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고구려 왕들의 후손 - 횡성 고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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횡성 고씨


인구: 약 1만명


시조: 동명성왕 고주몽


중시조: 고인승



668년 고구려가 나당연합군 손에 멸망 당하자


연개소문의 둘째 아들과 셋째 아들 그리고 고구려의 마지막왕 보장왕까지 싸그리 중국으로 끌려갔다


이 때 이미 중국으로 귀화한 연개소문의 맏아들이였던 연남생이 당고종에게 자기 형제들을 살려달라 하여


당고종은 형제간의 우애가 두텁다는 립서비스와 함께 자비로운 황제의 위엄을 보인답시고 진짜 둘을 살려줬다


그리고 보장왕도 살려주긴 했지만 보장왕에겐 한가지 퍼포먼스를 시켰는데 바로 당태종의 무덤 참배였다


이는 상징적인 의미가 굉장히 큰 사건으로 중국사 최고 명군중 한명인 당태종 최악의 흑역사가 고구려와 전쟁에서 패배인데


그 고구려가 당태종의 아들 손에 망해 고구려의 왕이 직접 당태종 무덤으로 끌고가 사죄와 참배를 시켰으니


이는 자신들이 당한 설욕을 풀고 당태종의 한을 달래기 위해 보장왕을 마치 제물마냥 바친 꼴이였다


이후 보장왕을 요동반도의 조선왕으로 책봉하여 고구려 유민들을 달래기 위해 보냈지만


보장왕은 되려 고구려 유민들과 함께 부흥운동 계획이 발각되거 당나라 산골짜기로 유배를 가서 거기서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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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여기서 포기할 고구려 유민들이 아니였고 고구려 유민들은 신라와 손을 잡고 부흥운동을 일으켰는데


이 때 보장왕의 서자였던 인승과 검모잠이 이끌었다 문제는 이 둘이 지도자 자리를 놓고 다투다


4개월만에 인승이 검모잠을 살해하고 신라로 튀어버렸다


당연히 신라 입장에선 북부 전선은 고구려 부흥군에게 맡기고 바다 건너오는 당군을 상대할려는 신라의 계획이 확 틀어졌고


이후로도 신라는 큰 반격도 못하고 후들겨 처맞아 임진강까지 확 밀려 고구려 땅 대부분을 상실했다


원래는 신라와 고구려 부흥군의 선빵으로 시작 된 나당전쟁이 이제는 신라의 존립을 위한 방어전으로 바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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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횡성 고씨들>



하지만 매소성에서 뒤집기에 성공하면서 분위기가 반전 됐고 이후 쭉쭉 밀어붙여


기벌포 해전을 끝으로 신라와 고구려,백제 유민이 당나라를 몰아내 삼한을 통합하는데 성공 했다


문제는 유민들이였다 이제 필요가치가 없어진 고인승은 전라도 익산에 고구려 유민들을 모아 보덕국이라는 괴뢰국가를 세워


보덕국의 왕으로 앉혔었는데 신라는 이 보덕국을 제거하기 위해


고인승을 경주로 불러들였고 그렇게 반도내 최후의 고구려계 국가라 할 수 있는 보덕국은 사라졌다


이후 고인승은 현재 강원도 횡성으로 거주지를 옮겨 거기서 살다 죽었다


지금의 국내 고구려 왕손들은 모두 이 고인승의 후손들이며 남한 땅에는 6000여명이 생존해 있다고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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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횡성 고씨의 종친회장 고준환과 일본의 고마씨 후미야스>



번외로 똑같이 보장왕의 아들이였던 고약광은 일본으로 튀어 일본 고마 씨의 시조가 되었다


현재도 일본의 고마 씨들은 횡성 고씨들과 활발한 교류를 이어가고 있다






2. 백제 왕들의 후손 - 부여 서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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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 서씨


인구: 17,000여명


시조: 온조왕 부여온조


중시조: 부여융 (백제의 마지막 왕태자)



