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점심에 짱깨 먹으러 가자! 상해대반점 꼽배기가 천오백원이래!"


신나서 외치는 친구들 속, 소년 B는 남몰래 슬그머니 반지갑을 열어본다.

지갑 안쪽 전화카드와 미용실 명함 사이 돌돌 말아 숨긴 오천원짜리 한 장.

들킬세라 친구들을 슬쩍 돌아보다 시무룩한 얼굴로 나, 나는 돈 없는데, 소심한 목소리가 흐른다.


'쟤는 왜 매번...'


하지만 착하고 명랑한 어린 친구들은 금세 웃으며 각자 삼백원씩 보태 B를 함께 데려간다.



2.


소년 B는 주머니 속에서 최신형 삐삐, 윤기가 흐르는 빨간 어필 미니를 만지작거린다.

그리도 아끼고 모으고 모아 저금통을 깨서 산 예쁜 삐삐가 감촉도 그리 좋을 수가 없다.

송송 분화구가 난 피부와 억울하게 눌린 눈매와 달리 이것은 참도 매끄럽고 선명한 것이,


'이 빨간 삐삐만 있으면 잘 나가는 친구들의 선망을 사고 여자친구도 생길테지?'


그런 소망을 담은 삐삐를 B는 짜장면 그릇 옆 테이블에 슬쩍 꺼내 놓는다.

시끌벅적 한참 침 튀는 소리를 내며 짜장면을 맛있게 먹던 친구들의 눈에 B의 삐삐가 들어온다.


'어? 저거 비싼건데.'


친구들의 눈은 자연스레 삼백원씩 모아 값을 치뤄준 B의 얼굴로 향한다.

어딘지 모르게, 무슨 말이라도 꼭 듣고 싶은 듯, 무언가를 기대하는 눈초리. 흐뭇한 얼굴로 기다리는 소년 B.

화기애애하던 친구들 사이 오가던 말소리가 사라진다.

침묵한다. 친구들도. 그리고 삐삐도. 이튿날도, 그 다음 날에도, 일 년 후에도.


점심시간이 되면 공중전화기에 길게 줄을 서서 음성사서함을 확인하는 친구들 사이,

B도 울리지 않은 빨간 삐삐를 꼭 쥐고 빈 사서함을 확인한다.

없는 메세지를 듣는 척 한참 수화기를 들고 있던 그는 스스로에게 전화를 걸어 답장을 남긴다.


"어, 친구야. 바빠서 늦게 확인했다. 학교 끝나고 당구장에서 볼까?"


끊고, 또 자신의 번호를 눌러 음성을 남긴다.


"나야. 예쁜이. 재밌게 지내고 있지? 나는 지금 점심시간인데..."


스스로가 스스로에게 녹음을 남기며 B는 뿌듯한 표정을 꾸며짓고는 다음 차례에 공중전화를 넘긴다.


"미안. 내가 너무 오래 썼지?"



3.


삐삐는 스마트폰이 되고 짜장면은 5천원이 된 지금, 소년 B는 그 때의 그 상해대반점이 있던 자리에 서 있다.

빨간 삐삐 대신 까만 도그마를 쥐어잡은 채 잠시 삶을 돌이켜본다.

B는 괜찮다.

너무 급하다며 100만원만 잠시 빌려달라던 친형의 부탁을 거절했던 것도,

하나밖에 없는 친구의 결혼식에 가지 않았던 것도 후회하지 않는다.

100만원도 결혼식 축의금도 그의 계좌에 그대로 남아있으니까. 계좌에 적힌 숫자는 변하지 않으니까.

형제의 우애도 친구의 우정도 변하게 마련인 것을.

손에 꼭 쥔 모스트 탈론 핸들바의 감촉이 탄탄하다.

그는 미련하지 않게 살았다.

상해대반점에 함께 있던 옛 친구들을 떠올려본다.

남몰래 찾아본 인터넷 SNS로 띄엄띄엄 유추해보건대 넉넉하니 잘 살고 있는 이는 없다.


'어차피 필요 없는 친구들이었어.'


오래간 말을 하지 않고 살아 말라 붙어버린 입술이 잘 떨어지지는 않는다. 소리내어 다시 말해본다.


