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일본 유교는 달랐다 이러는데
이건 미토학에 대해서 이야기를 따로 해야 하는 영역이니 차치하고
직설적으로 말해서 동양과 서양의 국가 관념은 달랐음.
어떤 점이 달랐느냐? 바로 재산권에 대한 부분에 있음. 우선 배경지식을 길게 얘기하자면
서양은 본래 예로부터 도시국가들이 서로 경쟁하다가
로마제국이 지중해를 중심으로 정치적 통일을 일궈내고
그러다가 게르만족의 침입으로 서로마가 멸망하고
각 유럽 지역들은 야만인으로부터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서
농민들이 영주와 계약을 맺고 봉건제를 실시함으로써
도시와 장원 그리고 농노들이 탄생했고, 도시에서는 부르주아들이 탄생하며
왕이나 영주들은 전쟁을 하기 위해 물자를 동원하고자
필요할때마다 의회를 소집해서 (원래 역사적으로 의회는 비상설기관이다)
필요한만큼 돈을 동원해야지만 전쟁을 할 수 있었다. 이 이야기임
유럽의 군주들이 동양의 군주들보다 힘이 약했던게 이런 이유였음.
부르주아들이 하나의 정치적 세력으로 부상해서 왕과 귀족을 몰아낼 수 있었던 까닭도
왕조차 시민들의 재산을 마음대로 침해할 수 없고, 의회를 통해 합의를 받아내야지만 국가운영 예산을 얻을 수 있는
정치적 구조를 가지고 있기 때문임.
이것은 백인들이 특별히 우월해서라기보단
게르만족의 침입으로 로마제국이 파괴되면서 로마의 법제도와 게르만족의 관습이 혼합되며 의회제도가 탄생했기 때문으로 봐야 함.
그래서 서양은 비교적 명확한 재산권 개념이 확립될 수 있었고
또한 서양의 부르주아지들은 자신들의 재산권 개념을 합리화 할 인문학적 근거를 찾기 위해서 기독교적 레토릭을 인용하기 시작함.
과거 유럽의 왕들은 기독교적 수사로써 자신들의 통치체제를 정당화하고자
어용 지식인들을 앞세워서, 왕의 권력은 신이 위임한것이라는 왕권신수설을 주장했으나
존 로크 같은 인물이 통치론과 같은 명저를 집필함으로써 고전적 자유주의를 만들기에 이르렀음
왕이나 신분제도도 본질은 그저 강한 힘을 가진 이들이 계약을 통해서
사회 내에서 그러한 권력을 얻고 세습한것일뿐, 신의 점지를 받았기 때문이 아님을 주장하며
또한 인간은 자신이 일궈낸 자산을 소유할 권리가 있음을 주장하면서
재산권 개념을 옹호했던 것도 이러한 역사적 맥락이 있었던 것이고
반면 동양은 국가 안의 모든 재산이 궁극적으로 군주의 소유였음.
대표적 사례로는 왕토사상을 보면 이해가 쉬운데, 동양에서 소유라는 개념은
명확히 니꺼 내꺼 이런 식으로 딱딱 떨어지는 개념이 아니라
왕이 모든 토지를 소유하는데, 그 토지 내에서 백성들이 자신의 경작지를 통해 생계를 이어나갈 수 있었고
또한 그 토지 내에서도 소작농 같은 개념이 존재하는등 소유가 여러 명에게 중첩되는 식으로 소유자가 명확히 나뉘어 떨어지는 개념이 아님.
이는 토지 같은 부동산뿐만이 아니라, 모든 형태의 재산이 포함되는 개념임.
그래서 일본이나 한국이나 중국이나 아무리 대부호라 할지라도
재산권 개념이 형성되지 않았던 전근대 시기에는 언제든지 왕이나 관료들이
자신의 권력을 바탕으로 부자들을 협박하고 부자들의 재산을 강탈해도, 부자들은 반항을 하기 어려웠음.
