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번째는 Implication(연루)라는 건데 이겁니다.
예를 든다면 가령 내가 90년대생 일본의 청년인데 미츠비시에 취직해서 월급을 받고 좋은 셀러리맨으로 잘 산다. 그런데 미츠비시라는 회사가 2차대전 당시 해왔던 결과물(징용)로 오늘날의 미츠비시가 되었는데 내가(전후세대 일본인 청년) 연루되어서(involved) 월급을 받으면서 내 삶을 영위하는데 거기에 대한 나의 책임은 어떻게 이야기 할 것인가. 뭐 내가 회장이나 사장도 아닌데 내가 뭔 책임이 있나? 내가 뭐 창립자도 아닌데.. 하지만 내가 거기서 월급을 받고 그 녹 (祿)을 받고 있을 때, 나와 미츠비시와 식민지 과거(colonial past)와의 관계는 어떻게 될까? 이젠 거기에 대한 문제제기가 전 테사 모리스 스즈키가 제기한 implication(연루)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리고 이걸 마이크 로스버그는 '연루된 주체(Implicated Subject)'이죠. 예컨데 미츠비시의 사원으로써 내가 월급을 받고 있을 때, 나는 미츠비시가 2차대전에서 연루됐던(implicated)것과 내가 지금 미츠비시에서 받고 있는 혜택사이의 관계는 어떻게 이야기 할 수 있는가. 사실은 여전이 고민이 많이 되는 부분인데 하지만 연루된 주체라는 말을 가지고 우리 자신들이 연루되었다는 것을 자각하기 시작할 때, 어떻게 여기에 대해서 접근하고 문제를 풀어 갈 것인가에 대해서 약간의 힌트를 주는 개념이라고 생각됩니다.
2. 부끄러움이 가지는 해방적 역할 vs 우리는 어쩔 수 없지 않았느냐. 그 누가 가장 큰 희생자인 우리를 손가락질 할 수 있다는 말인가.
그러면 과거를 기억할때는 어떻게 해야할까.
이것은 2차대전 나치 점령기 시절 폴란드 사례로 설명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나치는 폴란드에 살던 유대인들을 전부 체포하려고 하고 폴란드인들이 만약 유대인을 숨겨줬다가 발각이 되면 유대인은 물론 숨겨준 폴란드인들도 그곳에서 즉결 처형을 당했습니다. 그래서 폴란드인들에겐 유대인들을 숨겨준다는 것은 가족 전체 목숨을 거는 위험한 도박이었습니다. 합리적으로 볼때는 가족의 생존을 위해선 유대인을 숨겨주면 안되지만 도덕적으로 보면 가족의 생존을 위해 유대인의 도움을 외면하는 딜레마에 빠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생존을 위한 '합리성'과 '도덕'을 충돌시키겠끔 만드는 나치의 교묘한 통치는 악의 평범성이 얼마나 무서운지 상기시켜 줍니다.
그래서 폴란드에서 일화가 하나가 있습니다. 한 폴란드인 가족이 예전 삼촌 삼촌이라고 부렀던 이웃 유대인 아저씨의 숨겨달라는 요청을 받았습니다. 그 유대인 아저씨는 두 여동생을 같이 데려왔는데, 그 유대인 아저씨와 첫째 여동생은 코케이시언(백인종)처럼 보여서 숨겨줄 수 있었으나 둘째 여동생은 너무 피부가 검고 유대인 티가 너무 나서 이 둘째 여동생까지는 숨겨주지 못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유대인아저씨가 둘째 여동생 너만 다른 곳으로 가라 라고 할수는 없는거죠? 그래서 유대인 아저씨와 두 여동생은 같이 그 집을 떠났다가 나치에 의해서 희생이 되었습니다. 그것이 전후 이 폴란드 한 가정의 평생토록의 트라우마 였습니다.
