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일전쟁의 결과는 청나라에 영토보호능력에 크게 의문을 자아냈습니다. 이후 적극적으로 중국 식민지를 차지하기 위한 경쟁이 일어났습니다. 1897년 독일선교사 살해를 명분으로 독일제국 해군은 자오저우만(Kiautschou Bay)과 칭다오를 조차지로 삼고 극동함대 사령부로 결정합니다. 조약은 99년동안 조차하는 조건으로 홍콩과 유사합니다.
독일제국 해군은 이곳에 2척의 건보트를 건조해서 양쯔강 정기적 순찰로 중국에 영향력을 확대하기 시작합니다.
이들은 칭다오급으로 불리며 1번함 칭다오와 2번함 바터란로 구성됩니다.
바터랜드는 빌헬름 2세가 직접 고른 이름으로 고국/조국을 뜻합니다.
SMS 바터랜드는 1903년 진수 해체되어 상하이에 재조립되어 1904년 부터 양즈강 순찰을 시작합니다. 실제로 1905년 상하이에 반외세 폭동 진압에도 사용됩니다.
1890년 영국은 치푸 협약을 개정하면서 양쯔강 하류로부터 2,500Km 떨어진 충칭을 조약항으로 개항하도록 강요하여 조약을 개정합니다. 1907년 충칭에도 함은 방문해서 영국과 프랑스 건보트와 함께 반외세 폭동을 진압하는데 사용됩니다. 이후로도 1910년 이창에 일어난 반외세 폭동 진압에도 출동하는 등 여러 바쁜나날을 보내다, 1911년 중국 산해혁명이 한커우(우한)에 발발하면서 이곳에 정박합니다.
그러나 이날은 금방 끝났는데 1차 세게대전이 발발할때 난징에 있단 함은 선원들은 나포된 러시아 상선 랴잔호을 개조한 SMS 코므란에 탑승하기 위해서 육로로 이동하였고 함은 연합국 나포를 막기 위해서 페이퍼 컴퍼니에 매각되어 Landesvater호로 개명됩니다.
1917년 미국 등에 제안으로 독일 식민지 칭다오등 조차지 반환을 조건으로 중화민국이 1차 세계대전 참전을 결정하면서 함을 중화민국 정부에 압류되고 리수이(Li Sui, 利绥) 함으로 개명됩니다.
그리고 10월 혁명이후 러시아 상황이 어지러워지면서 동부 러시아에 중국인들에 안전이 심히 불안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중화민국은 다른 연랍국과 함께 중국인을 보호하기 위해서 동시에 개입을 시작했습니다. 1,600명에 병력이 파견되면서 상하이 조선소에서 개장된 이수함과 똑같은 전 독일 군함인 SMS Otter/Li-Tsieh(얘도 양쯔강 순찰함대에 포함된 건보트)와 함께 블라디보스토크로 이동했습니다.
이들은 머물다가 떠났는데 중화민국 해군은 이 2척으 아무로강 소함대를 결성해 아무르강을 정기적으로 순찰하기록 결정했기 때문입니다. 2척에 함선은 1918년 8월 24일 블라디보스토크를 떠나 사할린 섬으로 향했 그곳에서 10일 동안 갇혔습니다
1918년 9월 중순, 중국 포함은 아무르강에 태평양 만나는 곳에서 아무르 강으로 항해하여 하바롭스크까지 상류로 계속 항해했지만 하바롭스크에서 백군의 포격을 받았습니다.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아무르 강을 순찰하던 이 작은 함대는 겨울 전까지 아무르강과 태평앙 입구로 돌아갑니다.
1919년 다시 함대는 아무르강으로 출항했습니다. 그동안 정세는 1918년 이후로 내전에 개입한 일본군은 백군과 함께 아무르강과 태평양이 만나는 하구에 위치한 니콜라옙스크나아무레를 점거하였습니다. 그러나 1920년 2월 경 적군 야코프 트리아핏친이 이끄는 적군 4,000여명이 마을을 포위했습니다. 일본군은 백군과 합쳐도 숫적으로 크게 열세였기 때문 일단 중립을 유지하고 마을 진입을 허용합니다.
그러나 야코프 트리아핏친은 곧 백군을 처리하고 일본군의 무장해제를 요구하였고 일본군은 이 요구를 거부하고 현지 일본인의 도움하에 기습적으로 공격을 가하여 야코프 트리아핏친에 큰 부상을 입히고 그의 참모들을 살해했습니다.
낭만으로 가득찬 트라이핏친과 여자친구이자 참모장과 함께..