동양의 상인들은 부를 갖더라도 결국 권력을 갖지 못했기 때문에 왕에게 대항하는 권력의 한 축으로 성장하지 못했으며
동양에서 상인이라는 존재들은 본질적으로 피지배계층에 불과했던거임.
그나마 송나라때 상업이 발전하고 화폐도 찍어내며, 상업에 국가의 간섭을 최소화 하자는 학풍 비스무리한게 생길뻔하긴 했지만
몽골이 동아시아를 초토화 시키고, 이후에 집권한 명나라 시기부터
해상 자유무역을 국가가 금지하고, 조공무역만 허락하는 식으로
강력한 국가권력이 상업을 철저히 통제하는 방식으로 가버리고
동아시아에서 가장 큰 시장인 중국이 이렇게 폐쇄적으로 가버리니
동양 전체 국가들의 상업이 서양보다 쇠퇴할 수 밖에 없었음...
또한 동양의 군주들 역시도 자신의 권력을 위협할 수 있는 변수인 상인들의 성장을 좌시하지 않았기에
외국과 자국 상인의 교역을 제한하고, 부가 많은 상인들의 재산을 수시로 몰수하고, 국가가 해외무역 사업을 독점하는 식으로 상인계급을 견제하려 했음.
전국시대때 일본의 군벌들이 서양국가들이랑 교역을 했지만
결국 전국 통일 이후로 쇄국정책이 생긴것도 이 때문이고
그렇기에 동양에서 상인들이 권력을 얻는 방법은 권력층에게
뒷돈을 대주고 인맥을 형성하는 식으로 권세를 얻고
그 권세를 악용해서 특정 사업을 독점할 권한을 국가로부터 따오는 식으로
어용 독점 사업을 꾸려나가는 경우가 유일하다싶이 했고
이런 독점 어용 상인들은 자신들이 후원해주는 정치파벌이 몰락하면
바로 파산해서 전재산을 잃고 몰락하는 경우가 일상다반사였음.
(청나라의 호설암이 대표적 예시)
심지어 일본에서 요도야 가문이라는 대부호 상인 가문은
겨우 "검약하게 살지 않고 사치를 저질렀다"라는 이유만으로
막부에게 켓쇼 판정(전재산 몰수)을 받고 몰락하기도 했었고
유교만의 문제라기보단 애초에 극동 사회 자체가 재산권 개념이 형성하는데에 필수적 단계였던
'시민계급의 성장'이라는 과정을 거치지 못했기 때문에
유교의 논리 하에서 재산권 개념 같은게 형성되긴 어려웠던것에 가까움.
그 결과로 사회 전반의 역동성이 결여되고, 권력의 교체는
단지 왕과 유력 가문들 사이에서의 레짐 체인지에 그쳤고
체제나 생산수단 그 자체가 완전히 뒤바뀌는 유럽과는 궤가 달랐던것임.
이건 미토학에 대해서 이야기를 따로 해야 하는 영역이니 차치하고
직설적으로 말해서 동양과 서양의 국가 관념은 달랐음.
어떤 점이 달랐느냐? 바로 재산권에 대한 부분에 있음. 우선 배경지식을 길게 얘기하자면
서양은 본래 예로부터 도시국가들이 서로 경쟁하다가
로마제국이 지중해를 중심으로 정치적 통일을 일궈내고
그러다가 게르만족의 침입으로 서로마가 멸망하고
각 유럽 지역들은 야만인으로부터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서
농민들이 영주와 계약을 맺고 봉건제를 실시함으로써
도시와 장원 그리고 농노들이 탄생했고, 도시에서는 부르주아들이 탄생하며
왕이나 영주들은 전쟁을 하기 위해 물자를 동원하고자
필요할때마다 의회를 소집해서 (원래 역사적으로 의회는 비상설기관이다)
필요한만큼 돈을 동원해야지만 전쟁을 할 수 있었다. 이 이야기임
유럽의 군주들이 동양의 군주들보다 힘이 약했던게 이런 이유였음.