660년, 나당연합군에게 수도가 함락 된 의자왕은 바로 웅진으로 커맨드를 띄워 반격을 준비 했는데


백제의 이완용인 예식이 통수쳐서 5일만에 의자왕을 나당연합군에게 넘겨버렸다


그렇게 백제는 허무하게 무너졌는데 의자왕은 당나라 장안으로 끌려가 당고종과 측천무후의 꾸지람을 듣고 죄를 사면 받았다고 한다


당연히 이유야 위에 보장왕처럼 자기는 적국의 수괴도 용서하는 자비로운 황제다라는걸 보여주기 위한 정치적 쇼였다


그렇게 무죄 방면 된 의자왕이지만 스트레스가 심했는지 얼마 못가 죽었고 현재도 무덤은 중국 시안 주변에 있다 (근데 옆에 묻힌 새끼가 진숙보 ㅅ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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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히 백제 유민들은 백제를 되살리기 위해 대대적인 부흥운동을 일으켰고


백제 좆맛을 잊지 못한 일본까지 합세해 엄청난 기세로 위에 부흥운동 조무사 고인승과는 다르게


수백개의 성을 수복하는 엄청난 전과를 올렸다


근데 역시 이놈의 헬조선 특유의 DNA인가 그놈의 내분,지도자 자리를 다투면서


자기들끼리 칼부림 부리다 하나로 뭉치지 못했고 이 틈을 신라와 당나라가 비집고 들어왔다


이에 일본은 전국에서 싹싹 모든 병력을 긁어모아 최대 4만으로 추정되는 병력을 파견 했지만


백강전투에서 다 말아먹으면서 일본은 부흥운동에서 강퇴당했고 이후 반도내 백제 유민들도 차례차례 진압 됐다


그리고 이 때 백제 유민들을 진압하겠다고 당에서 대군을 파견 했는데 이 때 사령관이 백제의 마지막 왕태자 부여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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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히 백제 유민들에겐 원수와도 같은 인간인데


거기다 이미 당에서 사령관으로 부여융을 꽂을때 이 양반은


백제의 국성이였던 부여 씨를 버리고 당나라 황제가 준 서씨로 성씨까지 갈아버린 상태였다


그렇다면 부여융도 나당전쟁이 신라의 승리로 끝나면서 분명 중국으로 쫓겨났을텐데


어떻게 다시 반도로 껴들어와 부여군에서 새끼를 까고 대를 이었는지가 사료 소실로 알기 힘들다


현재로썬 후퇴하는 배를 놓친 부여융이 그대로 반도에 다시 남게 됐다라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


아무튼 그렇게 부여에서 부여 서씨의 시조가 되면서 부여 서씨가 현재는 백제 왕손들 중 가장 유명한 후손들이 됐다 (이 외에는 의령 여씨가 있다)




3. 신라 왕들의 후손 - 경주 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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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는 국성이 3개지만 그 중 경주 김씨만 소개하겠다


이는 경주 김씨 왕조가 586년으로 가장 오래 집권했기 때문 (박씨가 232년, 석씨가 172년)


인구: 180만 (전체 4위)


시조: 김알지



시조인 김알지는 신라 김씨 왕조(경주 김씨)의 시자이자 강릉 김씨의 시조이기도 하다


그런데 김알지는 왕이 아니라 나중에 추존 됐다


이후 13대 임금이였던 미추 이사금이 첫번째 김씨 임금이고 17대 내물 마립간이 김씨 왕조의 기틀을 잡았다고 하는데


워낙 너무 고대라 현재 학계에선 실질적으로 신라의 김씨 왕조를 연 것은 진흥왕으로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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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시조 김알지가 전설로 여겨지는 이유는 삼국사기에는 탈해 이사금 9년(65년)에


김알지가 경주 서쪽 시림 속에서 닭이 우는 소리를 듣고 신하 호공을 보내 조사하라 일렀는데


숲속 나뭇가지에 황금빛 궤가 걸려 있고 궤에서 빛이 나오며 흰 닭이 나무 밑에서 울고 있었다고 한다


바로 이 금궤에서 나온게 김알지로 딱봐도 박혁거세 신화랑 비슷한게 김씨들이 박혁거세 알썰 보고 베껴 만든듯?


