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장은 어떻게 만들어지고 발전하는가?



 일반적으로, 중세사회에서 시장의 최초 형성은 사회 기득권층의 거주지를 중심으로 이루어지기 쉽습니다. 기득권층은 시장의 상인들, 판매자들에게 보호를 제공할 뿐만 아니라 당연하게도 그들이 가장 큰 구매력을 가진 이들이기 때문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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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99년에 그려진 "一遍上人絵伝"에 묘사된 현재의 오카야마현의 지방시장----


 중세 일본의 지방시장은 사찰이나 신사의 문 앞에서 생겨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상인조합인 이치자(市座)들 역시 사찰이나 신사를 배후권력으로 삼아서 영업권을 획득하고 발전하죠. 대표적인 것이 아부라자(油座)입니다.


 아부라자(油座)는 중세 일본에서 사찰이나 신사가 야간에 행사가 진행되어 대량의 조명용 기름의 수요가 존재했기 때문에 시작됩니다. 사찰 소유의 장원으로부터 기름을 구해서 사용했으나 수요가 증가함에 따라서 이를 조달하기 어려워지니까 상인들에게 신닌(神人)이라는 직위를 주고 고급 기름의 원재료인 참깨의 매입과 기름의 유통, 판매권을 보장하게 됩니다. 


 즉 지방시장의 초기 형성과 발전은 상대적으로 많은 구매력을 가진 기득권층의 수요가 꽤나 영향을 미친다는걸 알 수 있죠. 이건 일본이 특별한 사례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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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세기 중세 유럽 수도원의 생활----


  중세 초기 서유럽에서 시장의 형성과 발전은 성(castle)이나 수도원(Monastery), 왕실이나 귀족의 저택 인근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이는 이러한 기득권층의 거주지가 대규모의 구매력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구매력을 갖춘 기득권층의 거주지는 생필품 뿐만 아니라 조선에서는 선물로 제공되는 사치품의 판매자들을 끌어들였으며, 이는 초기 도시를 형성합니다. 상인들은 시장이 형성된 일대의 토지소유권자인 기득권층에게 일정한 세금이나 수수료를 지불하고 자치권을 행사하는 도시가 발전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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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글랜드의 론서스턴 성과 배틀 대수도원----


 예를 들어 중세 잉글랜드에서 시장은 콘월 지방의 론서스턴(Launceston) 성의 건축이나 서섹스 지방에 설립된 배틀(Battle) 수도원의 성립과 함께 만들어졌습니다. 웨일즈 지방에서 도시가 설립될 때에는 이미 지역 중심점을 형성한 교회나 수도원의 위치에 만들어지곤 했죠.


 중세 시장은 귀족과 성직가문의 수입 대부분을 형성하는 농산물을 판매하여 수익을 얻을 수 있게 해주었기 때문에 그들은 시장의 가장 중요한 공급자인 동시에 소비자였습니다. 기득권층은 초기 시장의 형성과 발전을 촉진시키는 중요한 구매력을 제공합니다. 중세 일본에서 사찰이나 신사, 재지영주들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죠.


 왜 기득권층을 중심으로 시장이 발전하는걸까요?


 연재글에서 반복해서 설명했듯이, 대외무역이나 중계무역으로 발전하는게 아니라면 시장의 발전은 잉여생산물의 거래를 통해 이루어집니다. 이는 농업생산력의 발달과 인구증가로 인한 잉여의 양이 증가해서 이루어지죠.


 전근대 사회에서 토지소유권자인 기득권층은 지역사회에서 가장 생산성 높은 농장주인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들은 일반적인 농민에 비해서 더 비옥하고 수리시설을 갖춘 토지를 보유했을 가능성이 크고, 보다 품질이 좋고 충분한 수량의 철제 농기구와 밭을 갈기에 충분한 수량의 소나 말을 보유합니다. 