이 사례를 가지고 폴란드인들은 "어쩔 수 없는 상황이지 않았는가? 우리 폴란드인이 그처럼 가혹한 상황에서 무엇을 더 할 수 있었단 말인가? 항상 최고의 이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우리는 유대인들과 공생해오지 않았는가? 폴란드인-유대인 관계가 삐걱거린 적도 있지만, 그게 폴란드인만의 잘못인가? 누가 감히 나치의 가장 큰 희생자인 폴란드 민족에게 손가락질할 수 있다는 말인가"같은 주장에 얀 브원스키(Jan Błoński, 1931-2009)는 자기방어 논리 뒤에 숨어 희생자의식 속으로 숨어 책임을 덮어버리지 말고, 고통스럽더라도 그 끔찍한 과거를 직면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것에 대해 지그문트 바우만 (Zygmunt Bauman, 1925-2017)이 과거를 기억할 때 우리가 물론 할 수 있었는게 많지 않았지만 우리가 부끄러움 갖고 과거를 기억했을 때 그 기억이 가지는 해방적인 역할과 우리는 가장 큰 피해자였기 때문에, 우리 어쩔 수 없지 않았느냐! 왜 우리 스스로에게 화살을 돌리느냐 라는 식의 기억방식의 차이는 얼마나 큰 것인가.
그래서 바우만이 90년대 중반에 부끄럽다라는 것이 얼마나 큰 해방적인 역할을 가지는 가 하는 얘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3. 일본은 왜 과거사 책임에 인색한가. 일본의 서양제국주의를 향한 저항 민족주의 기억.
에도막부 말기 페리제독의 흑선(쿠로후네)가 강제 개항을 했을 때부터 일본은 서양 제국주의에 극도의 공포감을 갖고 있었습니다. 당시, 서세동점 당시 일본은 서양에 대한 반감이 극에 달하며 존황양이 운동과 시모노세키 전쟁 (조슈번 vs 미국,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1863-1864년. 조슈번 패배)과 사쓰에이 전쟁 (사쓰마번 vs 영국 1863년. 사쓰마번 패배)까지 일어났으며 출간된 책에서는 서양 백인들은 소변을 볼때도 개처럼 한쪽 다리를 들고 본다라는 거짓말까지 책으로 낼정도 였습니다. (참고로 구한말 조선에선 일본의 이런 책만 골라서 번역해서 서양인에 대해서 반감을 올렸습니다. (임용한 교수 내용))
현재 한국에선 일본이 서양에 사대하고 노예의식이 있어서 메이지유신과 탈아입구, 명예백인이다. 이런 소리를 하는데. 반은 맏고 반은 틀립니다.
일본은 反서양을 위해서 서구화(근대화)를 했습니다. 서구 근대문물은 객관적으로 나라를 부국강병하게 만들어준다는 것을 받아들이고 서구화 된 일본이 서양 제국주의를 맞설 수 있다라는 생각을 가졌습니다. 일본의 민족주의도 마찬가지로 처음은 서구에 대한 저항민족주의로 출발했습니다. 그래서 중화질서로부터 벗어나고 서구화 되어야(탈아입구) 일본이 서양 제국주의와 맞설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서양이 좋아서 서구화를 받아들인 것이 아닙니다. 명예백인의식도 이 맥락에서 이해가 됩니다.
청일 전쟁 승리 후, 일본은 시모노세키 조약을 통해 청나라에게서 요동 반도를 할양받게 되었지만 삼국간섭 (러시아 제국, 독일국, 프랑스의 3국이 일본 제국에게 외교적 압력을 통하여 요동반도를 다시 청나라에 반환하게 된 사건)으로 물러나게 됩니다. 일본이 이때 서구열강에 굉장한 분노감을 느꼈습니다. 일본은 청일전쟁에서 승전국 이었는데 서구열강이 일본국이 유색인종 국가라고 해서 인정을 안해준다라는 분노.