적군은 빠르게 반격을 하지만 곧 화력의 열세에 처합니다. 이들에게 믿을 수 있는 화력을 제공할 사람이 근처에 있었는데 바로 그 도시를 거점으로 아무르강을 순찰하는 중화민국 해군에 아무르강 순찰함대로 전대장은 적군이 일본군 방어를 뚫을 수 있도록 화력을 지원해줍니다. 그리고 이렇게 넘어온 적군들은 지역에 사는 일본 민간이니나 살해하는 짓거리나 하게 됩니다. 이렇듯 이 지역 적군 상태는 그닥 좋지는 않았는데 당시 여기서 활동하던 아나키스트 성향에 적군 총 지휘관인 트랴피친은 1920년 3월 부터 니콜라옙스크 사건이라고 불리는 민간인 학살을 자행하는데 함대 역시 근처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할 수 있습니다.
악명을 얻은 트랴피친에 대해 일본 정부는 볼셰비키 정부에 강력하게 항의했고 민간인 학살로도 이미 문제를 일으키고 있었기 때문에 체포 당하고 처형됩니다. 또한 이 사건을 구실로 북사할린과 블라디보스토크를 점령하게 됩니다. 일본군을 향해 포격을 가했던 중화민국 해군 아무르강 소함대에게도 일본군이 접근하지만 다행히 붉은 군대 진격으로 인해 벗어나게 됩니다.
소련은 1920년대 후반 백군과 그를 지원하던 일본군 세력을 거의 무너트리고 극동의 지배권을 확립합니다. 그러는 동안 중화민국은 군벌 내전을 겪고 아무르강 소함대 지휘권은 만주군벌 장쭤린으로 넘어갑니다
1929년 그의 아들 장쉐량은 이전 중-소 전쟁으로 넘어간 중국 동복부 철도 부설권과 권리를 다시 되찾기로 결정했습니다. 무력을 사용하더라도요.
이로 인해 아직도 소련영토 내 아무르강에서 버티던 아무르강 소함대는 소련 해군과 해전을 벌이게 됩니다. 처음이자 마지막인 소련-중국간에 해전이 되게됩니다.
1929년 10 하바롭스크 인근에 아무르강, 우수리강, 송화강이 만나는곳에서 소련 해군 건보트 9척이 중화민국(정확히는 봉천군벌소속) 아무르강 소함대와 해전을 벌이게 됩니다.
해전에 참가한 소련 해군 아무레츠, 몽콜, 스콜, 쑨원... 함들
사실 함대만 보더라도 답도 없이 소련이 강했지만 소련은 당시 기준 채신기술을 자랑하는 항공기를 동원했는데 지상에 있는 항공대 뿐만 아니라 수상기모함 아무르에서 수상기를 출격시켰습니다. 총 20대의 항공기가 해전에 참가했습니다.
아무르강 소함대는 당시 리수이, 리지에, 장흥 3척으로 구성되어 있었고 모두 수상기에 침몰 당했습니다. 이들은 소련 해군에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함선에 출격한 함재기에 의해 성공적으로 격침된 적함선으로 남았고 전세계적으로도 함선에 출격한 함재기에 격침된 함선 목록에 거의 초기에 이름을 올렸습니다. 리수이만 나중에 다시 인양 되어 수리 되었습니다.
1929년 하바롭스크 의정서로 중소 분쟁이 끝났고 인양된 리수이만 다시 수리되서 의정서 하에 다시 강을 순찰했습니다. 1931년 일본이 만주를 정복하자 얼어붙은 강 때문에 탈출하지 못하고 항복하였고 일본군은 利绥 한문 그대로 다시 일본어 발음으로 개명하여 사용했습니다.
1945년 8월, 아무르강 소함대 함선들을 소련이 다시 나포 하였지만 이수이는 너무 오래되었습니다. 소련은 그래도 다시 한번을 외치며 개장을 고려했지만 결국 스크랩처리 됩니다.
독일제국 건보트-제국주의선봉장-중화민국함께-중화민국함선으로 러시아에서 함포외교질-중화민국함선으로 일본군에게 포격질-함재기에 격침당한 함선행-일본군에게 노획됨-다시 소련군이 노획함-스크랩
요런 인생을 사신..
개쩌네... 나라를 7번이나 갈아타다니 개쩐다
너 조선족이지
글을 뭐이리 못 써 씨발럼아
저학력자 격노
일본 제국과 같은 색깔의 한반도 지도를 보니 눈물이 난다
글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모르겠다
빨갱이섀끼 하다하다 나치를 처 빠노 시발
2줄 읽고 비추주려고 글내렸다. 조선족 ㄲㅈ
ㅅㅂ 무슨 선박으로 하는 배구냐?
군하하하하하하
독일은 v 발음 f 발음일텐데 바털란드가 아니라 파털란트 아님?
중국어로 글쓰고 한국어변환했나
korea (Jap.) - dc App
우크라이나 나치에게 죽음을!
건포도의 일생으로 보임
샬롬 - 아멘
님하 가독성 너무 개구림
이거 좆선족이 짱겜 번역할때 보던 그 느낌
아니 무슨 유람선이구만 무슨 건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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