 또한 그들은 농업기술면에서 일반 농민에 비해 더 우월합니다. 외부의 발달한 농업기술을 도입하고 교육시키고 전파하고 종자를 가져오는건 귀족, 성직자, 사족... 여러가지 이름을 가진 기득권층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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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따비로 밭을 경작하는 사진과, 익산에서 출토된 따비의 철제날, 국립부여박물관소장----


 고려나 조선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농업생산력이 꽤나 발달한 조선 전기에도 기득권층인 사족들은 소작제보다는 노비를 통해 운영하는 직영 농장을 더 선호했습니다.


 심지어 조선의 대표적 성리학자 이황(李滉)은 빈농에게 소작을 주느니 차라리 땅을 묵히는게 더 좋다고 할 정도였는데, 소규모 농민이 독자적으로 농지를 경작할 때의 생산성이 직영 농장보다 낮았다는 것을 추측케 합니다.


 잉여의 측면에서 시장의 발전을 촉발시켜야 할 것은 바로 잉여의 양이 가장 많은 고려나 조선의 농장주, 사족들입니다. 이들은 일반 농민과 달리 보다 발달된 농업생산으로 잉여를 축적할 뿐만 아니라 사족으로서 품위를 지키고, 제사용품을 확보하는 등 다양한 목적으로 여러 상품을 필요로 합니다. 


 여기까지는 일본이나 유럽의 기득권층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하지만 수요를 충족하는 방법이 달랐읍니다.

 고려나 조선은 중세 유럽이나 중세 일본보다 훨씬 고도로 발전한 중앙집권화된 제도를 통해서 수요를 충족할 수 있으니까요.


 고려나 조선의 사족들은 그들이 가진 부가 클수록, 그리고 그들의 정치적 영향력이 클 수록 굳이 시장을 통해서가 아니라 국가권력의 수취체계와 통치체제를 통해서 그들이 필요로 하는 상품들을 구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의 수입을 거래에 사용하지 않고서도 말이죠.


 이러한 괴리는 15세기 최초로 출현하는 조선의 정기 지방시장의 성격에서 두드러지게 드러납니다. 이를 통해서 우리는 선물경제가 시장경제의 발전을 어떻게 저해했는지 이해할 수 있죠.

 



조선의 지방시장은 생존을 위해 만들어졌다.


 위에서 설명했듯이 중세 유럽이나 중세 일본에서 지방시장의 형성은 기득권층이 생산물을 거래하고 필수품이나 사치재를 구매하기 쉬운 위치에서 발전합니다. 기득권층이 시장에서 적극적으로 거래했다는 말이죠. 근데 고려나 조선은 그렇지 않았잖아요?


 그럼 15세기에 조선에서 출현한 지방시장의 거래자는 대체 누굴까요? 


 도내 여러 고을의 인민이 그 고을 길거리에서 장문(場門)이라 일컫고 매월 두 차례씩 여러 사람이 모이는데, 비록 있는 물건을 가지고 없는 것과 바꾼다고 하나, 근본을 버리고 끝을 따르는 것이며, 물가(物價)가 올라 이익은 적고 해가 많으므로, 이미 모든 고을로 하여금 금지시켰다.’ 하였습니다. 청컨대 다시 관찰사로 하여금 엄중히 금단하게 하소서.

성종실록 3년 7월 27일 1472년


 정기적으로 열리는 한반도 최초의 지방시장에 대한 기록은 1472년에 나타납니다. 지방 장시는 한양도성의 시전(市廛)과 달리 국가가 공식적으로 관리하는게 아니라 민간영역에서 자생적으로 생겨난 것을 알 수 있죠. 이 시장은 어떤 과정에서 생겨났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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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장시를 묘사한 김준근의 "기산풍속도첩"-----


 지방시장은 지역의 서민들이 농산물이나 면포 등을 소금이나 어물, 철물등과 거래하면서 생겨났을 겁니다. 이미 고려시대에 행상(行商)이 해안에서 내륙지방으로 소금과 어물을 날라서 거래한 기록이 있기 때문에 이런 거래를 용이하게 하기 위해서 정기적으로 동일한 위치에서 시장이 열리게 되었겠죠.


