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에 충실하라. 있는 그대로의 나 자신을 사랑하라.
마감에 쫓겨 클럽 안에서도 타자기 앞에 앉아 있지만 (would-be) 연인의 춤추는 모습으로 시선을 돌리기도 하고 잠시 원고는 잊고 춤이나 추자는 친구의 유혹에 못이기는 척 따라 나서지.
그런데 현생 한세주의 시간은 분 단위로 쪼개져 값이 매겨져 있어. 빼곡한 스케줄 속엔 춤을 출 시간도 노래할 시간도 연인과 사랑을 나눌 시간도 친구와 어깨동무 할 시간도 없지.
개인의 시간은 사라진 채 철저히 자본에 잠식된 시간.
그렇게 시간은 비인간화 되어 어느덧 한세주라는 인간, 알맹이, 기의는 사라져 '유령' 같은 존재가 되고 한세주라는 이름, 껍데기, 기표만 남아서 자본주의 시스템의 충실한 톱니가 되지. 그 껍데기 속을 채울 알멩이가 굳이 한세주가 아니어도 되는.
처음엔 한세주라는 이름과 한세주가 결합되어 있었을 테지만 어느 순간 갈지석 말 대로 상품가치가 있는 건 (한세주가 아니라) 한세주라는 이름이 되어버렸으니까.
모더니즘(근대)의 시대 휘영도 시계를 손에 들고 십분삼십분을 외치지만. 휘영의 시계가 바늘의 형태로 60칸을 물리적으로 돌아가는 아날로그 형식이라면 세주의 그것은 0과 1이 정신없이 무한반복되는 전자(이진법) 형식.
이 드라마는 글쓰기와 함께 시간에 대해서도 생각을 유도하는 것 같아.
상품으로서의 글쓰기, 위대한 글쓰기
자본으로서의 시간, 인간과 그 인간이 추구하는 대의, 이상으로서의 시간.
내가 필력이 달려서 두서없이 끼적이기만 했는데 누가 이 주제로 제대로 글 써줬음 좋겠다.
난 생각없이 봤나부다 ㅠ정말 그러네 ㅋㅋ 잘 읽었어.
좋은 주제구나 그러고보니 늘어지게 편집하는것도 그런것과 연관있을까 순간 순간 떠오르는 과거씬에 몰입하는 순간을 길게 처리하는게 세주의 바쁜 현실과 대비시키려는 의도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