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카르트의 악마'고 '통 속의 뇌'고 그런 것이 존재할 수도 있다라는 가능성을 완벽히 부정할 수는 없지만 명확하게 확률로 따질 수 없고 통상적 관점에서 고려할 필요가 없는 문제임. 사고실험을 100%인 것처럼 믿고 현실에서 그대로 따르려고 한다면 로코의 바실리스크도 무서워 하시겠네? 얼른 가서 로코의 바실리스크 얘기를 해드리고 인공지능 연구나 하시라고 하셈.
데카르트는 우리의 감각이 불완전하므로 연역법을 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치기 위한 사고실험을 펼친 건데, Cogito ergo sum라는 선언을 하면서 생각하는 나는 존재한다는 명확한 기반(뭐 이건 데카르트의 생각일 뿐이지만)을 얻었음에도 여전히 감각의 불완전이 해결이 안 됐음. 그래서 무안단물 식으로 당대 유럽인답게 신을 꺼내서 어떻게든 해결한 거고. 근원적으로 '참 신'이라는 해결책은 당대 유럽인들의 사고의 기반이 되던 기독교에 빗댄 다소 어이없는 해결책에 불과함.
신도 악마도 존재를 증명할 수 없는 존재인데 왜 떨어야 하는가? 만약 내가 "제 집에는 투명한 용이 있는데 얘는 사람을 잡아먹습니다. 잡아먹히기 싫다면 돈을 내세요!"라고 한다고 치자, 이 말의 가능성을 완전히 부정할 수 있겠음? 무게를 재보자고 하면 "이 용은 영적인 존재라서 무게를 잴 수 없어요"라고 하고, 증거를 대보라고 하면 "어떤 사람들이 진정으로 믿는 신성한 고서에 적혀있는 내용이에요"라고 해서 모든 반박을 피하는 거임.
헛소리를 하면서 구체적인 증명은 모두 피하고 권위에 기대면서 있다는 가능성만 제기하는 거지. '참 신'이고 '데카르트의 악마'고 '통 속의 뇌'고 다 마찬가지임. 사고실험은 가설을 증명하는 도구일 뿐이며, 이를 진정 믿고 현실에서 따르고자 한다면 언제나 입증책임이 존재한다. 왜 데카르트의 악마는 두려워 하면서 로코의 바실리스크나 투명한 용은 왜 두려워 하지 않는가? 왜 악마를 두려워하여 신을 따르면서도 용을 두려워하여 나에게 돈을 주지는 않는가? 결국 권위와 전통에 기대는 오류일 뿐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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