부르주아들이 하나의 정치적 세력으로 부상해서 왕과 귀족을 몰아낼 수 있었던 까닭도
왕조차 시민들의 재산을 마음대로 침해할 수 없고, 의회를 통해 합의를 받아내야지만 국가운영 예산을 얻을 수 있는
정치적 구조를 가지고 있기 때문임.
이것은 백인들이 특별히 우월해서라기보단
게르만족의 침입으로 로마제국이 파괴되면서 로마의 법제도와 게르만족의 관습이 혼합되며 의회제도가 탄생했기 때문으로 봐야 함.
그래서 서양은 비교적 명확한 재산권 개념이 확립될 수 있었고
또한 서양의 부르주아지들은 자신들의 재산권 개념을 합리화 할 인문학적 근거를 찾기 위해서 기독교적 레토릭을 인용하기 시작함.
과거 유럽의 왕들은 기독교적 수사로써 자신들의 통치체제를 정당화하고자
어용 지식인들을 앞세워서, 왕의 권력은 신이 위임한것이라는 왕권신수설을 주장했으나
존 로크 같은 인물이 통치론과 같은 명저를 집필함으로써 고전적 자유주의를 만들기에 이르렀음
왕이나 신분제도도 본질은 그저 강한 힘을 가진 이들이 계약을 통해서
사회 내에서 그러한 권력을 얻고 세습한것일뿐, 신의 점지를 받았기 때문이 아님을 주장하며
또한 인간은 자신이 일궈낸 자산을 소유할 권리가 있음을 주장하면서
재산권 개념을 옹호했던 것도 이러한 역사적 맥락이 있었던 것이고
반면 동양은 국가 안의 모든 재산이 궁극적으로 군주의 소유였음.
대표적 사례로는 왕토사상을 보면 이해가 쉬운데, 동양에서 소유라는 개념은
명확히 니꺼 내꺼 이런 식으로 딱딱 떨어지는 개념이 아니라
왕이 모든 토지를 소유하는데, 그 토지 내에서 백성들이 자신의 경작지를 통해 생계를 이어나갈 수 있었고
또한 그 토지 내에서도 소작농 같은 개념이 존재하는등 소유가 여러 명에게 중첩되는 식으로 소유자가 명확히 나뉘어 떨어지는 개념이 아님.
이는 토지 같은 부동산뿐만이 아니라, 모든 형태의 재산이 포함되는 개념임.
그래서 일본이나 한국이나 중국이나 아무리 대부호라 할지라도
재산권 개념이 형성되지 않았던 전근대 시기에는 언제든지 왕이나 관료들이
자신의 권력을 바탕으로 부자들을 협박하고 부자들의 재산을 강탈해도, 부자들은 반항을 하기 어려웠음.
동양의 상인들은 부를 갖더라도 결국 권력을 갖지 못했기 때문에 왕에게 대항하는 권력의 한 축으로 성장하지 못했으며
동양에서 상인이라는 존재들은 본질적으로 피지배계층에 불과했던거임.
그나마 송나라때 상업이 발전하고 화폐도 찍어내며, 상업에 국가의 간섭을 최소화 하자는 학풍 비스무리한게 생길뻔하긴 했지만
몽골이 동아시아를 초토화 시키고, 이후에 집권한 명나라 시기부터
해상 자유무역을 국가가 금지하고, 조공무역만 허락하는 식으로
강력한 국가권력이 상업을 철저히 통제하는 방식으로 가버리고
동아시아에서 가장 큰 시장인 중국이 이렇게 폐쇄적으로 가버리니
동양 전체 국가들의 상업이 서양보다 쇠퇴할 수 밖에 없었음...
또한 동양의 군주들 역시도 자신의 권력을 위협할 수 있는 변수인 상인들의 성장을 좌시하지 않았기에
외국과 자국 상인의 교역을 제한하고, 부가 많은 상인들의 재산을 수시로 몰수하고, 국가가 해외무역 사업을 독점하는 식으로 상인계급을 견제하려 했음.
