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모입니다 전하!"

"북문 밖에 대소신료가 모여 반정을 선언했다 하옵니다! 검을 씻어 왕조를 바꾼다며 세검정의 결의라 하더이다!"


임금 A는 당상관들이 하얗게 질려 바들바들 떠는 모습을 지켜만 보았다.

다급히 궁을 떠나야 한다 외치는 좌의정, 이미 민심이 모두 돌아섰다며 절망해 주저앉는 이조참판, 숫제 먼저 도망치는 예조판서.

모두가 황망하여 발을 동동 구르는 가운데 임금 A는 침잠하듯 옥좌에 깊이 몸을 묻었다.


"반정이라."


전쟁통으로 왕조가 무너지고 나라가 무너졌을 때 우연히 조선 사람이 아닌 왜인으로 조선 임금에 앉은 A,

조선의 사정은 아는 게 없이 조선의 정사는 돌보는 법 없이 그저 임금의 자리만 지킬 뿐이었던 그는 유약한 허수아비로만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지금 이 다급한 순간 A는 오직 홀로 침착하였다.


"반정이라."


경복궁 근정전 바깥을 힐끗 바라본 A는 가만히 혀를 찼다.

벌써 몇 달째 한결같은 광경, 벌떼와 같은 유생이 몰려들어 한 마음 한 소리로 A의 하야를 부르짖고 있었다.

임금은 대체 어디에 있느냐, 임금은 무얼 하고 있느냐, 정사를 돌본 적이 있기는 한가, 이어지고 이어지는 민중의 준엄한 꾸짖음을 A는 처음으로 귀를 열어 들었다.


"한낱 이름없는 부평초들이."


그러나 유생의 얼굴들을 훑어본 임금 A는 실소했다. 어느 하나 얼굴을 알지 못하는 민중.

그저 그들은 1열 243번째의 유생, 59열 30번째의 유생 등에 불과했다.


"전하, 피하셔야 하옵니다!"

"병판 P가 병사를 이끌고 진격하고 있습니다! 이미 궁 안에 들어섰다 하옵니다!"


짧은 조소를 밀어낸 임금 A는 옥좌에서 천천히 일어섰다.


"진정하라. 내 이 때를 기다렸으니."


허둥지둥하는 당상관들을 향해 가만한 손짓을 내보인 임금은 어전의 계단을 천천히 내려왔다.

당상관들의 사이를 걸어 근정전의 문 밖에 나서기까지,

임금 A는 왕위에 오른 이후 어느 때보다 근엄하고 차분한 걸음걸이로 어느 때보다 위태로운 시간을 당당히 걸었다.

조선을 알기는 아는가, 조선 정사를 돌본 적이 있기나 한가, 대체 왜 저런 자가 조선의 왕노릇을 하고 있는가 -

그 모든 의문에 한꺼번에 대답하듯 당당히도 걸어나간 그는 근정전의 돌계단 위에 서서 앞마당을 향해 눈을 내리떴다.


병조판서 P, 그리고 노론과 소론을 불구하고 그와 뜻을 함께하는 대소 신료들이 수없는 유생들의 앞에 서서 임금을 노려보고 있었다.

하야하라. 왕위를 놓고 내려와라.

이미 하늘을 향해 고했고 수없는 민중의 지지를 얻었으며 하늘의 허락을 얻었다.

용상을 비우고 사라졌던 시간동은 대체 너는 무엇을 하였느냐.


"일단 과인의 과오를 사과한다. 그러나 민중의 뜻이 너희에게 있다고 어찌 장담하느냐. 함께 백성의 뜻을 물어 정함이 어떻겠느냐?"


근정전 앞마당에 모인 모든 이들의 얼굴에 비웃음이 맺혔다. 저잣거리 아이마저도 예상했을법한 답변이 참 궁색하게도 나오는구나.

대꾸할 필요도 찾지 못한 채 그들은 하야하라, 그 한 마디만을 이었다.

임금 A는 더 할 말을 찾지 못한 채 가만히 서 있었고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과인이 미안하다. 그러나 과인에게도 사정이 있었다."