 일반적으로 15세기 지방시장의 등장을 농업생산력이 증가한 결과라고 평가합니다. 잉여가 증가했기 때문에 자급자족적인 경제에서 한발 나아가 시장경제가 발전하기 시작하는거죠.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닙니다. 하지만 완전히 맞는 말도 아니죠.


 지방시장의 등장은 잉여의 증가를 통해 이를 거래함으로서 이익을 추구하면서 시작된 거 같지 않거든요. 


 경인년(1470년)에 흉년이 들었을 때에 전라도의 백성이 스스로 서로 모여서 시포를 열고 장문(場門)이라 불렀는데, 사람들이 이것에 힘입어 보전하였습니다.

성종실록 4년 2월 11일 1473년


김종직이 아뢰기를,

"본도(本道, 전라도)에서 도둑이 일어나는 것이 다른 도에 비해 더욱 심한 것은 장문(場門, 지방시장) 이 있기 때문입니다. 도둑이 얻은 장물(贓物)을 장문에 팔기 때문에 수색해 잡기가 어렵습니다. 신은 그윽이 생각하건대, 흉년에는 장문이 구황(救荒)에 유익하므로 폐할 수 없으나 금년은 비가 흡족하게 내려서 풍년들 조짐이 있으니, 적당한가 아니한가를 보아서 임시로 장문을 폐하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성종실록 18년 6월 20일 戊子 2번째기사 1487년 


 전라도에서 지방시장의 초기 형성은 흉년이 크게 영향을 미친것으로 보입니다. 농민들이 흉년이 들자 상대적으로 농업생산과 해산물이 풍부한 전라도 나주 일대로 몰려들어 물건을 팔아 기근에 대처했던 것이 지방시장의 시작인 셈이죠.


소세양(충청도 관찰사)이 아뢰기를,

"농사를 게을리하는 백성과 장사를 하는 무리와 도둑질하는 승도가 모두 시장(市場)에 모입니다. 그래서 신이 일체 금파(禁罷)하려 하였지만 흉년이어서 백성들이 혹 이를 힘입어 살아갈 것을 생각하여 한 달에 세 번만 시장에 나오는 것을 허락하고 있습니다."

 중종실록 28년 4월 16일 1533년 


외방의 시장(市場)은 백성들이 장사에만 치중하고 도적도 번성하기 때문에 나라에서 이를 금하였습니다. 그러나 현재는 흉년이 심하게 들었습니다. 백성들은 있는 것과 없는 것을 반드시 시장을 통하여 교역하여 이를 바탕삼아 살아가는데, 지금 또 시장을 금하면 백성들이 무엇을 바탕으로 삼아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신이 보건대 금년에 재해를 당한 곳에는 벼가 모두 썩었고 밭곡식도 폭풍과 냉우(冷雨)의 피해를 입어 백성들이 먹을 것이 없습니다. 예로부터 흉년이 든 해에는 시장에서 장사하는 것을 금하지 않아 서로 도와가며 급한 것을 구제하게 하였습니다. 이러한 흉년을 당하여 일체 금한다면 백성들이 매우 괴로울 것이니 금하지 않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명종 2년 9월 27일 乙亥 1번째기사 1547년


  즉 조선 지방시장의 초기 형성은 농민층이 이익을 추구할 만큼 잉여농산물이 축적되어 이를 거래한 결과물이 아니라, 기근으로 인해 농산물이 부족해서 이를 다른 생산물, 예를 들어 직물이나 땔감, 또는 기타 다양한 산물로 장시에서 거래함으로서 생존을 유지하기 위한 노력에서 시작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는 중세 유럽이나 중세 일본과 달리 조선의 지방시장이 잉여를 축적한 기득권층의 다양한 수요를 만족시키고 보다 광범위한 지역 유통망을 발전시키거나 화폐거래를 발전시키기에는 적합하지 않았음을 의미합니다. 거래 품목이 매우 협소했을 테니까요.