러일전쟁이 벌어지자 당시 일본은 서구열강인과의 본격적으로 첫번째 전쟁 이었기 때문에 러일전쟁에 총력전 태세로 임했습니다. 러일전쟁에서 러시아가 협상으로 패배를 인정하자.
당시, 일본의 선전 문구는 이것이었습니다. "산업혁명 이후 백인국가에 대한 유색인종 국가의 최초 승리"
그리고 일본은 1차대전에도 참전해서 승전국 이었지만 서구열강 승전국으로부터 인정을 제대로 받지 못했으며 군축협상 당시에도 일본만 부당하게(?) 많이 감축하는 것으로 협상을 봤습니다. 이때 일본 군부의 서구열강에 대한 불만이 폭발하게 되고 당시 일본 총리들이 굴욕적(?) 협상을 받아들이자 5.15 사건(1932년 5월 15일 일본 제국에서 일본 해군 소속의 현역 위관급 장교들이 이누카이 쓰요시 총리대신을 암살하고 폭탄 테러를 벌인 사건 - 나무위키)과 일본 군부 황도파(황도파(皇道派)는 일본 육군의 청년 장교 파벌들 중 하나였다. 이들이 황도파라고 불리게 된 이유는 천황이 국가 수반으로서 직접적으로 친정하기를 바란다는 뜻이었다. 이에 반대하여 군부의 정치개입을 거부하고 민간인의 문민통제를 존중하는 파벌을 통제파(統制派)라고 한다.- 나무위키)가 일으킨 2.26 쿠데타 사건 (1936년 타카하시 코레키요 20대 총리대신, 사이코 마코토 30대 총리 대신이 군부 황도파에 의해서 암살)도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5.15 암살 사건과 2.26 군부 쿠데타 역시 일본 군부의 일본을 당시 국제사회에서 제대로 인정안해주는 서양에 대한 반서양 감정과 서양에 힘없이(?) 굴욕적인 협상을 받아들인 일본 문치세력에 대한 분노에 대한 결과였습니다. 자신들이 유색인종이라는 이유로 서구열강이 인정을 안해주자 백인에 대한 증오를 증폭시켰죠.
그러다가 일본 문치정부는 막을 내리고 군부통치 군국주의가 시작된 이후 진주만 공격이 시작되자, 당시 일본의 막시스트들은 일본 군부의 공산주의자 탄압과 싸우다가도 진주만 공격 당시엔 다들 만세를 불렀습니다. 이유는 야! 우리(일본, 유색인종)도 이제 이 미제국주의에 대해 한번 일격을 가했다"라는 반서양 감정.. 또한 놀랍게도 미국 내 흑인 막시스트들도 당시 진주만 공격에 일본을 찬양하고 일본 열풍이 불었습니다. 유색인종 국가인 일본이 백인 국가인 미국을 공격하고 전쟁을 일으켰다는 것자체가 당시 극심한 백인 우월주의와 인종차별이 있었던 흑인 막시스트에겐 고무적인 일로 느껴졌습니다.
2차대전 당시 일본은 미국과 영국에 대해 귀축영미(귀축영미(鬼畜英米)는 귀신과 가축 또는 악귀와 짐승같은 영국과 미국이란 뜻)라는 구호와 서구 제국주의로부터 아시아를 해방한다는 대동아전쟁 구호를 내세웠습니다.
당시, 일본이 동남아를 공략하면서 영국, 네덜란드, 호주, 미국등 서구열강과 싸웠지만 패배했죠. 그러나 2차대전 승전국이었던 영국등도 힘이 붙여서 수많은 동남아국가들이 독립을 하게 됩니다. 아이러니하게도 동남아에서 이런 맥락에서 친일성향이 강해집니다. 일본 우익 민족주의자들도 일본이 패배했지만 대동아전쟁을 통해 수많은 아시아 국가들에게 꿈과 희망이 되었다고 기억합니다.