원래 고대 신화라는게 다 고게 고거라 서로 영향을 받아서 비슷한 클리셰나 설정이 많다


어쨌든 탈해 이사금은 이 아이를 길렀는데 금궤에서 나왔다고 해서 성을 김(金)이라 했으며


성장하면서 총명하고 지략이 뛰어나 알지(閼智)라 불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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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됐든 현재까지도 경주김씨는 신라의 왕성으로 그 후손들만 180만이라는데...


경주 김씨계에서 분적된 성씨로 김녕 김씨(김해 김씨), 안동 김씨, 상산 김씨, 수원 김씨, 청도 김씨, 원주 김씨, 전주 김씨, 안동 권씨, 수성 최씨 등이 있는데


이 성씨들의 인구를 다 합하면 약 600만 명이 넘는다 ㄷㄷ


거기에 다른 경순왕 이후에 탄생한 강릉 김씨나 의성 김씨 언양 김씨 삼척 김씨 등 까지 다 합치면 그 수가 무려 천만에 달한다...







4. 발해 왕들의 후손 - 대씨,태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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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모든 대씨,태씨들은 전부 발해의 왕손들이다


인구: ???


중시조: 대중상



왜 대씨가 태씨로 바뀌었는가에 대해 두가지 설이 있는데


첫째 발해가 멸망한 뒤 934년에 태자 대광현이 발해유민 수만 명을 이끌고 고려로 망명하자


고려 태조가 이들을 후하게 대접하고 그에게 원보수의 벼슬과 함께 태씨(太氏)를 하사하였다는 것이다


둘째는 동국통감에서 에서 대조영을 태조영(太祚榮)이라 한 후로 자손들이 태씨를 칭하였다는 것인데


아직 확정 된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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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일단 유명한건 영순태씨들인데


경상북도 경산 남천면 송백리에 이 영순태씨들의 마을이 있다


마을 이름도 발해 마을로 여기 태씨 남성 142명의 얼굴을 분석하고


공통점들을 모아서 대조영의 표준영정을 만들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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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외에 유명한 후손이라면 탈북자 출신 국회의원 태영호가 바로 발해 왕손들 중 하나다


다만 직계는 아니다 일단 대조영의 직계는 끊겨서 없다 이미 발해가 멸망하기도 전에 끊겼다


그래서 현재 태씨 족보에서는 시조를 대중상으로 명기하고 있다


대중상은 대조영의 형제인 대야발의 후손으로 방계 계통이 후대에 들어 왕위를 계승했고


현재 태씨들도 모두 이 대야발의 후손들이다





5. 고려 왕들의 후손 - 개성 왕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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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성 왕씨


인구: 22,000


시조: 고려 태조 왕건



일단 왕씨는 조선왕조의 학살을 겪으며 그 수가 확 줄었는데 현재 중국에서 가장 많은 성씨 1위는 여전히 왕씨지만


반도에선 왕씨를 찾아보기 힘든 이유도 이 때문이다


하지만 원래는 반도 왕씨는 성씨가 아니였다


왕건의 친부인 왕륭은 원래는 용건이였는데 패서 호족들 중 개성을 먹은 나름 힘 좀 쌘 지방 호족이였다


문제는 이름의 건(建)은 세운다라는 의미로 대놓고 "내가 시조다!"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그래서 추존 묘호도 세조다)


당연히 왕건이 임금이 된 뒤 고친 티가 대놓고 나는 이름으로 이건 마치 왕건이 왕이 되는것을 예견하는듯한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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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원래 이름도 '왕륭'이 아니었는데 고려가 창업한 이후에 왕건이 갖다 붙인거라는 설도 있다


