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조선의 바늘 생산과 관련된 연재글을 올리던 도중, 어떤 분이 제 사상이 의심스럽고 일뽕종자라는 합리적 의심이 들기 때문에 연재글을 올리는 카페 및 사이트에서 일뽕종자가 아니란 것을 증명하지 않으면 각오하라는 요구를 해와서 작성하게 된 글입니다.


 이전 연재글들을 보시면 좀 더 내용을 재미있게 보실 수 있습니다. 


 이전 연재글에서는 중세 일본의 자력구제 사회가 어떻게 형성되고, 어떻게 작동하는지에 대해서 설명했습니다.


 공적 권력이 개인, 집단간 분쟁을 중재하고 제약하지 못함으로서 재지유력자인 무사들뿐만 아니라 피지배층인 농민들조차도 무장하고 자신의 권리를 지키고, 남의 권리를 빼앗기 위해서 실력을 행사하는 것을 거리끼지 않는 세상이 만들어진거죠. 


 교토의 천황을 정점으로 하는 율령제 체제가 해체되어 고대로부터 중세로 넘어가면서 일본에서는 국가에 의한 지방에 대한 통치가 이완됩니다. 조정의 영향력 감소는 한때 중앙의 권문(権門)에게 자신의 토지를 명목상 기진함으로서 지방에 장원(荘園)을 형성했던 재지무사들이 딴 마음을 품게 만들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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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무가정권인 헤이시 정권을 무너뜨리고 가마쿠라 막부를 개창한 미나모토노 요리토모, NHK 사극 鎌倉殿の13人 ----


 고대국가 시기에 형성되었던 중앙의 권위가 약화된 결과가 자력구제 사회의 발전으로 이어진다 할 수 있을 겁니다. 이 과정에서 재지무사들과의 봉건적 주종관계에 기반한 무가정권(武家政権)이 등장해 아예 중앙조정의 권위를 더욱 약화시키죠.


 헤이시 정권이 최초의 무가정권을 만들지만 미나모토노 요리토모가 이를 타도하고 가마쿠라시대를 열게 됩니다. 본격적인 중세 일본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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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상 미나모토노 요리토모가 일찍 죽고 그 아들들도 이리저리 죽어나가며 외척가문인 호죠 가문이 막부를 지배하게 됩니다. 호죠 요시토키는 요리토모의 처남으로서 막부의 정점에 서게 되죠. NHK 사극 鎌倉殿の13人 ----


 초기에는 교토의 천황과 중앙귀족인 공가(公家)와 관동의 가마쿠라(鎌倉, 도쿄 근처)에 위치한 막부간의 권력에 일정한 밸런스가 존재했지만 1221년 교토측의 고토바 상황이 막부를 정벌하려 했다가 패배하는 조큐의 난(承久の乱)에서 패배하면서 막부가 주도권을 가지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교토의 관료귀족인 공가(公家)와 종교집단인 사찰과 신사(寺社)들의 권위와 실력이 붕괴되고 이들은 자신들이 소유한 장원(荘園)의 지배를 그에 도전하는 재지무사들의 침탈로부터 독자적으로 지켜내기 어렵게 되죠. 중세의 악당(悪党)은 이러한 상황에서 등장하게 됩니다. 


 가마쿠라 막부는 승자로서 중세 일본의 최초의 지배권력이 된 대신, 이러한 분쟁을 중재하고 제어해야할 책임 역시 감당해야 했습니다. 

 



가마쿠라 막부의 사법제도는 어떻게 작동하는가?



