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라는 용어는 원래 변화에 대한 적극적 내지 급진적 태도를 말하는 개념이어서 사회주의 같은 이념적 좌표를 의미하는 ‘좌파’와는 다른 개념이다.
그렇기는 하나 두 용어가 최근까지 동의어처럼 혼용되어 온 것도 사실이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변증법적 유물론에 입각해 역사의 발전과정을 원시공산사회, 고대노예사회, 중세봉건사회, 자본주의사회, 사회주의사회/공산주의사회로 규정했다.
그들에게 ‘진보’란 다름 아닌 사회체제의 진보, 즉 ‘사회주의 체제로의 이행’을 의미했다.
이 같은 진보에 대한 인식은 한국의 공산주의자들에게도 확고한 믿음이 되었으며, 건국 후 최초로 ‘진보’라는 단어를 정당 명칭에 붙인 진보당의 조봉암 역시 진보주의를 ‘사회체제의 발전을 지향하는 사상’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1990년 초에 일어난 소련과 동구 여러 나라의 공산주의체제 붕괴는 이 같은 유물론적 진보사관에 파산선고를 내렸다.
그 결과 구 공산권에서는 보수와 진보의 역전현상이 일어나고 용어 사용에도 혼선이 빚어졌다.
이제 공산주의를 지키려는 세력이 보수파가 되고, 이에 반대하는 세력이 진보파가 되고 말았다.
이념갈등이 첨예한 한국의 경우는 파급력이 더욱 컸다. 소련의 붕괴로부터 큰 충격을 받은 한국 좌파운동권은 퇴조를 맞았다.
좌파혁명세력, 특히 친북혁명세력, 그 중에서도 시대착오적인 주사파들에게는 청천벽력이 아닐 수 없었다.
그들에게 더 이상 진보라는 용어를 쓰는데 대해서는 사람들이 강한 거부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 대신 진보라는 단어는 변화와 개혁을 추구하는 많은 사람들이 즐겨 쓰는 주관적이고 정치적인 용어가 되었다.
제 17대 대통령선거 패배 후 통합민주당 대표에 선출된 손학규가 ‘새로운 진보’노선을 내걸면서 자신의 ‘진보’는 ‘좌도, 우도 아닌 진보’라고 말했듯이 ‘진보’라는 용어는 이제 마르크스주의적 역사철학적 개념이나 좌우이념과 무관한, 또는 이를 초월하는 의미로 쓰이는 상황이 되었다.
제18대 총선 후 출범한 정세균 체제 하의 민주당이 ‘그릇된 보수’와 ‘낡은 진보’를 극복하고 성장과 분배를 동시에 추구하는 제3의 발전모델을 제시한 당지도부의 뉴민주당선언안을 둘러싸고 현재 치열한 당내논쟁을 벌이고 있는 것도 주목된다.
이제 ‘중도적 진보’도, ‘시장진보’도, ‘진보주의 없는 진보’도, ‘비좌파적 진보’도, 심지어는 ‘우파적 진보’도 모두가 가능한 혼돈의 시대가 온 것이다.
그 혼돈이 단순한 혼란인지, 아니면 새로운 창조를 위한 과도기적 혼돈인지는 아직 아무도 단언할 수 없지만 말이다.
2009.5. 남시욱 저 「한국 진보세력 연구」 초판 머리말 중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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