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학이나 신을 자기 자신을 속이지 않는 절대적 원리로 파악하고자 하는 시도는 [말이 자기 자신을 속이지 않는다]는 믿음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즉 언어의 [보편적 상수]를 믿거나, 보편적으로 통용될 수 있는 [추상적인 언어]를 믿는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이러한 언어를 통해 과학적 연구를 정초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가지게 됩니다
그런데 이 모든 희망은 너무도 안이합니다. 이는 철학하며 사용하는 논리며 언어가 왜 보편적 상수를 개입시키는지, 보편적 상수가 가정되기 전까지 언어가 어떻게 발달되어왔는지에 대한 어떠한 통찰과 숙고도 거치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벤베니스트에 의하면 언어는 주체들이 의사소통을 하기 위한 도구이므로, 철학적 언어나 논리는 주체보다 선행하는 것이 아닙니다. 한편 오스왈드 뒤크로에 의하면 주체 역시 사회적 구조보다 선행하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이 두 언어학자의 의견을 비판 없이 받아들이지는 않습니다. 제 생각엔 주체나 사회구조가 언어에 선행했다고 보기 보다는, 동시적이라고 하는 것이 덜 독단적인 답변이겠지요. 아무리 언어의 범위를 넓히고 사회규범들을 언어의 한 부분으로 포섭시키고 싶더라도 신이나 논리항등 언어의 [지시대상]과 그러한 언어를 발생시키게 된 계기인 <말하는 행위와 그 효과>는 항시 동시적으로 작동하고 있습니다.
언어가 아무리 메타적이고 추상적일지라도, 언어가 심지어 사회구조나 사회규범등 넓은 의미의 언어를 다룩 되더라도 언어가 상시 변수들을 포착해서 상수로 바꾸는한 언어는 변수라는 자기 외부 요소를 가질 수 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메타적이고 추상적인 철학적 언어의 한 부분에 불과한 데카르트의 <회의의 철학> 역시 자기 외부를 가질 수 밖에 없습니다. 다시 돌아가 봅시다. 데카르트의 절대적 회의는 세계 전체는 커녕 자기체계 외부에 있는 변수들을 상수로 추출해낼 뿐입니다. 이 상수의 기준과 변수를 연관시켜보며 자기 체계를 변형시키지 못하는 무력함에 불과합니다.
최종 결론입니다. 데카르트를 통한 이지선다는 철학적 언어를 통한 전개일 뿐이며, 이 외부에 어떠한 외부도 존재하지 않으리라는 독단은 언어가 변수를 상수로 추출해내가는 과정과 기준에 대해서 그들이 그토록 강조하는 질문과 회의를 허용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자기모순적입니다. 상수와 변수가 실시간적으로 영향을 주고 받는다면 어떠한 불변항이나 상수도 자기스스로를 보장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회의적이라고 주장한들, 이 회의는 다름아닌 그들의 철학적 언어안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일이므로 타자취급을 할 수 없습니다. 즉 자충수가 됩니다. 이제 데카르트주의자는 총체적이라는 말에 의존하는 자기의 철학이 총체가 아님을 받아들이거나, 자기 자신이 총체적 회의주의자임을 받아들여야 하는 이지선다에 빠지게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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