 가마쿠라 막부가 최초 성립되었을 때는 기존의 율령법이나 율령법에 기반해서 탄생한 공가법(公家法)과 같은 성문법이 아니라, 무가사회에서의 관습에 의존해서 판결을 내렸다고 하는데, 아마도 이는 초기 막부가 일본 전체를 통치하기 보다는 관동지방을 중심으로 막부와 주종관계가 성립된 무사들만을 관할하는데 주력했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천황측의 막부 토벌령으로 시작된 조큐의 난(承久の乱)에서 가마쿠라 막부가 승리하고 조정이 관할하던 관서지방과 규슈까지 막부의 영향력 하에 들어오면서 막부는 보다 광범위한 지역에서의 분쟁을 중재하고 사법처리를 담당해야하게 되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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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죠 요시토키의 아들, 호죠 야스토키는 가마쿠라 막부의 조정에 대한 우위를 확실히 다지고 체제를 안정화시키는데 성공한다. NHK 사극 鎌倉殿の13人----


 가마쿠라 막부의 실질적 지배자인 3대 싯켄(執権) 호죠 야스토키(北条泰時)는 이러한 상황에 대처하기 위해 기존의 관습에 기반한 무가법 제도를 성문화한 51개조의 어성패식목(御成敗式目)이라는 재판의 기준을 만들어내고, 이는 율령법을 대체하는 일본의 독특한 무가법 체계를 형성합니다.


 어성패식목은 기존의 복잡한 율령에 비해 간단하고 무사의 도리를 강조하는 지방의 무사를 위해서 만들어진 법이라는 것을 호죠 야스토키는 천명하고 있습니다. 율령사회에서 무가사회로 전환된 중세 일본에 맞춰진 일본 특유의 무가법은 이후 일본의 법체계의 기반을 형성합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어성패식목은 무가정권으로서 재지무사와의 봉건적 주종관계에 의존하는 가마쿠라 막부의 성격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고쿠가(国衙, 공령의 지방관청)나 장원(荘園)의 혼소(本所, 장원영주) 또는 신사(神社)나 사찰(寺)에서 일어나는 재판에 대해서 막부는 개입하지 않는다. 혼소의 추천장이 없는 경우, 장원이나 사찰의 소송은 막부가 다루지 않는다.

어성패식목 제6조, 고쿠시(国司)나 영주(領家)의 재판에 막부는 개입하지 않는다.


 이 대목은 가마쿠라 막부의 어성패식목의 목적이 막부의 고케닌, 즉 무사들의 재판절차를 다루기 위해 만들어졌음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막부는 장원영주의 장원이나 국가가 지배하는 공령의 문제를 다루지 않는다는거죠. 


 근데 그렇다고 막부가 아예 장원이나 공령에 개입을 안하겠다는것도 아닙니다. 막부는 자신과 주종관계를 맺은 무사들의 권리에 대해서는 장원영주나 공령의 지배에도 개입합니다. 


 미나모토노 요리모토공을 비롯한 미나모토 가문의 3대 쇼군이나 호죠 마사코(요리모토의 아내)님의 시절에 고케닌(御家人, 막부와 주종관계를 가진 무사)에게 주어진 영지는 혼쇼(本所, 장원영주)의 소송이 있더라도 그 권리를 빼앗을 수 없다.


 소령(所領)은 전투에서 공을 세워서 고케닌(御家人)에게 지급된 것으로서 명확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장원영주가 고케닌에게 지급된 영지를 선조로부터 내려온 땅이라고 하며 소송을 제기하는 것은 고케닌에게는 불만스러운 일이므로 이런 소송은 다루지 않는다. 

어성패식목 제7조, 요리모토공이나 마사코님으로부터 주어진 소령(所領)의 취급


 요시모토공에 결정한 것처럼 고케닌이 20년간 지배한 토지는 원래의 장원영주(교토의 귀족, 사찰, 신사)에게 돌려줄 필요가 없다.

 어성패식목 제8조, 쇼군이 발행한 토지문서(御下文)가 있더라도 실제 토지를 지배하지 않을 때


 가마쿠라 막부의 권력기반은 재지무사에게 영지를 인정해주거나 새로 지급하는 어은(御恩)과 그 반대급부로 군사적, 재정적 의무를 재지무사가 수행하는 봉공(奉公)이라는 봉건적 쌍무계약관계를 통해 성립됩니다. 


