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연기 공간으로써의 교외
『디오라마 보이 파노라마 걸』에 등장하는 교외 공간은 낡아빠진 가정의 집적지임과 동시에 현재진행형으로 공사가 이루어지는, 생성과 개발의 표상으로써 나타나는 공간이기도 하다. 전후 교외가 발전해온 역사를 들여다보면, 이 작품이 배경으로 삼고 있는 1987년이 도시와 그 교외 공간에 커다란 변화가 생긴 시기였다는 것을 알 수 있게 된다.
1980년대 도시공간, 특히 도쿄의 도시공간을 바라볼 때 빠트릴 수 없는 지역이 바로 시부야 일대로, 시부야는 1970년대 소비사회 붐을 반영하고 동시에 이를 촉진하는 무대로써 성장해왔다. 세종 그룹(* 역자 주: 세이부 백화점, 파르코를 운영하던 회사)의 일각을 맡던 마스다 츠지増田通二 사장의 파르코(パルコ)는 1970년대부터 시부야의 거리, 특히 시부야의 공원 거리(公園通り)를 중신으로 하여 파르코 백화점 주변 거리를 마치 가공의 무대처럼 연출하는 공간, 광고 전략을 실행했다. 거리의 이름은 ‘스페인 거리’ 등, 그 지역의 역사와는 전혀 관계 없지만 ‘세련된’ 명칭으로 바뀌었으며, 선진적이고 문화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는 풍경과 디자인, 상품을 거리에 차례차례 배치함으로써 파르코 백화점과 그 근처는 1970년대부터 1980년대에 걸쳐 유행과 문화의 ‘최첨단’을 달리는 장소로써 자리매김했으며, 마스다 사장은 이 공간을 소비를 위한 무대로 연출하였다. 더욱이, ‘지역이 가지고 있는 기억의 적층으로부터 ‘거리’를 빼앗아, 닫힌 영역 내부를 장면으로 분할하여 중층적 시퀀스로써 극장화한다’라는 파르코의 공간 전략과 보조를 맞추듯이, 『뽀빠이』, 『앙앙』, 『피아』와 같은 카탈로그 잡지가 무대화된 도시공간에서 취해야 할 행동을 알려주는 ‘대본’으로써 기능했다. 무대화된 도시공간 속 행동을 규범화하는 미디어가 지속적으로 운동하며 사람들의 욕망을 소비사회 속 스펙터클로 집어넣었다.
도시공간을 ‘무대’와도 같이 연출하며, 미디어가 그 ‘대본’ 역할을 한다는 자본에 의한 공간 전략은 디즈니랜드와도 같은 테마파크의 공간 연출 수법과 상통하는 부분이 있어, 때로는 ‘도시의 디즈니랜드화’라고 불리기도 한다. 그리고 이러한 도시 (재)개발 수법은 1980년대 후반 이후 도심 번화가뿐만 아니라 좀 더 일상 생활과 가까운, 주거의 장인 교외에까지 마수를 뻗쳤다.
1980년대 이후, 교외에선 1970년대 이전에 지어진 ‘성냥갑 아파트’나 비슷비슷한 주택과 차별화되는 새로운 형태의 주택이 나타났다. 이 시기에 등장한 새로운 형태의 주택들 -‘얼리 아메리칸 스타일’이라던가 ‘영국 컨트리 스타일’, 혹은 ‘지중해 스타일’, 더 나아가서는 ‘포스트모던 스타일’과 같은, 꽤 세련된 느낌의 디자인을 가진 주택이나 아파트 단지가 교외 각지에 속속들이 건설되기 시작했다. 그 결과 교외 공간은 일본이지만, 그 곳에 지어지는 건물은 이국의 ‘세련된’ 기호를 ‘인용’한 디자인을 가지게 되었다. 이질적인 건물과 풍경이 나란히 서있는, 디즈니랜드와도 같은 스펙터클 공간이 1980년대 후반 일본 교외에 생겨나게 된 것이다. 이러한 기류에 발을 맞추듯이 부동산 잡지나 인테리어 잡지와 같은 미디어가 외국식의 세련된 라이프스타일을 연출하기 위한 ‘대본’으로써 교외 거주민들을 중심으로 제공되었다.
