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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도 첨부하고 길게 쓰려다가

책 분야가 분야인지라 저작권 문제 생길 것 같아서 짧게 씀.

발췌는 정말 조금씩 했는데 문제소지 되면 언제든 다 지울거다.


시는 생각보다 좋았다.

시집은 솔직히 시인이 예뻐서 산 것 하나밖에 없는데

12000원이나 하는 시집치고 돈값 해낸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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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파만 하냐? 이젠 시인도 세계관 짠다


세계관이 뚜렷한 시인인데,

기본적으로 이 시를 읽을 때 전제해야 하는 건 세 가지다.


1) 미래는 어떤 경우에도 정해져 있지 않음. 고로 무엇도 '미래에 존재'하지는 않음.

예를 들어, 쌀을 담고 물을 맞춰 밥솥에 넣는다고 하더라도, 20분 뒤에 그것이 '밥'으로 반드시 존재하진 않음.

그것은 당장은 그냥 물에 잠겨 밥솥에 들어간 쌀일 뿐임.


2) 감각할 수 있는 것 곧 구체성을 획득한 것은 현존함.

밥솥을 열어서 밥알을 한 입 먹을 수 있으면 그때부터는 존재하는 게 맞다.

이것을 미시세계로 축소(아니면 확장)하면

가령 삶을 감각하게 해 주는 것은 사랑하는 가족이나 지나간 기억이 아닌

운동화 속에 들어간 모래 한 알의 거슬림이다.


3) 우리의 감각은 시공간을 재구성한다.


적어놓고 보니까 좀 철스퍼거같긴 한데

그런 게 아니라 양자역학의 불확실성 원리에서 따 온 세계관인듯.

우리가 관측해야만 정해진다는 걸 극대화해서 만들어낸 것 같다.

개인적으로는 버클리의 경험론도 생각났다.


여하튼 이것만 가지곤 재미가 없고

아포칼립스라던가 게임 속 세상이라던가 가상세계라던가

하여간에 신박한 시공간에 이런 필터를 씌워 바라보는 것이 강혜빈의 시 세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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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사랑한다는 감각


여기에 우리가 실제로 볼 수 있는 도시의 재해석도 일어나는데,

시집 전체에 대도시, 신도시, 백화점, 서울의 구체적인 지명들이 많이 나온다.

그건 아마도 도시가 '뭐든 다 정해진 공간'이라는 점을 이용하는 것 같다.

시골은 뭐가 안 정해짐? 할 수도 있는데

걍 느낌이라 설명하긴 어렵지만 도시는 딱딱 맞춰 돌아가긴 한다.


지하철이 제 시간에 오고 장미빌라는 7억이며 여기에 가서 이만큼 내면 이렇게 해 준다.


이렇다보니 이 전형성을 탈피하는 과정에서

주체적으로 시인이 그것들과 접촉하며 시공간을 재구성해나간다.

그런 와중에 이 시가 숨긴 보석같은 가치들을 하나씩 풀어내는데,

내가 제일 좋아하는 시는 <시향기>라는 시다.


시인은 백화점에 들렀다가 냄새를 맡고 냄새를 기억하는 것이 기억상실증에 효과적이라는 것을 떠올려낸다.

바이러스(코로나)로 인해 냄새를 맡지 못하면 곧 기억을 잃는다고 말하고,

기억을 잃으면 나는 죽은 사람이라고 한다.


그러나 시인은 죽지 않았기에 기억 속에서

백화점 향수와는 전혀 다른 고유의 냄새를 떠올려낸다.

담배 연기, 소독약 냄새 같은 것들.

즉, 냄새를 감각한다.


'당신' 이 좋아하는 건 나로서는 알 수 없는 나의 살냄새 뿐이라는 시인은

아주 익숙해진 것들 사이에서도 예민하게 감각할 수 있는 것이 있다고 강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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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불이 켜집니다

어쩌면 초록 불일까요


우리는 다른 풍경을 보고 있죠

그래도

잡은 손은 따뜻하고요


빈손으로

횡단보도를 건너요


멀리서 회색 벚나무

흔들리고


당신에게서 아직 오지 않은

여름 냄새가 나네요


- 수록 시, <시향기> 중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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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무엇도 정해지지 않은 상황 속에서 기억을 떠올리며

시인은 멀리에 있는 '당신'을 감각하고

손의 따뜻한 감각으로 '당신'의 손을 잡은 것처럼 느낀다.

그는 시인과는 다른 풍경을 보고 있을 테지만

그에게서는 아직 오지 않은 여름의 냄새가 난다.

즉, 그에 대한 감각으로 아직 오지 않았던 시공간인 여름이 재구성을 시작한 것이다.


예민한 감각으로 미래에 도달하는 그것은 사랑.

빈손으로 걷는 시인은 누군가의 손을 잡고 누군가의 냄새를 맡으며 걸어간다.

사랑하는 이는 거침없이 미래로 나아간다.

진열된 향수처럼 빛바랜 도시이지만 봄이라도 맞았는지 향기로 만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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멸망하는 시대의 오두막집


사랑에 대한 주제를 마구 변주하는 과정에서 이런 연애시들이 꽤 많다.