전국시대때 일본의 군벌들이 서양국가들이랑 교역을 했지만
결국 전국 통일 이후로 쇄국정책이 생긴것도 이 때문이고
그렇기에 동양에서 상인들이 권력을 얻는 방법은 권력층에게
뒷돈을 대주고 인맥을 형성하는 식으로 권세를 얻고
그 권세를 악용해서 특정 사업을 독점할 권한을 국가로부터 따오는 식으로
어용 독점 사업을 꾸려나가는 경우가 유일하다싶이 했고
이런 독점 어용 상인들은 자신들이 후원해주는 정치파벌이 몰락하면
바로 파산해서 전재산을 잃고 몰락하는 경우가 일상다반사였음.
(청나라의 호설암이 대표적 예시)
심지어 일본에서 요도야 가문이라는 대부호 상인 가문은
겨우 "검약하게 살지 않고 사치를 저질렀다"라는 이유만으로
막부에게 켓쇼 판정(전재산 몰수)을 받고 몰락하기도 했었고
유교만의 문제라기보단 애초에 극동 사회 자체가 재산권 개념이 형성하는데에 필수적 단계였던
'시민계급의 성장'이라는 과정을 거치지 못했기 때문에
유교의 논리 하에서 재산권 개념 같은게 형성되긴 어려웠던것에 가까움.
그 결과로 사회 전반의 역동성이 결여되고, 권력의 교체는
단지 왕과 유력 가문들 사이에서의 레짐 체인지에 그쳤고
체제나 생산수단 그 자체가 완전히 뒤바뀌는 유럽과는 궤가 달랐던것임.
일본의 유교는 미토학이라는 학문이 대세였음 이 미토학은 성리학과 고쿠가쿠 사상이 혼합된 일본식 유학임. 원래는 도쿠가와 가문의 스폰을 받고 만들어진 학풍인데 나중에는 반 도쿠가와 세력들도 미토학을 공부하고 역으로 이 미토학의 논조를 응용, 변형해서 반막부 운동을 정당화하는 도구로 사용할만큼 일본 사회의 변화에 큰 역할을 했음
미토학은 존황사상과 외세 배척 정서를 기반으로 한 사상인데 에도 막부는 천황을 허수아비로 만들되, 명목상 천황을 우대함으로써 자신들의 체제의 정당성을 확보했지만 문제는 이 존황사상이 막부의 권위가 약화된 때에는 역으로 천황이 권력을 되찾아야 한다는 논거로 변질될 수 밖에 없는 한계가 다분하다는 점임. 반외세정서 역시 서세동점의 시대 앞에서는
현실성이 없는 공허한 메아리에 불과했고, 그래서 반막부 시력들은 미토학의 이 2가지 취약점을 역으로 자신들의 무기로 삼아서 에도막부를 붕괴시키는 도구로 유용하게 사용한 이후 에도막부가 붕괴되자, 미토학적 수사들은 대중들을 통제하는 명분으로만 써먹고 권력층들은 사실 서양 문물이 우수하다는것을 누구보다 잘 아는 이들이었기에 집권 이후 반서양 논조를
과감히 버리고, 서구화 정책을 강력하게 펼친것임. 물론 미토학의 명분을 모조리 버릴 순 없었고 이 미토학을 응용한 사상적 발전인 항해웅략, 일군만민 사상을 주장하며 자신들의 통치를 정당화 하려 했음. 항해웅략이란 "무조건 서양 문물을 배척해야지만 양이(반서양운동)가 아니다. 서양 무기로 무장하고, 더 나아가 일본이 서양문물로 부국강병을 이루어
서양 국가들이 역으로 일본에게 머리를 조아리도록 일본을 발전시키기 위해 전략적으로 개국하고 무역을 증진하며 서양 문물을 수용하는것이야말로 더 높은 차원의 양이운동이다"라는 논조이고, 일군만민이란 요시다 쇼인이라는 일본인 양명학자가 주장한 사상인데, 요약하자면 봉건제 체제 하에서 파편화 된 소속감과 신분제도로 갈라진 일본사회를 천황이라는 하나의 군주 아래에서
만민이 평등한 새로운 세상을 만듦으로써, 일본이 하나된 국가로 만들어져야 한다는 사상임. 유교적 레토릭이긴 하지만 마치 서양의 국민국가 모델과 흡사한 주장이라 할만한거지
