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의점 점장 잔혹사
밤 11시 59분. 김태정은 익숙하게 POS기의 시재 점검 버튼을 눌렀다. 마르지도, 뚱뚱하지도 않은 그의 몸이 좁은 카운터 안에서 뻣뻣하게 굳어 있었다. 형광등 불빛이 그의 그림자를 길게 늘어뜨렸다. ‘오늘도 무사히.’ 마음속으로 되뇌는 습관적인 독백은 거의 주문에 가까웠다. 24시간 불이 꺼지지 않는 이 작은 공간의 왕. 편의점 점장이라는 직함은 그에게 그런 허울 좋은 자의식을 심어주었다.
자정이 되자 교대 근무자인 지훈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형, 오셨어요?" 태정은 고개만 까딱였다. 그의 섬세한 성격은 이런 무뚝뚝함 뒤에 교묘히 숨겨져 있었다. 다정함을 드러내는 건 약점을 보이는 것과 같다고, 이 각박한 세상은 그에게 그리 가르쳤다.
"오늘 뭐 별일 없었죠?" 지훈이 유니폼으로 갈아입으며 물었다.
"늘 똑같지 뭐. 진상 하나, 도둑 하나, 취객 둘."
태정은 짧게 대답하며 인수인계 사항을 읊었다. 그의 목소리는 낮고 차분했지만, 그 안에는 누구에게도 쉬이 간파당하지 않으려는 단단한 벽이 느껴졌다. 사실 오늘, 그의 다정함이 시험에 드는 일이 있었다. 폐기 시간이 임박한 도시락을 앞에 두고 쭈뼛거리던 노인이 있었다. 태정은 잠시 망설이다 "이거 하나 남았는데, 그냥 가져가세요"라고 말할 뻔했다. 하지만 그는 끝내 입을 다물었다. 원칙은 원칙이고, 예외는 파멸의 첫걸음이다. 그는 스스로를 그렇게 채찍질했다.
"고생하셨습니다, 형."
지훈의 인사를 뒤로하고 편의점을 나섰다. 싸늘한 밤공기가 폐부를 찔렀다. 태정은 담배를 꺼내 물었다. 불을 붙이자 붉은 점이 어둠 속에서 작게 타올랐다. 그는 연기를 깊게 빨아들였다가 천천히 내뱉었다. 희뿌연 연기가 가로등 불빛에 흩어지는 모습을 보며 그는 생각했다. 이 편의점은 거대한 수족관이고, 나는 그 안에서 정해진 동선대로 헤엄치는 물고기일 뿐이라고. 손님, 아르바이트생, 그리고 자기 자신까지. 모두가 이 네모난 어항 속에서 각자의 역할을 연기하고 있다.
그는 지배자(Dom)가 되고 싶었다. 이 작은 왕국에서만큼은 모든 것을 통제하고, 자신의 규칙 아래 모두를 복종시키고 싶었다. 하지만 현실은 시궁창이었다. 본사에서 내려오는 지침, 끝없이 이어지는 컴플레인, 최저시급에 목매는 아르바이트생들의 미묘한 반항. 그는 왕이 아니라 광대에 가까웠다.
그때였다. 어두운 골목에서 누군가 그를 불렀다.
"저기요, 점장님."
익숙하지만, 여기서 듣고 싶지 않은 목소리였다. 얼마 전 물건을 훔치다 걸려서 경찰에 넘겼던 고등학생이었다. 소년은 혼자가 아니었다. 그의 뒤로 어둠 속에서 그림자 몇 개가 꿈틀거렸다.
"나한테 볼일 있나?"
태정은 담담하게 물었다. 그의 심장은 발소리 없이 내려앉는 고양이처럼 조용히, 하지만 무겁게 바닥으로 가라앉는 듯했다. 애써 태연한 척했지만,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 한 줄기가 흘러내리는 것이 느껴졌다. 도망칠 곳은 없었다. 막다른 골목은 아니었지만, 뒤를 돌아 달린다 해도 저 젊은 혈기를 이겨낼 자신은 없었다.
"볼일이 없겠어요, 점장님?"
앞에 선 학생이 비죽 웃었다. 앳된 얼굴에 어울리지 않는 악의가 번들거렸다. 그의 친구들로 보이는 무리가 태정을 둘러싸듯 반원을 그리며 다가왔다. 어둠에 잠겨 있던 얼굴들이 하나둘 가로등 불빛 아래 드러났다. 모두 비슷한 또래의, 세상에 대한 불만으로 가득 찬 얼굴들이었다.
"그때 좋았어요? 경찰에 넘기니까 속이 시원하던가요?"
"네가 잘못한 일이다. 나는 내가 할 일을 했을 뿐이고."
