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야 제일 유명한 '달의 궁전'만 읽어봤지만 폴 오스터라는 작가는 어쨌든 한국에서도 꽤 유명한 소설가

예전에 그 '달의 궁전'을 읽으면서 동시에 만화의 이해 3부인 '만화의 창작'을 같이 읽고 있었는데

이미지와 대사의 결합을 설명하는 예시 중 하나로 폴 오스터의 소설을 만화화한 '유리의 도시'의 장면을 예로 드는 파트가 나왔음

그때 꽂혀서 나중에 봐야겠다 다짐하고 몇년이 지나서야 소설과 만화 양쪽 다 읽게 됨

소설은 중편 3개가 모인 3부작 소설이고 '유리의 도시'는 그중 1부 (알라딘 중고서점가면 맨날 보이는 악성재고더미 중 하나)

탐정이 나오고 사건이 나오는 추리물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추리물은 아니고

언어와 현실의 괴리를 외치는 정신병자와 반사되고 투과되는 유리 앞에 선 주인공 자아의 박리와 실종을(이 부분은 사실 읽을 필요가 없다) 특유의 달필로 써내려간 이야기임


이 만화는 '쥐'의 작가 아트 슈피겔만이 기획했음

퓰리처상까지 수상하고 그래픽노블이라는 멋진 이름도 얻던 90년대 초, 여전히 이 새로 나온 까리한 만화의 입지는 매우 좁았는데 ("게임공략집 코너 틈새에 끼워진")

슈피겔만이 인식을 좀 더 바꿔보고자 친하게 지내던 폴 오스터의 동의를 구하고 자기가 가르치던 유망주들인 데이비드 마추켈리와 폴 카라식으로 하여 나온 결과물

카라식이 원안을 짜고 마추켈리가 실제 그림을 그렸는데
소설을 읽어보면 알겠지만 이건 만화화를 떠올리기엔 너무나도 불친절하고 맞지 않는 물건임

작가 특유의 십여페이지에 걸쳐서 말과 독백을 쏟아내는 수많은 파트와 명쾌하지 않은 스토리라인을 카라식은 굉장히 세련되게 옮겼고
(소설 읽으면서 조금 막혔던 바벨탑과 낙원 부분은 정말 알기 쉽게 옮겼음)

'아스테리오스 폴립' 작가로 월만갤러들한테는 친숙할 마추켈리가 그림으로 잘 나타냈음

이런 해석이 소설을 읽을때 독자의 역할인 상상을 제한하고 과도한 친절함으로 다가와서 영 고깝게 느낄 분들도 계실텐데

그건 어떤 작품을 다른 형식으로 옮기면서 나타날 수 밖에 없는 것이고 상상을 제한하는 대신 해석자의 확고한 스타일로 새로 마주할 수 있다는 건 분명 새로운 즐거움일 것임


미국 만화 전형적인 3×3 칸 배치를 기본으로 하되 중요한 장면들에서 이 컷들에 대해 적절한 변형을 줌으로써 완급조절을 하고 있음

또 소설이 200페이지 분량인데 만화가 130페이지라 좀 의아했는데 이미지를 통해 과감한 내용 생략을 잘 해냈음 수십페이지동안 방황하는걸 1페이지안에 끝내는등



정체성이 무너져 내리는 주인공 퀸의 상황을 이렇게 질서정연했던 3×3 컷이 흩어지는 걸로 표현한다든지



초반 깔끔했던 선들이 점점 거칠어지는 것으로도 표현한다든지

오랜시간 기획 끝에 나온만큼 꽤나 영리하다고 느껴지는 만화임

아스테리오스 폴립에서 보여준 몇몇 연출들의 원형도 엿볼 수 있었고



한가지 특이점은 만화판도 열린책들 출판사에서 냈다는 것 그래서 소설판이랑 번역자가 같음

이후 자회사 미메시스 세우고 미메시스에서 재판했으나 현재는 절판됨ㅠ 그래서 중고로 사서 봤음

만화적 재미가 굉장하다기보다는 작품성 있는 문예작품을 만화적으로 잘 해석해낸, 그래서 만화 인식 재고에 꽤나 기여한 그런 작품으로 받아들이면 좋을 것 같음
(소설은 86년, 만화는 04년에 나옴)

이미 지금 기준 16년전에 나온 만화라 "굉장히 신선한" 무언가를 찾기는 어려울지 모르지만 당시 만화 형식 탐구와 표현의 외연확장을 고민한 만화사적 결과물로 받아들이면 그또한 소소한 즐거움일것

먹물들이 엄청 좋아할 스타일이라 머시기에서 뽑은 100대 만화에도 들었다고 하니

추천이라기보단 뭐 요런 만화도 있었구나 하는 정도로



밑에 유리의 도시 산다는 사람 있길래 재탕해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