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즈] 알쏭달쏭 한국사 미스터리
· [약스압] 알쏭달쏭 한국사 미스터리 1편.mystery



※ 본인이 의미없이 좆대로 정한 미스터리로,

그냥 이런 게 있구나 생각하고 보는 게 마음 편함. 진짜임.



1. 고구려 태조왕부터 신대왕까지의 미스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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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의 유물인 국보 118호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


광개토대왕과 장수왕에 조금 묻혔지만

고구려의 초기 정복 군주였던 6대왕 태조왕,

그는 한국사에 큰 족적을 남겼지만

어이없게도 ''나이'로 큰 논란을 낳았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태조왕은 기원후 47년에

태어나 165년에 사망하였고, 53년에 즉위하여

146년까지 왕위에 있었다 전해진다.


이 말인 즉, 태조왕은 118년을 살았으며

6살에 왕의 자리에 올라 93년간 통치했다고

볼 수 있는데, 이는 현실적으로 가능하다고

보기 힘든 기록이다.


먼저 인류 역사상 최장수 인물로 공인되는

프랑스의 '잔 루이즈 칼망'은 태조왕보다 4살 많은

122세의 나이에 생을 마감했는데,


공중보건과 위 체제가 전혀 확립되지 않은 시대에

80세도 아닌 100세를 넘어서까지 산다는 것은

수많은 학자들에게 의문을 품게 하였다.


그 뿐만이 아니라, 태조왕의 뒤를 이은

태조왕의 첫째 동생이자 7대왕 차대왕 또한

태조왕보다 24살 차이가 나며, 75세에

왕위에 올라 94세에 사망하였고,


태조대왕의 이복동생이자, 8대왕 신대왕은

77세에 왕위에 올라 90세에 생을 마감하였다 전해진다.


고구려의 모든 국왕들이 이들처럼

장수했다면 모를까, 닉값한 20대왕 장수왕(97세)을

제외하면 오피셜로 80세를 넘어서 생존했던 왕은

21대왕 문자명왕 (최소 80대)만 있기에

28명의 왕 중 단 한 명 뿐이고,


90% 이상이 생년 미상인 고구려 왕들의 나이를

모두 합쳐 어림 잡아 평균을 내보아도 60대를 넘기지

못 했기 때문에 태조왕, 차대왕, 신대왕의 나이는

기록된 것보다 훨씬 적었다고 보는 게 합당하다.


이는 삼국사기를 편찬했던 김부식이 다른 왕의 기록을

3명의 왕에 다 합쳐버리고, 이름을 뺐다는 의혹을 낳았다.


기록하기 귀찮아서 저랬다고 하는 게 말이 안 되지만,

삼국사기의 백제 파트와 신라 파트에 비해 중국과 직접적

교류와 접촉을 했던 고구려의 파트는 교차 검증 정확도도

꽤나 높고 자세하여 두 국가보다 신빙성이 높은 데에 반해


갑작스레 저러한 비정상적인 기록이 있으니

후대 사람들은 당혹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러한 의혹은 조선시대부터 이미 제기되었으며,

중국 측 기록에도 교차 검증이 맞지 않아

(후한서에는 태조왕이 74세의 일기로 사망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세 왕의 정확한 나이를 알아내는 것은 요원해 보인다.


2. 발해사의 미스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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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대조영에서 대조영을 분한 배우 최수종


발해 또한 꽤나 많은 미스터리를 지닌 국가이다.

발해를 건국한 태조 고왕(대조영)부터 시작이 좋지 않은데,

그와 발해 고구려를 계승한 것은 분명한 역사적 사실이지만

그의 출신 성분이 고구려 유민인지, 말갈족인지 확실치 않으며


발해의 시조임에도 불구하고, 대조영이

어떻게 고구려 유민들을 규합하여 발해를 건국했는지,

건국한 이후의 21년간의 행적이 어떠했는지,

묘는 어디 있는지, 모두 밝혀지지 않아

발해사를 입문하는 이들의 머리를 지끈거리는 원인이 되었다.


사실상 발해 또한 고조선 못지 않게 기록이 매우 부실한데,

삼국시대에 비하면 짧지만 나름 200년 이상을 존속했던

국가임에도 불구하고 발해가 족적을 남겼던

중국, 러시아, 북한 어디에도 제대로 된 기록을 찾기가 힘들다.


정확히 말하자면 발해를 기록한 사서는 어느 정도 있으나

이들 사서에도 빈 부분이 매우 많고 충돌하는 부분이 많아

교차검증이 힘들 뿐더러, 결정적으로 발해에서 자체 저술한

현존하는 역사서가 하나도 발견되지 않아,

발해 또한 가려진 베일이 꽤나 두터운 국가이다.


발해의 멸망 이유 또한 여러가지 가설이 존재한다.