 이를 잘 보여주는 것이 오희문의 쇄미록에 등장하는 약재 관련 기록입니다.


 오희문이 쇄미록에 기록한 약재의 수령 역시 주로 선물에 의한 것으로 주로 사위인 함열현감이 제공했습니다. 쇄미록에 기록된 17건의 사례에서 7건이 사위에 의한 것이었죠. 2건은 아들 오윤겸이 보낸 것이었구요. 


 약을 구입한 사례는 2건이었는데, 충청도에서 아들 오윤겸의 임지인 평안도로 이사하던 도중 수원에서 딸의 병세를 치료하기 위해 서울의 양예수에게 아들을 보낸 사례와, 평안도 평강에 있을때 아내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 평강의 의원에게 허준에게 약에 대해 묻고 내의원에서 약을 산 기록입니다.

 그가 아들 오윤겸의 후원하에 평강에서 넉넉하게 지낼 때 시골에는 약재가 없다고 한탄한 기록이 3건이나 남아 있습니다.


 이는 사족이 지방에서는 나름의 권력이 있더라도 약재를 구하기가 쉽지 않았음을 보여줍니다. 실질적으로 약재는 공납제도를 통해서 지방에서 채취되어 한양으로 운송되므로 중앙권력을 지닌 유희춘의 경우는 이를 손쉽게 구할 수 있었지만, 오희문의 경우는 서울로 사람을 보내야만 구할 수 있었죠.


 장시가 형성된지 100년이 넘은 17세기에도 지방시장에서 필요한 약재를 구하는 것은 아들 덕분에 형편이 넉넉해진 오희문에게도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이는 지방시장이 우리가 일반적으로 아는 시장과 달리 매우 협소한 영역에서 상품거래가 이루어졌음을 알게 해주죠.


 이는 선물경제가 지방시장의 형성 자체를 억제하고, 발전을 지연시키고 있음을 알려줍니다. 어떻게 그렇게 한 것일까요?




조선의 선물경제는 시장경제를 어떻게 저해하는가?



 기본적으로 선물경제가 시장경제의 발전을 저해하는 건 위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가장 잉여를 많이 가지고 있는 기득권층의 수요가 시장을 사용하지 않고 충족되기 때문입니다.


 고려나 조선의 기득권층이 선물을 통해 수요를 충족하면 시장에 가서 그러한 다양한 물품들을 판매할 메리트가 적어지겠죠? 시장에서 물건을 사는 이들은 가난해서 당장 먹고사는데 급급한, 즉 잉여가 적은 계층들이 대부분입니다. 이들에게 고급 비단을 판다거나 종이나 약재를 팔려고 해도 살 만한 구매력이 없다는 겁니다.


 즉 선물경제는 시장경제로 유입될 구매력을 제거함으로서 전근대 한국의 시장경제 발전을 저해합니다. 이 부분까진 아주 명쾌하죠.


 하지만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기본적으로 고려와 조선의 사족들이 수수하는 선물은 서로간에 남는 물건에서 나온게 아닙니다. 국가의 권력에 의해 수취된 현물, 또는 국가권력에 의한 부역, 즉 강제노동을 통해서 만들어진 물품들이 존재해야만 선물경제가 성립될 수 있으니까요.


 또한 이것이 운송되는 것 역시 무료가 아닙니다. 역참이나 조창에 묶여서 강제로 역(役)을 대대로 세습하는 역졸(驛卒)과 조운선의 선원인 조졸(漕卒)들에게 무상으로 노동력을 수취해 이러한 물품들을 운송하지 않는다면 선물경제는 원활하게 돌아갈 수 없습니다.


 고려나 조선의 기득권층이 중앙관료와 지방관의 인적 네트워크를 형성하며 수수하는 선물은 결국 피지배층을 수취한 잉여와 노동력의 결과물을 5~10%에 달하는 사족층에게 재분배합니다. 