또, 여기서 한국인들이 이해를 못하는 지점이 일본이 어떻게 모순(?)되는 개념인 친서양으로 보이는 탈아입구(아세아(亞細亞, 아시아)를 벗어나 구라파(歐羅巴, 유럽)에 들어간다는 뜻, 이 당시 아시아는 중화세계였기 때문에 중화세계로부터 벗어나 구라파(서구열강)에 들어간다는 의미)와 반서양으로 보이는 대동아전쟁을 같이 할 수 있냐는 것인데, 일본인의 입장에선 이것은 모순되는 것이 아닙니다. 한국과 중국은 중화사상 세계관 이었기 때문에 反서양이라면 서구의 모습을 다 배척(위정척사 또는 양무운동, 동도서기, 서구의 과학 기술은 취하되 정신과 체제는 우리 중화를 유지한다.)해야한다고 보지만 일본은 서구열강에 맞서려면 일본이 서구화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급진개화, 메이지유신). 그래서 일본은 탈아입구와 대동아전쟁이 모순이 되지 않습니다.
일본인들이 유색인종 의식과 명예백인 의식이란 상반된 개념을 동시에 갖고 있는 양가성도 이런 의미입니다. 일본인들의 양가적 감정 (탈아입구-대동아/ 명예백인의식-유색인종의식).
결국 2차대전 말에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떨어집니다. 전후 일본은 급격하게 친미화 됩니다. 일본인들은 또 생존을 위해서 세계 체제에 자신들을 매우 빠른 속도로 변하게 하고 그 체제에 익숙해집니다. (19세기 메이지 유신과 20세기 전후-일본의 자유민주주의 도입).
그러면서도 일본인들은 유대인의 홀로코스트에 매우 비상한 관심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히로시마와 아우슈비츠
폴란드 크라크푸에서 발간되는 일간지 <폴란드 매일(Dziennik Polski)> 1963년 1월 29일자는 흥미로운 기사를 하나 싣고 있다. '자유의 첫째 날'이라는 제목으로 1~2면에 걸친 이 기사는 4명의 일본 반핵평화활동가가 아우슈비츠 해방 18주년 기념식에 참석했다는 소식을 전했다. 히로시마부터 아우슈비츠까지 8개월 동안 아시아와 유럽의 23개 나라를 거쳐 3만 3,000km에 이르는 이들의 긴 여정을 기사는 '히로시마-오시비엥침 평화행진'이라고 일컫고 있다. 오시비엥침은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강제수용소가 자리 잡았던 폴란드 실롱스크 지역의 소도시 이름이다. 기사에 따르면, 전 세계에서 히로시마와 아우슈비츠는 수십만의 무고한 사람을 죽인 잔인한 역사의 상징이다. 또 1963년 1월 27일 아우슈비츠 해방 기념식에서 처음 만난 두 도시의 기억은 전 인류에게 전쟁의 비극이라는 경종을 울릴 것이었다. 히로시마-아우슈비츠 평화행진 일본 대표는 원폭 투하 당시 폭탄의 열기에 녹아내린 히로시마의 기와 조각을 가져왔고, 아우슈비츠 기념관 측은 그 답례로 홀로코스트 희생자를 소각하고 남은 재를 항아리에 담아 기증했다. 기념식 참석자들은 "Nigdy więcej Hiroszimy(히로시마는 다시 없게!)"와 "Nigdy więcej Oświęcimia(아우슈비츠는 다시 없게!)"를 연호했다." (희생자의식 민족주의 - 211-212p)