성씨가 민간에 정착하던게 후삼국시대라 시기상으로도 딱이고


이때부터 그냥 이름 앞 글자 따와서 성으로 삼는 경우가 종종 있었는데


이미 그 전에 선례로 박혁거세가 있는데 박은 [밝은누리]라는 우리말을 음차표기+이중설명을 덧붙여 만든 이름이다


정확히는 혁거세가 이름이고 박은 뒤에 혁거세를 확실히 설명하기 위한 단어인데 졸지에 박이 성씨가 돼버렸다


즉, 왕건도 원래는 그냥 이름이였는데 고려를 세우면서 이름의 앞 글자를 성씨로 정할때


왕을 왕씨로 만들어 성씨화 했고 한술 더 떠 자신이 왕씨가 됐으니


애비도 똑같이 왕씨가 됐고 애비 이름 용건을 륭으로 고쳤다는 것이다


아무튼 그렇게 개성 왕씨의 역사가 시작 됐다 (당연히 자기가 이제 왕이라는 의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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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고려왕조가 막을 내리자 폭도전 슨상님에 의해 철저한 대량 학살을 겪어 확 쪼그라 들었고


이후 태종대 가서야 학살이 좀 멈추고 세종대왕 때 쯤 복권 작업이 시작 됐다


현재 유명한 개성 왕씨 인물로는 전지현이 있다 (본명이 왕지현이다)


흔히 전지현보고 화교라고 하고 그 근거가 왕씨라는 것이다 그런데 전지현은 중국과는 전혀 무관한 순혈 한민족이다


그 중 희귀한 고려 왕손인 개성 왕씨 연예인이다





6. 조선왕들의 후손 - 전주 이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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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 이씨


인구: 400~500만 (전체 3위)


시조: 이한


왕조의 시조: 태조 이성계



조선이 세워지기 전까진 그냥 민간에 "이런 성씨도 있구나" 하는 수준이였다가


조선이 세워지고 나서 그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확확 불더니 현재는 4번째로 많은 성씨가 됐다


일단 크게 3분파가 있는데 전부 태종-세종대왕계 후손들이다


효령대군파-양녕대군파-광평대군파 순으로 현재 전주이씨들 중 가장 많은건 효령대군파다


두번째가 양녕대군 세번째가 광편대군파인데


대표적으로 이승만이 있는데 전주이씨 분파 중 2번째로 인구가 많은 양녕대군파 16대손이다


그래서 이를 근거로 미국에서 지낼때 자신을 프린스 리 라고 소개하고 다녔다고 한다


하지만 이 글에서는 왕실 후손만 다루니 전주이씨 400~500만은 패쓰하고 고종황제계만 다루도록 하겠다





6-1. 영친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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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한국인도 일본인도 아니다”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태자로 신기하게도 순종의 이복 동생이지만 황태제가 아니라 황태자다


이는 왕조 초기 이방원이 정종의 왕세제가 아니라 왕세자로 책봉 받은것과 똑같다



당시 친모 순헌황귀비 엄씨가 궁궐에서의 영향력이 컸던 탓인지 태어나자마자 귀하게 자랐다고 한다 (내명부 서열 1위였다)


이 덕분인지 다음 제위 계승 1순위였던 이복형 의친왕을 제치고 황태자로 책봉 됐다



애초에 의친왕은 아니다 의친왕은 밑에 서술 참조


이후 영친왕은 이토 히로부미한테 끌려가서 천황의 친척 이방자랑 결혼했다 (이방자 언니가 히로히토의 마누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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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자의 회고록 《세월이여, 왕조여》 에 나온 얘기인데 일제가 영친왕을 부부를 유럽으로 여행을 보냈는데