태정의 목소리는 의외로 떨리지 않았다. 그는 내면의 두려움을 억누르고, 오히려 상대를 지배하려는 듯한 Dom의 기질을 끄집어냈다. 이런 상황에서 약한 모습을 보이는 순간, 모든 것이 끝장이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그의 차가운 눈빛이 학생을 똑바로 꿰뚫었다. 다정함 따위는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던 사람처럼, 그는 완전히 다른 인격의 가면을 쓰고 있었다.
"할 일? 씨발, 고작 몇천 원짜리 훔쳤다고 인생 조지게 만드는 게 네가 할 일이냐?"
학생이 고함을 질렀다. 그의 분노에 동조하듯, 주변의 그림자들이 한 발짝 더 가까이 다가왔다. 위협적인 공기가 태정의 숨통을 조여왔다. 태정은 주먹을 쥐었다.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드는 감각이 아찔하게 현실감을 일깨웠다. 여기서 무릎 꿇을 수는 없었다. 이 작은 편의점 세계의 왕, 아니, 스스로 왕이라고 믿고 싶었던 남자의 마지막 자존심이었다.
"규칙은 규칙이다. 내 가게에선 내 규칙을 따라야지."
태정은 피도 눈물도 없는 지배자처럼 차갑게 내뱉었다. 그것은 허세였지만, 동시에 그의 진심이기도 했다. 이 말이 어떤 결과를 불러올지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 학생의 눈이 붉게 충혈되었다.
"규칙?"
학생이 코웃음을 쳤다.
"좋아. 그럼 지금부터는 우리 규칙대로 한번 해볼까."
그 말이 신호였다. 옆에 있던 다른 학생의 주먹이 바람을 가르며 태정의 얼굴을 향해 날아들었다. 피할 새도 없이, 둔탁한 충격과 함께 태정의 시야가 격렬하게 흔들렸다. 입안에서 비릿한 피 맛이 번졌다. 바닥에 쓰러진 그의 위로, 여러 개의 그림자가 어른거리며 겹쳐졌다. 무자비한 발길질이 그의 온몸을 짓이기 시작했다. 뼈가 부서지는 고통 속에서, 태정은 희미해지는 의식 너머로 자신의 편의점에서 새어 나오는 밝은 불빛을 보았다. 그 불빛은 마치 다른 세상의 일처럼 아득하고, 비현실적으로 평화로워 보였다.
그 불빛은 마치 다른 세상의 일처럼 아득하고, 비현실적으로 평화로워 보였다. 그가 지키려 했던 작은 왕국은, 결국 그를 집어삼키는 괴물의 아가리가 되었다. 쏟아지는 폭력 속에서 김태정의 의식은 점차 가라앉았다. 갈비뼈가 으스러지는 고통, 내장이 뒤틀리는 듯한 충격이 파도처럼 밀려왔지만, 어느 순간부터 감각은 무뎌지기 시작했다. 그는 마치 깊은 물속으로 빠져드는 것 같았다. 수면 위에서 반짝이는 편의점의 불빛이 점점 멀어져 갔다.
‘이대로 끝인가.’
그의 섬세하고 다정했던 본성은 겹겹의 갑옷 속에 숨겨져 있었다. Dom의 가면을 쓰고, 차갑고 무자비한 지배자를 연기하며 스스로를 지키려 했다. 하지만 그 가면은 너무나도 무거웠고, 갑옷은 너무나도 허술했다. 결국 그는 자신이 만든 규칙의 제물이 되어 버렸다. 아이들의 발길질이 멈춘 것은 한참 후였다. 그들은 욕설을 몇 마디 내뱉고는 어둠 속으로 낄낄거리며 사라졌다.
고요함이 내려앉은 골목. 태정은 미동도 없이 쓰러져 있었다. 부서진 몸뚱이 위로 차가운 밤이슬이 맺혔다. 그의 눈은 반쯤 열려 있었지만, 아무것도 담고 있지 않았다. 시선의 끝에는 여전히 24시간 불이 꺼지지 않는 그의 편의점이 있었다. 그곳에서는 새로운 야간 근무자가 손님을 맞고, 물건을 채우고, 정해진 매뉴얼에 따라 왕국을 운영하고 있을 터였다. 왕이 사라진 왕국은 아무 일 없다는 듯 태연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태정은 그토록 지키고 싶었던 왕국의 하찮은 부속품에 불과했다. 아니, 언제든 교체 가능한 건전지 같은 존재였다. 그의 피는 아스팔트 바닥의 작은 틈새로 스며들고 있었다. 다정함을 숨기고 냉혹한 지배자를 연기했던 남자의 잔혹사는 그렇게, 누구의 관심도 받지 못한 채 도시의 어두운 이면에서 막을 내리고 있었다. 그의 왕국이었던 편의점의 불빛만이, 그의 비참한 마지막을 밤새도록 무심하게 비추고 있었다.
짱잘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