"히로시마-아우슈비츠 평화행진의 선한 의도는 출발지점에서부터 냉전 체제의 차가운 정치적 계산에 어그러지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평화행진의 한계를 냉전 체제 탓으로 돌려서는 곤란하다. 참가자들이 가진 인식 지평의 문제도 결코 무시할 수 없다. 세계 최초의 원폭 희생자의 기억을 안고 아우슈비츠로 출발한 참가자들은 아시아의 기착지인 싱가포르에서 생각지도 못했던 문제에 봉착했다. 1962년 5월 이들이 도착할 무렵 싱가포르 해안의 한 건설 현장에서 일본군에게 대량 학살된 중국계 주민의 유해가 수백 구 발굴된 것이다. 아시아 이웃들에게 저지른 일본군의 잔학행위를 잊었던 행진 참가자들에게 이 사건은 충격이었다. 도시를 가득 메운 반일 감정의 공기에 놀란 평화행진의 리더 사토 교츠란 중은 일본 제국주의의 희생자를 애도하는 불공을 드리고, 나아가서는 행진 참가자 모두가 유해 발굴 작업에 참여했다. 이들은 일본군 만행의 희생자 유족들에게 사죄하면서도 동시에 히로시마 희생자의 명분을 설파해야 하는 어려운 과제 앞에서 난감해했다. 자신들을 제2차 세계대전의 가장 큰 희생자라고 생각했던 히로시마의 희생자가 싱가포르에서 자신들에게 희생당한 이들을 만난 것이다. 히로시마와 아우슈비츠 희생자의 연대를 향한 평화행진이라는 메세지는 세계 곳곳에서 격찬을 받았지만, 이처럼 싱가포르 에서 삐걱거리기 시작했다. 이들이 '일본=원폭 희생자'라는 프레임이 갇혀 일본군의 잔학행위와 아시아 이웃 희생자들을 잊고 있었다는 게 드러났다." (희생자의식 민족주의 - 218-219p)
이 희생자의식 저자인 임지현 교수가 당시 이 내용을 봤을 때의 기억을 회고했습니다. 당시 사토 교츠란 중이 이끌던 일본 평화 행진가들은 싱가포르 희생자 유해발굴에 가서야 그때 일본군의 잔학행위가 있었다는 것을 '처음' 알고 거의 쇼크에 빠져들었다 (인지부조화). 당연히 자신은 일본인들도 일본군의 잔학행위를 알고 있을거라고 생각했지만 일본인들은 진짜로 자신들을 서구 제국주의의 철저한 피해자이고 그것에 대항하여 대동아 저항 전쟁을 벌였다는 서사를 믿고 있었고 동시에 그 서구 제국주의로부터 해방전쟁을 수행(?)한 일본군이 아시아 이웃에 대한 잔학행위를 했다는 것을 이 일본 평화행진단이 알게 되면서 집단 쇼크상태를 일으킨 상황에 대해 임교수는 그 모습에 자신이 반대로 충격을 받았다라고 회고를 했습니다.
"1995년 종전 50주년을 기념한 다양한 텔레비전 프로그램에 대한 분석이 보여주듯이, 일본의 경우에는 원자폭탄의 기억이 공습의 기억을 압도했다. '세계 유일의 피폭국'이라는 일본의 고유성은 가해의 역사가 피해의 기억으로 전도되기에 더 유리한 조건이었다. 일본이 인류 역사에서 유일한 피폭국이었다는 사실은 아시아 이웃에 대한 일본의 전쟁범죄와 가해 행위를 가리는 '가림막 기억(screem memory)'으로 작동한 측면도 있다. 원자폭탄 투하는 때때로 아우슈비츠와 비견되어, 일본의 민족주의 우파에게 아우슈비츠와 히로시마는 백인 인종주의의 가장 대표적인 전쟁범죄라는 생각이 강했다." (희생자의식 민족주의 - 임지현 277페이지)
"일본인을 원숭이와 기생충에 비유하고 '하등 인간'으로 취급하는 미국의 인종차별주의적인 '하얀 태평양 (White Pacific)'에 맞서 싸웠다고 해서 아시아 이웃에 대한 일본의 패권주의가 정당해지는 것은 아니다. 일본 군부의 오만과 독선, 인종주의적 차별 때문에 많은 아시아인이 일본 제국에 등을 돌렸다." (희생자의식 민족주의 220p)
"아시아 이웃에 대한 일본의 오리엔탈리즘은 일본 제국과 아시아태평양 전쟁에 대한 일본의 문화적 기억을 구성하는 서사적 틀이자 얼개였다. 아시아 이웃에 대한 우월감의 밑에는 일본은 서양 제국주의에 의해 밀려나고 주변화 된 '서벌턴 제국주의'에 불과하다는 연민이 강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희생자의식 민족주의 221p)