이때 임시정부의 김구 등은 영친왕을 태운 배가 상하이에 정박하면 영친왕을 망명시키려는 계획을 세웠었다고 한다


근데 이를 안 일제가 군함을 파견해 영친왕 부부를 함내에 머물게 하는 바람에 무산되었다고 한다



또한 헤이그에서는 현지에 사는 한국인이


“고종황제께서 한일보호조약을 무효로 만들고자 밀사를 헤이그에 보내셨던 사실을 잊지 않으셨다면


신문기자에게 ‘나는 일본 황족이 아니고 한국의 황태자’라는 것을 명확하게 선언하소서”라고


권유하는 글을 전달하려 했지만 수행원의 제지로 실패했다고 한다


이렇듯 당시 순종이 죽고 사실상 당시 민중들에겐 실질적인 후계자로 취급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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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 이구와 아내 줄리아>


해방후엔 이승만이 황족들의 귀국을 불허하고 황실의 재산 상당부분을 국고로 귀속시켰다


그래서 6.25 전쟁 이후 황실의 사유 재산이라곤 사동궁, 창덕궁 낙선재 등이 전부였다


이런 상황 속에서 영친왕은 "나는 일본인도 한국인도 아니다"라며 아내 이방자에게 괴로움을 호소 했었다고 한다


자녀로는 이구가 있는데 우크라이나계 미국 여성과 줄리아와 결혼했다가


사업 실패 후유증으로 이혼했고 2006년에 죽으면서 이로써 적통은 모두 끊기게 된다






6-2 의친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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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라리 한국의 한 백성이 될지언정, 일본의 황족이 되길 원치 않는다.”



의친왕 이강은 태어날 때부터 불우했다 순종, 영친왕 이은, 덕혜옹주는 출생에 대한 기록이 있지만 의친왕은 기록이 없다.

상궁 김명길에 의하면 이강의 어머니 귀인 장씨는 “평양기생과 대전별감 사이에 태어난 지체 낮은 궁인”이라고 한다


아마 의친왕이 나이가 더 많음에도 영친왕에게 후계자 자리를 뺏긴것도 출신 문제 때문으로 보인다 (물론 증거는 없고 내 개인생각임)

의친왕은 한마디로 일탈남이다 1898년 일시 미국을 방문했을 때에는 주미일본공사에게 600원을 빌렸고


1900~1905년 미국 유학 시절에는 미국 여성들과 염문을 뿌리기도 했다.

심지어는 차에 타서 창문을 살짝 내리고 길거리를 오가는 여인들을 감상 했다고 한다


역시 굉장한 정력가라 여러 명의 소실 사이에서 수많은 자녀를 낳았다. 공식적으로 호적에 올린 자녀만 12남 9녀고

비공식적인 자녀까지 합치면 28명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막내가 태어날때 의친왕은 76세였다 ㄷㄷ)


이런 ‘대량생산’은 결실을 맺었다. 왜냐 오늘날 까지 살아남은 황실의 후손들은 모두 의친왕의 자식들이기 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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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친왕 이강은 가장 항일정신이 투철한 황족이였다.



조선총독부 경무총감은

“(이강) 공은 즐겨 시정잡배와 왕래하였는데, 특히 금춘 독립운동의 수모 손병희와는 몰래 회합 모의하였고

손병희가 체포되자 공은 매우 낭패한 빛이 있었다고 한다”고 보고했다(1919년 11월 24일)


그리고 실제로도 상해 임시정부로 가서 독립운동에 가담하기 위해

1919년 11월 11일 전협 등과 만주로 탈출하려 했으나 일제 경찰에게 체포되었다


당시 상해임시정부에게 의친왕은 이렇게 말했었다고 한다

"한국의 한 백성이 될지언정 일본의 황족이 되길 원치 않는다 이를 한인들에게 표하고 아울러 내 일생을 독립운동에 몸바치길 원한다"


당연히 한국 황실이 일본황실의 일원으로써 화합을 강조해온 일제에겐 고종의 망명정부 계획 이후 가장 치명적인 사건이였다

그래서 의친왕이 대동단원들이 권총으로 위협하는 바람에 마지못해 끌려갔던 것이라고 발표했고


의친왕은 50여 일간 녹천정(남산 총독관저)에 연금되어 있다가 석방 돼

이후 한반도 내에서 자유여행 권한도 박탈 당하며 일제의 감시 속에서 살게 된다




6-3 모모야마 켄이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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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버지와의 인연을 끊고 싶다.”