왕조가 바뀔 것은 틀림없었다.

이미 몇 번이나 간신배를 등용하여 나라를 망쳤고, 본인은 나라를 돌보기는커녕 임금의 체면에도 불구하고 백성과 유생을 음해한 임금.

그리고 지금 그를 보다못해 나선 병조판서 P를 비롯한 조선의 기둥들.

이제 어떤 모양새로 임금을 끌어내리고 새 나라를 열어가만이 남았을 뿐이었다.

벌써부터 웃음을 짓는 유생들, 서로의 어깨를 토닥여주는 백성들, 뿌듯한 얼굴로 바람을 맞는 대소 신료들. 근정전은 밝기만 하였다.

어떻게 바뀔 것인가! 어떤 새 나라가 열릴 것인가!

저 작고 얇은 입술은 무슨 치졸한 말을 내어 못난 왕조의 마지막을 고할 것인가.


"먼저 병조판서 P를 영의정에 임명한다."


순간 임금의 입에서 나온 것은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말이었다. 노론의 수장이자 수많은 유생과 백성의 지지를 받는 인망 있는 P, 백성과 하늘의 뜻을 받들어 임금을 갈아치우겠다고 나선 그를 영의정에 임명하겠다니. 그래도 임금의 자리에 앉았다는 자가 그토록 치졸하고 볼품없는 수작을 속보이게 부릴 줄은 그 누구도 생각지 못한 것이었다.

그따위 수작이 받아들여질 리가.

만에 하나 병조판서 P나 노론이 받아들인다 해도 근정전의 반절을 차지하고 있는 소론이 받아들일 리가 없었다.


"그리고 이조판서 U를 우의정에 임명한다."


임금의 입에서는 소론의 수장을 가리키는 말이 이어졌다. 근정전에 모인 인물들의 얼굴에 어린 비웃음이 더욱 짙어졌다. 집어치워! 등의 소리까지도.


"그리고 예조판서 K를 좌의정에 임명한다."

"그리고 정승과 같은 정1품의 벼슬을 만들어 대제학 R을 그 자리에 임명한다."

"병조참판 Y 또한 정1품에 임명한다."

"..를 정1품에.."

"...를..."


반정을 꿈꾸고자 그 자리에 모였던 모든 무리들의 수장이 호명되었다. 더불어 인망 높은 몇 인물까지.

삼정승의 자리에 임명된 것은 모두 일곱.

비웃음이 사라지고 서로의 얼굴을 훑어보고 있는 가운데, 임금은 그리고도 호명을 멈추지 않았다.


"금부도사 G 또한 정1품의 벼슬에 임명한다."


이에는 모두 아연을 금할 수 없었다.

금부도사 G.

그는 매일같이 유생들의 상소문이나 벽보가 있을 때마다 거리를 뛰어다니며 유생들은 모두 후레자식이다,

나라가 망하는 것도 유생 탓, 비가 내리는 것도 유생 탓, 사람이 병드는 것도 유생 탓

이 나라를 위해서 후레자식들을 모두 죽여야 한다며, 스스로 벼슬을 높여달란 말을 밥먹듯이 외치던 인물이었다.

같은 당상관들조차 품위를 지키려 피해다니고, 저 이름 높은 이이나 이황 등의 대학자조차 외면한다는 인물.

순간 모두의 시선이 쏠린 금부도사 G의 얼굴에는 이를 드러낸 미소가 피어올라 있었다.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란 말이오."


유생들의 웅성거림이 이어지고 반정을 위해 모인 이들이 경계하듯 서로를 훑어보았다.

왜인 임금. 조선 최대의 악적이라며 이 자리의 봉기를 야기했던 그는 반정의 주역들과 몇몇 인품 있는 자들을 섞어 삼정승을 팔정승으로 늘려놓았다.

이 얼마나 속보이는 수작인가! 그러나 그들은 안심할 수 없었다.

어쩌면 그 과실을 달게 여길 자들이 있을 지 모른다는 생각.