"침략과 학살을 부정하는 일본 우익의 민족주의는 희생자의식과 동전의 양면이었다. 하야시 후사오(林房雄)의 논리에 따르면, 아시아 민족이 서양 식민주의의 억압에서 벗어나는 데 이바지한 '대동아전쟁'은 1853년 페리 제독의 개항 이래 일본이 서양에 맞서 싸운 '약 1세기에 걸친 하나의 긴 전쟁'의 일부인 것이다. 그의 '동아 백년전쟁'론은 잔 다르크의 '영불 백년전쟁'에서 모티브를 따왔는데, '하얀 태평양'을 건설하려는 미국의 야망과 '아시아 방위'에 대한 일본의 열정은 태평양을 두고 부딛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태평양은 미일간의 도버 해협이었고, 미일전쟁은 일본의 비장한 운명이었다. 일본의 민족주의와 국민국가론에 대한 가장 매서운 비판자 중 한 명인 니시카와 나가오(西川長夫)가 날카롭게 지적했듯이, 메이지 초기 일본은 저항 민족주의로 출발했다. 일본의 저항 민족주의는 청일전쟁과 러일전쟁 그리고 조선 침략을 거치면서 순식간에 식민주의로 변화해갔지만, '서양 식민주의의 희생자'라는 의식은 일본의 기억 문화를 구성하는 주요한 축이었다. 메이지 유신을 인도의 세포이 반란이나 중국의 태평천국운동과 같은 반열에 놓고 서양의 제국주의에 맞선 아시아 민족의 반제민족투쟁으로 재구성하는 해석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된다. 1905년 러일전쟁에서 일본의 승리는 서양 제국에 맞선 주변부의 저항 민족주의자들에게 희망의 방아쇠를 당겼다. 모한다스 간디(Mohandas Gandhi)가 남아프리카 한구석에서 일본의 승리를 자축할 때, 라빈드라나트 타고르(Rabindranath Tagore)는 학생들을 이끌고 승리 행진을 벌였다. 오스만제국의 병사 무스타파 케말(Mustafa Kemal), 영국의 사립학교 해로에 다니던 소년 자와할랄 네루(Jawwaharlal Nehru), 중국의 국부 쑨원, 이집트의 무스타파 카밀(Mustafa Kamil) 등에게 일본의 승리는 도미노 효과를 일으켜 서양 제국의 붕괴를 알리는 신호탄으로 받아들여졌다. 듀보이스는 러일전쟁에서 일본의 승리 이후 세계 각지에서 분출하는 '유색인의 자긍심'에 대해 말했다.
일본의 저항 민족주의적 관점에서 보면, 하야시 후사오의 백년전쟁론이 새롭지만은 않았다. 1931년 만주사변을 계획하고 실행한 관동군 작전주임참모였던 이시와라 간지(石原 莞爾)는 이미 1927년부터 미일전쟁의 필연성을 확신했다. 미일전쟁 불가피론은 1920년 캘리포니아주에서 통과한 제2차 배일 토지법, 1924년 미국 의회를 통과한 일본 이민자를 배척하는 이민법 등 미국에서 일본인 배척을 위한 법적 체계가 점차 틀을 갖추어가자, 그에 대한 반동으로 제기된 측면도 크다. 일본 각지에서 반미 항의 집회가 열렸고, 대미 개전을 주장하는 목소리가 커졌다. 이시마루 도타(石丸藤太)의 <일미전쟁, 일본은 지지 않는다>(1924)를 비롯해 <일미일전론>(1925) 등의 책이 잇달아 나와 반미감정을 부추겼다. 이시와라 간지는 만주사변 당시 이미 만몽 문제는 미국을 격파하겠다는 각오 없이는 해결될 수 없다고 역설하고, 미일 전쟁은 피할 수 없는 세계사의 필연이라고 주장했다. 이시와라 같은 일본의 민족주의자에게 "미일전쟁은 단순히 태평양의 정치적 패권을 둘러싼 항쟁이 아니라 인류사상 수천 년에 걸쳐 진보해온 동서양 문명이 일본과 미국을 각각 챔피언으로 내세워 최후의 자웅을 겨루는 싸움"으로 받아들여졌다. 여운형과도 가까웠던 일본의 아시아주의자이자 우익 국수주의 운동의 지도자 오카와 슈메이(大川周明)에 따르면, 앵글로 색슨의 패권에 대항하여 새로운 세계질서를 구축하려는 일본과 미국의 충돌은 불가피한 역사적 운명이라고 역설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된다.