 때문에 막부는 본래의 재산권을 보호해주는 것보다는 자신을 지지하는 재지무사의 이권과 실효지배권을 더 중시하는 태도를 보입니다. 최고 지배자가 이런 마인드라면 지방의 재지무사들이 그들에게 뭔가 이익을 제공하고 권리를 보호해줄 실력이 약화된 장원영주들에게 시간이 지날수록 어떤 태도를 보였을지 상상하는건 어렵지 않을 겁니다.


 문제는 가마쿠라 막부가 중앙조정과 장원영주들의 권위를 약화시킨 결과 일본 전국의 분쟁을 조정해야할 부담을 가져가야 한다는 겁니다.


 사실 중세 초기라고도 볼 수 있는 원정(院政)시기(1086~1185년)에도 이미 일본의 사법제도는 중앙집권에 익숙한 우리 기준으로는 납득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국가소유지인 고쿠가령(国衙領)에서는 고쿠가(国衙)에서, 장원(荘園)에서는 장원영주가 재판을 담당하는게 원칙이지만 사실 분쟁당사자들은 자기한테 유리한, 즉 인연이 있는 권문(権門)에게 재판을 받으려고 했습니다. 재판의 신뢰성이 떨어지는건 당연하겠죠?


어떤 의미에서 무가정권인 가마쿠라 막부는 적어도 여기저기 얽힌 다수의 권문들보다는 더 신뢰할 수 있는 사법권 집행자였을 수도 있었죠. 


 막부는 막부와 주종관계를 가지고 있는 무사들인 고케닌(御家人)의 토지나 재산과 관련된 민사재판을 위한 문주소(問注所)를 설치하고, 살인이나 상해 등 치안 관련한 사법문제를 담당하는 사무라이도코로(侍所)를 두었습니다. 가마쿠라 내부의 소송이나 고케닌이 아닌 무사의 소송은 정소(政所)가 담당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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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HK 드라마에서 묘사되는 가마쿠라 막부의 회의 모습----


 재판과정을 살펴보면 문주소에서 당사자를 소환해서 서류를 검토하고 심문을 실시한 후 그 결과를 막부의 최고 합의기구인 효조슈(評定衆)에 보고하면 검토하여 판결을 확정하게 됩니다. 이후 재판절차가 점차 발전하여, 3회에 걸쳐서 원고의 소장(訴状)과 피고의 답변서인 진장(陳状)을 통해서 원고와 피고간의 서류상의 논변이 진행된 후, 피고와 원고가 구두변론을 실시합니다. 


 이후 소송실무 관료들의 합의에 따라 판결의 초기안이 작성되면, 이를 막부의 싯켄, 효조슈등의 합의를 거쳐서 정식 판결을 내리고 판결문을 승소한 이에게 내려줍니다. 


 이론적으로만 보면, 가마쿠라 막부의 소송제도는 나쁘지 않습니다. 문서를 검토하고 원고와 피고 모두에게 변론기회를 제공하며 3심제와 유사한 검토절차도 있죠. 아니 이런 제도가 발전해 있는데 대체 왜 자력구제의 사회가 만들어진건가하고 의문을 표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재판에서 패소한 쪽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는 경우죠.


 일반적으로 중세 초기 일본에서 재판에서의 승소했을때 그 판결문을 승소자한테 주는데, 승소자는 이를 통해 명분을 확보해 패소자에게 판결을 집행하러 갑니다. 판결의 집행을 국가권력이 대신해주지 않았거든요. 다만 정당성을 담보시켜주는거죠.


 만약 패소자가 이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승소자는 실력행사해서 이를 집행합니다. 근데 여기서 문제는 승소자가 패소자에게 강제집행을 실시할 실력이 없는 경우입니다. 이전 연재글의 장원영주인 도다이지(東大寺)가 악당들한테 두들겨 맞았던 것처럼요.


 때문에 13세기 중반이 지나면서부터 가마쿠라 막부는 단순히 재판 판결 땅땅땅! 이렇게 해 하고 끝나는게 아니라 판결을 실제 집행하는 것까지 커버해야 할 "지배자의 의무"를 수행해야 할 필요성이 증가합니다. 