사진속 남자는 위에 의친왕의 장남이자 아예 탈조선해 일본인이 되어버린 장남 이건이다


일본 이름은 모모야마 켄이치인데 성씨 모모야마는 다이쇼 천황이 묻힌 곳이다

한국 황족이 일본 천황과 관련 된 성씨를 쓴다는게 무슨 의미인지는....말 안해도 알테니 따로 설명은 안하겠다


실제로 이건은 아버지나 동생 이우처럼 반일의식이 전혀 없었고

아버지 의친왕이 “그렇게 일본이 좋으면 일본에 가서 살아라” 라고 호통을 쳤다고 한다


근데 진짜로 스시녀 와이프한테 초강력 통수까지 처맞았으면서 끝내 일본으로 귀화해버린다 (자녀가 친자식이 아니였다고 한다 당연히 이혼함)

그리고 일본으로 귀화하던 그 해에 공교롭게도 아버지 의친왕도 죽었다


이에 이건은 나중에 지인들에게 “일본 황실의 태도에는 따뜻한 맛이 있는데 한국 황실에는 냉담함만이 있다” 라고 뒷담화 까지 한다

한술 더 떠 왜 일본으로 귀화 했냐는 질문에 “아버지와의 인연을 끊고 싶어서” 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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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화 후엔 생활고 때문에 팥죽장사,산양 젖 장사, 과자가게, 막노동(!)까지 했었다고 한다 실제로 영친왕 부부가 한번 방문 했었다고 한다

문제는 새 스시녀 와이프한테 2차 통수 맞아 아내가 화류계에 발을 들여 이혼하고 말년에는 자녀도 없이 쓸쓸히 보내다 1991년에 죽었다


이에 한 교수가 이건을 평가하기를

이건 공은 당시는 깨닫지 못했으나, 1945년 일본 패전 후가 되어서야 비로소 자기들(왕·공족)의 본질이

일본 황실의 식객이며, 천황제 기구의 부록이고, 인격이 없는 괴뢰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노라


쉽게 말해 일제가 한국 황실을 받아준건 좋아서가 아니라 한국인들의 독립의식을 억누르기 위한 선전용 도구로 쓰기 위함이였는데

2차 대전이 끝나고 해방 된 남의나라 황족을 이젠 굳이 일본이 챙겨줄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렇게 말년에 되서야 본질을 깨닫고 비참하게 살다 갔다고 평가했다




6-4 이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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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일본의 것이라면 병적으로 싫다



위에 이건의 친동생이자 의친왕의 차남으로 얼짱 왕자로 유명한 이우다

현재는 영친왕계가 단절되고 이건계가 일본으로 귀화를 해버려서 이우계 후손들이 가장 정통성이 강하다


아버지 의친왕처럼 항일의식과 독립의식이 뚜렷해서 일본의 것이라면 병적으로 싫다라고 까지 말했으며

그의 가정교사였던 가네코는


“당시 이우 공은 일본의 모든 행위가 마음에 들지 않았고

독립해야 한다는 확실한 신념을 갖고 있어 일본 육군에서도 두려워했다”는 증언을 남겼다


위에 형하고는 완전 정반대인셈 그래서인지 의친왕은 이건에게 쌀쌀 맞았어도

이우는 굉장히 아껴서 한국에 도착하면 직접 기차역까지 마중 나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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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투철한 반일의식은 실천으로 이어졌다



