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한 신들의 귀환 : 국가주의, 포퓰리즘, 서구의 미래 중 / RR르노
2차대전은 서구세계의 정치적, 문화적 지형을 바꿔놓았다. 2차대전의 고통과 파괴를 겪은 세대는 국가주의에 의존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했고, 전후 컨센서스를 형성했다. 전후 좌파는 도덕적 자유와 문화적 규제 완화로 반 권위주의를 추종했고, 전후 우파는 경제적 자유와 시장 규제 완화로 반 권위주의를 추종했다.
전후 좌파로 인해 개방성이 강해졌고, 문화 비평이 약해졌다. 다양성이 추종받았고, 다문화주의, 포용성 등으로 사회의 경계가 약해졌다. 전후 서구 우파도 문화적 규제 완화를 주장했다. 개인들은 더 이상 관습에 구애받지 않게 되었다. 자유경제이론과 사회생물학적 정치 문화 분석은 환원주의적이며 공적 생활을 약화한다. 개방성과 유대 약화가 전후 사회학, 심리학, 신학에서조차 관찰된다. 이는 강한 신들의 귀환을 막기 위한 조치였다.
강한 신들을 말할때 나는 고대 북구 신화의 신들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강한 신들은 사람들의 사랑과 헌신을 받는, 열정과 충성의 근원이 되고 사회 통합의 근원이 되는 것들이다. 그것들은 시간을 초월한다. 진실은 강한 신이다. 왕과 국가는 강한 신들이다. 현대 이념과 카리스마있는 리더들도 강한 신들이다. 강한 신들은 모두에게 이익을 줄 수 있다. 미국의 헌법도 강한 신이다. 때로 그들은 파괴적이기도 하다. 군국주의, 파시즘, 공산주의, 인종주의, 반유대주의는 파멸을 가져왔다.
경제, 정치, 문화가 공공의 이익을 위해 존재해야 한다는 건강한 직관을 왜곡한 파시즘은 반대를 용납하지 못하는 사상이 되었다. 공산주의는 정의를 향한 열망을 딱딱하고 잔인한 이데올로기로 바꿔놓았다. 인종주의와 반유대주의는 공공의 공포를 살인으로 바꾸어 놓았다. 나는 이런 종류의 강한 신들은 막아야 한다고 믿는다. 그러나 나는 그들에 대해 이 책에서 말하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일부를 짜증나게 할지도 모른다. 우리는 너무나도 강하게 전후 "반" 문화의 영향을 받았다. 그래서 일부는 파시즘, 공산주의, 인종주의를 부정하는 데에 조금이라도 실패하면 서구 문명을 자신의 변태성욕에서 구하지 못한 것으로 생각한다. 나의 관심은 다른데에 있다. 나는 어떻게 2차대전 이후 서구가 재건되었는지, 어떻게 열려있고 약한 사회가 되었고 우리의 삶에 장해를 주는지, 자신이 지키고자 했던 서구를 파괴하고있는지 말할 것이다.
다음의 페이지들에서, 나는 어떻게 반 파시즘과 반 전체주의가 사회에 대한 일반 이론에 영감을 제공했는지 말할 것이다. 그 이론은 여러 형태가 있다. 일부는 명시적이고 일부는 암시적이다. 그러나 그것은 근본적인 판단에 기반한다: 강한 것은, 곧 강한 사랑과 강한 진실은 압제를 낳으며 자유와 번영은 약한 사랑과 약한 진실을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아우슈비츠의 그림자 속에서 이 일반이론은 여러가지 반 초월주의적 철학과 비판 이론을 낳았다. 그것들은 우리에게도 익숙하다. 만약 누군가가 백인 남성 1세계의 일원으로서 말한다면, 이라는 단서를 앞에 붙인다면, 그는 정치적 올바름 파당의 공격을 약한 신에 대한 신앙심으로 막아보려는 것이다. 상대주의의 독재와 사회생물학과 경제적 분석으로의 환원주의, 지구촌 사상도 그로 인한 것이다. 첫 세 장에서, 나는 2차대전 이후의 일반 이론으로 인한 사회 변화를 다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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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꿈에 대해 전후 상상력은 약한 신들, 또는 약하게 만들어 마음을 여는 신들을 추종했다. 오늘날, 우리가 가장 밀어붙이는 테제는 포용성이다. 이는 차이에 대한 인식을 무디게 만든다. 규율 위반은 경계를 약하게 만든다고 찬양받는다. 사회를 열리게 만든다고 말이다. 다양성과 다문화주의는 권위있는 중심을 부정한다. 자유시장은 자발적 질서를 불러와, 우리의 자유 선택을 기적적으로 조율하고, 권위적 중심이 없다. 