 가마쿠라 막부가 판결의 집행을 위해 사람을 파견하는 것을 사절준행(使節遵行)이라고 합니다.

 1~2명의 무사를 사절(使節)로 파견함으로서 영지 관련 분쟁에 따른 재판결과를 집행하기 위해서 분쟁지역을 실효지배하고 있는 패소자를 강제로 배제하거나, 분쟁대상인 토지나 재산을 승소자에게 인도하는 거죠.


 자기땅을 지키기 위해서는 언제든 칼과 활을 들어 상대와 싸울 의지가 충반한 재지무사들이 막부의 지시에 고분고분 복종했을까요?


 우리는 이 집행과정을 살펴봄으로서 최고권력인 막부의 존재에도 불구하고 중세 일본이 자력구제 사회로 나아가는 양상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절준행과 악당체포는 얼마나 힘든 일이었을까?



 13세기 중반부터 지방에서 일어나는 소송의 처리와 집행은 관동지방의 경우는 가마쿠라 막부가, 일본 서부지방에 대한 소송처리는 교토에 설치된 로쿠하라단다이(六波羅探題)가, 규슈의 경우에는 원나라의 공격 이후 설치된 진제이단다이(鎮西探題)가 담당하게 됩니다. 


 로쿠라하단다이나 진제이단다이 모두 호죠정권이 본거지인 관동이 아닌 원래 조정의 영향력 하에 있던 교토의 조정을 감시하고, 서부일본과 규슈의 통치를 강화하기 위해 설치한 지방통치기관입니다. 


 각각의 지방에서 사절준행이 필요해지는 분쟁의 증가는 다른 양상으로 나타납니다. 


 교토 인근의 기나이(畿内) 지방은 원래 중앙조정의 거점지역으로 장원이 발달했으나, 조큐의 난 이후 독자적인 무력을 상실한 공가(公家)나 사찰, 신사로 이루어진 교토의 장원영주들은 장원지배에 도전하는 재지무사들, 악당(悪党)에 시달립니다. 조큐의 난 이후 조정의 무력기반이었던 교토 주변의 군사귀족들이 제거된 것 때문이었죠. 


 막부가 교토에 설치한 로쿠하라단다이는 사절을 파견해 무력으로 이들을 체포할 것을 장원영주에게 요청받게 됩니다.


 규슈의 경우, 한때 막부가 타도했던 최초의 무가정권 헤이시(平氏)의 거점으로서, 헤이케가 멸망한 이후 영지를 빼앗겨버린 헤이케 지지파 재지무사들과, 그들의 소령을 차지하게 되어 대거 이주해온 관동출신의 막부 가신들인 고케닌(御家人)간의 갈등, 그리고 원나라 침공 이후 그 전공에 대한 은상 문제나, 원나라가 물러간 것은 신사(神社)의 기도 덕분이니 신사의 영지를 확대해달라는 등 지역 분쟁이 13세기 중반 이후 격화됩니다.


 막부가 규슈 다자이후에 설치한 진제이단다이(鎮西探題)도 사절을 파견해 이런 문제를 해결해야했죠. 


 문제는 기본적으로 지방의 재지사회에서 막부에 의한 사절파견을 호의적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특히 장원영주에 의해 악당이라고 지칭된 분쟁의 경우가 두드러집니다. 


 악당(悪党)은 장원영주 입장에서의 표현이고, 이들은 재지사회에 뿌리를 둔 유력자이며, 다른 재지무사들과 혈연, 지연으로 얽혀있는 교토의 장원영주와 달리 터줏대감입니다.


 여기다 에헴! 내가 막부에서 보낸 사절이야!!! 하고 1~2명의 무사가 부하들 데리고 쫄레쫄레 오면 무슨일이 벌어질것 같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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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마쿠라시대의 헤이케모노가타리에마키(平治物語絵巻)에 묘사된 무사들----


 악당의 제압을 위한 사절의 임무를 명령받은 2명의 무사들은 그야말로 난감한 상황에 부딫치기 쉬웠습니다. 