근데 이러한 일본의 천황 존숭사상은 결국 유신지사들이 자신들의 통치체제를 정당화 하고자 모든 정부 기관과 부서들을 천황 중심으로 끼워넣고, 각 부서들을 통제할 법적 근거가 부재한 동양적 해석이 들어간 불완전한 의회제도를 수립하는 악수로 작용했고 이게 삿초 번벌들이 자신들의 사적 인맥과 금융을 동원해서 국가를 통치할 때에는 문제가 수면 위로 드러나지
않았으나, 유신지사 시대들이 모두 늙어서 은퇴하게 되면서 문제점들이 하나 둘 드러나기 시작했음. 1000년 가깝게 궁궐에 틀어박히며 현실정치에 개입하지 않던 천황에게 하루아침에 프로이센식 강력한 군주제 모델을 적용했으니 결국 대공황 이후 일본 의회는 힘도 제대로 못 쓰고 군부의 폭주에 끌려다니며 천황조차 이들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는 문제점이 생
기게 됨. 결국 서양의 문물이든 동양의 문물이든 맥락적 해석을 통해서 본질을 꿰뚫고 시대적 흐름에 맞는 변용적 해석과, 구조적 파악이 필요한데 이상한 부분에서는 과도하다 싶을 정도로 급진적인 파괴와 무비판적 서구 따라하기를 했으면서 또 정작 국체와 정부 구조라는 필요한 부분에 대해서는 개혁에 소극적이었던게 메이지 유신의 실상임.
그래서 어떤 사상이건 문자 그대로의 해석은 피해야 한다는 것임. ‘독서는 다만 지식의 재료를 공급할 뿐 그것을 자기의 것이 되게 하는 것은 사색의 힘이다.’ 존 로크가 했던 명언임. 책이 분명히 지식을 얻는데에 중요한 매체임은 분명하지만 막상 책이 어떤 맥락에 의해 쓰여졌으며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를 이해하지 못하면 책은 무용지물임.
천황 숭배를 국가 통치 명분으로 내세우다가 어느순간 천황 숭배사상 컨셉에 지도층들이 먹혀버리고, 서양 문물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면서 정작 가장 중요한 부분인 천황제와 정부 구조 개편이라는 중대한 문제에서 정치인들이 터치를 못했으니 일본이 대공항으로 폭주해서 나라가 패망의 길을 걷게 된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니라 메이지 유신부터 정해진 필연이었음.
https://m.dcinside.com/board/japans/41728
비평
논조가 이 글이랑 전반적으로 비슷한 듯
잘쓴글임 쌉명문 탭으로 옮겨야
애초에 서구에서 문명을 시빌라이제이션(Civilisation)이라 부르는데에서 알 수 있듯이, 서구 문명에서 도시(city)와 시민(civic)의 개념은 중요한 개념임.
내가 이 글을 쓰는 까닭도 자유주의에 반대한다면서 고전적 자유주의 시기 정치인들의 일부 어록을 맥락 고려없이 인용해서 자유주의의 본질적 문제점과, 그럼에도 자유주의가 왜 현대사회에서 완전히 부정될 수 없는가에 대하여 구조적으로 이해하지 못하고, 고전적 자유주의의 레토릭으로 현대 사회의 문제점을 개혁하고 자유주의를 공격하는 유저들에게 스스로를 돌아보라는
취지로 이 글을 써봄. 가령 에드먼드 버크나 고전적 자유주의자인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의 일부 보수적 어록을 언급하며 현대 자유주의를 비판하는 사람들도 보이던데, 다 무의미한 짓임.
