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36살 A씨는 상당히 멜랑콜리하다.


그것은 조금 전 원룸에 오는 길, 골목을 점거하고 담배를 피우는


일단의 고등학생 - 무시무시한 일진이 분명한 - 들의 가운데를


자전거에 올라탄 채 마치 모세의 기적마냥 당당히 가로질러왔기 때문.


말은 하지 않았지만 아마도 그 못된 청소년들의 일탈에 따끔한 가르침이 되었으리라!


그리 생각하며 A씨는 20년전을 잠시 떠올린다.





그는 학창시절 대두라 불리웠다.


실은 그리 머리가 크지는 않았지만 그는 매일 책상에 이마를 대고 엎드려 잤고


그의 이마에는 교복 소매 섬유의 자잘은 격자무늬와 함께 단추 자국이 빨갛게 나곤 했기에


머리가 무거워서 그렇다, 대충 그런 이유로 대두라 불리웠다.


실지로 잠을 잔 것은 아니었다.


수업시간에는 혹시나 선생님의 지적과 질문에 대답을 못해 웃음거리가 될까봐


쉬는시간에는 혹시나 어느 쾌활한 교우가 말을 걸기라도 하여 난처한 상황이 될까봐


그는 머리가 무거운 대두이기를 자처했다.


길고 지리한 수업시간을 버티기 위해 그가 찾아낸 것은 외움이었다.


'라피에르, 룩, 리들리... 피나렐로, 콜나고, 비앙키, 윌리어, 치렐리, 파쏘니..'


'랜스 암스트롱, 크리스 프룸 , 마르코 판타니... 나이로 킨타나, 피터 사간...'


그런 것들을 중얼거리며 그는 흐르는 시간에 저항했다.


그러나 그의 인생이 마냥 애달프고 가냘프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수업이 끝나거든 그는 낡은 철제 자전거, - LESPO 라는 글자를 긁어낸 곳에 TREK 라는 글씨를 매직으로 굵게 칠한 - 를 타고


흙길을 달렸다.


다른 친구는 필요 없었다. 귓가에 스치는 시원한 바람과 매일 질리지도 않고 짖어대는 개 농장의 도사견들, 떼지어 소용돌이를 일으키는 하루살이들,


그런 것들이 그를 매일 반겨주는 그의 친구였다. 매직 트렉, 그것이 열어주는 세상이란 오로지 그와 친한 것들만이 가득한 별천지였다.


혼자이지만 홀로가 아닌 그는 행복했다.


" 나 샀어."


반 친구, 엎드려 자는 그의 뒷통수를 가끔 쎄게 후려갈기는 것만이 접점이었던 그 친구가 번쩍번쩍한 진짜 TREK을 선보이기 전까지는.


어린 A는 그날 매직 트렉을 하수가 흐르는 개천에 내던졌다.


2천 원 용돈을 주는 어머니께 울며 악을 썼고 아버지의 20년된 녹슨 포터를 발가락이 부러지도록 걷어찼다.


가출할까, 신세계로 떠나 일해서 돈을 벌어 진짜 TREK을 살까. 그러나 소심한 A는 그러지 못했다.


조금 더 오랜 시간 엎드려 있었고 조금 더 말을 잃었고 조금 더 맹렬히 외웠다.





옛 생각을 마친 A는 5평 남짓 원룸의 사분지 일쯤은 차지하는 자전거를 본다.


오롯한 데칼 TIME. 비록 찾고 찾아 크랙난 중고를 할부인계받아 데려온 녀석이지만 참으로 나이스한 녀석이다.


그는 그를 버킹엄 공작이라 불렀다. 귀족적이지만 진보적인 자태, 프랑스 리옹 출신이라는 공통점까지.


오늘 버킹엄을 타고 지나던 그를 사람들은 알아보았을까.


스페셜라이즈드, 트렉, 캐논데일, 그런 싸구려 북미 감성의 자전거들과 구별하여 그의 기품을 확인하였을까.


문득 화가 치민다. 자부심 어린 그의 얼굴이 슬쩍 일그러진다.


그가 일하는 편의점에 스컬트라 5000을 타고 나타났던 쫄쫄이들이 생각난 까닭이다.


자전거에 대해 하나도 모르는 주제에 그들은 라파니, 파노말이니, 하는 대화를 나누었고


자전거에 대해 하나도 모르는 주제에 그들은 한 손으로 카드를 내밀었으며


자전거에 대해 하나도 모르는 주제에 그들은 거만하게 딸칵거리는 클릿 소리를 내며 사라졌다.


무엇보다 그들은 편의점 바깥에 세워놓은 버킹엄을 알아보지 못했다.


감히 대만제 제품을 타는 주제에 불란서의 유구한 기품을 공경하지 않고 사라졌다.


A는 증오한다. 자이언트, 메리다 따위를 타는 이들의 당당함이 메스껍다.


위아위스, 첼로를 타는 이들이 같은 도로를 달리는 것이 괴로웠고


아팔란치아같은 자전거라도 볼 적엔 바닥에 침을 뱉지 않고는 입 속이 찝찝하여 견디지를 못한다.


'자전거도 모르는 주제에.'





그는 원룸의 때묻은 좌식 쇼파에 누워 핸드폰을 켠다.


옛날 매직 트렉이 열어주었던 세계. 현실의 세상과는 구분된 또 다른 세계가 그에게 또 다른 곳에서 열려 있다.


조금 다른 것이 있다면 이번 세계에는 사람들이 있다. 수많은 자알못들이. 그의 지식에 한참 모자라는 신분 낮은 이들이.


몇 개 글을 코웃음치며 내리던 그는 자이언트 자전거에 대한 칭찬글을 보고 얼굴이 사뭇 붉어진다.


감히 그의 앞에서 누군가 자전거를 품평하는 것도, 그 품평의 대상이 대만제 서민 자전거라는 것도 견디기 어려운 일이다.


그는 한껏 거만한 독설을 교훈으로 내려주며 마침표 하나를 찍어둔다.


그리고 현재의 자신을 있게 해준 버킹엄 - 아직도 할부로 한달치 봉급을 앗아가는 - 의 사진을 몇 번 찍어본다.


조금 더 비싸보이도록 몇 번 각도를 조절하다 그냥 접어둔다.


함부로 사진을 올렸다간 자알못들이 고귀한 버킹엄을 마구 품평하며 더럽힐지 모른다.


'나는 아직 신비스럽게 남아있는 것이 좋지.'


그는 스스로의 아이디를 타이핑해본다. 대두. 실수로 영문으로 쳤던 그 글자가 불어마냥 아름답게 쓰여진 아이디.


핸드폰 속의 어느 커뮤니티와 버킹엄을 만족스럽게 번갈아 바라보던 그는 곧 천천히 눈을 감는다.


미소가 떠오른다. 자신은 달라졌다. 교복 소매에 이마를 박고 고개를 들 줄 모르던 대두가 아니다.


이언, 에언, 몇 번 스스로의 신비롭고 고귀한 이미지를 뭐라 발음하면 좋을지 고민하다 편안히 잠든 그의 입술이 절로 움직인다.


'자알못들 주제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