 단바국(丹波国) 미야타장(宮田荘)은 현재 효고현 단바사사야미시(丹波篠山市)에 위치했던 곳입니다. 이곳은 효에지로 뉴도 세이사이(兵衛次郎入道生西), 일명 세이사이법사라고 불리는 악당이 1301년부터 약탈과 방화를 저지르고, 성곽을 쌓으며 장원영주에게 보내지는 연공을 탈취하고 장원의 공관을 불태우는등의 행동을 저지르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는 장원의 문서를 담당하는 하급직인 쿠몬(公文) 직위를 박탈당하자 미야타장에 대한 실력행사에 들어갔습니다. 그를 제압하려고 파견된 사절인 무사들은 2명이었습니다. 아마도 그들의 종자들도 있었겠지만, 그들이 상대해야 했던 악당의 수는 300여명에 달했습니다. 




---2:28부터 보세요. 악당들은 요렇게 소리지르면서 활을 쏴댔을까요?----


 4일간에 걸치는 격전이 벌어졌는데, 악당 세이사이측은 화살을 쏘고 화공을 가하는 등 수적으로 완전히 열세였던 사절측은 퇴각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1323년까지 세이사이측의 활동은 계속되게 됩니다. 


 현재 교토부 남부인 야마시로국(山城国) 가모장(賀茂荘)에서 발생한 악당들도 수백명에 달해서, 사절들은 우리힘으로는 체포가 불가능하다며 돌아오기도 했습니다. 대체로 사절들은 현지의 재지무사인 악당에 비해서 항상 수적 열세였습니다.


 근방의 치안을 담당해야할 지토(地頭)나 막부와 주종관계를 맺은 현지의 고케닌(御家人)들 중 단 1명만이 협력할 뿐이고 수적으로 우세한 악당들이 막부가 파견한 사절에게 돌격해서 화살을 쏘고 각종 난폭한 행동을 했다는 기록이 남아있죠.  


 재지사회에서 막부의 사법집행이 공감과 협력을 얻는게 쉽지 않았음을 알려줍니다.


 주로 파견된 사절 2명 중 1명은 지역의 슈고(守護)를 대리하는 재지무사인 슈고다이(守護代)인 경우가 많고 나머지 1명도 지역에 연고가 있는 무사인 고케닌(御家人)인 경우가 많았는데, 가마쿠라 막부가 현지 악당의 제압에 있어 사실상 파견한 사절이 지역에 가지고 있는 개인적인 세력에 의존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이는 막부의 서부일본 통치기관인 로쿠하라단다이가 교토 인근에서조차 빈발하는 악당 문제 하나하나에 충분히 대처할 수 있는 군사적, 경제적 역량이 충분하지 않았음을 의미합니다. 


 이는 중앙집권국가에 익숙한 우리에게는 납득하기 어려운 양상입니다.


 국가권력의 판결을 거부하고 날뛰는 무력집단이 수도 인근 지역에서 날뛰고 있는데 2명의 재지유력자한테, 야 니들이 알아서 좀 해봐!!! 라고 하는건 좀 이상하잖아요?


 게다가 이렇게 실패하고 제멋대로 돌아왔다고 처벌하지도 않습니다. 중앙집권국가에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양상이지만, 봉건적인 주종관계에서 무사들은 막부에게 무조건적인 희생을 요구받는 대상이 아닙니다. 쌍무적인 계약관계에 가까우니까요.


 일반적인 소송집행을 위한 사절들과는 달리 이렇게 어려운 일을 자기의 재산과 무력을 동원해 해결해야 했기 때문에 악당을 체포하는 임무를 담당하는 사절들의 경우,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하면 보상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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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1년 나라의 가스가타이샤(春日大社)를 습격했던 악당들이 토벌당하는 그림, 春日権現記絵 참조---- 


 악당을 토벌하는데 성공한 경우 사절들은 그들이 행한 봉공(奉公)의 대가로 막부로부터 은상(恩賞)을 받습니다. 이 은상은 실제로는 장원영주의 재산으로 지급되게 되는데 주로 그들이 제압한 악당들의 장원에서의 실무직이나 지토(地頭) 직위에 따른 영지의 지행(知行), 즉 수세권을 획득하합니다. 영지를 받는다고 보면 됩니다. 