시대적 상황에 따른 사상가 개개인의 지엽적 어록들만으로는 자유주의 체제의 구조적 문제점들을 개혁할 수 없음. 가령 전장연이 장애인 이동권이라는 의제를 내세우며 투쟁하는것도 자유주의 체제 하에서는 필연적인 일인데, 이걸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의 논조를 인용해서 비판한다고 자유주의 체제의 본질적 문제점이 개혁 가능할것 같음?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 살아생전에 장애인 이동권 같은 개념은 상상도 못하는 일이겠지만, 그들이 다시 되살아나서 이 세태를 목격한 뒤에 이런건 자유가 아니라고 부정할지라도, 이것은 자유주의의 필연적 귀결일뿐임. 권리를 위한 투쟁이 인정된다면, 장애인 이동권이라는 것도 얼마든지 정당화 될 수 있고, 그것을 추구하기 위한 각종 투쟁도 정당화 되기 때문임.
자유주의는 기독교적 가치관에서 파생된 개념이나 현대사회에서는 이신론적 관념으로 넘어간 사상일뿐임. 오늘날에도 고전적 자유주의를 주장하며 최종적 논거를 기독교적 하느님으로 두는 논리를 펼쳐봤자 대중들에게 외면받을뿐임 당장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부터가 기독교인이되, 동시에 이신론자들이거든
철학이 세속화된지 얼마나 지났는데 지금 입장에서 이성의 근원을 신에게서 찾는건 무의미하다 싶음. 자연법 사상은 그 역사가 오래된 만큼 학설이 발전되어온 연혁만 따져보더라도 2차대전 이전까지 대세였던 법실증주의가 2차대전 이후로 퇴색하면서 히틀러 체제에 대한 반성 (물론 법실증주의 자체가 히틀러 체제에 부역한건 아님, 오히려 자연법학자 칼슈미트는
나치에 부역한 인물이지, 그러나 법실증주의 하에서는 히틀러 체제에 저항할 수 있는 논거가 나올 수 없었기에 이런 문제의식들이 법학계에서 생기면서, 2차대전 이후 세계 각국에서 자연법론이 대세가 되었음.)을 통해서 자연법론이 만연해진 것을 보면 알겠지만 현대에 자연법이 복권된 과정은 인간들이 신을 되찾으려 했기 때문이 아니라 2차대전의 잔학성에 대한
인간들의 반성에서 출발한것임. 실제로도 중세 여타 자연법론이나 심지어 토미즘이랑도 현대자연법이랑은 확실히 다르고
분명히 기독교적 사유체계와 자연법이 100% 완전히 분리될 수는 없는 개념이라지만 아직도 기독교적 맥락의 신을 찾으며 중세자연법이나 토미즘에 기반한 보수화를 지향하는것은 시대착오적 발상임. 당장 서구 국가들부터가 PC주의랑 세속주의에 지배되고 있는데 이러한 대세에서 한국만 빗겨나갈 확실한 방법이 있다고 생각함? 결국 새로운 대안을 제시해야지
새로운 접근법을 통한 문제의 극복이 아닌, 이전 체제로의 회귀를 외치는것은 실현 될 가능성도 낮고 무의미한 행동일뿐임.
고전적자유주의도 당대에는 좌파적면모가 있었고, 버크도 토리가 아니라 휘그였음.휘그는 좌파임. 고전적자유주의의 일부요소를 차용하면 뭐 어느정도 인정하겠는데,고전적자유주의=보수주의?진짜 개풀뜯는소리라고 생각함. - dc App
자유주의와 보수주의가 동일한 개념은 아니지만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은 고전적 자유주의자이고 또한 에드먼드 버크는 자유보수주의자임. 버크가 영국 명예혁명을 옹호했던 논거 역시 왕이 신민들과의 신성한 계약을 어겼다는 점에 두었던 역사관을 벗어나지 않았음. 당대 유럽의 전제군주들은 왕권신수설을 신봉하기에 그런 논조를 옹호할 수 없었다는건 알지?
ㅇㅇ 나또한 고좆같은 개홍어새끼를 보니 왕정에 대한 회의감이 들어서 왕권신수설보단 천부인권을 인정하고 신뢰함.다만 자유보수주의자나 고전적자유주의자는 아님 - dc Ap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