흥미로운 것은 아프리카계 미국인으로 마르크스주의에 인종 문제를 본격적으로 제기한 듀보이스 또한 일본의 만주 점령으로 아시아에서 백인의 지배 전략은 종말을 맞았고 일본이 아시아와 유색인의 지도자가 될 것이라 전망했다는 점이다.
(...)
이는 비단 듀보이스 개인의 판단은 아니었다. 세네갈 등의 아프리카 민족주의 지도자들은 '더 검은 민족의 국제연맹(International League of Darker People)'을 결성하면서 일본과의 연대를 추진했다. 존 에드워드 브루스(John Edward Bruce) 등 아프리카계 미국인 작가들은 다가오는 미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는 소설을 발표했다. 소설은 일장기가 필리핀과 하와이의 항복한 미군 요새에서 흩날리는 장면을 그려 미국 정보당국을 긴장시켰다." (희생자의식 민족주의 242-244p)
일본 우익 내셔널리스트들은 유대인의 홀로코스트 희생과 일본의 원자폭탄 희생은 백인 인종주의 때문이라는 내러티브.
우리 일본인과 유대인이야말로 각각 원자폭탄과 홀로코스트로서 백인 인종주의의 공동 희생자이다.
일본 우파 뿐만 아니라 일본인들의 과거에 대한 집단 기억은 자신들의 원자폭탄의 희생의 기억을 끊임없이 유대인 홀로코스트를 소환하여 같이 병치시키는 기억 문화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과 일본인들이 백인 인종주의에 가장 큰 희생자였다라고 만들어나가는게 일본 기억문화 저변에 깔려있습니다. 일본에선 90년대까지 안네의 일기가 400만권이 팔리고 홀로코스트 기념관도 5곳이나 존재합니다. 일본인들은 안네의 일기를 히키아게 모노가타리(히키아게샤 2차대전 일본 본국으로 귀국 피난가는 피난민)와 연결이 되는 면도 있고 그래서 공간적으로 일본과 전혀 상관없는 홀로코스트에 대한 기억을 끊임없이 소환해 내는 것이 다른 역사의 비극적인 사건의 희생자(유대인)에 대해 그들과 같이 같은 편에 서겠다는 연대(solidarity) 의사 표현일 수도 있지만 또다른 한편은 그들(유대인)을 끌여들여서 우리(일본)와 그들(유대인)만이 진짜 희생자였다. 그렇게 보면 한국인들이 자꾸 일본 제국주의의 희생자였다는 이야기는 코에 안차는 이야기가 되어버립니다.
니들 원자폭탄이나 맞아봤어? 너흰 일제시대 시절에 근대화도 되고 그랬는데 왜그래? 라는 식의 것들이 일본 집단 기억문화에 밑바닦에 깔려있습니다.
YTN 2015년 4월 28일 보도
미국 워싱턴 홀로코스트 기념관 참배...아베 '이중 행보' 계속
https://ytn.co.kr/_ln/0104_201504281413260158
중앙일보 2015년 6월 19일 보도
"세계 평화 공헌하겠다" 아베가 이스라엘 예루살렘의 홀로코스트 기념관에 간 까닭
https://www.joongang.co.kr/article/16972450#home
일본의 2차대전 대동아전쟁 신화..