영친왕 이은이나 덕혜옹주와 달리 일본 황족·화족(귀족)과 결혼하기를 거부하고 한국 여인과 결혼을 강행한 것이다

당시 조선 공족의 결혼은 1926년 제정된 〈왕공가궤범〉에 따라 천황의 칙허를 얻도록 되어 있었다


근데 이우는 이를 무시하고 멋대로 박영효의 손녀인 박찬주와 약혼을 해버렸다

이왕직 장관 한창수와 일본 궁내성에서도 반대했지만 일본 정계 요로에 지인이 많았던 박영효가 나서서 이를 무마시켰다


결국 1935년 5월 이우는 박찬주와의 결혼에 성공했다

당시 일제는 한국 황족들을 싸그리 일본 황족과 강제로 결혼시켜 명맥을 끊고 일본 통치에 순응하는 모습을 보여 선전할려 했었는데


이우만이 유일하게 저항했고 끝내 황실의 자존심을 지킨 것이다

그 결과 현재는 이우가 외모버프까지 받아 가장 이미지가 좋은 황족이다


하지만 이렇다할 독립운동까진 하지 못했다 일본군에 강제로 입대하며 사실상 평생을 일제의 감시망 속에서 살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의친왕의 자녀들은 많지만 사실상 적자로 인정받은 자녀는 이건과 이우 두명 밖에 없다 (그래서 다른 그 외 다른 후손들은 안쓰겠다)



현재의 후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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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황실 수장, 이원


현재 공식적으로 대한제국 황실 수장을 맡고 있는 이원이다

가계도는 의친왕의 9번째 아들 이갑의 아들로 원래 이름은 이상혁이였다


수장직을 맡기전에는 미국과 한국을 오가는 평범한 사람이였다

애초에 본인도 황실의 후손이라는걸 19살때 알게 됐다고 한다


그러다 이구(영친왕의 아들)이 죽으며 대가 끊기자

부랴부랴 이구의 사후양자로 들어가서 황실 수장직을 맡게 됐다


이에 문화재청도 이를 인정하여 매년 종묘대제 재현 행사에 이원을 황제역할로 참여 시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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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가장 강한 정통성, 이청


이 사람이 위에 이우와 박찬주의 맏아들 이청으로 현재 가장 정통성이 강한 황족 후손이다 (차남은 미국에서 유학중에 뺑소니 사고로 죽었다)

적장자 승계 원칙으로는 이 사람이 고종-순종에 이은 3번째 황제가 된다


게다가 땅 내노라고 나라 상대로 소송하는 기타 황족 후손들과 달리 오히려 운현궁은 박찬주 여사가

필사적으로 지킨 사유재산이였는데 운현궁과 흥선대원군 무덤 주변 땅까지 싸그리 다 나라에 기부하며


다른 황족들에게 모범이 되는 개념찬 모습까지 보였다

이청의 정통성은 당대에도 인정을 받아 이승만이 자신의 양자로 달라고 까지 했었다


근데 어머니 박찬주가 "어딜 방계후손(양녕대군 16대손) 따위가 직계를 노리느냐" 라고 반발해서 실패했다

황실만 보면 PTSD오는 이승만까지 탐냈다는건 이청의 정통성이 어느정도인지 감이 오지 않노?


현재는 나이도 많아(84세) 병석에 누웠다고 한다 슬하에는 아들이 있다고 하며

이청이 죽으면 그 아들이 가장 강한 정통성이 강한 황손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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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황제를 꿈꾸는 자, 이석


의친왕의 10번째 아들로 이름은 이석이다 이석이 태어날때 의친왕은 64세였다

한때는 가수로 활동하며 비둘기집이 히트치기도 하며 현재는 가장 유명한 황손이다


이유는 가장 정통성이 강한 이청이나 공식적으로 수장직 달고 있는 이원도 제정복고는 언급도 안하는데

이 양반은 그놈의 대한제국 황실복원을 자주 언급하면서 가장 미디어에 얼굴을 자주 비추기 때문


문제는 슬하에 친아들이 없다 설사 된다치더라도 바로 대가 끊길텐데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다

그러다가 2018년에 앤드류리라는 재미교포 사업가를 세자로 책봉했다


당연히 혈연관계일리는 없을거고 그러다 작년에 앤드류리가 미국에서

138억에 달하는 저택을 구매하며 얼굴이 알려졌는데 장발남이였다






이상으로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반도를 통치 했었던 왕들의 후손들을 알아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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