 

 이로 인해서 고려나 조선 전체의 농업기술발달과 인구증가로 인해 축적된 잉여는 시장경제 발전에 온전히 사용될 수 없습니다.


 시장경제 발전에 기여할 실질적 공급자인 농민, 어민, 수공업자들에게 가야할 이익이 적어집니다. 이는 이들이 생산량을 늘여서 전체 생산성을 개선하고 물가를 낮추게 만들 인센티브를 감소시킬 겁니다. 

 마찬가지로 유통업자인 상인이나 운송업자인 선원의 이익도 감소합니다. 국가가 주도하는 역참과 조운망이 선물의 운송에 활용되니까요. 


 농업기술 발달로 농업생산량이 증가하고 인구가 늘어나도, 이것이 상공업 발달로 이어지는 과정에서 병목(Bottleneck)이 발생합니다. 국가의 수취체계가 잉여를 기득권층에게 선물이란 수단으로 재분배하는 과정에서 어물이나 소금, 자기나 철물등의 지역간, 지역내 유통의 필요성과 수익성이 감소하니까요.


 그 결과는 어떻게 나타날까요? 장시에서 서민들은 더 비싼 가격에 소금과 생선을 구해야 했을 겁니다. 농기구를 구하고 싶어도 충분한 양이 공급되기 어렵고 비쌌을 겁니다. 약재 역시 위에서 소개한 것처럼 한양에 가지 않으면 구할 수 없었을 겁니다.


 무본억말(務本抑末)을 하지 않으면 농업이 망한다는 일관된 조선 성리학자들의 견해와 달리, 시장경제의 미발달은 물가를 올리게 만들어 절대 다수인 상민 및 노비들의 생활수준을 악화시켰을 겁니다. 장시(場市) 때문에 물가가 비싸진다는 요상한 사대부들의 주장과 달리 장시의 발달 지연은 상품의 공급을 줄이고, 유통을 어렵게 함으로서 물가를 올리고 상품을 구하기 어렵게 만들었을 테니까요.


 그런데 왜 조선의 사대부들은 시장 때문에 물가가 오르고 농업이 망한다는 황당한 이야기를 했던 것일까요? 


 아마도 물가만 비싸게 만든다는 견해는 자기는 공짜로 선물받아서 그 물건 구할 수 있는데 괜히 비싸게 팔고 있다는 이야기가 아니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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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리 앙트와네트의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어라"라는 유언비어와 달리, 시장이 농업을 망치고, 물가를 올린다는 것은 실제 역사기록에 남은 조선 사대부 관료들의 공식적인 견해입니다.


 일반적으로 이러한 태도는 조선 사대부들의 건국이념과 고려의 폐단을 극복하는데서 시작되었다고 해석되었습니다.

 조선 전기 상업사에 매우 호의적 태도를 보이는 박평식 교수는 고려 사회의 특권세력이 국내외 상업에 대한 투자와 독점으로 소상인 소농민을 착취했고, 조선의 건국 이후 이를 타파하기 위해 무본억말(務本抑末)과 이권재상(利權在上, 모든 이권이 국가에 귀속되어야한다)의 관점으로 개혁한 결과라고 주장합니다. 이게 일반적인 해석이죠.


 하지만, 위에서 소개한 바와 같이 조선시대의 선물경제는 고려시대부터 시작된 아주 오래된 전통이었습니다. 고려시대에서도 기득권층은 상업을 독점하는게 아니라 국가권력을 활용하여 피지배층에게서 잉여를 수취하고 이를 자기들끼리 재분배하여 선물경제를 영위하는 비중이 압도적으로 더 컸을 겁니다. 


 만약 중세 유럽이나 중세 일본과 같이, 기득권층이 수요를 충족시키는데 시장의 존재가 필수불가결했다면 조선 사대부가 아무리 송나라 성리학자들을 맹렬하게 추종했다고 할지라도 장시(場市)를 폐쇄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지는 못했을 겁니다.


