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에 들어가기 앞서 사상 검증을 위해 광복군은 국내진공이라는 허황된 망상이나 하는 몽상가 집단, 킬구는 고작 이념이 틀리다고 같은 독립운동가도 처죽이는 극우, 김좌진을 필두로 한 일부 독립군들은 민간인 약탈이나 하고다니던 깡패새끼들이라는것을 인정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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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글처럼 독립운동은 아무런 소용이 없었고 독립은 온전히 미국과 연합국들의 공적이라는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심심치 않게 보인다.



과연 이것은 정말일까? 카이로 회담을 알아보며 같이 살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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꺼무위키에서 긁어온 카이로 선언문이다. 뭔가 이상하지 않은가? 


’1차대전이 발발한 이후‘ 에 일본이 점령한 땅들을 반환한다고 되어있다. 하지만 한국은 1910년 경술국치로 땅을 뺐겼기 때문에 포함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왜 카이로 회담에서 똑같이 1차대전 전에 일본이 먹은 류큐(오키나와)와 대만의 독립은 논의되지 않고 조선의 독립만 명시되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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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바로 루스벨트와 장제스가 처칠이 ㅈㄴ 싫어하는 티를 팍팍 내는 와중에도 무조건 조선을 독립시켜야 한다고 아득바득 우겼기 때문이다.



당시 류큐와 대만은 독립운동을 하지 않았으며, 자연스래 열강들은 두 국가를 독립시킬 정당성과 필요성 자체를 느끼지 못하였다.



독립운동의 의의는 다른곳에 있는것이 아니라 우리 민족의 독립 의지를 계속해서 세계 만방에 알린 것에 있다.



그렇다면 실질적으로 독립운동이 적게나마 카이로 회담에 끼친 영향을 계속해서 알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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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제스가 카이로 회담에 참석한다는 것이 알려지고 난 후, 김구를 필두로 한 중국에 있던 독립운동가들은 장제스에게 임정의 승인과 한국의 독립을 요구했다. 

장제스 역시 한반도에 소련의 영향력이 커지는걸 볼 바에는 아에 독립시키는 것이 낫다고 판단하여 23일에 있는 루스벨트와의 만찬에서 대뜸 한국의 독립 필요성을 강조한다.





사실 장제스가 윤봉길의 의거에 감격하여 선의로 한국의 독립을 주장했다는 한국인의 인식은 틀렸다.

당시 루스벨트는 이미 한국에 대한 신탁통치안을 구상하고 있었고 이를 중국도 동의 한 줄 알고 있었다.

장제스는 한국을 즉각 독립시킨 후 청나라 시절처럼 다시 속국화 시키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는 미국측의 문서에서 잘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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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담이 열린 호텔)



11월 23일 루스벨트는 장제스를 자신의 숙소로 초대하여 만찬을 가진다.
미국이 따로 기록해둔 문서는 없고, 중국이 정리한 기록에 따르면,


“루스벨트 대통령은 한국·인도차이나, 다른 식민지역의 장래 지위에 대한 상호 이해를 같이해야 한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장제스 총통은 동의하면서 한국에 독립을 허용할 필요성을 강조했다.”

“한국 독립문제에 대하여 총통은 특별한 노력을 경주했고 루스벨트에게 우리 주장을 찬조해 달라고 요구했다”


라고 나온다.






24일에 처칠과 루스벨트는 회담을 가진다. 미국 국무부의 기록에 따르면 루스벨트는 전날 장제스와의 회담내용을 이렇게 설명한다



“장제스는 전날 있었던 토의 내용에 대해 매우 만족한 듯하다. 중국이 만주와 한국의 재점령을 포함한 광범위한 야심을 갖고 있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또한 당시 장제스와의 만찬에 참석한 루스벨트의 아들 앨리엇은 자신의 회고록에서 이렇게 증언한다



“대통령이 한국을 포함해 일본 점령 지역에 대한 전후 배치에 대해 물었다. 장제스는 한국 운명에 별로 관심이 없는 듯했다”





장제스는 임정을 지원했다. 윤봉길의 의거를 찬탄했다. 하지만 후원은 제한적이였으며 일본이 패망한 1945년 8월 15일 당일에 김구가 지금이라도 공식 망명 정부로 승인해달라며 빌었지만 끝까지 승인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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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소앙의 사진)


고스 중국 주재 미국 대사의 이런 비밀 전문이 있다.


“나는 임시정부 외교부장(조소앙)의 요청으로 비공식적으로 그와 만났다. 중국 정부가 왜 한국 임시정부를 승인하지 않느냐고 그에게 물었다. 그는 귀엣말로 말했다. 일제 패전 후 한국을 중국의 종주권 아래에 두려는 중국의 욕망 때문일 것이라고 했다”


조소앙은 임정의 핵심 간부였다. 당시 임정에서도 장제스가 한국을 다시 속국화 하려는 야망을 품고있다는 인식은 일반적이였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미국은 중국을 견제하며 조선의 신탁통치를 거친 독립을 주장한다.


