소녀만화의 문법을 따르며 켄이치와 더 깊은 관계를 맺으려 한다. 그러나 하루코는 할머니에게 빙의되어 빵집을 터는 등 두 사람 사이의 연애 관계와는 상관없는 에피소드로 채워지며 만난다-사귄다라는 보이 미츠 걸 서사의 단선적 시간 구조를 파괴하며, 지속적으로 상호 관련성이 결여된 에피소드가 수평적으로 병렬되며 의미는 미끄러진다’. 그 결과, 상기한 부분은 감동적이지만 이야기의 절정으로써 작용하지 못하게 된다. 그렇게 되어 켄이치는 하루코와 다시 만났을 때 처음 뵙겠습니다라고 태연히 하루코에게 인사하게 된다. 두 사람의 미트는 이야기의 시간적 추이와는 관계없이 초기화되어버리게 된다.

 이와 같이 다른 텍스트에서의 인용을 자주 찾아볼 수 있는 이 작품에서는 그 맥락이 결여된 인용이 계속된 결과, 이야기 구조가 파괴되며 보이 미츠 걸이라는 연애의 성취라는 명제가 와해되게 됨과 동시에 연애를 통해 교외 가정 공간으로부터 탈출한다라는 초반부의 명제가 애매모호하게 되어 버린다. 대신 전경화하는 것은 지각과, 또는 행동의 가이드라인으로써 나타나는 팝 컬처의 기호이며, 이를 ()의식적으로 재연하려 드는 등장인물들의 정합성이 결여된 행동이며, 욕망이다. 오카자키 쿄코는 이러한 점에 대해 자각하고 있었으며, 본 작품의 후기에 이렇게 쓰고 있다.

 

바야흐로 저희의 변변찮은 청춘은 TV 브라운관이나 잡지의 그라비아 면에 흡수되어 있고, 지루한 재방송을 거듭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희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 하면 그 재방송의 흉내를 내는 정도겠죠.’

 

 이 인용문으로부터 인용이라는 기법이 미디어와 팝 컬처를 내면화한 등장인물들의 인물 조형을 위해 이용되었음을 파악할 수 있다. 기존 평론에서 부정적으로 다루었던, ‘이야기 앞뒤가 안맞는다’-즉 정합성 없는 이야기 구조는 등장인물들에게 부여된 성격 구조를 고려한다면 오히려 필연적이라고까지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팝 컬처와 미디어에 침식되어 이를 내면화하고 때로는 이를 적극적으로 재연하려고 하는 등장인물과, 난무하는 인용에 의해 이야기가 안으로부터 파괴되는 이 작품의 특성을, 교외라는 공간과 어떻게 결부지을 수 있을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