꼭 이 시인처럼 안 생겼어도 내 여자친구가

오늘 백화점 향수코너 갔다가 네 생각 나서 썼어 하면서 저런 시 보여주면 미치긴 할듯

물론 이 시인처럼 생기는 것보다 이런 수준의 시를 쓰는 게 훨씬 어렵긴 한데...


뒤로 가면 SF시가 나오는데, 그야말로 별의별 게 다 나온다.

심지어 GTA 주제로 쓴 시도 나옴. 로스 산토스라는 거 보고 잠깐 벙졌다.


앞서 세계관 설명했으니 게임 시는 뭔지 대충 알겠지?

그들의 미래는 감각에 무관하게 정해져 있고 그래서 사랑하는 법을 배우지 못한다.

알 수 없는 미래들 속에서 누군가를 변하지 않게 감각하는 것이 바로 사랑이니까.

실제로 시인은 사랑을 굉장히 달콤하고 불안한 것으로 묘사한다.

사랑은 미래의 불확정성 때문에 불안한 것으로 느껴지지만 그건,

우리가 사랑하는 이와 맨살을 맞대어야 할 가장 좋은 핑계가 되기도 할 것이다.


GTA가 주제인 시 <딥 러닝>은 시인이 에디터를 써서 주인공 둘에게

연락처를 교환하도록 하는 것으로 끝이 난다.

무채색 도시 속에서 그런 미래를 부여하는 존재가 예술가라고 보는 것 같다.

미래를 부여한다는 말은 조금 오만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정확히는 그런 미래를 대신 감각하는 존재이다. 존재할 수 있도록.

게임 캐릭터들의 데이트와 손잡기와 키스와 애무를 대신 감각한다면

그들은 자유롭게 사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의 세계도 더는 반복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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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의 제목인 <미래는 허밍을 한다>는 간단히 말해

아포칼립스 상황에서 같이 지하 밀실로 도망치지 않고 지상에 남아

꽃과 여름이 있는 세상을 지켜냄으로써 미래를 구하겠다고 선언하는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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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상의 나는

너에게 노래를 줄게


별들의 윙윙거림

바람이 사각거리는 소리


앰비언트 음악과 닮은

최소한의 내일을


여름의 싱그러운 무릎을 줄게


(...)


지상의 나는

허밍을 멈추지 않을게


그대의 빈집이 될게


- 수록 시 <미래는 허밍을 한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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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노래와 허밍은 결국, 파멸되는 세계 속 희망을 상징한다.

꽃, 벌, 배꽃, 빗소리, 수플레케이크.

그것들이 없이 목숨만 부지한다면 살아남았다고 보기는 힘들지도 모른다.


물론 합리적인 선택은 아니다.

거기 있다가 죽으면 아무 의미도 없는 개죽음이니까.

미래를 구원한다고는 하는데 대체 노래로 뭘 어떻게 하겠다는 건지.


한편 지하의 밀실,

어디선가 들려온 노랫소리를 들은, 곧 감각한 누군가는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여전히 세계에는 희망이 있다.

여전히 세계에는 꽃이 피고 벌이 날아다니며 배꽃이 지고 비가 내리며

어딘가로 간다면 수플레케이크를 얻어먹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미래가 존재한다는 것을 끊임없이 알리기 위해

미래는 허밍을 한다.

미래는 우리에게 희망을 줄 의도가 전혀 없지만

미래가 부르는 노랫소리가 우리에게 감각된다면

그래서 그런 세계가 지금 당장 우리에게 찾아온다면

오늘 지금 당장을 믿는 내가 너의 내일이 된다면


틀림없이 존재하게 된다. 구원이라는 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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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체적인 감각과 미래의 탐험


미래가 정해지지 않았다는 것은 두려움의 대상이기도,

사랑을 실증하는 대상이기도, 희망을 지켜내는 영웅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은 단지 미래의 불확실성에서만 나오는 게 아니다.

우리가 그 시간들을 감각하기 때문에 미래가 정해지지 않았다는 것이 의미를 갖는다.


시인이 지나치게 예쁘지만 않았다면

연애를 시작할 때 상대방에게 이 시집을 줘도 좋을 것 같다.

뭉쳐지지 않은 수많은 가능성들 중에서

내가 감각하는 것은 굳게 결정된 너의 품이다.

내 사랑은 영원할까. 네 사랑은 영원할까. 우리의 사랑은 불안할까.


한편 멸망하는 세계 속에서 수플레 케이크를 구우며 허밍을 흥얼거리는 누구처럼

그것을 믿고 있다면 그것을 감각할 수 있다.

네가 내게 만져지는 이유는 내가 너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조금 믿어줘도 좋겠다.

이 도시의 모든 것들은 그저 정해져 있을 따름이지만

너를 만질 때마다 내 세계의 시공간은 끝없이 재구성되니까.


너를 닮아갈 내 미래는 미리 보일 것처럼 따뜻하게 만져진다.

그런 문구를 앞장에 써서 꽃다발과 함께 선물하면 더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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