미국은 어째서 중국의 영향력을 배제한 한국의 독립(비록 신탁통치라고 하여도)을 지지하였는가?


그 이유는 이승만의 꾸준한 독립 외교와 끊임없는 독립운동, 그리고 루스벨트가 구상한 전후 신질서의 바탕이 식민지의 해체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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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은 조선에 관련된 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미국 정부와 의원들에게 편지를 보냈다. 당연히 미국 정부는 무시로 일관하였지만, 이승만은 개의치 않고 계속해서 편지를 보냈다.



놀랍게도, 이런 노력은 차츰 성과를 얻어서, 국무부 관리들이 그를 괄목상대하게 되었다. 그의 인품과 열정에 감복한 미국인들이 그를 돕기 시작한 덕분이였다.



대표적인 사람은 통신사 INS의 기자였던 제이 제롬 윌리엄스였다. 1919년 4월에 이승만은 처음으로 윌리엄스의 사무실을 찾았다. 당시 미국 신문들은 일본에 우호적인 여론에 눌려 3·1독립운동을 보도하지 못했다. 이승만이 자신을 소개하고 조선의 만세 시위가 총독부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이어진다는 내용의 전보 두 통을 꺼내 놓자, 윌리엄스는 바로 타자기를 꺼냈다. 다음 날 그의 기사가 많은 신문들에 실렸다. 그 뒤로 이승만은 전보들이 들어오면 윌리엄스를 찾았고, 조선의 시위 소식은 미국 전역으로 퍼져 나갔다. 이승만의 열정과 조선의 비극적 운명에 끌려, 윌리엄스는 자기 시간과 돈을 들여서 조선 독립운동을 도왔다.





1941년 6월 이승만은 『일본 내막기(Japan Inside Out)』 라는 책을 냈다. 그 책은 일본의 미국 공격을 예측했다. 루스벨트에게 책과 함께 주구장창 편지를 보냈다. 전쟁 발발 후 ‘한인자유부대 편성계획서’도 보낸다. 이 편지들과 노력이 루스벨트의 마음을 움직였는지는 모르지만, 루스벨트는 잊혀진 나라 한국을 처음으로 공식석상에서 언급한다.



루스벨트는 태평양 전쟁 개전 70여 일 뒤, 라디오 연설문에서 “한국 국민이 당하는 일본의 가혹한 압제”에 동정을 표시했다. 그는 식민지 한국의 처리 문제를 재조명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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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은 그 후 루스벨트에게 장문의 친서를 보낸다. 소련에게 조선을 넘겨주지 말고, 임정을 승인해 주며, 한인부대를 창설해 달라는 내용이였다.




루스벨트는 놀랍게도 답장을 직접 보낸다.


“친애하는 이 박사.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나는 귀하의 서한을 잘 접수했음을 알려드립니다. 
귀하의 서한이 ‘섬세한 주의’를 받았다는 사실은 표명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라는 내용이였다.




이승만은 그 후로 두 차례 더 루스벨트에게 직접 친서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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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노력이 빛을 발한 것일까? 미국은 카이로 회담에서 전후 한반도의 주도권을 가져오려는 중국을 견제하고 조선을 독립시키지 않으려는 영국을 찍어누르며 한반도의 신탁통치안을 관철시킨다.



신탁통치는 식민지 퇴출의 루스벨트 방식이다. 완전 독립으로 가는 중간에 나라를 이끄는 역량을 기르기 위해 하나의 체제를 둔다는 것이다.



카이로 회담의 초안은 미국이 작성했고, 중국과 영국이 동의하였다.



홉킨스의 초고에는 ‘가장 이른 시기’ 에 독립을 시키겠다고 명시되어 있고, 루스벨트는 ‘적절한 시기’ 로 수정하였으며, 처칠은 아에 독립이라는 단어를 빼버리려고 시도하다 타협하였다.



루스벨트는 한국인에게 나라를 이끌 수 있는 적절한 역량이 있는지를 의심했기 때문이고, 영국은 식민지와 제국주의를 포기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한국의 독립은 국제적으로 보장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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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은 절대로 아무런 의미도 없지 않았다.



필자는 비록 과정에서 크고 작은 다양한 찐빠들이 있었고, 큰 영향을 주지 못하고 강대국들의 이해관계에 의해 독립이 이뤄진 것은 맞으나, 그것을 근거로 독립운동 자체를 폄훼하면 안된다고 생각한다.



독립은 강대국들이 아무런 대가 없이 쥐어준 선물보따리가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의 노력으로 얻어낸 값진 보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