일본 우익 민족주의자들의 2차대전 서사는 [守(まも)る, 마모루]. 당시 일본군들은 자신들의 가족을 '지키기' 위해, 사랑하는 이를 '지키기' 위해, 서구 제국주의로부터 아시아를 '해방'하기 위해 목숨을 바치며 쓰러져갔다는 내러티브.
이 서사를 뒷받침하는 영화 '나는 당신을 위해 죽으러 갑니다 (俺は、君のためにこそ死ににいく) 2007' 이 영화 시작 부분에서는 이시하라 신타로 도쿄도지사의 메시지가 나오는데, '슬프지만 아름다운 이야기', '사나이들의 아름답고 늠름했던 일본인으로서의 모습' 같은 문장이 나옵니다.
하지만
"요시다 유카타(吉田 裕)<일본군 병사- 아시아 태평양 전쟁의 실체(日本軍兵士―アジア・太平洋戦争の現実) 2017.12.20 출간>의 연구에 따르면, 300만이 채 안되는 일본군 전사자 중 무려 61%퍼센트에 달하는 180만 명이 굶어 죽었다. 일본군 지휘부는 태평양의 작은 섬들에 고립되어 있던 일본군 병사들을 헌신짝 처럼 버렸다. 일본군의 허술한 보급체계야말로 일본군 병사들의 가장 큰 적이었던 셈이다. 요시다가 밝힌 180만이라는 아사자 수는 '국가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게 병사의 본분'이라며 전사자들을 칭송한 '익찬체제'와 그 이데올로기의 허구성을 폭로하는 것이기도 하다. '옥쇄'작전으로 적진에 뛰어들어 장렬하게 죽어간 병사나 봄바람에 떨어지는 벚꽃처럼 아름답게 스러져간 카미카제 특공대 등으로 그려진 일본군 전사자의 이미지는 많은 부분이 이데올로기적 효과이다.
눈보라처럼 휘날리며 떨어지는 사쿠라 꽃잎같이 아름답게 스러져간 애국적 청춘들 그리고 야스쿠니 신사의 명부에 든 아들과 남편을 자랑스러워하는 유족들 같은, 일본 시민들의 공식적 기억은 동료의 인육을 먹다 비참하게 굶어 죽은 180만이라는 아사자 수치 앞에서 여지없이 그 가식이 벗겨졌다. '조국과 민족을 위해 장렬하게 목숨을 바친 전사자'라는 공식 기억은 병사들의 식인이라는 처참한 현실을 감추는 장치 였을 뿐이다. (기억전쟁 12-13P)"
카미카제로 죽을 때 “덴노 헤이카 반자이” 외친 전우 못 봐 … 모두 “오카상(엄마)” 불러
중앙일보 2015.05.04
https://www.joongang.co.kr/article/17726919#home
4. 한가지 아이러니... 일본은 1965년에 한국에 징용 배상을 했었습니다만 그러나 과거사 반성 모범국이라는 독일의 강제노동에 대한 배상은 1999년에 와서 이뤄집니다... 1998년 독일 연방의회에서 독일 경제계가 동참하는 피해배상 재단 설립이 결의됐고, 1999년 12월 나치정권 당시 강제노역의 배상과 관련한 합의가 발표됐습니다.
5. 마지막으로 일본의 반서양 민족주의 모습을 보면 현재 러시아 네오나치 파시스트 (민족 공산주의자) 알렉산드르 두긴의 문명의 (러시아 vs 앵글로색슨) 충돌 전쟁 주장과 러시아의 반서양 반영미 주장을 통한 우크라이나 침략 전쟁이 얼마나 일본의 2차대전 논리와 비슷한지 알게되어 전 매번 놀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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