"엋피 피럽는 친구들었어."


습관이 붙어있다. 옛 습관.



4.


과거, B는 결국 발각되고 말았었다.


"쟤가 여자친구가 있을 리 없어!"


매일 그리 외치고 다니던 못된 친구가 하필 그의 공중전화 줄 바로 뒤에 서있던 것을 놓친 까닭.


"나 오늘은 안 보고싶었어? 난 자기가 너무 보고싶어서 수업도 잘 못듣고..."


그렇게 스스로에게 남기는 녹음을 마친 뒤 수화기를 넘겨받은 그놈은 공중전화의 재다이얼을 눌렀더랬다.


"야! 이 병신새끼 지가 지 사서함에 남기는 거였어!! 아 병신!!"


뒤에 줄 선 친구들을 다 불러서 일일히 재다이얼을 누르며 확인시켜주곤, 얼굴이 벌개져 고개를 푹 숙인 B를 발로 걷어찼다.

확인해본 다른 친구들도 하나둘씩 B를 둘러싸고는 숨이 막혀라 웃으며 삿대질을 거듭했다. 병신. 병신.

300원씩 내주던 친구들도, 간혹 그를 챙겨주던 친구들도, 아주 드물게 그의 빨간 어필 미니를 칭찬해주던 친구들도.

수십일 간 스스로에게 음성을 남기며 지켜왔던 앙상한 세계가 무너지고 깨어졌다.


"아 아니야. 아니야! 이 벼, 벼."


"뭐?"


"이 볏."


결국 주먹이 날아들었다. 까닭 모를 주먹과 발길질이 여기저기서 날아들었다.

B는 원통하고 분했다. 내가 뭘 잘못했길래. 내가 무슨 피해를 줬길래. 이이, 이 볏. 이 볏들.

그러나 끝까지 입술은 떨어지지 않았다.



5.


40년. 세상은 달라졌다.

B에게서 마음대로 떠나가버렸던 소통의 창구가 이제는 지천에 열려있는 놀라운 세상이 열렸다.


"저 왔숴여~"


추천을 하나. 핸드폰으로 추천 하나 더. 다른 TV케이블과 인터넷을 쓰는 옆 호실로 뛰어가 하나 더.


"형님 오쉈습니까~~!!"


"로싸갤 1티어 고수형님!!!"


익명의 세계가 아닌가. 이 세상에는 B를 걷어차던 못된 친구와 같은 이는 없을 것이 아닌가.

지독히도 고독했던 공간이 컴퓨터만 키면 마술처럼 뒤바뀌고 마는 것을 만끽하던 B는 헤 웃는다.

마음껏 꾸며낼 수 있는 이 별천지와도 같은 세계를 이제는 누구도 알지도 망치지도 못하리라.


"흐흐흐, 방구뽕이다. 볏."


잘 떨어지지 않는 짧게만 이어지는 말들을 흘려내며, 그는 혼자뿐인 세상에 하지 못한 말들을 마음껏 담아낸다.

마눌 1호에여. 얘는 2호.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추종자를 상상하며 스스로를 섬겨본다.

톱식이, 그래 너는 톱식이가 좋겠다.

또 다시, 반드시 세상에 있어야할 것만 같은 추종자를 상상하며 스스로를 달래본다.

너는 음. 아무래도 좋지. 마음껏 만들어낼 수 있는데. 누가 알겠나.


한심하게 지켜보는 와이프도, 괜히 소란피우며 손 타게 만드는 아이들도, 쓸데없이 연락해서 귀찮게 하는 형제도 친구들도 없는 세상에 B는 빠져든다.

울지 않던 빨간 삐삐가 제3세계 어느 쓰레기더미 속에서 눈물을 흘린다.

누구와도 함께 달린 적 없는 검은 자전거에 쓰여진 PINARELLO 데칼도 빛을 흐린다.

한 소년이 선망했던 세상과의 통로가 여전히 닫힌 채, 작고 고독한 집으로, 방으로, B의 머릿속으로 좁아들고 좁아든다.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타자 치는 소리만이, 이따금씩 홀로 웃는 웃음만이 들린다.


"볏, 볏들. 볏클럽 흐흐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