대중주의적 도전을 분파주의적 발작으로 보는 것은 우리가 권위에 대해 환멸을 느끼게 만드는 비판이다. 나는 이러한 약화의 패턴을 논할 것이다. 이로서 나는 전후를 지배한 분위기를 보여줄 것이다. 개방성과 폐쇄성의 대립, 자발성과 권위의 대립, 약함과 강함의 대립 말이다. 열려있고, 자발적이며, 약한 쪽의 정치적, 윤리적 명성은 갈수록 강해져 또다른 권위주의가 되고 말았다. 우리의 임무는 이러한 역설적으로 권위적인 열림과 약화의 문화를 뛰어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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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한 사랑에 대한 두려움과 개방성에 대한 집착으로, 전후 컨센서스는 이러한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우리가 다같이 사랑하는 공통의 것을 찾지 못하고, 때로는 "우리"라는 것조차 만들어내지 못함으로서 우리는 공공선을 구별해낼 수 없다. res publica의 res를 말이다. 서구에 만연한 이렇나 상황에서 시민적 삶은 사적 이익 사이를 헤매는 역경으로 변하고, 이러한 역경 속에선 강자와 부자가 이긴다. 21세기에는, 과점과 책임없는 엘리트들이 히틀러의 귀환보다 더 위협적이다.
연대는 강한 신들의 영역이고, "우리"는 그들의 선물이다. 그러나 서구 엘리트들은 서구를 위협하는 연대라는 것을 알아채지 못하고 포퓰리즘을 키운다. 그들은 발작적으로 문제를 파시즘, 인종주의, 체제에 대한 순응, 권위적 인격으로 돌린다. 중산층의 파괴와 그들에 대한 연대를 말하면 그들은 위험한 추억이라고 한다. "50년대는 백인 남성 연대의 시대였어" 그녀는 말할 것이다. 어떤 사람은 "어떻게 연대의 부족이 우리의 문제라고 말할 수 있어? 트랜스젠더들이 사회에서 대접을 못받는데?"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어떤 사람은 이에 대해 다양성을 두려워하는 "논리 중심적"이고 "이성애규범적"이라고 할지도 모른다.
그것도 운이 좋을 때고 대부분의 경우엔 분노와 비난, 해가 뒤따를 것이다. 전문적 암살이 뒤따를 것이다. 남부 빈곤 법률 센터는 당신을 증오범죄 집단의 일원이라 부를지도 모른다. 압력이 가해져 당신에게 재정적 해가 가해질지도 모른다. 다양성과 포용성은 지켜져야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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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구가 멸망을 향해 치닫는 것은 근대성의 결함 때문이 아니다. 우리의 문제는 오컴의 윌리엄이나 종교개혁, 존 로크, 자본주의, 현대 과학과 기술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근대성에 원자화, 뿌리 잃게 만들기, 비통합화의 트렌드가 있는 것은 사실이다. 많은 역사가, 철학자, 사회 비평가들이 이것을 지적했다. 그러나 그것은 항상 그렇다. 인간의 타락은 모든 문명, 모든 시대를 엔트로피의 법 아래 놓이게 했고, 리더쉽의 중요한 요소엔 공통의 애정과 통합의 충성을 가지게 하는 것도 있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가 부족해하는 것이다. 오늘날 공공의 생활을 불안하게 하는 것은 전후 컨센서스의 실패 때문이며, 개방성과 약화의 약한 신들의 문제이다. 자유주의나 근대성, 서구의 문제가 아니다. 2차대전 이후 우리가 도착한 곳은 더이상 작동하지 않는데도 의무가 되어버렸다. 우리는 우리를 통합하는 "우리"를 회복해야 하지만, 전후 컨센서스는 죽지않는 좀비가 되어버렸다. 서구는 대중과 개인들에게 초월적 목표를 회복시켜줘야 한다. 우리의 시간, 이 세기는 충성과 연대의 정치를 요구하며 개방성과 비통합화를 요구하지 않는다. 우리는 더는 다양성과 혁신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우리에겐 집이 필요하다. 그리고 이를 위해, 우리에겐 강한 신들의 귀환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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