쪽바리들 역사 왜곡 날조가 극에 달했노..

일본 역사 교과서 번역해왔으니까 한번 읽어봐라

내용이 긴 편이니까 형광펜 칠한 거 맨 끝에 요약 정리표만 봐도 된다..

기가 막히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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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일본 고등학교에서는 세계사(世界史)가 필수과목이고 일본사(日本史)와 지리(地理)는 선택과목임.

아래의 교과서는 필수과목인 세계사 교과서를 번역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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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과의 외교

1868년, 정부는 대마도를 통해, 왕정복고를 알리는 문서를 조선에 보냈습니다. 쇄국을 진행중이던 조선은 문서 내용 중에 조선을 낮춰보는 문구가 있는 것을 문제삼아, 문서의 수신을 거부했습니다.


새로운 국교에 응답하지 않는 조선에 대해서, 정부내에서는 무력을 이용해서라도 국교를 맺게하자는 주장(정한론)이 대두되었지만, 1873년, 구미제국의 시찰로 부터 돌아온 오쿠보 도시미치1 기도 타카요시2 등은 국내의 개혁과 국력의 내실을 기하는 것을 우선으로 해야한다고 생각하여 반대했습니다.


주장이(정한론) 받아들여지지 않은 사이고 다카모리3, 이타가키 다이스케4 등은 정부에서 물러났 습니다.


그러나, 1875년에 강화도사건(1)이 일어나자, 이듬해, 정부는 군함을 이끄는 사절을 보내 조선에 압력을 가하여, 일본에 유리한 일조수호조규(2)를 맺고, 조선을 개국시켰습니다.


(1) 서울에서 가까운 강화도 앞바다에 일본의 군함이 무단으로 측량을 했기 때문에, 조선의 포대로부터 포격을 받자, 일본측에서 반격하여 포대를 점거한 사건.

(2)일본의 영사 재판권과 관세의 면제를 조선에 인정시키는 내용이었습니다. 또, 조선을 독립국으로서, 지금까지의 청과 조선과의 관계(p. 104)를 부정하는 것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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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청전쟁

19세기말, 조선의 국내에서는 일본을 모방하여 근대화의 정책을 진행하고자하는 개화파와, 그에 반대하는 보수파가 대립하고 있었습니다. 개화파를 지원하여 조선에 세력을 넓히고자 했던 일본은, 조선에 지원을 강화하고자 하는 청과 대립이 깊어지고, 군비를 늘려 갔습니다.

1894(명치27)년, 조선의 남부에서 동학(1)이라는 종교를 신봉하는 농민들이 부패한 정치의 개혁을 요구하는 동시에, 외국의 세력을 쫓아내자고 봉기했습니다(동학농민전쟁). 이것을 진압하기 위한 조선정부의 요청에 응답하여 청이 군대를 보내자, 일본도 이것에 대항하여 출병하여, 일청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조선과 청의 요동반도를 전장으로 하여 벌어진 전쟁은, 근대화에 늦은 청에 비교해, 군사력이 우수한 일본의 승리로 끝났습니다.


(1) 민간의 믿음을 바탕으로, 유교와 불교등을 받아들인 종교로, 서학(크리스트교)에 반대했습니다.


시모노세키 조약과 삼국간섭


1895년, 시모노세키(야마구치 현)에서 열린 강화회의에서 시모노세키 조약이 맺어져, 청은 일본에, 조선의 독립, 요동반도, 대만, 팽호제도의 양도, 배상금 2억 냥 (당시의 일본 엔으로 약 3억 1천만엔)을 지불하는 등을 승인했습니다. 그러나, 일본이 조선과 중국에 세력을 늘리는 것을 경계한 러시아는 독일, 프랑스와 함께 요동반도를 청에 반환하도록 요구했습니다(삼국간섭). 삼국에 대항할 힘이 없었던 일본은, 배상금을 추가로 받는 것으로, 이것을 받아들였습니다.

그 후 러시아는, 요동반도의 일부를 청으로부터 조차(2)하여 군사시설을 만들고, 일본은 러시아의 남하를 대비해, 배상금을 바탕으로 대규모의 군비확장을 진행해갔습니다. 또, 일청전쟁의 승리에 의해, 동아시아에서 세력을 강화한 일본에서는, 러시아에 대한 대항심과 함께, 중국과 조선에 대한 우월감과 차별의식도 커져갔습니다.


(2) 외국의 영토를 빌려서, 실질적인 지배를 하는 것을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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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전쟁의 시작


만주를 점령한 러시아는 청과의 조약에서 병력을 철수하기로 약속했습니다만, 그 기간이 와도 철군하지 않고, 한국에도 군사시설을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위기감을 느낀 일본정부는 외교에 의한 교섭에서 만주에서의 러시아의 권익을 인정하는 대신, 한국에 대한 일본의 지배권을 인정하게 하고자 했습니다. 일본의 국내에서는 많은 유력 신문에서 러시아와 곧바로 싸울 것을 주장하고, 개전을 원하는 여론도 강해졌습니다.