누구도 제 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하고 누구도 아무 말을 하지 못하는 시간이 한참이나 흘렀다.

아무도 움직이지 말라. 아무도.

모두가 한 마음으로 본래의 뜻을 지켜 애국과 위민을 부르짖어다오.


그리고 얼마간의 시간이 지났을 때, 금부도사 G가 움직였다.

근정전의 마당을 지나, 어전에 올라서 양 옆으로 도열한 당상관들의 사이를 지나, 맨 첫줄 정 1품들이 서는 자리로 향하며.


"어디에 서야 되는 거요? 이 관직 어찌 수락하면 되는 거요?"


모였던 이들 대다수의 얼굴에 분기가 떠올랐지만 이어지는 침묵 가운데 기어이 다른 움직임이 있었다.


"여기, 여기쯤 서면 되는거 아니오?"

"나는, 나는 어디 서면 되는 거요?"


두번째 세번째가 이어지자 종내는 여덟 모두가 앞다투어 어전의 계단을 올랐다. 그리고 모두가 당상관의 첫 번째 열 근처에 자리를 잡으며 섰다.

다소간의 소동을 지켜보던 임금 A의 만면에 가득 미소가 떠올랐다.

누가 나를 허수아비 왕이라 불렀는가, 누가 나를 그리 만만하게 보았던가.


"여덟 정승 모두가 합심하여 이 나라를 해치고 조정을 모독하는 악적의 무리를 잘 단도리해주길 바라오."

"미력하나마 온 힘을 다해 조정을 지키겠나이다."


그 짧은 사이 상황은 이미 끝나 있었다.

인간이란 얼마나 쉬운 존재인가!

임금 A는 양 팔을 벌리며 새로운 여덟 정승을 크게 반겼고 여덟 정승 모두 가만히 고개를 숙여 존경과 충성의 인사를 보였다.

근정전 마당에 남은 이들, 머리에 흰 띠를 두르고 나선 유생들과 괭이나 호미 등을 들고 뛰어나왔던 백성들,

심산유곡에서 학문을 닦던 이들, 나라를 걱정하며 일구던 조선의 근본들의 허망한 눈빛이 허공에 흩어졌다.

인간이란 원래 그런 것이었나. 반정, 반정이란 대체 무엇이었나!

백성에 그토록 절절하게 부르짖었던 외침은 그저 한나절 짖고 떠나는 까마귀 울음보다 못한 것이었나!


"이, 이게 대체 무슨 짓거리란 말이오!"


결국 터져나온 한 유생의 외침. 그러자 이제는 정승이 된 금부도사 G는 크게 외쳤다. 저 나라를 해치는 악적을 당장 베어라!

그리고 그 외침에 답한 이는 포졸이 아니었다. 근정전에 모였던 이들, 나라의 땅을 이루는 근본들 가운데 한 인물이었다.

허망한 눈빛으로 여덟 정승을 바라보던 바로 그들 민초 중 하나였다. 이 새끼가 바로 악적이구만!

가져온 방망이로 유생의 머리통을 후려친 그는 의기양양하게 피흘리는 유생을 걷어차 쓰러트리곤 한 발짝 무리에서 떨어져 섰다.


"새 나라가 참 잘 되었으면 좋겠나이다."


그것이 시작이었다. 또 다른 이가 쓰러진 유생을 짓밟고는 그를 따라 떨어져 서고, 또 다른 이가 유생을 짓밟고.

그러는 와중에도 이러지 마시오! 새 나라는 어찌된 거요! 외치는 유생들과 백성들이 있었으나 그들은 연이은 금부도사 G의 명이 떨어지기도 전

다른 백성들에게 짓밟혔다.


"새 나라엔 저런 자들이 있어서는 아니되지."

"암, 이제 정승이 여덟이나 되니 나라가 참 깨끗해질 걸세."

"후후 악적놈들 이제 어디에 서려나."


결국 근정전의 마당에 임금을 향해 마주섰던 이들은 몇 구 시체만이 남았을 뿐이었다.



[조선상고사] 김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