 그런데 이렇게 고생스러운 일을 해내고 받은 은상은 그야말로 애물딱지가 되는 경우가 많았던 것 같습니다.


 재지무사인 악당들이 사면되는 경우는 다시 받았던 영지를 돌려줘야 하는 경우도 생겼고, 그렇지 않더라도 도망간 악당이나 그 일족은 재지사회에서 영향력을 가진 이들로 이제부터는 그 원한을 사절이 사게되고 토지분쟁이 일어납니다. 


 즉 봉건사회에서 재판과 법에 의한 통치를 실현시키기 위해 임무를 받은 사절들은 자신의 생명을 위협받고 개인재산을 투자해서 임무를 수행하는데, 성공하지 못하면 보상도 없는데다가, 성공한다고 해도 어렵게 얻은 토지는 매우 불안정한 상황에 놓였습니다. 


 가마쿠라시대 후반부터 두드러지게 증가한 악당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장기화되는 것은 이러한 요인 때문이었을 겁니다. 


 가마쿠라 막부는 위의 어성패식목에서 살펴볼 수 있듯이, 장원영주와 재지무사간의 분쟁에 개입하고 싶어하지 않았습니다. 원래 자신의 장원에 대한 외부의 개입을 거부했던 장원영주들은 가마쿠라시대 중반부터 악당 문제가 점차 심화되자 막부에게 도움을 요청하게 됩니다.


 이에 따라서 막부는 사절을 파견해 악당을 체포하려고 노력하지만 봉건적 지배구조하에서 막부의 능력은 이러한 상황을 완전히 해결하기엔 부족했습니다.


 막부가 가능한 장원의 분쟁에 개입하지 않으려 했던 것은 이와 같은 지방에서의 법집행이 봉건적 질서 하에서 자신과 주종관계에 있는 무사들에게 요구하기에는 지나치게 가혹하고, 이에 대한 보상이 불안정한, 한마디로 가성비가 안맞는 행위였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악당들은 단순한 도적의 무리가 아니라 재지사회에 뿌리를 둔 무사들이었습니다. 때로는 막부와 주종관계를 가진 고케닌들인 경우도 있었죠. 막부의 개입을 통해 이들을 처벌하는 것은 재지사회에 형성된 봉건적 질서를 파괴하는 외부의 위협으로 현지인들에게 받아들여질 수 있었습니다. 


 때문에 악당의 토벌이 쉽게 이루어지지 않고 장기화되거나, 장원영주가 실효지배하고 있는 악당들과 적절한 타협을 통해 장원에 대한 지배권을 점차 포기하는 타협이 이루어지는 경우도 나타났다고 합니다. 


 가마쿠라 막부는 중세 일본의 정점에 서있는 무가정권이었지만, 자력구제 사회를 타파할 수 있을 만큼 충분한 역량, 정확하게는 영향력을 가지고 있지 못했던 셈이죠. 


 전쟁을 통해 상대를 이기는 것은 무력의 우위를 통해 달성가능합니다. 하지만 통치하는 것은 단순히 무력을 통해서 달성되지 않습니다. 막부는 자신과 주종관계를 맺은 무사들인 고케닌을 기반으로 다른 무가나 조정의 도전을 물리치고 정권을 차지할 수는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방의 분쟁을 조정하고 판결을 집행하는건 훨씬 까다로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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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아프가니스탄의 부족 장로들이 방문한 미군의 이야기를 듣고 있다.----


 세계최강 미군이 베트남, 이라크, 아프가니스탄에서 경험한 일들을 생각해보시면 이해가 쉽겠죠?


 지방에서 재지무사들은 막부의 지배자로서의 위치를 부정하는건 아니지만 자기가 거주하는 지역에서 분쟁을 중재하고, 판결을 내려줄 정당성이 있는 존재까지로는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이 것이야말로 봉건적 사회와 중앙집권적 사회를 구분하는 중요한 포인트죠.