 17세기까지 조선 기득권층인 사족에게 장시(場市)는 경제생활을 영위하는데 필수적인 유통망이 아니었습니다. 정치적 영향력이 크고, 인적관계망이 넓을수록 장시에서 거래를 통해 수요를 충족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죠. 즉 중앙조정에서의 의사결정권자나 지방관 중에 직접적으로 지방의 장시(場市)에 이해관계를 가지는 이들이 없었다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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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인싸는 공부를 잘하거나 공부잘하는 사람하고 친해야 합니다.----


 아마도 당시의 인싸 사대부들은 이렇게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약재가 없다고? 생선이 없어? 너는 지방관 친구도 없니? 선물해주는 사람도 없어?"


 물론 모든 사대부가 이렇게 생각한건 아닙니다. 지방관들이나 관료들 중에는 장시(場市)가 자신에게는 별 쓸모가 없어도 백성들은 이를 통해서 생계를 유지하거나 기근에서 살아남는다는 것을 인식하고 그 필요성을 인정하기도 했으니까요.


 이러한 양면성이야말로 고려와 조선의 사대부들을 평가하기 어렵게 만드는 요소라고 하겠습니다.


 이제, 고려와 조선의 중앙집권적 정치체계와 현물과 부역 중심의 수취제도가 어떻게 민간영역에서의 수요를 빨아먹음으로서 시장경제 발전을 장기간 지연시켰는지, 보다 명쾌하게 이해할 수 있으리라 기대합니다.(완벽하지는 못하더라도....)


  선물경제는 17세기까지 존재가 확인되지만, 18세기 들어서면 사족들도 시장에서의 거래를 통해서 수요를 충족하게 됩니다.


 대동법의 등장이 재량적인 현물공납을 대체하고, 지방재정이 상당부분 공식화되면서 지방관이 선물로 활용할 재정여유를 감소시켰기 때문일런지도 모릅니다. 선물경제가 해소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미 기존 연재글에서 소개한 바와 같이 조선의 수공업은 중국이나 일본 대비 생산성 향상 수준이 낮았습니다. 


 이는 단순히 선물경제로 인한 "수요부족"이 수공업자의 이익을 저하시켰기 때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조선의 재량적인 수취체계와 선물경제는 이렇게 간접적으로만 영향을 준게 아니라 보다 직접적으로 "수공업자"를 착취했습니다. 18세기에 선물경제가 해체된 이후에도 이러한 구조적 문제는 완전히 해소되지 못했고, 구한말까지 이어지게 됩니다.

 

 다음편에서 조선 전기부터 구한말까지 이르는 이러한 사족과 국가의 수공업자에 대한 착취와 불공정성을 구체적으로 설명하도록 하겠습니다. 



참고자료

김재호, "조선왕조 장기지속의 경제적 기원"

오치훈, "이규보를 통해 본 고려관인의 경제생활 - 선물 수수를 중심으로 -"

한정수, 서민수, 이준, "고려시대 선물의 분석과 그 정치문화사적 함의"

변성아, "고려말 李穡이 받은 선물의 특징"

임경희, 최연식, "태안마도 수중 출토 목간 판독과 내용"

박종진, "마도선은 조운선이 아니다." 한국역사연구회

오창현, "조선 중기 ‘해산물’ 증여 관행에 대한 기초 연구"

이성임, "조선중기 양반의 경제생활과 재부관"

이성임, "16세기 李文楗家의 收入과 經濟生活"

최주희, " 16세기 양반관료의 선물관행과 경제적 성격"

신동원, "조선후기 의약생활의 변화: 선물경제에서 시장경제로-미암일기, 쇄미록, 이재난고, 흠영의 분석"

Mark Casson 외 1인, "The Origin and Development of Markets: A Business History Perspective"

이경식, "16世紀 場市의 成立과 그 基盤"

박평식, "조선전기 상업사의 이해 시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