얻음의 성경 제43장
天下之至柔, 천하지지유
馳騁天下之至堅. 치빙천하지지견
無有入無間. 무유입무간
吾是以知無爲之有益. 오시이지무위지유익
不言之敎, 불언지교
無爲之益, 무위지익
天下希及之. 천하희급지
하늘 아래 가장 부드러운 것이
하늘 아래 가장 단단한 것을
앞달리고 또 제어한다.
사이가 없는 곳에까지라도
아니 들어감이 없다.
나는 이로써
무위의 유익함을 안다.
말하지 아니하는 가르침,
함이 없음의 이로움,
하늘 아래 누가
이에 미칠 수 있으리오.
“지유至柔가 지견至堅을 제어한다. 여자가 남자를 제어하고, 물이 불을 제아하고, 여태후가 유방을 제어한다.”
얻음의 성경 제76장
人之生也柔弱, 인지생야유약
其死也堅强. 기사야견강
萬物草木之生也柔脆, 만물초목지생야유취
其死也枯槁. 기사야고고
故堅强者死之徒, 고견강자사지도
柔弱者生之徒. 유약자생지도
是以兵强則不勝, 시이병강즉불승
木强則兵. 목강즉병
强大處下, 柔弱處上. 강대처하 유약처상
사람의 살아있음의 특질은
부드럽고 약하다는 것이며,
사람이 죽음으로 가는 길은
단단하고 강한 특질이 있다는 것이다.
풀과 나무 등, 만물은
살아 있을 때는 부드럽고 연한데,
죽으면 마르고 딱딱해진다.
그러므로 딱딱하고 강한 것은 죽음의 무리요,
부드럽고 약한 것은 삶의 무리다.
그러하므로 병력으로써 강함만을 과시하면
적을 이길 수 없을 것이며,
나무도 강대하기만 하면 도끼에 찍히고 마는 것이다.
살아있는 고목을 보라!
나무에서 딱딱하고 커다란 것은
모두 뿌리 쪽으로 내려가 있게 마련이고,
부드럽고 연약한 것은
가지 끝쪽으로 올라가게 마련이다.
노자가 말하는 생生과 사死는 분리될 수 있는 일 시점의 사태가 아니라, 삶을 구성하는 생성生性과 사성死性을 지칭하는 것이다. 생성生性이란 삶의 방향으로 움직이는 기의 성性(본성, 특성, 경향성)을 말하는 것이며 사성死性은 죽음의 방향으로 움직이는 기의 성性이다. 성性은 이벤트이며 집단적 사회society를 구성하여 그 특성을 나타낸다. 다시 말해서 나의 몸에서 일어나는 유약柔弱한 성격의 기의 창발이 생성生性이며, 나의 몸에서 일어나는 견강堅强한 성격의 기의 고착이 사성死性이다. “인지생야유약人之生也柔弱, 기사야견강其死也堅强”은 바로 노자의 이러한 프로세스 필로소피Process Philosophy적인 사유를 나타낸 명언이다.
(...)
“저 나무를 보라! 강대한 것은 밑으로 내려가기 마련이고, 유약한 것은 위로 올라가기 마련이다. 强大處下, 柔弱處上.” 사성死性과 생성生性은 끊임없이 혼합되어 나무를 구성한다. 아랫도리로 내려가는 딱딱하고 강한 것은 고목의 사성을 대표하지만, 고목의 윗도리에서는 봄이 되면 연약한 녹색의 생명의 향연이 춤을 춘다.
하나의 우주에서도 엔트로피가 증가하는 성향(사지도), 엔트로피가 감소하는 성향(생지도)이 공재共在한다면, 한 나무에서도, 인간의 한 몸에서도 삶의 무리와 죽음의 무리는 같이 춤을 추고 있는 것이다. 죽음의 무리가 삶의 무리를, 다시 말해서 견강이 유약을 완전히 지배해버리면 죽음으로 꼴인하지만, 인간의 삶이란 어떻게 유약을 가지고 견강을 이겨내는가 하는 삶의 철학에서 그 의미를 찾고 있는 것이다. 노자가 유약을 강조하는 이유, 그 우주론적 함의를 이해하고, 그 무위의 생명철학의 장쾌한 구상을 이해하게 될 때 비로소 우리는 노자의 “무위無爲”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깨닫게 된다.
- 도올 김용옥 <노자가 옳았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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