먼저 백두산 폭발로 인한 멸망설은 현재 폐기되었는데,

백두산의 분출 시기는 발해가 멸망 20년 후인 946년으로

밝혀졌고, 이는 발해의 멸망보단 멸망 이후의 혼란에

영향을 끼쳐 발해의 유민들이 긴 시간 동안 유랑을 하게 되었다.


가설들을 종합하여 추정컨대, 발해 후기 때부터 지배층 간의

분열이 있었고, 다민족 국가였던 발해 내부에서 피지배층을

완전히 제대로 규합하지 못 하고, 말갈족과도 대립을 이루었으며

결정적으로 발해와 사이가 매우 좋지 않던 요나라가

칼을 제대로 갈아 한 번에 수도를 점령하고 멸망한 것으로 보인다.


어느 국가든 국가의 멸망에는 지배층 간의 분열이 반드시 존재하며,

고구려 유민과 말갈족의 대립으로 인한 말갈족의 신라와 고려로의

이탈은 실제로도 신라와 고려의 기록에도 존재한다.


수도를 한 번에 점령하는 전략은 백제를 침공한 나·연합군,

고려와 요나라 간의 전쟁, 조선의 병자호란, 북한의

6·25 전쟁 당시의 서울 점령 등 여러 사례에서 찾을 수 있다.


3. 경애왕의 최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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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애왕하면 빼놓을 수 없는 포석정, 전체 규모는 꽤 넓은 편이다.


신라 55대왕 경애왕은 의자왕과 이미지가 조금 비슷한데,

포석정에서 술판을 벌이다가

견훤이 직접 이끈 후백제군에게 기습을 받아

결국 울며 자결했다는 비극적인 이야기 때문일 것이다.


당시 신라는 지방 호족들이 곳곳에서 거병하는데도,

이를 바라만 보고 있어야 하는 국가로까지 나락을 가버린

수준이었으며, 군사력 또한 이에 상응하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경애왕은 이에 굴하지 않고,

즉위를 하자마자 매년 고려에 사신을 보내

야무지게 빨아주면서 화친을 맺는 등

국가의 존립을 위해 동분서주하였다.


당나라에도 서신과 조공을 보내 플랜 B를 꾀하였고

후백제와의 전투에도 승리하는 등,

우리가 알고 있는 경애왕과는 꽤 다른 모습을 보였다.


이에 자신감이 조금 생겼는지, 경애왕은

고려에 같이 후백제의 젖보똥을 따보자고

서신까지 보내는 등 과감한 전략을 펼치기도 했다.


이에 참을 수 없었던 견훤은 60이 넘은 나이에도

직접 투구를 써 후백제군을 이끌어 전장으로 나섰고,

근품성(지금의 경상북도 문경시)를 점령한 후

바로 경주로 돌격했으니 이때가 927년 음 11월이였다.


견훤이 경주시의 바로 옆에 있는 영천까지 왔다는

소식을 듣고 포석정에 놀던 경애왕은 도망하였지만

결국 견훤에게 사로잡히게 되었다.


이 사태를 보고는 견훤도 어처구니가 없었는지,

신라의 신하들을 모두 죽이곤 경애왕에게 칼을 던져

자결을 강요했으며, 결국 경애왕 박위응은 숨지게 되었다.


이 부분이 고려사와 삼국사기에 교차 검증이 되는 부분인데,

경애왕이 '무엇을 하다가' 죽었는가를 유심히 볼 필요가 있다.


경애왕은 견훤이 침공한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자신의 생각과

달리 루트를 틀어 바로 경주로 온 사실을 뒤늦게 알았고

일찍이 고려에게 도움을 요청했음에도 사로잡혀 죽었다.


그런데 이를 알고도 음 11월 한겨울에 대놓고

포석정에서 술잔을 동동 띄우고 노가리를 깐다는 것이

실질적으로는 받아들이기 힘든 부분이다.


많은 이들이 모르는 사실 중 하나로, 포석정은

신라의 성지 중 한 곳인 남산의 중앙에 위치하고 있으며,

포석정 주위에는 신라의 성지들이 많다.


또한 신라 왕실의 오피셜 놀이터인

동궁과 월지, 임해전이 아닌 굳이 포석정까지 가서

술판을 벌일 만한 이유도 딱히 찾을 수 없을 뿐더러


음 11월에는 한창 팔관회를 열던 시기였으므로

'경애왕은 포석정에서 술판을 벌인 것이 아닌

국가의 안녕과 수호를 위해 제사를 지냈다'는

반론이 심심치 않게 제기되고 있다.


의자왕과 더불어 경애왕은 망국의 군주이며,

나라를 지켜보고자 애를 쓰다가 사망했기 때문에

어쩌면 사서에 프로파간다가 주입되었을 수는 있지만


가설은 어디까지나 가설일뿐 경애왕이 정말로

자신감이 넘치다 못 해 흘러넘쳐 술판을 벌였다가

죽었을 가능성 또한 배제할 수 없는 일이다.


다음에 이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