이러한 당시 사회, 문화적 컨텍스트를 참고한다면 『디오라마 보이 파노라마 걸』에 있어서 등장인물들의 생활공간로 교외가 선택되어 이야기의 중심 무대로써 명시적으로 설정된 사실은 극히 당연하다고 할 수 있다. 상기한 바와 같이 1980년대 이후 교외 공간은 시부야로 대변되는 도시공간과 동일하게 지역이 가지고 있는 기억의 적층으로부터 ‘거리’가 빼앗기고, 그 대신 외부로부터 풍경과 디자인이 ‘인용’되어 무대와도 같은 공간으로 연출되었고, 더욱이 라이프스타일을 제안하는 견본=대본이 미디어에 의해 제공되는, 연기의 공간으로 변모하였기 때문이다. 사회학자 와카바야시 미키오若林幹夫에 의하면 이러한 주거공간은 자본주의 하 상품과도 같이 상품화되어 진열되는, ‘다른 장소와 차별되는, 대체불가능성을 지닌 고유한 장소’라는 특성마저 갖지 못하게 되며, ‘대중 자본주의 사회에 보편적으로 확산한 주식회사와 다를 법하지 않은 장소’라고 평하였다. 또한 이와 같은 상품화된 주거가 ‘미국 스타일’, ‘비엔나 스타일’과 같은 표층적 기호를 몸에 두르고 미디어는 동시에 주민들의 ‘주민을 연기하는 욕망’을 활발히 환기시키고 있다고 날카롭게 지적하며, 교외 주택을 ‘연기하는 상자’라고 평하였다.
다양한 기호의 인용, 연기, 재연의 욕망, 테마파크와도 같은 교외를 특징짓는 두개의 성질은 이 작품의 이야기 구조나 인물 조형의 한 축으로써 작용하고 있으며 이 점에 있어서 『디오라마 보이 파노라마 걸』은 ‘교외화한 이야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렇게 홈 드라마로부터 러브 스토리로 이야기가 변화하고, 가정 공간으로부터 그 외부로 이야기가 확장된 『디오라마 보이 파노라마 걸』이 80년대 이후의 ‘교외’와의 관계성 속에서 전개되고 있음을 알아보았다. 고도 경제 성장기의 규격화, 공업화된 가족의 안식처로써의 교외로부터 80년대 이후 테마파크와도 같은 교외로의 이행에서 찾아볼 수 있듯, 텍스트는 내폐화한 가정 공간을 출발점으로 소년과의 러브스토리라는 체제를 잡을 듯 하면서도, 오히려 인용으로 넘쳐 흐르는 교외 공간의 연기성, 재연성을 그려내는 데에 방점을 두고 있다. 더욱이 이 텍스트에 있어서 교외 가정이 서두부터 홈 드라마의 재연 공간으로써 표상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해본다면, 이 작품에 있어서 등장인물들이 모두 적어도 일정 부분 ‘연기’를 하고 있으며, 교외는 그 ‘극’을 뒷받침하는 무대로써 시작부터 결말까지 기능하고 있음을 찾아볼 수 있다.
이상과 같이, 『디오라마 보이 파노라마 걸』은 보이 미츠 걸이라는 러브스토리로 흘러가려 하다가, 소비사회와 미디어 사회 하 사회 속에서 전후 급조된 교외라는 공간을 무대로써 전경화하여 그 주민들이 ‘연기하는 모습’을 희화화하는 동시에 소녀 만화를 지지하는 연애 이데올로기를 안쪽에서부터 해체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 오카자키 쿄코는 1990년대 버블 경제 붕괴 이후를 그린 『리버스 엣지』에 있어서도 교외 공간의 표상을 그려내고 있으나, 이 문제는 지면의 한계로 다른 연구에서 다루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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