 중세 일본에서 공권력에 의한 판결이 분쟁당사자들에게 "공정한 중재"로서 인정받지 못한 이유는 뭘까요?


 중세 일본의 법제사 연구자인 사토 유키(佐藤雄基)는 그의 저서 "중세의 법과 재판"(中世の法と裁判)에서 봉건적 사회질서에서 공권력을 형성하는 권문(権門)이던, 막부던 간에 그들의 판결은 "엄정한 절차에 의한 공평한 심판"을 추구하지도 않았고, 분쟁당사자들도 그걸 기대하지 않았다고 설명합니다. 


 어은과 봉공이라는 봉건적 쌍무계약관계가 발달한 사회에서, 분쟁당사자들은 자기와 "인연(縁)"으로 이어진 권력자가 자신의 호소를 일방적이고 신속하게 받아들여서 문제를 해결해줄 것을 기대했습니다.


 중세 일본사회가 재지유력자가 국가권력에 의한 징세와 사법적 개입에서 벗어나기 위해 국가가 아닌 중앙의 권력자에게 토지를 명목상 소유권을 넘기고 연공(年貢)을 바치면서 형성되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는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일원적 지배질서가 아니라 중층적으로 형성된 복잡한 지배구조에서 모두의 공익을 추구하는 공권력이라는게 존재하기 어렵고 인정받기도 어렵습니다. 


 재판에서 작동하는 중세 일본의 공권력(公儀)은 공적인 옳고 그름의 여부(公義)가 아닌 사적인 은혜(私恩)의 영향을 받을 수 밖에 없는 구조라는거죠.  


 막부도 예외는 아닙니다. 어성패식목에서 막부의 자세에서 보듯이, 막부와 봉건적 주종관계를 가진 고케닌의 권리는 상대적으로 더 중요했습니다. 중세 일본의 사법체계는 이러한 사적 "인연"의 역할을 부정하지 않고 발전합니다. 


 중세일본의 막부는 우리가 생각하는 공적인 옳고그름, 공의(公義)의 집행자로서 행동하지도, 받아들여지지도 않았지지도 못했던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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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일본의 무사들이 빡쳐있던 것도 이해는 갑니다. 배경에 밀려서 억울하게 패소하면 아주 짜증났을 겁니다. NHK드라마 가마쿠라도노의 13인-----


 재판에서 승소한 자의 입장에서는 이건 당연한 일입니다. 하지만 패소한 자의 입장에서는 납득할 수 없는 부당한 일이죠. 무사가 부당한 일을 당해 권리가 침해됬다면 어떻게 해야할까요? 칼을 들어야 합니다.


 봉건적 사회구조가 어떻게 자력구제의 사회를 만들어나가는지 좀 더 이해할 수 있겠죠?


 중세 일본의 이러한 사회구조는 지방시장을 등장과 화폐경제의 발전을 촉진시켰지만 동시에 공의(公義)를 추구하는 법에 의한 통치가 발전하지 못하게 방해합니다. 


 이렇게 공권력에 의해 자력구제를 제어할 수 없는 상황은, 가마쿠라 막부가 멸망하고 남북조시대의 혼란기로 접어들면서 더욱 심화됩니다. 이런 여건 하에서 중세 일본인들은 공권력의 권위가 아닌 다른 분쟁해결수단을 찾아나갑니다. 


 그것이 현대인이 보기에는 어처구니없어 보인다 하더라도 말입니다.



참고자료

外岡慎一郎, "武家権力と使節遵行"

静岡県教育委員会, "資料に学ぶ静岡県の歴史"

本間志奈, "悪党召し捕りについての一考察"

佐藤雄基, "中世の法と裁判"

西村安博, 書評 "佐藤雄基著「中世の法と裁判」"

http://www.tamagawa.ac.jp/sisetu/kyouken/kamakura/goseibaishikimoku/index.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