한편, 경제계는 개전에 신중론을 내세우고, 크리스트 교도의 우치무라 간조1와 사회주의자 고토쿠 슈스이2 등은 비전론을 내세우며 전쟁에 반대하였습니다만, 여론을 움직이는 것은 실패했습니다. 결국, 러시아와의 교섭은 이루어지지 않고, 1904(명치37)년 2월, 일본군은 러시아의 군사거점인 여순을 공격하고, 중립을 선언한 한국의 인천에 상륙하여 일러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 뒷부분 생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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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병합


일본은, 포츠머스 조약을 맺고 머지않아 한국을 보호국으로 만들었습니다. 한국의 외교권을 장악하고, 한국에 통감부를 설치하여 통감이 외교를 감독했습니다. 일본은 이윽고 한국의 내정의 실권을 장악하여, 군대를 해산시키는 등 한국에 대해서 지배를 강화했습니다. 한 나라로서의 권리를 빼앗긴 한국에서는, 무기를 들고 일본과 싸우는 의병 등의 저항운동이 벌어져갔습니다. 이런 가운데, 초대 통감이었던 이토 히로부미4가 한국의 운동가인 안중근에게 사살당하는 사건도 벌어졌습니다.
일본은 한국의 저항을 누르고, 1910(명치43)년, 한국을 영유하고 조선으로(이름을) 고쳤습니다. 이를 한국합병이라고 합니다. 조선에는 총독부를 두고, 무력을 배경으로 식민지지배를 시작하였습니다.

일본의 식민지정책

조선에서는, 조선사람들을 천황과 국가에 충성을 맹세하는 일본인과 똑같이 만드는, 동화정책이 진행되었습니다. 학교에서는 조선어와 조선의 역사보다 일본어와 일본의 역사, 수신(1)을 중시했습니다. 한편, 선거권이 인정되지 않는 등 조선사람들의 권리와 자유는 제한되었습니다.
(옮긴이 주 - 조선인이 일본에 거주할 시에는 선거권 행사 가능 / 반대로 일본인이 조선에 거주할 경우엔 선거권 박탈 )
또한, 토지조사사업(2)이 실행된 결과, 근대적인 토지소유권이 확립되었습니다. 토지불하 등을 받아 조선에서 대토지를 소유하는 일본인의 지주도 나타나는 한편으로 조선의 소작인 등의 농민은 생활이 힘들어져, 농촌을 떠나거나 일본과 만주에 이주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1) 교육칙어에 따른, 일본국민으로서의 도덕을 배우는 교과입니다
(2) 일본의 지조개정과 같은 목적을 가지고, 8년에 걸쳐서 행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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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부록. 역사의 창

일본인이 본 삼일 독립운동


당시의 일본에서는, 삼일독립운동을 폭동으로 본 사람이 대부분이었습니다. 하지만, 조선의 예술에 깊은 관심을 가졌던 민예평론가 야나기 무네요시1는 「독립이 조선인의 이상인 것은 당연하다」「일본에 있어서 형제인 조선이 일본의 노예로 있는 것은 있을 수 없다. 그것은 조선의 불명예로서보다도 일본에 있어서의 수치다」라고 주장하며, 독립운동을 무력으로 진압하는 일본의 행동을 비판했습니다. 저널리스트인 이시바시 단잔도 「조선문제의 해결 열쇠는 조선의 독립이나 자치이며, 조선인은 독립을 얻을때까지 결코 그 반항을 멈출 자들이 아니다」라고 주장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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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부록. 역사의 창

관동대지진


1923년 9월 1일, 매그니튜드 7.9의 대지진이 관동지방을 덮쳤습니다. 지진과 화재에 의해, 도쿄, 요코하마를 시작으로 관동일대는 큰 피해를 입고, 재해를 입은 가옥이 약 37만 호, 사망자, 행방불명자는 10만명 이상에 달했습니다. 혼란 속에서 「조선인이 폭동을 일으켰다」등의 유언비어가 번지고, 주민들이 조직한 자경단과 경찰, 군대의 의해 수많은 조선인들과 중국인이 살해당하는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또한, 사회주의자와 노동운동가 중에서도 살해당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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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과서 점유율 출처 - 日 시민 단체 및 신문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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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증결과


역사왜곡은 쪽바리가 아니라

비객관적이고 비합리적인

민족주의적 역사관를 강요하는

K페미국이 하고 있었음


역사 교육을 페미니즘식으로

쪽바리=잠재적 가해자

K페미국=잠재적 피해자 구도에 입각해서

국민들을 한녀화 시키고 있음